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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11월 동지사(冬至使)로 청의 북경에 다녀온 임제원(林濟遠)이 청국에 다녀온 보고서를
1781년 4월18일에 정조에게 바칩니다.
1781년은 청 고종 홍력(弘曆/만주어 훵리hvng li), 즉 건륭제가 재위한지 46년 되는 해로 건륭제의 나이는 이미 71세였습니다.
이미 이 당시부터 청은 내부에서부터 만주족의 기상상실, 부패와 사치, 과도한 인구증가, 황제의 허영심 등으로
저물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인 임제원의 눈에도 이것이 확연히 보였나 봅니다.
조목조목 당시 청의 상황을 정조에게 보고하였더군요.
한편 건륭제는 당시 조선에 상당한 호의를 보여, 중국 안에서는 고려황제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건륭제는 노망난 늙은이? http://cafe.naver.com/historygall/52957
간략하게 요점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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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 흉년이 든 곳과 풍년이 든 곳이 있는데, 풍년 지역의 쌀을 흉년 지역으로 나르는 구휼 작업이 한창이었다.
2. 산해관 밖에 축성 공사가 한창이었다.
→ 제가 영조조의 기록을 살펴보니, 영조는 신하들과 강연하면서 청의 침략을 가정한 여러 논의를 하였는데,
<청 오랑캐가 언제든 만주로 돌아가기 위해 산해관 밖의 만리장성을 방치하고,
많은 재화를 만주의 근거지였던 영고탑에 비축하고 있다>
이러하였는데, 건륭제 말기에 들어서는 산해관 이북에 축성 공사를 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비는 대략 260만 냥이 들것으로 보았네요.
3. 건륭제가 라마교의 달라이라마를 매우 예유하였는데, 이는 몽고를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 여러 서적에 청 황제들이 몽고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몽고족을 라마교에 빠지게 하였다는 말이 있더군요.
청 정권이 몽고족과의 연합정권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며
청의 황녀와 몽고족 추장들과의 혼인 정도에 불과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물론 몽고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을 자주 북경에 초대하거나, 어릴 적에 북경에 살게 한 것도
실은 몽고의 강인한 상무정신을 억누르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글도 본 기억이 나네요.
4. 건륭제 말기의 희대의 간신 화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건륭제가 화신을 매우 총애한다는 기록과 함께, 화신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개국공신의 후손을 핍박한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건륭제 사후 처형된 화신의 개인 재산이 청 조정의 12년치 예산이었다니
당시 화신의 권력이 짐작이 갑니다.
5. 건륭제의 문자옥이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로 피해를 입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기록하였네요.
6. 건륭제가 이미 70이 넘었는데도 혈기가 왕성한데, 매우 괴팍해졌다고 기록하였네요.
법 집행을 마음먹은 대로 하고, 감정대로 환관과 첩들을 매질한다고 합니다.
이에 백관들이 좋은 말만 하며 복지부동 중이라고 냉철하게 꼬집었습니다.
7. 중국 전체에 뇌물이 횡행하고 있는데 정말 심하다
8. 법이 엄하여 이를 이용한 관의 횡포로 한족 백성의 민심이 좋질 않다고 합니다.
9. 중국 관리의 복지부동과 부패가 심각한데, 황제에게는 좋은 말말 전한다고 합니다.
10. 건륭제의 말년에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1. 사고전서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12. 건륭제의 사치에 관한 내용도 보이네요. 북경에 놀러 온 몽고 귀족을 대우하고
궁녀를 뽑아서 예쁘고 복스러운 궁녀는 만주 황족의 궁에 보내고,
단지 예쁘기만 한 궁녀는 몽고 귀족에게 시집보낸다고 합니다.
13. 건륭제의 행차에 동원되는 백성이 많이 죽고 있다고 합니다.
헌데, 아무도 이런 고통을 황제에게 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4. 건륭제의 나이 70인데도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5. 요동의 한족은 팔기군에 편입되었고, 산해관 안의 한족은 팔기군에 편성되지 못하였으나
요동의 한족 팔기도 부역만 고달프고 만주족에 비해 차별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조정의 관리도 마찬가지로 한족이 등용되긴 하나 만주인과 엄격한 차이가 있으며,
군사에 관련된 고위 관직에는 한족은 한 명도 없다고 기록하였네요.
제가 본 어떤 서적에서도 만주족과 한족이 동수로 관리에 임용되긴 하였으나
한족 관리들은 만주족 관리와 비록 관직이 동급이라도
반드시 만주족 관리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16. 팔기군에 편성된 군졸들은 대우가 평민보다는 좋다고 합니다.
팔기군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기록도 보이고, 자긍심도 높으며,
군역 외에는 다른 부역이 일체 없는 혜택이 있다고 합니다.
17. 산해관 밖의 요동지역은 농지가 많지 않아 백성들이 중국 본토와의 상업에 많이 의지한다고 합니다.
인구 증가도 굉장히 심해 한집에 아들이 보통 5~6명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물가가 치솟고 생계가 더욱 어렵다고 하네요.
18. 건륭제가 조선에 대한 대접이 융숭하여, 민간에서는 고려황제라 불린다고 합니다.
이런 건륭제의 특별한 조선인 대접에 조선의 말단 관리들도 함부로 중국인을 대하여
이로 인한 작은 폐단이 있다고 하네요.
19. 북경 인근의 사람들은 먹고사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법을 잘 지킨다고 하네요.
해서 관아에서의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는 강희제가 만든 법이 아직까지도 잘 집행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20. 법적으로 65세 이하의 만주 관리는 무조건 말을 타게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족 관리는 2품 이상이면 교자를 타게 허락한다고 합니다.
이는 만주족의 상무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제도라고 하네요.
21. 만주족이 입관한지 100년이 지나니, 이제는 만주족은 한족과 거의 구별이 안된다고 합니다.
또한 나약해졌는데도 겉모습을 꾸미는 데만 집착하고 형식에 얶매이는데
이들은 자신이 그토록 경계하던 명나라 말기와 비슷하게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냉철하게 평하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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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日省錄) 1781년 4월18일 기사 中
정조에게 바친 임제원(林濟遠)의 청국 탐문 보고서
강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 임제원(林濟遠)이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다.
목 〇 별단은 다음과 같다.
1. 작년의 농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산해관(山海關) 밖의 지나는 연로(沿路)에 촉서(蜀黍)와 당직(唐稷) 등 각종 전곡(田穀)이 매우풍년이 들었다고 하며, 민간의 기색이 기근(饑饉)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수레가 줄지어 수송하는 것을 보았는데, 대부분 쌀자루였고 모두 관내(關內)로 향한다고 하였으니, 관내에 흉년이 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해관에 들어간 뒤에 들으니, 작년 여름과 가을에 비가 매우 많이 와서 농사에 대단히 피해를 입었는데, 직례성(直隸省) 각읍(各邑)이 혹은 2분(分)을 수확하고 혹은 3, 4분을 수확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도로에서 목격한 것은 말의 여물 한 근 값이 소전(小錢) 8푼(分)이었고, 노미(老米) 1두(斗)의 값이 정은(丁銀) 1냥이었으니, 두(斗)의 크기가 우리나라에서 통행되는 것보다 배나 크다고 하지만 쌀값이 폭등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또 삼하(三河) 등의 지역을 보니 진정(賑政)이 한창이었는데,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노인을 이끌며 다투어 죽과 밥을 나누어 주는 곳으로 가는 자들이 수십 수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습니다. 또 계주(薊州) 등의 지역은 기근이 매우 심하여 나무껍질을 벗겨 가루를 내어 죽에 섞어 먹으며 살아가는 자가 있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아울러 당보(塘報)를 참고해 보니, 직례성 관할의 무주(武州)와 청주(淸州) 등 41주에 30만 석을 절조(截漕)하여 진자(賑資)에 대비하며, 현재 저축된 것이 충분치 않아 통창미(通倉米) 30만 석과 부고은(部庫銀) 30만 냥을 더 징발하여 사용할 재원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또 황도(皇都)의 다섯 성(城) 안팎의 죽창(粥廠)에서 으레 지급하는 쌀이 많지 않아 매일 매 창(廠)마다 1석을 더 지급하여 끓여서 먹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봄 이후에 각성(各省)에 하유(下諭)하여 재해를 입은 모든 곳에 분수(分數)를 구별하여 정진(正賑) 외에 성(城)에서 2개월을 더 진휼하게 하고, 씨앗과 식량 또한 환곡으로 빌려 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하였으니, 농사가 흉년이 든 것과 진정(賑政)을 착실히 하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1. 산해관 밖의 각처에는 성을 쌓는 일이 한창입니다. 봉황성(鳳凰城)으로부터 서쪽으로 명조(明朝)에서 설치한 모든 장(障)과 보(堡)의 옛 터에다 특별히 더 수축하는데, 도합 18곳이라고 합니다. 봉황성은 역사를 마친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 밖의 각처도 한편으로 돌을 뜨고 한편으로 기와를 굽는데 연로에서 본 바로는 도처가 똑같았습니다. 신이 심양(瀋陽)을 지날 때 길에서 흠천감(欽天監) 정희상(正喜常)이 흠차(欽差)로서 봉천(奉天)의 각주(各州)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또한 성터를 간심(看審)하는 일로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중국에 들어간 뒤로 산해관 밖의 성지(城池)를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고 일찍이 수선한 일이 없었습니다. 산해관은 얼마나 중요한 지역입니까. 그런데도 오장(吳將 오삼계(吳三桂))이 훼손시킨 곳이 무너진 그대로 있고 단지 철채(鐵寨)를 세워 대략 방비만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산해관이 이와 같으니 다른 곳은 논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연전에 황제가 심양에 행행(行幸)한 뒤에 비로소 이 일에 유의하여 공역(工役)을 꺼리지 않고 일시에 아울러 거행하고 있으니 그 의도를 도통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역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매우 많은데, 봉성(鳳城)은 주위가 5리(里)가 못 되는데도 3만 냥의 은자(銀子)가 들었으니, 18곳에 들어갈 비용을 통계하면 260여 만 냥이 든다고 합니다. 신이 중전소(中前所)를 지날 때 기와를 굽는 역사를 보고서 역가(役價)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1인이 1일 기와 굽는 역(役)을 할 경우 관에서 33문(文)의 돈을 지급하고, 수축하는 역은 매 2파(把)당 10냥의 은자로 역가를 정하여, 파(把)를 계산해서 역가를 지급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쌓도록 허락하며, 감역(監役)하는 경관(京官)은 견고한지의 여부만 살핀다고 합니다.
1. 반승(班僧)이 죽은 뒤에 금탑(金塔)에 염(殮)을 하여 그 시신을 덕승문(德勝門) 밖에 두었다가 2월 12일에 거용관(居庸關) 밖 후채지(後蔡地)로 보냈는데, 여덟 사람이 메는 금교(金轎)에 싣고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며 모두 왕(王)의 예(禮)를 써서 황제의 여섯째 아들 질군왕(質郡王)과 이부 상서(吏部尙書) 영귀(永貴)가 호송해서 갔다고 합니다. 하루 전날 황제 또한 임하여 곡하고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후채지 이후는 몽고(蒙古)의 여러 부(部)가 각각 지방별로 번갈아 가며 교대로 운송하여 서번(西番)에 도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이 승려의 본말을 탐문해 보았습니다. 한인(漢人)들 중에는 이치에 맞지 않다고 대답한 자가 있었는데,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은 말을 하기가 어려워 모른다고 핑계 대는 것입니다. 혹자는 “한 번승(番僧)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불(佛)이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혹자는 “만세야(萬歲爺)도 달자(撻子)이니 승려를 공경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라고 내뱉어 드러나게 불만스러운 기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인(滿人)은 모두 “한때 원적(圓寂)했으나 장차 환도(還度)할 것이다.”라고 똑같은 말을 하여 존숭하고 믿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만인과 한인의 견해가 대체로 현격히 다르고, 또 한인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황제가 이 승려를 지나치게 예우하는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어서이다. 황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몽고만 한 것이 없고, 몽고가 공경하는 것은 반승만 한 것이 없어서 48부(部)가 모두 존숭하고 받든다.무릇 반승의 수레가 지난 곳과 대소변이 떨어진 곳을 보면 반드시 100배(拜)를 하여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니, 황제가 이 승려에게 반드시 마음을 쓰는 것은 실은 몽고의 여러 부들을 수습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니, 이 말이 가장 근리합니다. 듣건대, 몽고의 부락이 날로 강성해져서 중국의 깊은 근심거리가 되고 있으므로 황제가 몽고인에 대해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혼인을 맺어 액부(額駙)가 대부분 사막에서 나오고, 관작(官爵)으로 총애하여 청요직(淸要職)에 뒤섞어 기용하며, 특히 승려들에 대한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한다고 합니다. 열조(列朝)의 원당(願堂) 및 기타 공가(公家)에서 관할하는 사관(寺觀)은 모두 몽고 승려들을 앉히고 나마선(哪嘛禪)이라고 부르며, 관에서 늠료(廩料)를 지급하며 대우하기를 자별하게 하는데, 비록 일반 승려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몽고인들이 불(佛)을 숭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미루어 말한다면 반승에 대해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에 특별한 예를 베푼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일 듯합니다.
1. 호부 상서(戶部尙書) 화신(和珅)은 일반 사병에서 발탁되어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고, 늘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황제와 함께 지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가장 총애받는 사람이라고 지목하기도 합니다. 황제가 일찍이 정신(廷臣)들에게 말하기를, “화신은 짐의 친신(親臣)이다.” 하였으니, 비록 그 지위의 중함은 복융안(福隆安)에 버금가지만 총애하는 것은 그보다 더합니다. 그 사람됨은 아첨하고 말재주가 있으며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고, 무릇 융정(戎政)에 있어 힘이 있기 때문에 혹 마음대로 조치한 것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군병의 늠료를 먼저 지급한 일로 기하(旗下)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위세와 권세를 부리면 온 조정의 신하들이 눈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대화하다 말이 화신에 미치면 사람들이 모두 손을 내저어 거부합니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득실과 장단을 또한 자세히 탐문할 수 없었습니다. 또 듣건대, 황제에게 돈비(敦妃) 왕씨(汪氏) 소생의 파라공주(波羅公主)라는 12세 된 여아가 있는데, 황제가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비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궁중에서 반드시 공주의 한마디 말을 빌려 막으며, 현재 화신의 11세 된 아들과 정혼(定婚)했다고 합니다.
1. 이시요(李侍堯)가 옥에 갇혀 있은 지가 지금 한 해가 되는데, 본사(本事)의 전말은 이미 전후의 당보 중에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대개 이시요는 국초의 원훈(元勳)인 이영방(李永芳)의 후손인데, 황제의 신임을 받아 내직에 들어와서는 내각(內閣)을 맡고 외직에 나가서는 운귀 총독(雲貴總督)이 되어 수십 년 동안 지위와 대우가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화신을 아이 취급하였기 때문에 화신이 사람을 사주하여 그가 뇌물 받은 것을 적발해서 하나의 큰 옥안(獄案)을 만들었는데, 내각의 9경(卿)이 원래는 참후(斬候)로 의율(擬律)했다가 참결(斬決)로 바꾸어 청하였는데, 참후란 ‘때를 기다린다〔待時〕’는 뜻이고, 참결이란 ‘바로 결정한다〔立決〕’는 뜻입니다. 각성(各省)의 독무(督撫)들도 의견이 또한 같았고, 민악원(閔鶚元)만이 의근(議勤)과 의능(議能)의 조문을 끌어대었는데 황제가 민악원의 의견을 따라 누차 이시요가 판리(辦理)한 공로와 그의 조부 이기상(李旗常)의 공을 칭찬하였으니, 황제가 기필코 살려 주려는 뜻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의 곡절을 한번 탐문해 보았더니, 대부분 이 일은 화 상서(和尙書)가 일으킨 사건이므로 내각과 외성(外省)이 반드시 무거운 형벌을 의율한 것은 화신에게 견제를 당해서라고 합니다. 다시 당보를 참고해 보니, 부륵혼(富勒渾)은 전후로 다른 의론을 냈고, 진휘조(陳輝祖)는 우물쭈물하며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하였으니, 실로 화신의 권세와 총애를 살피느라 감히 다른 의론을 주장하지 못한 자취가 있었습니다. 또 듣건대, 이시요가 운귀 총독으로 있을 때 뇌물을 받고 억지로 사들인 일 등은 확실한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태반이 사적으로 헌납한 재물이고 진귀한 보물은 모두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갔기 때문에 황제가 조정의 의논에 끌려 아직까지 옥에 가두어 두고 있지만 실은 죄주려는 뜻이 없습니다. 옥에 갇힌 뒤에도 만약 기밀스런 일이 있으면 몰래 사람을 시켜 옥중에 가서 묻고 의논하게 하였는데, 작년 가을에 대신 아계(阿桂)가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굴어 서직문(西直門) 밖에 사사로이 세국(稅局)을 설치하였다가 일이 발각된 뒤에 벌이 10년의 녹봉을 몰수하는 데 그쳤으니, 이는 이시요의 옥중 의견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1. 당보 중에 호광 총독(湖廣總督) 부륵혼의 복주(覆奏)에 관한 사건은 문자(文字)의 기강에 관계된 일입니다. 그 주문(奏文)의 대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범(逆犯) 대곤(戴昆)의 《약정집(約亭集)》에 있는 시(詩)는 어구(語句)가 광패(狂悖)한데 노지유(魯之裕)가 그 시에 서문(序文)을 썼고, 또 노지유가 지은 《식형당집(式馨堂集)》 중에 전겸익(錢謙益)과 오매촌(吳梅村) 등의 성명이 있어 마침내 이것 때문에 노지유의 후손인 노서계(魯恕棨)와 노서모(魯恕模) 등에게 조사하여 모두 내쳐 바꾸기를 청하였고, 또 《약정집》의 시본(詩本) 및 현재 남아 있는 《식형당집》을 조사해서 기필코 모두 없애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연전에 일주루시옥(一柱樓詩獄)으로 많은 사람이 주벌되고 찬배되었는데, 지금 이 당보에 나온 것은 일주(一柱)의 여파인 듯하기에 다방면으로 탐문해 보았으나 사람들이 모두 숨기고 꺼렸습니다. 신이 돌아올 때 한 숙생(塾生)을 만나 물으니, “이 일은 건륭(乾隆) 40년 을미년(1775, 영조 51)에 발단되었다. 처음에 강서(江西)의 사인(士人) 왕석신(王錫信)이 《강희자전(康熙字典)》을 함부로 고친 일로 인하여 비로소 문자(文字)를 수색하는 일이 있었다. 대곤의 경우는 그가 지은 《명사찬(明史纂)》 중에 시의(時宜)에 어긋나고 구애되는 말이 많았기 때문에 그 화가 대곤의 《약정집》에까지 미쳐서 아울러 압수되어 불살라지고 역률(逆律)로 논죄(論罪)되었다. 노지유의 경우는 일찍이 한림(翰林) 벼슬을 하였는데, 대곤의 절친한 친구로서 실제로 대곤의 《약정집》의 서문을 지은 일이 있어 노지유의 《식형당집》도 불살라졌다. 전겸익의 자손이 그 조상의 문자 사건으로 유배된 것이 강희(康熙) 연간에 있었지만 그 후에 당시 빠졌던 글과 글씨도 을미년 이후에 수색해서 불살라 버려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 집안의 문자라도 본조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황조(皇朝)를 그리워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수색해서 불살랐는데, 을미년에 시작하여 지난겨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아 불살라진 것이 680여 종의 책자이고, 그 자손이 흑룡강(黑龍江)이나 오로목제(烏嚕木齊) 등으로 옮겨진 자도 그 수효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온 세상이 두려워하여 문자를 조심하는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하였습니다.
1. 황제의 춘추가 많은데도 신기(神氣)가 강건하고 왕성하며 이목의 총명함은 젊은 시절에 비해 줄지 않아서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보자마자 곧바로 파악하고 한 글자나 반 구절이라도 잘못된 곳이 있으면 모두 지적합니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성격이 점점 더 엄하고 급해져서 법령이 매번 까다롭고 각박한 것이 많아져 하나라도 적발되면 비록 미세한 글이나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철저히 캐내서 엄한 법을 적용한다고 합니다. 당보를 가지고 보더라도 황제가 《강희실록(康熙實錄)》 중에서 당시 훈신이었던 오배(鰲拜)가 마음대로 했던 단서를 끄집어내어 증직(贈職) 1등을 추탈(追奪)하였고, 또 당시 총독이었던 변삼원(卞三元)이 아뢴 내용이 오삼계(吳三桂)와 관계된 일이라 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비석을 넘어뜨렸습니다. 비사(祕史)를 들추어내는 것은 이미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심사(心事)를 추론(追論)하는 것은 더욱 심밀(深密)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그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또 금중(禁中)에서 감정을 갑자기 드러내어 매 때리는 것이 그칠 날이 없으므로 복례(僕隷)와 환관과 첩들이 벌벌 떨면서 날을 보내고 있고, 안으로 궁궐에서부터 밖으로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덮어 숨기고 좋은 말로 미봉하여 고식적으로 처리할 계책을 한다고 합니다.
1. 뇌물이 횡행하는 폐단이 요즘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세금을 거두고 관직을 파는 등 재물을 거두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모두 내무부(內務府)에 소속되어 내탕고에 가득 차고, 도성 안팎에 또 이른바 황제포자(皇帝舖子)라는 것이 있어 크고 작은 점포가 서로 이어져 있는데, 그 이문(利文)을 취합니다. 또 각방(各坊)에 관(官)에서 희자옥(戲子屋)을 설치하여 그 세입(稅入)을 거둡니다. 그리하여 모든 재물을 긁어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동원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근자에 들으니, 북문(北門) 밖 수십 리에 있는 향산(香山) 아래에 한 점포가 있는데 이름을 해점(海店)이라고 하며, 만수산(萬壽山)에 올라가면 내려다볼 수 있는데 온갖 재물이 운집되는 것이 하나의 파사(波斯)와 같다고 합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황제가 그 배위(陪衛)를 선발하여 직접 해점에 가서 가게의 물건들을 두루 살피고서 직접 가격을 부르는데, 완구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사기를 당(唐) 나라 때 백망(白望)과 같이 하고, 내무부에서 그 값을 계산하여 주는데 사적으로 매매하는 것보다 후하게 쳐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익이 된다고 여겨 다투어 진기한 보배로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힘씁니다. 또 선물을 바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매번 수절(壽節)을 만나면 각성의 독무들이 반드시 신기한 완구 10여 종을 제왕(諸王)들에게 와서 바치고, 대신(大臣) 이하도 각각 그릇이나 항아리 따위를 바치는데 모두 좋은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여 전부 궁중에 들입니다. 이 때문에 저자에 진주 등의 물건이 날이 갈수록 값이 뛰어올라 장사치들이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구하는데, 깨진 패옥이나 작은 구슬이라도 10배의 값으로 팔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재화가 몰리는 곳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도 여기에 물들어 문무 관서가 모두 점포가 되어 온갖 방법으로 이익을 도모하면서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게다가 송사가 대부분 뇌물에 의해 판결이 나고, 관직을 제수하는 일도 재물로 사고파는 등 갖가지 탐욕스럽고 비루한 행태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저자 백성이 이시요에 대해 말할 때면 “지금의 재상은 모두 이시요와 같은 자들인데, 이시요만 죄에 걸린 것은 원통한 일이다.”라고 합니다. 여론이 이와 같으니, 재물을 탐하는 풍속을 볼 수 있습니다.
1. 작년 가을에 어떤 도둑이 대내(大內)의 옥기(玉器)를 훔쳐다 남경(南京)의 부자에게 팔았는데, 숙노호(叔老虎)라는 사람이 마침 장사하러 남경에 갔다가 그 물건이 어용(御用)인 줄을 모르고 후한 값에 사 왔습니다. 얼마 뒤에 일이 발각되어 도둑은 처형되고 숙노호는 원지에 유배되었는데, 관에서 그의 가산(家産) 수백 만을 적몰(籍沒)하였습니다. 숙노호는 사실 그 일의 내막을 모르는데 죄가 가산을 적몰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민간에서 자못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재화가 있는 부유한 사람은 작은 죄만 있어도 관에서 반드시 법으로 다스리고 걸핏하면 적몰의 형률을 시행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고 늘 법에 저촉될까 두려워합니다. 특히나 저자의 백성들은 모두 한인(漢人)들인데 전방(廛房)에 으레 부과하는 세금 외에 또 구전(口錢)을 징수하고, 게다가 각 아문의 이졸(吏卒)들이 관의 위세를 빙자하여 전방에 출몰해서 갖가지로 토색질하는 것이 거의 없는 날이 없으므로 저자의 백성들이 특히 이 때문에 견디기 어려워 관(館)에 매매하기 위해 왕래하는 자들이 대부분 근심하고 원망하는 기색이 있다고 합니다.
1. 작년 여름에 정양문(正陽門)에 화재가 발생한 뒤에 태학사(太學士) 영렴(英廉)이 실로 개수(改修)하는 역사를 주관하면서 관은(官銀) 7만여 냥을 공사의 비용으로 사용하였는데, 태반을 착복하고 외문(外門)과 누첩(樓堞)을 대충 얽어 놓았습니다. 역사를 마친 뒤에 겨울철이 되자 갑자기 틈이 생겨 장차 무너질 조짐이 있었는데, 영렴을 감죄(勘罪)하지 않고 다만 벌로 은 4만 냥을 징수하여 다시 쌓게 하였습니다. 현재 공사가 한창이고 공사를 마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황제가 한번은 직접 공사하는 곳에 가서 인부 수백 명이 흙을 나르고 땅을 다지느라 애쓰는 것을 보고 특별히 내무부에서 은 200냥을 내서 어가 앞에서 나누어 주며 격려하였습니다. 무릇 관은은 으레 50냥을 한 덩어리로 만들기 때문에 200냥이면 도합 네 덩어리인데, 관장하는 해당 이례(吏隷)가 나누어 줄 때에 두 덩어리는 몰래 감추고 두 덩어리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턱없이 농간을 부리고 눈앞에서 횡령하는데도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니 인부들이 원통해한다고 합니다. 또 정월 20일쯤에 인부 한 사람이 부제(浮梯)를 타고 올라가 기와를 걷다가 실족하여 떨어져 죽었는데 감독하는 관원이 숨기고 아뢰지 않았습니다. 이는 황제가 크게 놀라 비상한 거조가 있을까 염려해서라고 합니다. 대체로 아랫사람들이 숨기고 미봉하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법과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신이 원조(元朝)의 하례(賀禮) 때 삼가 보니, 반열의 차례가 어지럽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법도가 없어, 어떤 사람은 궤(跪)하고 미처 일어나지 않고, 어떤 사람은 계수(稽首)하고 미처 궤하지 않고, 간혹 손 모양을 뒤집어 마치 서로 가리키는 것처럼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를 마치고 나서도 반차(班次)대로 물러 나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 앞서고 어떤 사람은 뒤서고 하여 혼잡스러운 것이 놀라웠습니다. 종전에 매번 저 나라의 조정의 반열이 매우 정제되어 있어 군법(軍法)과 가깝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본 것은 들은 것과는 매우 달랐고, 임역(任譯)들도 전과 다르다고 합니다. 다시 당보를 참고하여 보니, 작년 10월 초하루에 황제가 친히 태묘(太廟)에 나아갔을 때 만인과 한인 감찰어사(監察御史) 각각 2인이 반열을 정제하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배반(排班)할 때까지 모두 대령하지 않아 교부(交部)의 형률을 받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조정의 위의(威儀)가 어그러진 것을 여기에서 이미 볼 수 있습니다. 통관(通官)들의 말에 의하면, 황제의 만년에 조정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지고 조정에 있는 사람들도 전처럼 정제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1.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휘집(彙輯)하는 일이 한창 바쁜데 짧은 기간 내에 마칠 수 없다고 합니다. 황제의 여섯째 아들 질군왕과 대신 아계(阿桂)ㆍ화신 등이 총재(總裁)의 임무를 맡고 있고, 또 분교(分校), 복교(覆校), 총교(總校), 등록(謄錄) 등의 직임이 있어 한편 옮겨 베끼고 한편 검토하면서 일을 나누고 힘을 합하여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보를 살펴보니, 《사고전서》의 잘못된 곳을 석 달에 한 번씩 조사하여 만약 잘못된 곳이 있으면 각각 자질(資秩)의 높낮이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기과(記過)합니다. 만약 총재가 한 차례 기과되면 분교 등의 소임은 두 차례 기과되고, 상서(尙書)와 혜황(嵇璜) 등 이하 수십 인이 모두 기과되어 기과가 많은 자는 수십 차례가 되는데 모두 교부(交部)하게 하니, 그 교정하는 법이 착실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또 선발된 공생(貢生) 중에서 스스로 여비(旅費)를 마련하고 관(館)에서 힘을 다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등록의 직임에 충당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또 교정하고 등사하는 일을 맡은 자는 6년이 되어야 자리를 옮길 수 있는데, 정월 그믐쯤에 등록관이 등사하는 일을 지체했다고 총재가 아뢰어 22인을 모두 파직하게 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임기가 4, 5년 된 자도 많이 있는데, 아울러 모두 죄를 입었다고 합니다. 또 무영전취진판(武英殿聚珍版)의 식례(式例)를 보니, 《사고전서》를 인쇄하는 활자는 인쇄하는 일이 방대하여 구리를 녹여 주조하는 법을 쓰지 않고 대추나무로 수십만 자를 새겨 공비(工費)를 절약할 수 있게 하니, 그 일을 시행하는 것이 지극히 치밀합니다.
1. 황제가 상원절(上元節)에 원명원(圓明園)에 행행하여 은 10만 냥을 출연하여 특별히 각종 화등(花燈)과 지포(紙炮) 따위를 만들어 구경하는 데 제공하고, 경사(京師)에 머물고 있는 몽고인들도 와서 함께 구경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해점으로 가서 낮에는 저자를 구경하고 밤에는 매화(埋火) 놀이를 하며 10일간 즐겼습니다. 환궁한 뒤에 2월 2일부터 친히 수녀(繡女)를 간택하였는데, 수녀란 궁녀를 말합니다. 무릇 팔기(八旗) 기하(旗下)의 여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간택의 대상에 들어가는데, 하루에 한 기(旗)의 여자를 간택하여 9일에 이르러 간택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간택된 사람의 수효가 100여 인이라고도 하고 10여 인이라고도 합니다. 또 간택에 응하는 여자는 14세부터 19세까지로 한정하여 3년에 한 번 간택하는 것이 정해진 제도입니다. 모든 기하의 여자는 한번 간선(揀選)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시집가는 것을 허락하고, 만약 제도를 어기고 지레 시집간 경우에는 그 부모를 일률(一律)로 논죄합니다. 비록 외관(外官)으로 처자를 데리고 갔더라도 반드시 제때에 치장하여 보낸다고 합니다. 또 간택에 응할 때에 내관(內官)이 궁문 밖에서 먼저 가부를 정하여 올리거나 내치기 때문에 재상이나 부유한 집안의 여자는 후한 뇌물을 써서 대부분 면제되고 뽑힌 부류는 모두 가난한 집안의 여자입니다. 처음 뽑혔을 때에는 관에서 1000냥의 은을 지급하여 치장할 수 있게 하지만 그 후의 모든 비용은 본가(本家)에서 모두 마련하기 때문에 뽑힌 집에서는 지탱할 길이 없어 온 집안이 통곡한다고 합니다. 또 새로 간택한 뒤에는 궁인 중에서 나이가 많고 총애를 받지 못한 사람은 궁을 나가는 것을 허락하고, 그렇게 해서 부족한 인원은 새로 간택한 사람으로 보충해서 원래의 정원을 충당한다고 합니다. 또 새로 간택된 사람 중에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워 복스런 기운이 있는 사람은 제왕(諸王)의 궁중에 나누어 보내고, 미색(美色)만 있는 사람은 공주(公主)를 가칭하여 몽고의 각부(各部)에 시집보낸다고 합니다.
1. 황제가 2월 22일에 오대산(五臺山)에 행행하려 하였는데, 이는 예불(禮佛)하고 복을 빌기 위해서입니다. 오대산은 황경(皇京)에서부터 9일 여정이므로 왕복하려면 한 달 남짓이 걸린다고 합니다. 산이 안(雁)과 대(代) 사이에 있는데 지역이 황량하고 추워 인적이 드뭅니다. 강희 27년(1688, 숙종 14)에도 행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시종신이었던 한림(翰林) 양사기(楊士奇)가 《호종서순록(扈從西巡錄)》 1책을 지었는데, 설명이 제법 자세합니다. 《서순록》을 가져다 보니, 오대산이란 동대산, 서대산, 남대산, 북대산, 중대산 다섯 개의 대산(臺山)을 가리키니, 오대산이라는 명칭은 이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합니다. 남대산과 동대산은 높이가 37리(里)이고, 서대산은 높이가 35리이고, 중대산은 높이가 39리이고, 북대산은 가장 높아서 40리인데, 가파르고 깍아지른 듯하며 돌은 미끄럽고 길은 위태로우며, 사나운 바람이 차갑게 불면 사람을 거의 떨어뜨릴 정도라고 합니다. 또 해마다 단단한 얼음이 쌓이고 여름에도 눈이 날려서 유람하는 사람이 이르지 않고, 오직 한여름에만 법려(法侶)가 식량을 싸 가지고 와서 예불하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불(仙佛)의 자취와 꽃과 약초의 아름다움은 그 기록으로 본다면 과연 천하의 영산(靈山)이고 또한 그 높고 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곳의 전설로는 대부분 반승(班僧)이 살아 있을 때 황제와 봄을 기다려 함께 오대산에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행행하는 것은 사실 옛 약속을 추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대산은 열조(列朝)에서 행행한 곳이므로 이번 행차는 반드시 반승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황제도 십수 년 전에 재차 북대산에 갔는데, 대신(大臣) 손가간(孫可簡)이 간하여 제지할까 염려되어 미리 손가간을 남방에 봉사(奉使)로 내보낸 뒤에 비로소 어가가 나아갔다가 문득 비바람에 막혀서 끝내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손가간이 도중에 듣고서 급히 상소를 올려 거세게 간쟁했다고 합니다. 또 강희제가 행행할 때 산을 깎아 길을 내고 나무를 얽어 묶는 과정에서 동원된 백성들이 매우 많이 죽고 다쳤는데, 이번에는 험한 곳을 지나고 또 노년이므로 비록 연로에 특별히 신칙하여 민폐를 줄이라고 했지만 산길을 수개(修開)할 때에 또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신(閣臣) 이하가 아무도 간쟁하는 사람이 없고 그곳 사람들도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가 많아서 심지어 손가간이 만약 살아 있다면 필시 황상으로 하여금 이 행차를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1. 저 나라에 이미 건청궁(乾淸宮)의 유조(遺詔)가 있어 가법(家法)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옹정(雍正) 이후에 미리 태자를 정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듣건대, 황자(皇子) 수십 인이 영락(零落)하여 거의 다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은 단지 다섯 사람뿐인데, 여섯째 아들인 순귀비(淳貴妃) 소씨(蘇氏) 소생의 질군왕 영용(永瑢)이 현재 가장 장자의 서열에 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절륜(絶倫)하여 성력(星曆)을 두루 통하기 때문에 황제의 주목을 받고 있고 백성들의 바람도 육왕(六王)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번에 오대산에 갈 때 미리 내각에 유시하여 여러 아들 중에서 역시 질군왕으로 하여금 경사에 남아 있게 하였는데, 일이 감국(監國)과 관계되므로 황제가 의지하고 중시하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여덟째 아들 의군왕(儀郡王) 영선(永璇)은 욕심을 부리고 예를 무너뜨리며 성품과 행실이 불량합니다. 반승이 왔을 때에 육왕을 가장 좋아했는데 영선이 접견을 허락하지 않아서 끝내 배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 요동(遼東)과 심양(瀋陽) 사이에는 기군(旗軍)과 일반 백성들이 섞여 살면서 그다지 분별이 없고 또한 서로 혼인하기도 하는데, 산해관으로 들어간 뒤로는 한계가 심히 엄하여 함께 혼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토(田土)를 서로 매매하는 것도 법금(法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개 산해관 밖의 백성은 대부분 최초에 투항하여 따른 자의 자손으로 모두 팔기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여 별도로 한군(漢軍)이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진신안(縉紳案) 중에 간혹 ‘봉천(奉天)의 어느 기하(旗下)’라고 기록된 것은 또한 봉천성(奉天省)에 유독 한인(漢人)으로서 기하가 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심양을 지난 뒤에 도로에서 떠돌며 구걸하는 자가 있기에 물으니 한인이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조세와 부역이 편중(偏重)되어 지탱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편중된 사정을 물으니, 백성들은 1향(晌)의 전세(田稅)가 290문(文)인데 기군은 1향의 전세가 48문이고, 백성들의 구전(口錢)은 매 정(丁)당 160문인데 기군은 구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1년에 24냥의 은을 의례적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대체로 기민(旗民)의 전토는 그 비옥도에 따라 고하의 차등을 두어 세금을 매기니, 민전에서 배로 징수하는 것을 여기에 근거하여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임청(臨淸)의 토적(土賊)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할 때 방료(放料)한 일을 《기략(紀略)》 중에서 확인해 보면, 만주병(滿洲兵)은 한 달의 염채가(鹽菜價)로 은 1냥 5전(錢)을 지급하였는데 녹영병(綠營兵)은 7전 5푼(分)만 지급하였으니, 똑같은 전병(戰兵)인데도 차등이 있었습니다. 조정의 관리에 있어서는 비록 섞어서 등용하기는 하지만 주객(主客)의 형세가 현격하게 차이가 있어, 모든 군기(軍機) 등에 관계된 직임은 모두 만주에 거주하는 몽고인은 혹 맡는 것을 허락하지만 한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 기군(旗軍)은 다른 신역(身役)이 없고, 의례적으로 지급하는 은 외에 또 그 구근(久勤)을 보아서 상을 주는 예가 있습니다. 무릇 그 이해(利害)는 평민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기군이 된 자는 스스로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심양을 지날 때 한 기군을 만났는데, 바로 만(蠻)을 정벌할 때 참전했던 자입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에는 군병을 뽑는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손으로 몇 마리의 말을 막아서 쓸만한 재주가 있음을 보인 뒤에야 비로소 참전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참전하여 죽는 것이 참전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 낫다.” 하고, 대화가 창을 잡는 데에 이르자 자못 고무되려 하였습니다. 한 병졸이 이와 같으니 삼군(三軍)의 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출정(出征)하는 군사는 살아서 돌아오면 후한 포상을 받고 죽어서 돌아오면 휼전(恤典) 대상에 들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군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뿐만이 아닙니다. 특히나 출정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은 법제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또 수천 리의 도로를 가는 동안 한 사람도 사사로이 다투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국가의 전쟁에 나가 싸우는 데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이 다투는 데에는 겁을 낸다는 것입니다.
1. 산해관 밖의 각처는 한전(旱田)만 있고 또 산이나 바다의 이로움이 없어서 사는 백성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마을도 황량한데, 수레의 이로움에 의지하여 살아가며 먹고 입는 것도 매우 간소하고 소박합니다. 듣건대, 1정(丁)이 1년간 먹는데 단지 100여 문의 은자가 든다고 합니다. 매번 도로에서 손에 작은 삽을 든 자가 여행객의 뒤를 따라다니며 소나 말의 똥이 떨어지는 즉시 주워 담아 혹시라도 빠뜨릴까 염려하는 것을 보았는데, 도처에서 모두 그러하였으니, 농사에 힘쓰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인구가 번성하고 특히 남자가 더욱 번성하여 비록 외딴 마을이나 작은 점사(店舍)라도 도로에서 사행(使行)을 구경하는 자가 잠깐 사이에 4, 5십인이 모여듭니다. 또 아들이 없는 자가 거의 없어 사람마다 모두 5, 6명의 아들이 있고 적어도 2, 3명을 밑돌지 않으며, 가축에 이르러서도 한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도 각각 5, 6두(頭)가 되고 노새나 나귀가 거의 모두 4, 5제(蹄)가 된다고 하니, 민물(民物)의 번성함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이 때문에 생계가 어렵고 물가가 뛰어오르는 것이 전에 비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1.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해 대우하는 것이 조금 자별(自別)하여 산해관 안팎의 여염 사이에 고려황제(高麗皇帝)라는 속어가 있기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그곳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않고 역인(驛人)이나 쇄부(刷夫)들도 이러한 물정을 익히 알아 기세를 부려 저들을 대하려고 하는데도 저들이 반드시 물러나고 움츠려 모두 삼가고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館)에 머물 때 또 방비하고 보호하기를 매우 충실히 하여 일마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또한 연전에 화재가 나고 사람이 압사하는 등 여러 가지 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감히 방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봉성에서부터 요동까지를 동팔참(東八站)이라고 하는데, 산곡(山谷)이 험준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도 따라서 사납고, 심양 이후는 인정과 습속이 또한 절로 근후하여 야박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 중 쇄부 등속이 종전에 매번 저들을 속였기 때문에 저들도 부득이 속이는 것으로 앙갚음하는데, 그 폐단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병신년에 고교보(高橋堡)에서 은을 잃었다가 도로 찾은 뒤로 무릇 연로의 물정이 크게 변하여 대부분 싫어하는 기색이 있어 애당초 응접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비록 작은 일 같지만 또한 염려할 만한 일입니다.
1. 산해관 안팎의 지나는 곳에서 단지 거주하는 장사치나 농민들이 각각 자기 일에 힘쓰는 것만 보았고, 말이 관가(官家)에 미치면 모른다고 대답하니, 생업에 편안한 뜻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읍치(邑治)를 경유할 적에 아문(衙門)이 고요하여 누구를 부르거나 징발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황성에 도착한 뒤에 또 액문(掖門)이 늘 닫혀 있고 출입하는 사람이 드물었으며, 각부(各部)와 각시(各寺)에도 전혀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고요하여 항상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건대, 그 정치가 전적으로 번다한 것을 없애고 간략함을 숭상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기 때문인 듯하고, 또한 강희제(康熙帝) 때 만든 법과 정한 제도를 지금까지 준용하여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법 안에서 단속하게 하여 관과 백성이 서로 의식하지 않아서 편안할 수 있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곳의 의장(儀章)은 이미 중국의 제도와 달라서 홍모(紅帽)와 치의(緇衣)가 분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존비에 따라 차등을 두는 절차가 질서정연하여 문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모정(帽頂)이나 좌욕(坐褥) 따위를 품계에 따라 제도를 달리한 데서 충분히 귀천을 표시할 수 있고, 또 산해관 안에서 근종(跟從)하는 법이 모두 일정한 규례가 있어서 아무도 감히 넘지 못하는 데에서 충분히 볼 만한 점이 있습니다. 한인으로서 2품 이상은 모두 사인교(四人轎)를 타도록 허락하지만 만주인의 경우는 비록 1품관이라도 모두 말을 타고 다니는데, 이는 활을 쏘고 말을 타는 것을 업으로 삼기 때문이니, 우리나라에서 문관과 무관을 구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들이 관(館)에 머물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 아양아지(阿揚阿之)가 특지(特旨)로 와서 안부를 물을 때 만주인인데도 교(轎)를 타고 왔기에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비록 만주인이라도 재상으로서 65세 이상이면 비로소 교를 타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잗단 절목에 관한 일이지만 분수(分數)가 심히 분명하여 외람되고 잡된 폐단이 전혀 없으니, 이는 그들의 좋은 점입니다.
1. 삼가 보건대, 저 나라는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지만 중국에 들어와 산 지 이미 100년이 넘어 집과 음식에 완전히 중국 제도를 사용하고, 정령(政令)과 전칙(典則)을 대부분 명조(明朝)의 것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비록 현재 만주인이라 하더라도 원래부터 중국에 살던 사람과 거의 뒤섞여서 분별이 없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잃고 함께 나약해지고, 의절(儀節)은 갈수록 지나치고 질실(質實)한 정취는 매우 박해져서 점차 쇠망해 가는 기상이 있습니다. 궁전으로 말하더라도 단지 다듬고 꾸미는 것만 일삼고 겉모양에만 힘써서 심양에 행행할 때 세운 행궁(行宮)이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단청은 새로 칠한 것 같지만 절반이 넘게 무너져서 앞으로 10년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치의 폐단일 뿐만 아니라 전혀 실용성 없이 짓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문적(文蹟)을 확인해 보더라도 위에서 하유하는 것은 매번 고상함을 자랑하고 아래에서 아뢰는 것은 전적으로 찬미하는 데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매사에 비록 명말(明末)을 경계 삼아 반드시 상반되게 하려고 하지만, 스스로 본조(本朝)의 허위의 버릇을 알지 못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생각건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규모는 이렇지 않았을 텐데 무(武)를 숭상하는 풍속이 도리어 형식만을 숭상한다는 탄식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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