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뉴스'
디지털 카메라 뉴스(digital camera news)
'사진이 든 뉴스'이라는 뜻일까?
'디카시'라는 단어가 이 카페에 떴다.
제목을 보고는 나는 '어느 도시이지? 어느 나라에 있는 도시이름이지?'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문학 시를 읽고는 그게 도시의 지명이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문학 글인 시에 함께 올린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카메라(사진기)가 무엇인지를 몰랐던 나.
1949년 1월 생인 나는 사진기를 처음으로 보았던 때가 있었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큰당숙이 여름 방학 때 시골로 내려와서 예닐곱 살 난 쌍둥이 형제를 논두렁에 세워놓고는 사진을 찍었다. 나한테는 최초의 사진이었다. 1950년대 초, 콧물을 줄줄 흘리던 시골아이한테는 그 사진은 신비한 세상, 또다른 문화의 충격이었다.
내가 아홉 살 때인 1956년에 국민학교(요즘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학교에서 글자를 배웠다.
그 당시의 교과서에는 사진이 없었고, 그림으로 그린 삽화가 책속에 들어 있었다.
그 이후로 사진기를 쉽게 구입해서 사진을 찍었다. 나도 1980년대 초에 사진기 두어 종류를 사서 묵직하게 어깨에 매고 다녔다. 필림을 인화하는 사진기는 또 사라졌다. 필림이 전혀 필요없는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했기에.
지금은 묵직한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는 것보다는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소형 핸드폰/스마트폰에 사진기가 달려 있어서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고, 그 영상은 그 자리에서 멀리, 해외까지도 전송하는 세상이다.
글자를 써서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예술을 문학이라고 한다.
문학글에 사진이 겻들였다고 해서 이를 '디카시'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웃긴다.
'디카 포엠'(dica poem)이라고 해야 더 유식해 보이는 게 아닐까?
촌스럽게 '디카시'가 뭐냐?
세상물정에 둔한 나는 '디카시'가 외국의 지명으로 알았다니까...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1950년대, 60년대의 교과서에는 사진이 아닌 삽화. 그림이 겻들였다.
이런 삽화와 그림이 든 문학을 '삽시, 그시'라고 말하는가?
이후에 사진기(필림을 인영하는 사진)로 찍은 사진이 든 문학을 '사시'라고 말하는가?
-핸드폰,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겻들인 문학을 '핸시. 스시'라고 말하는가?
오늘아침에 조간신문을 펼치니 신문 뉴스에 많은 사진이 겻들였다.
사진이 있는 뉴스이기에 나는 '디카뉴스'라는 단어도 있을까 싶어서 검색하니 있다. '디카뉴스'라는 단어가 있다.
'디카시'... 나한테는 무척이나 황당하다.
어떤 단어/용어의 첫글자을 따서 몇 개의 단어를 합성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신생어, 신조어를 만들 수 있다.
단어형성, 용어형성 측면에서 보면 웃긴다.
문학(문학)의 본질은 문자(글짜)이다. 인간이 서로 합의해서 어떤 기호를 만들었다.
이 문자로 쓴 내용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 곁다리 낀 사진(음성, 색깔 등)은 그냥 수식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본질은 글자로 쓴 내용이어야 한다.
오늘아침 조간신문에는 사진이 든 뉴스가 대부분이었지만 신문의 핵심인 '사설'에는 그림이나 사진이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문자로써 어떤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사진기가 별로 없었던 시대에 태어났던 나. 아주 어렷을 적, 코흘리개 아이였을 때 처음으로 찍힌 사진 한 장.
1960년대 말 서울의 대학가에는 사진사가 있어서 학생들이 원하면 사진을 찍었으며, 이삼일 뒤에는 인영한 사진을 받을 수 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면 현장에서 즉시 인영해서 손님에게 내주는 세상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속성시대이다.
'디카시'라는 용어에 고개를 내젓는다.
나한테는 별로이다.
나한테는 글자로 쓴 내용이 본질이기에.
용어/단어, 이름을 숱하게 바꿔서 불러도 본질은 하나이다.
가을 들판에는 허수아비를 세웠다.
벼 이삭 위에 올라앉는 참새를 쫒으려고 사람의 형태처럼 헌옷을 걸치면 처음에는 경계심 많은 참새는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들은 그게 가짜라는 것을 안다. 나중에는 허수아비에 올라타고는 쉬고, 때로는 똥도 찍 갈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허수아비는 가짜였기에 비스듬히 넘어지고, 결국에는 뽑히기 마련이다.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위 '디카시'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본질이며, 핵심인가? 詩는 부수적인 것인가?
아니다. 사진보다는 '詩'가 먼저이기에 '詩디카'라는 단어로써 조어해야 한다.
詩가 위주이고, 사진은 부수적으로 겻들었기에.
서울 송파구 잠실아파트.
비좁은 아파트 실내에는 화분 120개쯤 올렸다.
대부분 도자기로 된 화분이며, 플라스틱으로 된 화분들이다.
특히나 도자기 형태의 화분은 크고, 외모도 멋지다.
그런데 화분에서는 공기의 소통이 원활할까? 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울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다. 맨땅의 흙에 비할까?
올 여름 들어와 장마가 지속되는 바람에, 화분 속의 공기소통이 잘 되지 않는 탓에 화분에 곰팡이가 자주 끼었기에 나는 화초를 숱하게 죽였다. 이제는 화분 100여 개 남짓 남았다.
화분 속의 식물은 화분 속에 갇혀서 뿌리가 질식사했다는 뜻이다.
도자기로 된 화분은 화려하고, 멋지고, 돈 비싸게 주었는데도 공기소통이 잘 안 된다.
식물한테는 이런 것(멋, 고가, 장식품)들이 하나도 필요없다.
인간의 허영심으로 가득 찬 화분에 불과하기에. 인간한테만 필요로 하는 화분이기에.
식물한테는 그저 자연스러운 환경이나 원할 게다.
시골에 내려갈 때 화분 몇 개라도 차에 실고 가야겠다.
화분 속의 식물을 뽑아낸 뒤 텃밭에, 그냥 아무렇게나 흙이나 파서 심어야겠다.
화려했던 도자기 화분은 멀찌감히 치워버려야겠다. 하등의 가치도 없는 허례허식이었기에...
도시사람한테나 필요한 것들이었기에.
식물한테는 전혀 아니올씨다이기에...
거실에 꺽꽃이를 한 장미꽃송이 여러 개.
큰딸이 어제 친정에 올 때 손에 들고 왔나 보다.
목이 긴 물컵 속에 장미줄기가 꽂혀 있다.
줄기를 잘라낸 장미꽃을 보니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물이 든 화병 속에 꽂혀 있는 장미꽃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줄기가 잘려나간 것을 장미는 원했을까?
꽃이 핀 장미의 줄기를 잘랐을 때 식물은 통증을 못 느꼈을까?
아닐 게다. 식물도 제 몸뚱아리가 잘려나갔을 때 엄청난 통증과 원망, 분노가 이글거렸을 게다.
나는 줄기(꽃대)를 잘라서 멋지게 꾸며서 선물한 화보다는 화분 흙속에 담은 화초가 훨씬 낫다.
내 비좁은 아파트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100여 개 있다.
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식물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를 원할 게다. 식물이 제대로 자라고 꽃을 피우려면...
어제 오후였다.
잠실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 남쪽으로 걸어나갔다.
경기도 성남지역에서 흘러내리는 강물. 탄천물에는 아직도 뿌이연한 황토빛깔. 얼마 전 대홍수로 강물이 넘쳤다는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꼭대기까지 물이 범람했으니 강 주변 일대가 온통 물에 잠겼다는 뜻... 많은 식물들이 죽었고, 뿌리가 뽑히었고, 나무 줄기가 휘어졌다. 강물이 다 빠진 뒤에는 인부들이 문제가 된 나무를 톱으로 잘라낸 흔적인 그루터기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탄천1교, 탄천2교를 지나서 북상하였다.
한강변 쪽으로 ... 잠실운동장 뒷편 탄천 강물과 한강물이 합수하는 곳 에는 낚시꾼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따금 앳된 여자도 낚시대를 드리우고는 물고기/잉어를 낚아채려고 했다.
나한테는 이들의 낚시질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남의 생명을 낚아채서 죽이는 게 그들한테는 취미생활이며 놀이일 게다. 하지만 물고기의 처지로서는 생명을 빼앗기는 비병횡사일 터.
한강변을 따라서 천천히 잠실대교 쪽으로 향했다.
무릎뼈가 무척이나 아프기에 천천히 느리적거리면서 귀가했다.
잠실5단지 뒷편 도로를 따라서 잠실4단지로 향하다가 도로에 떨어진 다육식물 한 뿌리를 보았다.
손가락 길이의 짧고 어린 다육식물 하나. 뿌리가 뽑힌 채로 길바닥에 떨어진 탓으로 오고가는 사람의 발길에, 자전거 바퀴에 많이도 으깨진 흔적이다. 어쩌다가 뿌리채 뽑혀서 길에 떨어졌지?
나는 허리를 굽혀서 손으로 주웠다. 손에 가볍게 쥐고는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화분에 심고는 물을 조금 부어주었다. 혹시라도 살았으면 싶다.
긴손가락선인장일까 싶다.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마디가 있는 긴손가락처럼 보였기에.
다육식물의 이름이 무엇이던 간에 그저 되살아났으면 싶다.
세 시간 남짓 걸었으니 무릎뼈가 또 욱신거린다.
그래도 많은 글감을 얻었다.
탄천강물... 정말로 흐리고 탁했다. 그런데도 길이 1m가 넘는 잉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흙탐물 속에서 입을 뻐금거리며, 물고기의 눈은 맑아보었다.
물고기의 눈은 물속에서 잘 보이는 보다.
사람인 나는 물속에서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세수대야에 얼굴을 대고는 세수를 할 때에는 나는 두 눈을 꼬옥 감는다. 그런데도 말이다. 탄천변 강물, 한강변의 물고기들은 눈을 껌벅거렸다. 이들의 눈에 또다른 장막이 있어서 눈알을 보호해 주나 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물고기가 인간보다 더 우수하다는 사실을 엿본다.
물고기는 아가미를 벌렸다 닫았다하면서 물을 뻑금거렸다.
만약에 인간에 물속에 들어가서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닫았다하면서 물을 뻑금거리면? 잠시 뒤에는 그는 숨을 쉬지 못한 채, 폐에 물이 가득 찬 채 죽을 게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물고기가 인간보다 훨씬 우수하고, 생존력이 강하다.
첫댓글 좋은 말씀 동의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09.04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