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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절기(2)
신 16:1-17
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9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신 16:1-17 / [유월절] 곡식을 추수하기 시작하는 ㄱ) 초봄이 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이 기간의 어느 날 밤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ㄱ. 히. 아빕월.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를 말한다) 2) 그때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양이나 소를 잡아 여호와께 유월절 제물을 바치고 잔치를 베푸십시오. 3) 또 그때에는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만을 먹으십시오. 여러분이 애굽 땅에서 황급히 탈출할 때에 누룩을 넣어서 부풀릴 사이도 없이 반죽하여 금방 구워서 먹었던 것처럼 다시 그런 떡을 7일 동안 구워서 먹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고난의 떡을 먹음으로써 여러분이 애굽 땅에서 탈출하던 날을 평생토록 기억하십시오. 4) 묵은 누룩은 모조리 폐기하고 새 누룩이 나오기까지 7일 동안 전국에서 어느 누구도 집안에 누룩을 보관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또 여러분이 유월절 첫날 저녁에 잡은 제물의 고기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5)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이라고 해도 아무 데서나 자기 마을에서 유월절 짐승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6) 꼭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이 애굽에서 출발하던 때인 해지는 시각에 잡으십시오. 7) 여러분은 그 고기를 여호와의 성소에서 요리해 먹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8) 그래도 계속 6일 동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만을 먹고 7일에는 다시 성소에 모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를 베푸십시오. 그리고 이 잔칫날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9) [칠칠절] 여러분은 곡식 추수를 시작한때로부터 7주를 계산하여 10)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ㄱ) 오순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논밭에 복을 내려 주셔서 여러분이 일년 동안 수고하여 거둔 것인 만큼 자진해서 추수 감사 예물을 가져다 바치십시오. (ㄱ. 히. 칠칠절) 11) 여러분은 자녀들과 남녀 종들과 여러분의 마을에서 함께 사는 레위 사람들과 외국인들과 고아와 과부들까지 모두 데리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즐거운 잔치를 베푸십시오. 12) 여러분 자신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규정들을 지켜 실천하십시오. 13) [초막절] 여러분은 봄철 곡식을 수확한 때뿐만 아니라 초가을에 올리브와 포도를 수확한 다음에도 일주일 동안 초막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14) 여러분은 자녀들과 남녀 종들과 여러분의 마을에서 함께 사는 레위 사람들과 외국인들과 고아나 과부들과 함께 이 잔치를 즐겁게 베푸십시오. 15)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잔치에서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16)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씩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곧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는 여러분이 여호와의 얼굴을 뵈어야 하는데 언제나 빈손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17) 많든지 적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가지고 가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따라서 예물을 가지고 가십시오.
< 설 교 >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
신 16:13-17 / 남서호 목사
J.C페니는 미국의 이름난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1928년 미국 증권시장 파동 때 많은 재산을 날리고 고민 하던 중 불면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대상포진까지 생겨 그 통증으로 밤을 세우기가 일수였습니다. 밤만 되면 밀려오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떨며 진정제나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이었는데 병원 끝에서 참으로 마음에 평안한 음악소리가 들렸습니다. 몸을 일으켜 그곳으로 가보니 그기는 몇 사람의 환자들이 기도와 찬송하는 예배 실이었습니다. 그 곳에 앉아 있는데 캄캄한 굴속에 서서히 햇빛이 비치는 것 같이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밀려오는데 이와 같은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그 후 병세가 날로 좋아져갑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데 그 마음에 불같이 다가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을 그의 사업과 생활의 표어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몸은 건강해졌고 퇴원하여 뜻있는 일을 위해 은퇴 목사님들을 위해 플로리다 주에 주택 백동을 건축하여 헌납했습니다. 그 후 그의 사업은 번창하여 미국 각 곳에 J.C페니 가계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감사생활이 넘쳐나기를 원하셔서 감사절을 만드시고 감사생활을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는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감사생활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받으시는 분이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절기를 지키며 감사를 잃어버린 오늘의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의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두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절기를 지킬 때, 즉 초막절,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언급하시는 것은 풍요로운 추수의 기쁨 앞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산들을 쌓아놓고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복된 감사절에 함께 즐거워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1) ‘너와 네 자녀와 노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이 우선순위입니다. 그리고 노비입니다. 노비가 누구입니까? 종입니다. 자신의 삶과 생활이 주인에게 묶여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노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따져보면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함께 수고하고 일하며 땀 흘리며 함께 한 가족과 동료이며 직원이며 일꾼입니다. 이들과 함께 그 풍요로운 결실을 기뻐하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통해 열매로 나타나는 것들이 바로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가장 가까이서 땀 흘리며 애쓴 사람들, 이들과 가장 먼저 즐거워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2)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 따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땅도 분깃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여호와께서 그 분깃이 되는 사람들입니다(민18:20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신10:9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세 번째 아들인 레위의 후손 아론을 출애굽 이후부터 제사장 집안이 되게 하였고 레위인들은 성막과 성전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에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지키며 돌보는 이 레위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을 오늘날로 바꾸어 말하면 목회자와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는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무리를 돌보며, 하나님의 사자로서 교회의 목자로서 주님의 성도를 지키고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레위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상 분깃에 연연하지 않으며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돌보는 일에 모든 것을 다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 객과 고아와 홀로된 여인(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초막절에 함께 할 대상으로 객과 고아와 홀로된 여인을 드셨습니다. 가장 외롭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 남편을 잃고 홀로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들과 함께 초막절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객과 고아와 홀로된 여인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올 한해 하나님이 주신 결실을 통해 추수 감사절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다음 주 추수감사절에 함께 즐거워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아직도 구원의 복음을 모르는 내 가족과 동료와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원의 즐거움과 은혜의 풍성함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열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첫 번째 감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즐거움은 ‘온전하신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평안,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때문에 오늘 말씀하시는 온전한 즐거움은 물질의 풍족함에서 오는 만족감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세상이 주는 기쁨에서 오는 즐거움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절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여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이 무엇입니까? 결산의 절기입니다. 일 년 동안 수고한 곡식과 땅의 온갖 소산물들을 거두고 그것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농사지은 풍족한 양식과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것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배부름을 위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내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더 큰 창고와 곳간을 짓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칠 일 동안 머물며,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절기를 지켜야 합니까?
1)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일 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은 지금도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고 있습니다. 결실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고도 곳간도, 개인 기도처도 아닌 성전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서 온전한 결실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 나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함께 하셔서 지난 일 년 간 수고케 하심으로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이 누구인지 깨달으며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전12:1-2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2)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풍성한 결실로 모든 것이 풍족해 질 때 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세상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많이 갖는 것입니다. 남보다 많은 물질, 많은 돈, 재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능력대로 자신을 치장하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고 물질로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마음 중심이기 때문입니다(삼상16: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3) 여호와께서 복주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1-10절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축복의 목록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복을 우리가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는 풍성한 추수감사절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리에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3. 그 힘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원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의 모습은 바로 물질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봉헌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신 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복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드리는 찬송 중에 이런 후렴구가 있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새찬송429장/통합489장)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보면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지난 날 주신 복을 깨닫고 감사할 때 또 다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평안히 눈 뜰 때부터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감사하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로 우리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비록 지금 우리에게 조그만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이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는 것이 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한 부인이 신문에 남편을 팔겠다는 이색광고를 냈습니다. 주말이 되면 남편은 아내보다는 사냥이나 골프를 즐겼기 때문에 불만에 차있던 아내가 이런 광고를 낸것입니다. 광고의 문안은 이러했습니다. “남편을 염가로 양도함. 사냥 도구와 골프채 및 개 한 마리는 덤으로 드림.” 광고를 내니까 흥미를 가진 여성들로부터 금방 60여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남편을 구입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남편이 살아있다는 것을 다행하게 여기라.”고 충고한 과부가 있었고, “남편이 바람 안 피우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고 이야기하는 한 주부의 조언이 있었고, “남편과 헤어진 뒤 아이들의 양육 문제로 어려웠었다”는 이혼녀의 충고가 있었고, 더러는 “남편 말고 개만 줄 수 없느냐”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인에게 준 충고는 현재 자기 생활에 대한 불평과 원망보다는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고마움, 삶의 보람, 그 속에서의 새로운 생활의 노력, 이것을 찾아보라는 것일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음으로 인해 이전의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욥42:10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욥과 같이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분 곁에 바짝 붙어 서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을 돌아보고 헤아리다 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감사하다 보면 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감사가 복을 낳고 복이 감사를 낳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복을 받고 감사함으로 또 복을 받는 반복되는 복의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있다면 어찌 그 감사함을 표현하지 않고 지나가겠습니까? 우리가 추석 때마다 명절 때마다 우리에게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한 분들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힘에 지나게 그 감사함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축복하시는 그분께 과연 무엇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17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복에 대해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기를 원하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받은 복을 따라 여러분의 힘대로 능력대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감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마음으로 입으로 물질의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입으로 감사를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물질로 감사를 표현해야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감사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민6: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그리고 바로 그 복을 받는 비결 중에 하나가 감사입니다. 이제 올해의 추수 감사절이 다음 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모두가 경험하시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모습을 회복하시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모습은 바로,
첫째, 모두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둘째,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 힘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드리라
신 16:13-17 / 임덕순 목사
오늘은 문명세계의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하나님 앞에 가서 진지하고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본문에 보면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라고 하여, 때는 일 년 농사를 마치고 저장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라고 하시어, 가족과 나그네와 레위인 등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앞에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라고 하시어 하나님의 집에서 지키라고 하셨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시어, 이미 주신 모든 복을 헤아려 감사하며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뵈옵지 말고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라고 말씀하여 물질로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초막절을 지키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잘 정리해 보면 세 가지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몸을 드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16)
16장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씀인데 세 절기 모두의 공통점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장소에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거기에 모여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16: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16: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16:11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즐거워하라.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명절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모여와서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면서 절기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로 꼭 오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고 기르시고 보호해주신 몸이니까, 그 몸으로 당연히 하나님앞에 가서 보여드리고 예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몸을 얻어서 사는 인생이 그 몸을 주신분 앞에 보여드리며 예의를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몸은 누가 주신 몸인지를 아십니까? 나도 모르게 태어났고, 나도 모르게 먹으면 살과 뼈가 되어 자랐으며, 나도 모르게 내 인격이 형성되었습니다. 부모가 한 것이 아니요, 30길에 들어서서 만난 배우자가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고 기르고 관리해준 몸이요 생명입니다. 당연히 이 몸을 주신 아버지앞에 몸으로 나와서 보여드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까? 지금 이 땅위에 있는 사람들은 믿든지 아니 믿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결국 그분에게로 돌아가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롬11:33에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로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감사의 첫 번째 요소는 자기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 누구든지, 몸을 가진 사람은 이 몸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경배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이며 그래야 하나님이 그의 장래의 생명을 책임져 주십니다.
추석이나 설날이 가까우면, 서너 달 전에 귀향열차표 예매가 시작됩니다. 추석을 며칠 앞두면 전 국민이 들떠서 고향에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고,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거나 자가용을 몰고 열 시간이 걸릴지라도 기어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속도로마다 길이 막혀서 목포나 부산까지 가는데 열 시간씩 걸리고, 교통사고도 어지간히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명절만 되면 고향으로 가는 길은 만원이고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합니다.
왜 그렇게 명절마다 난리를 치러야만 합니까?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몸을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신고향은 그렇게 늘 마음에 두고 살고, 명절마다 찾아가면서, 부모님을 주시고 지금도 내생명과 내 장래를 주관하시는 참 아버지, 생명의 주인이며 천지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뵙지도 않고 살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부모만큼도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할 분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우리는 실제로 누구에게 더 큰 은혜를 입었습니까? 앞으로 누가 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칠 분입니까? 나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끼칠 분이 누구이고 내가 머리 두르고 돌아갈 대상은 진정 누구입니까? 세상에 하나님보다 귀한분이 계실까요?
그런데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내 삶의 인도자와 보호자이시며 나의 최후에 심판하실 주님이신 하나님께 대한 대접이 지금의 상태로 충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게으른 사람이 직장가기 싫어하는 것처럼, 교회가기를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다가 하나님께서 노하신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할 줄 모르는 행위를 괘씸하게 여기시고 재앙을 내리신다면 막아줄 이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자애로우신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시되 내가 정한 곳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서 정해주신 곳이 교회입니다. 모든 사람은 교회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구약에서는 성막이요 성전이며, 지금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몇몇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소원을 빌며 종교생활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은혜와 복을 받는 곳으로 정해주신 장소입니다. 생명을 받아 호흡하는 모든 인생은 여기에 나와서 자기의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힘없는 노인이 자기를 일으켜 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소유하셨고 만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 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도움을 받으려고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아시고 도와주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비애와 절망과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려고 애타게 부르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우리의 고통의 원인을 아시고, 그것을 해결할 길을 만들어 놓으셨기에 그래서 부르십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돌아오지 아니 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고도 하며 부르십니다.
파멸의 죄를 사해주시려고 부르십니다. 피곤하고 지쳐서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부르십니다. 영혼이 목마르고 갈증이 심각한 것을 안타까이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려고 사람을 만나자고 하는 부패한 관리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동기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고후12:14에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너희니라”라고 하셨고,
시50:10-14에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것이며 들의 짐승들도 내 것임이라. 가령 내가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다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그 다음에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부르시는데 각자 몸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받으시고 싶어서 오라는 것이 아니라, 주고 싶어서 오라고 하십니다.
죄 짐지고 비틀거리며 힘없이 주저앉으니까 용서하고 새 힘을 주려고 부르시는 것인데, 몇 몇 사람만 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먼저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주실 은혜를 받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길거리에서 광고지 나누어주는 사람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시큰둥하면서 내 길을 갔습니까?
왜 그렇게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나요? 몰라서요? 그렇게 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셨나요? 앞으로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내 생각대로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도리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용서와 새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거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라도 빠짐없이 하나님이 택하신 곳인 교회로 와서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감사의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추수감사절에 오셨으니 잘했습니다. 매 주일마다 교회로 찾아와서 몸과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으로 부터 생명의 힘과 삶의 지혜와 지침을 받아서 목표를 잃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마음을 드리라.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17)
주신 복을 따라서 감사드리려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복을 주셨는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추석에 열댓 시간씩 차를 타고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는 사람을 보면 빈손으로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가지고 갑니다. 부모는 물론 그 선물 기다리지 않고 몸 성한 자식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맨손으로 가는 자식은 없습니다. 부모는 필요 없다고 말씀하지만, 선물 꾸러미보다는 그것을 사들고 돌아온 그 정성에 감격합니다. 자식이 아직도 부모의 사랑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 선물에서 확인하기 때문에 선물을 받으며 흡족해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선물을 바라시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에게는 선물이 필요하긴 합니다. 고향에 계신 노부모님은 명절에 자식이 갖다드리는 몇 푼의 돈이 얼마나 요긴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님을 물질로 공경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늙고 병들어서 수입이 끊어진 노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앞에서 읽은 말씀대로 우주의 만물과 산천의 생축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물질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을 많이만 가져오라 하지 않고, 주신 복을 헤아려서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물질로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받은 복을 헤아려 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아깝지만 어쩌겠어, 대충 몇십만원 드리자" 하고 드리는 예물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생각없이 드리는 감사헌금은 도리어 괘씸히 여기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의 은혜는 생각하지도 하지 않고, 저 노인네한테 선물 안 사가면 온 동네에 소문나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것이고, 많이 드리면 아무개 출세했다고 좋은 소문 날 터이니 두둑하게 드리고 오자, 한다면 그는 못된 자식이며, 부모님이 자식의 그런 마음을 안다면 부모는 통곡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을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숨은 동기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 없이 감사에 참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기 전에 꼭 우리가 받은 은혜를 헤아려야 합니다.
고승이 죽으면 유골을 화장하고는 사리를 수습합니다. 사리가 무엇입니까? 과학적으로 말하면, 고승이 닦은 수도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병소의 흔적일 수도 있고, 철분과 열의 화학적 반응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찾기 위해 재를 헤치고 찾는 모습에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나오는 줄 알고 관심을 갖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누구의 유골을 수습해서 사리가 몇 개가 나왔다고 선전을 하면 사람들은 꺼뻑 죽습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우리는 죽은 고승의 재에서 사리를 찾는 우매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흔적을 찾는, 현명하고 생산적인 보물찾기에 나서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리면 우선 감사가 나오고, 내 믿음이 자라며, 지금 당한 어려운 환경을 이길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생산적인 보물찾기입니다.
여러분! 힘써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아니 일생동안 나에게 내려주신 복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주신 것, 선한 삶의 목표주신 것, 그동안도 말씀과 선하신 간섭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것, 내가 하고 싶어 한 옳지 않은 일을 가로막아 금지시켜 주신 것도 감사하고, 내가 하기 싫어하는 선한 것을 강권해 주신 것도 감사하며, 아직까지 건강을 유지시켜주신 것도 찾아내야 할 감사의 이유입니다.
10년이 넘은 코트가 하나 있는데, 너무 오래 입어서 소매가 닳아서 소매를 접어 고쳐 입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화요일에 새벽기도하다가 약간 추워서 그 코트를 등에 걸쳤는데 코트 깃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나님, 이 좋은 코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내가 그런 기도한 것이 신기하여 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금요일 새벽기도회 마친 후에 국립묘지 뒷산을 올라가다가 중풍에 걸렸는지 다리가 아주 불편한 분이 몸부림치며 걷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를 추월해 가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아, 나는 얼마나 감사한가?”였습니다.
누구는 남보다 건강한 것을 감사하고, 누구는 아직 직장이 있는 것을 감사하고, 누구는 자녀가 말 잘 듣는 것을 감사하고, 누구는 친구가 있는 것이 감사하고, 누구는 밤마다 잠을 편하게 잤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우리 모두는 우리나라가 평안하고 풍요롭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국 광저우에서 아세안게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메달 획득에서 어제 현재 금메달 52개로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가 세배이상 많고 경제력은 다섯배 이상 많은데 금메달은 29개로 반절 조금 넘습니다. 인도는 국민이 13억 이상인데 금메달이 겨우 2개입니다.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 우리보다 자원이 몇 십 배 많은 나라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경쟁상태가 되지 못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런 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어디에 감사하겠습니까?
103년전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가 만국평화회의로 모였는데, 그때 우리나라는 이준 열사등 세명을 대표로 파견했지만 입장도 못하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103년이 지난 금년 서울에서 G20회의가 열렸습니다. 한국은 의장국이 되었는데 네델란드는 20대 강국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회원이 아니었고, 그래서 이번 의장국인 한국에 우리도 초청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결국 초청받지 못했답니다.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이토록 축복하신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셋째, 힘대로 물질을 드리라. (17)
16절에는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하셨고, 17절에는 힘대로 드리라 하셨는데, 형편대로 드리라고 하지 않고 "힘대로" 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힘대로 란 경제적인 형편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신 복을 헤아린 결과로 나온 감사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15절에 “네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미래지향적인 감사입니다.
“주실 것이니" 라는 말은, 이미 생명과 환경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더 주실 것이니 그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힘대로 라는 말은 경제적 형편대로 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의 분량이요, 미래에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분량대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미 나에게 주신 복을 헤아려 감사하고, 앞으로 내게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주실 것을 믿으면서 감사하여 믿음의 힘대로 물질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일 년 동안의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정리하고 결산하는 의미 깊고 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 살아왔으니 몸으로 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할일입니다. 여러분 여기 참석하셨으니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께 몸을 받고도 그 몸을 놀이에 바치고 돈에 바치고 세상에 바치느라고 교회에 오지 못하고 방탕과 게으름에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어서 다 나오도록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몸으로만 나온 것으로 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을 자세히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슴이 터질 만큼 감사가 채워질 것입니다. 그 헤아린 결과를 따라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앞으로도 나의 길에 복을 주실 것을 믿으면서 믿음의 분량대로 힘껏 물질을 드려서 감사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물질을 모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주는데 사용하게 하여 이웃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제대로 감사할 줄 아는’ 한가람 성도들이 되시어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풍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절
신 16:13-15 / 강성찬 목사
어느 마을 입구에 큰 호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두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몇 년 후 많은 호두알을 주렁주렁 맺게 되었습니다. 호두나무는 속으로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드디어 열매가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오더니 돌멩이를 집어 호두나무를 향하여 마구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두열매가 와르르 떨어져 내렸습니다. 어느 날은 꼬마들이 긴 장대를 가지고 왔고, 또 어떤 때는 어른들이 몰려와 나무가 상하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돌멩이를 던져댔습니다. 몇 날 며칠을 이렇게 지낸 호두나무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가지도 여기저기 부러져 나갔습니다. 돌에 맞은 자리가 몹시도 아팠습니다. 나무는 자기의 찢긴 상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 나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려고 오랜 세월을 애쓰며 기다렸는데, 사람들은 정말 은혜를 모르는구나.”
서울소방방재본부에 소속된 119구급대가 한 해에 292,000번 이상 출동해서 212,000명 이상을 병원으로 옮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119구급대의 헌신적인 봉사로 생명을 건지기도 하고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는데, 그해에 그 가운데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표한 사람은 100중 3명 꼴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 일곱 개의 황금단지를 얻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개의 단지는 황금으로 가득 찼는데, 일곱 번째 단지는 반만 차 있었습니다. 그는 일곱 번째 단지를 가득 채우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황금으로 바꾸어서 반만 차 있는 단지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담아도 그 단지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단지를 채우고 싶은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만족하지 못한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평생 동안 불평하는 마음으로 궁색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밤에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교인들의 기도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습니다. 이쪽 바구니는 교인들의 간구의 제목을 담는 바구니였고 저쪽 바구니는 교인들의 감사를 담는 바구니였습니다. 간구의 바구니에는 이것 주십시요. 저것 주십시요. 하는 기도는 차고도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바구니는 저 밑바닥에 조금 깔려서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천사가 기도의 바구니를 들고 하늘에 올라가는데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애를 쓰고 또 애를 써도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말더랍니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몸이 붕 뜨더니 하늘나라로 인도를 받습니다. 하늘나라 문을 열고 들어가서 봤더니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응답 주시려고 큼직한 보화 창고에 보화를 준비해 두었는데 한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한 창고는 가득 채워져 있더랍니다. 이 빈 창고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이것 주십시요. 저것 주십시요. 간구할 때마다 주는 보화 창고인데 하도 사람들이 가져가서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창고는 감사의 창고인데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더 부어 주기 위해서 쌓아 놓은 보물들인데 감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쌓여 있더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모습들을 지적하는 이야기 들입니다
교회는 매주일 감사하지만 특별히 봄에는 맥추감사주일로 가을에는 추수감사 주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추수감사절은 성경적으로 유대의 3대 절기의 하나인 초막절과 연관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할 삼대절기와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규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요소입니다. 모세는 다시금 그 사실을 강조하면서 아울러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적극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히브리 민족의 절기 중에서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날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참자유와 구원을 얻은 날이요, 이스라엘의 성력이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 유월절이라는 명칭은 무교절과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유월절 주간에 무교병을 먹으며 두 개의 절기가 한 주간에 이어서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구분한다면 유월절은 아빕월 14일 저녁 하룻밤을 가리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의 초태생의 죽음을 대신해 양을 잡았던 것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은 양을 잡아 가족과 함께 먹으며 그 유월절을 기념했습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요구합니다
(출 12: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리스도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리고 무교절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월절 저녁을 포함한 일주일간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은 누룩을 안 넣은 무교병을 먹으면서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두번째 절기는 칠칠절(오순절 혹은 맥추절)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첫 수확한 보리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흔들어 바치는 요제의 날로부터 계산해 칠 주가 되는 날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특히 함께 기뻐해야 하는 대상이 명시된 것이 특징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노비,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 등과 함께 그 절기를 지키며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일찍부터 가르치라는 의미와, 곡식의 수확을 위해 애쓴 집안의 노비들 역시 감사의 절기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리도록 명하는 것입니다. 레위인 등 기업이 없이 하나님의 일에 전임하는 사람들 역시 함께 해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살피라고 요구되었던 객과 고아 과부 등 가난한 자들도 소외시키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 칠칠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감사 축제에는 이렇게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신14: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 이유는 지난날 애굽에서 겪었던 나그네로서의 고초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큰 은혜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대 절기 중 마지막 절기는 초막절(장막절 혹은 수전절)이었습니다.
이 절기 역시 추수한 곡식과 포도주에 대해 감사드리는 절기로서 한 해의 추수를 모두 끝내고 드리는 추수 감사제였습니다.
이 절기 역시 일주일 간을 지키는 절기로서 특히 초막절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지어 놓고 그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한 해의 모든 추수를 은혜롭게 마치게 하신 하나님에 감사하면서, 40년 광야 생활의 의미와 교훈을 깊이 되새기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칠 일 동안 지켜졌습니다
(레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깁니다
(레 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절기와 예배에 대해서 강조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은 교회사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청교도들이 지킨 감사절기와 관련이 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들끓던 16세기 중반 영국에서도 헨리 8세라는 강력한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이끌고 갈 목적으로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 국교회를 창시하게 됩니다.
이에 반대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성경 말씀대로 경건하게 생활하려는 입장을 취하였으니 이들이 청교도들입니다. 이들은 영국 성공회의 분리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11년간의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무척 고된 것이었으며, 아르미니우스파의 반대에 부딛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자녀를 교육하기란 더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7년 동안 힘들여 일해서 번 돈으로 배를 샀습니다. 그러나 스피드웰(speed well)이란 이름을 가진 그 배는 장기간 항해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다른 배를 구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호입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청교도(the Puritan)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16일, 180톤의 메이풀라워 작은 목선에 102명이 몸을 싣고 망망 대해를 건너 신대륙 아메리카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이 그때 항해한 거리는 대략 3,4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너무나 멀고 긴 이 지루한 여행길을 끝가지 견디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죽기도 하였습니다. 먹을 물과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행해진 65일간의 항해는 험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꿈에 부풀게 했던 신대륙 미국에서의 생활도 생각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620년 11월 9일 미국 동부 매사츄세쓰 주 케이프 카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개척지의 악조건 때문에 케이프 카드 서쪽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플리머드로 옮겨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1년을 개척하며 보냈던 시간은 또한 악몽과도 같이 힘들고 어려웠던 세월이었습니다.
낮에는 원주민인 인디언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고, 밤에는 사나운 맹수 때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추위와도 계속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년 후에 인원을 다시 점검해 보니까, 처음 출발했던 102명에서 그 절반도 넘는 53명의 사람이 죽어 버렸고, 겨우 49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 일년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 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저들에게는 마치 그것이 10/100년을 지나는 것 같은 천신만고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단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어 교회부터 짖고 1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며 그간 약 반수가 사망하였는데도 장례식도 제대로 못 치른 때가 많았으니 인디언에게 사람 수가 적어지는 것이 알려지면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디언과 화친을 맺게 되자 심한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 주었고, 옥수수를 심는 법 등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은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옥수수와 호박 등을 처음 수확하였을 때에 그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 가을 즉 1621년 10월에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인디안으로부터 배워서 가꾸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바치며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역경 가운데서도 저들은 그 땅에서 얻은 약간의 소출을 가지고 기뻐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또한 저들을 몹시 들뜨게 하며 감사와 흥분으로 넘치게 했습니다.
아무튼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회로서 눈물과 기쁨이 범벅이 된 체 서로 얼싸 안고 감사의 축제를,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기쁜 첫 추수 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칠면조를 잡아 고기를 먹게된 것도 인디언도 초청된 이날 총을 들고 새를 잡으려던 사냥꾼이 부근에서 칠면조를 잡게 되어 그 고기를 먹은 것이 지금까지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 때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칠면조 고기를 먹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과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일 년에 한번씩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된 이 추수 감사절의 역사요 기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감사절은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 감사절을 미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당시 남북 전쟁이던 남군과 북군도 이날 하루만은 전쟁을 중지하였다고 합니다. 1941년에 미국 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습니다. 그 후 루스벨트에 의해 11월 셋째 목요일이 추수감사절로 공포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어 온가족이 모여서 풍성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복 주심에 감사하는 날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영국의 「매튜 핸리」라고 하는 사람이 하루는 돈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는데, 그 날 그는 자기 일기장에 다음과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한번도 소매치기 당한 적이 없었기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소매치기는 내 지갑을 훔쳐 갔지만 내 생명은 훔쳐가지 못했으니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 설령 내게 모든 것을 털어 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니 감사하다. 또한 내가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 내가 도둑을 맞은 것에 감사하다.'
일본의 유명한 화장품회사 가운데 가네보라고 하는 화장품회사의 역대 회장 가운데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서 회장이 된 신화적인 존재가 있는데 미따니 야스또라고 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이 사람이 결혼을 한 후 아내로부터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세요, 출세 안 해도 됩니다. 그저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만 사세요.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다가 회사에서 정리되더라도 과감히 그만 두세요. 그러면 우리 둘이서 전도하러 다니면 되요”라고 했습니다.
다른 아내들은 다들 출세해야 된다고 말들을 하기에 아내의 말중 ‘출세 안 해도 되요’라는 말이 남편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마음이 편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뒤 출세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까 고민을 하다보니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씀을 간직하였다 합니다. 이것 때문에 불이익도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할 위기를 맞을 때도 있었으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자 하나님은 말단 직원에서 회장이라는 높은 위치까지 높이셨다합니다.
중국 사천성 지진의 최대 피해지 북천시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을 때 일이라 합니다.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 속에서 한 여성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이 여성은 엎드려 있었는데 포대기에 100일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아이를 꺼내 보니까 다행히 아이는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죽어가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온 몸으로 아이를 지켜낸 것입니다. 서둘러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던 의료진이 포대기 안에서 핸드폰을 발견했습니다. 그 핸드폰 화면에 한 줄의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 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 이 메시지가 매스콤을 통해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습니다. 모두가 감동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식을 지켜낸 모정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한 여인의 자녀를 위한 희생 보다 더 큰 희생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 하는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담당 하시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감사절(초막절)을 잘 준비합시다
신 16:13-17 / 이기복 목사
1년 중 가장 풍요로운 감사의 달 11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고(회고), 오늘의 삶에 감사하며(현실) 오는 미래를 바라보며(조망)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지켜 온 3대절기는 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하게 된 은혜와 구원에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칠칠절(오순절 또는 맥추감사절)은 봄에 뿌린 씨앗을 농사지어 수확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감사절로 일명 수장절(收藏節) 또는 추수감사절이라고 합니다.
점점 감사의 정신이나 생활이 사라지는 시대에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철저히 감사절을 지켜야 합니다. “감사하라”는 말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절을 철저하게 지키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감사절은 가장 기뻐해야 할 절기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와 물과 좋은 환경을 주셔서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절기가 감사절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평생 동안 많은 혜택을 받고 삽니다. 본문 14절에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감사절에 모두가 다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번역에서는 “함께 연락하라(Be joyful at your Feast)”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5절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초막절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면서 지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집밖에 장막을 치고 지내던 절기입니다. 추수의 절기는 누구에게나 기쁘고 즐거운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기쁘고 즐겁게 하시려고 감사절을 주신 것입니다. 어느 해보다도 모든 면에서 풍년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감사절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합니다.
2.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는 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은 서로가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의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는 절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절을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즐기는 절기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7일 동안을 모든 백성들이 한 곳에 모여서 같이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즐길 때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을 추수를 할 때 반드시 이삭을 남겨 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일부러 곡식을 논밭에 남겨 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려운 사람들과 나그네들을 배려해서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날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라 하여도 이웃을 최대한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약 1:27에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농부의 수고와 이웃들을 생각해 봅시다.
3.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이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절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감사절만은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본문 16절에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라고 말씀하였고 17절에는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첫째, 감사절에 우리는 먼저 여호와 “택하신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16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란 바로 성전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3대 절기에는 전국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였습니다. 우리도 감사절에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 우리 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몸을 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절에 물론 감사의 제물도 중요하지만 가장 값지고 중요한 제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절에 온 가족과 함께 성전에 나와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16절에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을 준비하였으나 오늘날 우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믿음으로 감사의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능력껏, 재력껏, 온갖 힘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라”라는 것입니다. 또 고후 9:7에 제물을 드릴 때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여 즐거워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믿음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받은 복을 세어 봅시다. 감사의 조건을 찾읍시다. 그동안 받은 은혜를 헤아려 봅시다. 건강 주신 것과 가정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할 수 있을 때 힘껏 정성을 다하여 감사를 합시다.
힘대로 드릴지니라
신 16:13-17 / 서명성 목사
신앙생활의 핵심 중의 하나가 감사인데 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기보다 현재 없는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만을 자꾸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고 섭섭해 하며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얼마나 과실들이 풍성하였습니까?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더라도 시간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바라보고 나중에는 그것을 먹었다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 사업, 교회를 통하여 주신 것만 헤아려보아도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습니까? 분주한 삶이지만 저희들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선한 일들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주일마다 봉헌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베푸신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으며 감사를 표현함이요, 추수감사주일에 특별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베푸신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으며 감사를 표현함입니다. 현재 우리가 지키는 감사절은 종교자유를 찾아 1620년에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에게서 유래를 찾을 수 있지만 구약 성경에서도 감사절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어떠한 자세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야 하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세 번의 감사 절기를 지켰는데 그중 두 가지가 추수와 관계된 감사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절기입니다. 이어 오는 절기가 유월절 이후 7주 다음날에 해당하는 오순절이며 그해 추수한 보리를 드린다하여 맥추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초막절은 한 해의 모든 추수가 끝난 후에 지키며 하나님의 풍성하신 공급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히브리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지키는 절기로 태양력으로는 9~10월에 해당합니다. 이 절기는 출애굽 후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는 종교적 의미와 한 해 동안 토지의 소산물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농경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해의 모든 농산물을 거둬 타작하고 창고에 저장한 후 지켰기에 ‘수장절’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과 그 시기와 의미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주일 동안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지은 장막에서 지내면서 40년 광야 생활의 아픔과 고난을 기억하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고난 끝에 가나안 땅에서 풍요롭게 평안한 삶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렸습니다. 초막절을 지키게 한 또 다른 이유는 가나안에 정착한 뒤에 나타난 새로운 세대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거의 천 년 동안 초막절을 지키지 않다가 느헤미야 시대에 가서야 초막절 지키는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감사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이 모세를 통하여 모압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질 때에 출애굽을 경험했던 광야 제일 세대는 광야에서 거의 사라지고 출애굽 할 때 20세 이하였거나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이 세대가 이스라엘 백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제 2세대가 가나안을 점령하여 정착할 때쯤 제삼 세대가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첫 소산의 예물을 드리면서 의식을 행하는 것은 가나안에 정착하는 광야 제이 세대가 그 동안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기 위함이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가르침으로써 자손 대대로 조상들이 믿던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더불어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었기에 하루아침에 열 자녀들과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어도 하나님께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욥 31:24-25) 하면서 욥은 부자였지만 재물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재물을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감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여호와.’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아닌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바알이나 아세라가 아닌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습니다. 감사를 드리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고 섬기던 바로 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했으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끈질긴 사랑으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기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 된 우리를 구속해 주시고 저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감사하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를 입고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제대로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나간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시편 136:24-25절을 보면,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놀라운지 회고하였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정복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가족들과 더불어 애굽에 내려가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노예로 삼았습니다. 애굽에서 벽돌을 굽고 건축을 해야 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며 힘든 일을 시키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날마다 만나를 하늘에서 내리셔서 우리로 굶지 않게 하셨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말하는 자뿐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도 듣습니다. 가나안의 복이 거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 세대의 땀 흘림 때문인 것을 자식들에게 알려줍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에 대한 회상이 없다면 새로운 세대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조상들의 신앙 여정을 알 리가 없습니다. 자식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풍요가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며 교만에 빠질 염려가 있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문맥에 따라 ‘찬양하다’ 혹은 ‘고백하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구약에 나타난 감사는 찬양과 신앙의 고백 혹은 죄의 고백인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무엇을 하셨는지 믿음의 눈으로 보고 고백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 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는가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드리는 진실한 믿음의 고백 위에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에 와서 이민자로서 믿음의 뿌리를 내린 것이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님을 자식들에게 들려줌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행사에 복을 내리심을 자식들에게 깨닫게 하여 그들도 부모들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신앙 간증은 그들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씨만 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기도하고 삶을 통하여 본을 보여주면서 좋은 열매를 거두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설교에 이어 성찬식이 행해집니다. 성찬식을 eucharist라고 하는데 ‘thanksgiving’의 뜻을 가집니다.
누구에게 감사합니까? 성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보내시고 십자가의 희생적인 죽음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 성육신, 사역, 고난, 죽음,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만찬의 자리가 이루어지도록 주선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성만찬을 직접 제정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성만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깊은 의미를 느끼도록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 농사지어 거둔 수확물 중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드려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12:8에 의하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하면서 가나안에 정착하거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감사가 됩니까?
1) 각 사람이 감사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추상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우리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모든 남자는 ... 여호와께 보이되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16-17절)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회상함으로써,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데리고 와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다 감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감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해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의 반응이어야 합니다.
2) 구별된 장소로 나아갑니다
감사절은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신 소득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체에 의미가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소득과 물질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별된 예물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즉 구별된 장소로 나아가 드렸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날 것이니라.” 성도들이 땀 흘려 수고하여 거둔 열매를 인하여 구별된 예물을 가지고 구별된 장소인 교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3)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눕니다
감사 절기의 아름다운 특징은 모든 이웃과 더불어 감사 절기의 풍요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특히 평소에 사회의 빈궁하고 소외된 계층과 더불어 절기를 함께 지킬 것을 하나님은 명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유가 없는 나그네, 농사지은 것 없는 과부와 고아,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레위인과도 즐거움과 물질을 나누며 절기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데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하나님의 사랑과 구제가 필요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서 큰 보람과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 떡을 떼며 기쁨”(행 2:44-46)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많이 받은 성도나 받지 못한 성도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교제를 의미하는 koinonia에는 구제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인한 즐거움은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교회를 넘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쳐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이번 Food Bank Drive에서는 바울선교회가 저소득층 가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또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귀한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찬이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주의 죽으심은 결국 교회를 세우시려 하신 것인데 성찬을 나누면서 분쟁과 파벌이 있다면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요 결국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그러니까 성찬을 통하여 주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함께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나 됨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우리는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립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절기를 지킬 때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빈손으로 나오지 말고 힘이 닿는 대로 예물을 준비해서 나오라고 권면합니다.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예배자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예물을 가져오도록 배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초막절의 제물은 특히 소산에 대한 감사 제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받은 복 만큼 바쳐야 합니다. “그 힘대로” 라 함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함을 일컫습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찾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가난한 과부가 자원하여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을 칭찬하셨는데 그것은 그녀가 돈의 양보다 그 간절한 심령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물을 드렸음에도 그 행위가 가증스러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버리셨습니다(행 5:1-11).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가 흘리신 보혈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적셔짐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 한가지만을 가지고도 평생 감사할 이유가 있고 이 소망의 근거를 우리의 이웃에게 부지런히 증거하여 그들도 이 기쁨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게 되고 나 자신과 가정과 이웃과 교회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쁨을 낳게 합니다. 2013년도도 한 달여 남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건강을 지켜주신 것, 가족을 지켜주신 것, 직장을 지켜주신 것, 좋은 이웃과 교우를 만나게 해주신 것,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해주신 것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감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 중에 건강이 이상이 있거나 상처를 받거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은혜요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구약에서는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감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범사에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풍성하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들을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 속에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필요합니다. 예배, 기도,헌금, 헌신 등은 우리의 신앙을 측정하는 온도계와 같습니다. 주님 앞에 다른 것을 드리려고 바쁘기보다 우리의 삶 전체를 산 제물로 드리는 저희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감사생활을 꼭 실천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가족이나 친지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더욱 체험하게 되고 영육 간에 더욱더 윤택하여지고 더 많은 감사의 열매들이 맺을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신 16:12-17 / 이원식 목사
어떤 글에 보니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보통 네 가지 대답이 나온다고 한다. 첫째는 “그럭저럭 삽니다.” 둘째는 “마지못해 삽니다.” 셋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셋째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 그러면 넷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그냥 살아요.”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1)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2) 기쁜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3) 역경 중에서도 여전히 감사하는 사람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수확을 한 후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1. 왜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입었으므로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12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 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피땀 흘려 농사를 지었지만 모든 소득은 주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과 이스라엘의 한탄을 보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도록 하셨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힘껏 농사를 지었다. 이제는 아무도 빼앗는 자가 없었다.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은혜 입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셨다.
수장절은 추수를 끝낸 다음 그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거워한 축제인 것이다. 어떻게 삶의 고비를 넘겨왔든지 어떻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든지 한 자리에 모여서 잔치로 함께 연락하며 하나님 앞에서 감사했다. 1년 동안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절기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과거에 베푸신 축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즐거워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은혜를 입었다. 애굽의 억압과 같은 이 세상 죄악의 억압이었다. 이 죄악의 억압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의 자리에 놓이도록 했다. 이러한 죄악에서 우리들이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7-18절 말씀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하셨다. 죄악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는 가난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감사함이 없는 마음이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함이 없으면 그것은 타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유를 늘리기보다 욕심을 줄이는 삶이다. 욕심을 줄일 뿐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고백할 줄 아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레23:43절에서는 초막절 기간동안 초막으로 나가야하는 이유를 출애굽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에 거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초막으로 나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다음의 네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1) 과거에서 오늘을 조명해 보라는 것이다.
초막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웠었던 과거로 되돌아가라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곳으로의 입국을 소망하였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대로 가나안에 입국하여 정착된 생활을 하며 토지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나안 입국의 감격을 점차 식어지고, 그 대신 가나안의 이런 저런 불편한 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감사절인 초막 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초막에서 지냈던 광야생활로 되돌아가 오늘을 조명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가나안 땅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지마는 광야에서 초막에 거하던 때로 돌아가 보면 감사가 절로 나올 것이라는 거지요.
2) 하나님의 극대화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초막으로 나아가는 것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초막에서의 생활은 분명히 불편하고 불완전한 생활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나 함께 하셨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늘 그들의 진 곁에 있었으며, 아침마다 만나가 내리시고, 때로는 메추라기를 몰아오기도 하셨다. 물 없는 광야에서는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함으로 광야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고 사막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환경 앞에서 인간은 작아 졌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대하셨다.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극대화가 대두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극소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초막으로 나아감은 뒤바뀐 신앙의 우선 순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위함인 것이다.
3) 상실한 소망을 되찾자는 것이다.
광야의 초막이 의미하는 것은 잃어버린 소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광야를 방랑하는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비록 초막에 거하였지만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지가 있었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삶의 활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가나안에 입국하여 정착한 것은 그 동안 꿈꾸어 왔던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나안 정착이 결코 소망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소망을 위한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가나안 이후는 가나안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을 소유해야 한다. 초막으로 나아감은 미래의 소망으로 불타올랐던 과거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새로운 소망을 되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풍족한 삶과 부를 이루었다고 그것이 소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이 있다. 내가 어려울 때 가졌던 꿈처럼 감사절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을 가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4)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초막 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는 저들이 추수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복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복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감사절을 지킬 때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21년 중국 사천성 지진의 최대 피해지 북천시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을 때 일이다.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 속에서 한 여성 시신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까 이 여성은 엎드려 있었는데 포대기에 100일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급하게 아이를 꺼내 보니까 다행히 아이는 숨을 쉬고 있었다. 엄마가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죽어 가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온 몸으로 아이를 지켜낸 것이다. 서둘러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던 의료진이 포대기 안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다.
그 핸드폰 화면에 한 줄의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 이 메시지가 매스컴을 통해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모두가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식을 지켜낸 모정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한 가지다.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아마도 살아남은 이 아이는 평생 엄마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문자 메시지를 평생 가슴속에 묻고 살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게 하셨다. 바라는 것 아무 것도 없으시다. 다만 한 가지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란 곡이 있다. 이 곡의 배경 이야기가 있다.
작곡가 김석균씨는 뇌성마비 장애자 한 자매와 여러 해 교제했다. 한번은 그 자매로부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았다. 가난한 한 집사님이 이사를 했다. 셋방살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녀석이 둘이나 있었다. 어찌나 장난이 심한 녀석이든지 신발을 사주면 한 달을 채 신지 못했다. 신발이 그러는 데 옷이야 뭐 말할 게 있겠는가? 아무리 빨아대도 도무지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한 다음 날 큰 마음먹고 중고 세탁기 한 대를 샀다. 세탁기를 가지고 대문을 들어서다가 그 집 주인 부인을 만났다. 집주인이 묻는다. “웬 세탁기입니까?” “네, 중고 세탁기 한 대 샀습니다. 애들이 워낙 번잡스러워서 당할 수 있어야죠?. 아니 글쎄,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신발이 한 달을 못 가요 글쎄” 그 순간 집주인 부인이 갑자기 울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게 아닌가? 당황했다. “내가 멀 잘못했나?” 그때 그 집 남편이 나오면서 “아닙니다. 부인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6살 난 아이가 있는데 지금껏 걷지도 못해요. 이 아이에게 신발을 신겨 걷게 해보는 게 저희들 소원입니다”그 가난한 집사 님은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이들의 신발을 빨리 닳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불평한 저를 용서하옵소서”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이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죽음이나, 배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고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영국의 신학자 매튜 헨리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감사와 불평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하면 할수록 더욱 불어난다는 것이이다. 불평과 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만과 불평의 일들이 쌓여 가지만 감사를 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과 축복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성경에 비춰볼 때 이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의 신앙인가? 이제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생존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욕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감사절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초막 절은 모든 이웃들과 더불어 감사를 나누는 즐거운 축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즐거움과는 다른 방향에서 불편한 초막으로 나가 칠 일간을 지내라는 성경의 규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사는 오늘의 안정된 삶을 보다 더 선명하게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2. 어디서 이 절기를 지키라 했는가
본문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하셨다. 이 말씀의 택하신 곳이 곧 중앙 성소인 성막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후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이 그 성소가 되었다. 그 후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바로 그 곳이다. 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절기가 되면 온 힘을 다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모였다. 심지어 먼 외국에 거하는 사람들까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달려왔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성전에 계신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다. 호화로운 건물들도 많다. 그러나 아무도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움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라면 그 곳은 성전이다. 교회당은 어디에 있던 성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되는 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라 하셨다. 함께 모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참빛 가족 모두는 이 귀한 감사절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이 성전을 찾아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복지까지 가는 동안 메마른 사막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이들은 이동식 천막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이를 광야 교회 즉 성막 교회라고 한다. 이 성막은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구분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갔던 장소다. 절기를 지키되 이 거룩한 곳에서 지키라 하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절기를 지켜야 했다. 반드시 여호와 앞에서 지켜야 했다. 이는 우리를 택하신 곳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모든 소산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며 즐거워하라고 한다. 지나간 일년 동안 소산물에 복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또 복을 주실 것을 믿으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초막이란 임시로 허름하게 만든 간이 움막이다. 유대인의 경전인 `미쉬나`에 의하면, 초막을 만드는 일에 특별히 중요한 것은 초막의 지붕인데 초막 안에 누우면 천장을 통하여 하늘의 달과 별들이 보여야 한다. 느8장에 기록된 대로 감람나무, 버드나무, 종려나무나 화석류 나무 가지로 짓고 지붕은 얼기설기 달과 별도 보이게 지었다. 이것은 초막이 완벽한 거처가 아니라 무엇인가 불완전한 거처임을 강조한 것이다.
3. 어떻게 이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14절에 “절기를 지킬 때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한다. 그러니 추수하여 너희끼리만 좋아하지 말고 성중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눠라 는 말이지요. 여기서 두 가지 꼭 기억해야 한다.
1) 너와 네 자녀다.
여호와의 절기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 라고 한다. 이 말은 너희가 너희 자손에게 꼭 가르쳐 주어야 할 절기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부모가 자녀와 함께 초막 절을 지키면서 초막의 지붕으로 쳐다보이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유대민족은 별을 보고 살아 온 민족임을 교육한다. 낮에 해를 보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살아 온 민족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의 박해로부터 근세사의 히틀러의 박해까지 3300년 간 자유롭게 활동한 것이 아니라 별이 비치는 밤에만 그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 절기에 초막에 거하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기의 조상들에게 베푼 역사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교육을 시도한다. 자녀와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유대인들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부자관계가 매우 엄격해서 자식들은 부모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는데 수장 절에는 부자모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2)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라 고 한다.
초막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수문 앞 광장에서 큰 성회를 열고 저들이 초막 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깨닫고 성대히 초막 절 절기를 지킬 때 느8:10절에 [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 이와 같이 초막 절에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자들과 함께 명절을 즐겁게 지킬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런 이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절기다.
아랫사람과도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유대인들은 주인과 노비의 관계 또한 엄격했는데 수장 절에는 주의 소유물에 불과한 천한 노비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사랑이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일군들과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레위 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열 한 지파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양과 소를 키우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신 다음에 그것을 레위 인에게 돌려주어 그들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추수감사절에 주의 종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어 수고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절기가 되도록 준비하시기 바란다.
나그네와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객, 즉 나그네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다 이 세상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여 한곳에 정착할 수 없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우리 자신이 나그네 인생임을 기억하고 나그네와 함께 하는 추수감사주일이 되도록 준비하자
어려운 이들과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와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육신의 고아와 과부가 있고 영적인 고아와 과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고아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추수감사절이 되도록 전도로 준비하시기를 바란다.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은 재물에 대해 두 가지 책임을 강조했다.
1)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책임이 있고 2) 어려운 이웃에 대해 나누어야 할 책임이다. 그래서 청교도가 세운 미국에서는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다. 카네기 록펠러 존 워너메이커, 헨리 포드, 현재 세계적 재벌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돈 만 많이 번 부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일에도 부자들이다.
1. 보임으로 감사하라
보임으로 감사해야 한다. 16절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하나님께서 모든 남자들에게 1년에 3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다. 절기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여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디예요?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다. 예배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나를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인격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마음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감사를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 예배라고 할 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얼굴 표정도 신경 써야 한다. 평소 우리의 인격 관리도 잘해야 한다. 우리 마음도 수시로 잘 가꿔야 한다. 그런가 하면 항상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한다. 언제나 감사, 어디서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고싶어 하신다.
2. 힘대로 감사하라
또 보일 때의 유의할 점이 있다고 하신다. 공수로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공수는 빈손을 말한다.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것이다. 예물을 준비하여 나아오라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예물을 준비하여 감사절 예배에 나오라는 것이다. 그럼 예물을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가? 예물은 어느 정도나 준비하는 게 좋은가? 힘대로 준비하라고 한다. 신16: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했다. 왜 말로 감사하고 마음으로 감사하면 되지 물건을 드리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니 우리에 대해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맘 깊은 곳까지 다 알고 계신다. 우리의 생각까지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 우리의 약점까지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물질에 얼마나 약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돈에 얼마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도 알고 계신다. 결국 공수로 보이지 말라는 말은 우리 손에 있는 물질이 탐나서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만물이 주님의 것이다. 우주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그런 분이 우리 손에 있는 물질을 탐내시겠어요? 아니요. 예물을 손에 들고 나아갈 때 마음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결 론
인간과 짐승의 차이 중에 하나는 인간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신자와 불신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안 하는가의 차이라면 누가 큰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가에 달려있다. 이제는 습관적이나 형식이나 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체면 때문이 아니라 잘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정말 이미 받은 은혜와 구원의 축복만도 감사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갈수록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을 하여도 점차 상실되어 가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감사는 은혜 입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다. 감사는 행복의 비결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감사는 복을 받는 비결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고, 형통해서 감사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될 결과적인 감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승리하게 된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란다.
사실 마음가짐이 결정적이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이 그대로이면 모든 것이 그대로다. 작은 것을 받아도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많은 것을 받아도 감사는 인색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마음가짐 때문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감사의 분량은 곧 행복의 분량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고전13:13절에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가 우리 삶에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나에게 한 가지 더 추가하라고 한다면 '감사'를 넣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감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응답이요,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이요, 믿음의 행위다. 진정한 감사를 할 때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고, 축복의 문을 여는 것이다.
여러분, 감사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지난 일 년 동안 지켜주셨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붙잡아 주셨다. 때로는 앞뒤 좌우가 꽉 막혀 캄캄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숨을 쉬잖습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뚫고 나왔습니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주님께서 힘이 되셨고, 능력이 되셨다. 주님께서 성령 님을 통해 역사 하셨다.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주셨다. 그 믿음으로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역사 하셨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셔 여러분들의 심령을 풍성하게 해 주셨다. 감사가 충만한 마음으로 다음 주일 추수감사 주일을 준비하는 여러분들에게 큰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신 16:10-17 / 박용래 목사
언젠가 어린이 동화집에 나오는 ‘호두나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면, 어느 마을 입구에 큰 호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두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끝에, 몇 년 후 많은 호두알을 주렁주렁 맺게 되었습니다. 호두나무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드디어 열매가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오더니 돌멩이를 집어 호두나무를 향하여 마구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두열매가 와르르 떨어져 내렸습니다. 어느 날은 꼬마들이 긴 장대를 가지고 왔고, 또 어떤 때는 어른들이 몰려와 나무가 상하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고 돌멩이를 던져댔습니다. 몇 날 며칠을 이렇게 지낸 호두나무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가지도 여기저기 부러져 나갔습니다. 돌에 맞은 자리가 몹시도 아팠습니다. 나무는 자기의 찢긴 상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 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열매를 주려고 오랜 세월을 애쓰며 기다렸는데, 사람들은 정말 은혜를 모르는구나.”
이 호두나무의 탄식은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여 주고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 아니 감사는커녕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시대에 사람들 모습을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전반기를 살아온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행여나 호두나무처럼 감사가 없는 사람들을 향한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삼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는 유월절입니다.
애굽에서 해방 받게 된 것에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애굽 전역에 일어났던 재앙에서 보호를 받았고 출애굽하게 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속죄함 받고 구원받게 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오순절입니다.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유월절부터 칠일씩 7번 지난 다음 날 50번째 되는 날이라서 칠칠절,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이때는 밀과 보리농사를 지어서 그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로 지킴으로 맥추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셋째는 초막절, 수장절입니다.
초막절은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초막을 만들어 생활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이라 불렀고 또는 일년 농사를 다 거두어들인 다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수장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는 모두가 감사절입니다. 성경은 이 감사절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감사절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가 ? 너는 온전히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거듭해서 너는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 즐거움으로 드리는 찬양과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번 미국을 방문 했을 때 미국인들의 교회에 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의 예배는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축제의 예배라고 느끼었습니다.
찬양도 세례식도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들의 예배 속에는 즐거움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적이 있고 축복이 있는 신앙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오늘 우리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즐겁고 찬양과 기도와 예배가 즐겁고 전도와 봉사와 헌신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이 될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는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영상은 흑인들이 모이는 사도교회와 두 교회 예배에 참석했던 모습입니다. 이 예배에 보면 그들이 얼마나 즐거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반드시 절기를 지키되 온전히 즐거움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절을 지키되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라 하셨는가.?
1)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감사하라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잘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면서도 늘 은혜는 잊어버렸고 작은 일에도 불평과 원망을 가졌습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감사하라.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기독교방송에 맹인이었던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에 그는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기뻐하며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내 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눈 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 하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을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느냐"라고 말했다 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신앙 때문에 자신은 고난을 이길 수 있었고 선교사를 만나 미국에 나아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지만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감사를 잃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맹아요, 농아였던 헬렌 켈러는 태어나서 열병을 앓다가 장님되고 귀머거리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작가도 되고, 자선가도 되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가 매일 삶 속에서 감사해야 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헬렌 켈러는 말하기를 “나에게 3일만 볼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 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겠다.”
헬렌 켈러는 3일만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나를 가르쳐주신 썰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겠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 터오는 모습을 보고 저녁에는 별들을 보겠다. 셋째 날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없어봐야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헬렌 켈러가 그렇게 감사할 조건들은 다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을 보고 있는데요. 그래도 우리는 감사를 별로 안했습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묻는다면 대개는 검은 점이 보입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검은 점보다도, 하얀 면이 더 넓습니다. 이 검은 점은 하얀 백지의 1/100도 안될 텐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검은 점만 눈에 들어온다고 대답합니다.
오늘 전반기를 살아온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검은 점보다도 더 넓은 하얀 백지를 보는 눈이 뜨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검은 점과 같은 어두움보다 사실은 하얀 백지와 같은 감사꺼리가 더 많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 불평과 원망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신 것에 대하여는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나쁜 것은 잊지 않는데, 그리고 불평하는 반면, 좋은 것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부자지간에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오늘 먼곳에 출장을 다녀오는데 교통사고를 입었지만 인사사고는 없어서 다치지 아니한것을 감사해서 감사헌금을 드린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나는 머나먼 곳을 다녀왔지만 교통사고를 입지 않은것에 대하여 감사한단다.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사업에 실패했다가 극복하면 감사하고 병들었다 건강회복하면 감사하는데 평생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어지면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감사를 잃어버린 삶이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지난날 건강하게 살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하여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게 주신 복을 인하여 힘대로 감사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해서 감사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감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더욱 값지고 귀하고 좋은 것으로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보화 창고를 여는 키라고 했습니다. 감사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 자들이 절기헌금과 일반헌금을 구별하지 못하는 감사절을 지킬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부자로 살아가면서 절기 감사나 일반감사나 별로 구별 없이 드리는 감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듯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감사절이 아니라 정성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큰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의 절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2) 네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
16:15-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네게 북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가 화려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가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네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말씀은 너의 미래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고 복 주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불안 때문에 고민하며 산다고 말을 했습니다.
1) 경제적인 불안 - 2) 실패할까봐 불안 - 3) 건강에 대한 불안 -
4) 사랑에 대한 손실 - 5) 노쇠에 대한 불안- 6) 자유를 잃어버릴까 불안
7) 죽음에 대한 불안 -
현대인들은 미래가 불확실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복주 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 했습니다. 믿고 감사함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
어느 곳에 한 착한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이발소에 가운을 입은 목사님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이발사는 정성을 다해 이발을 했습니다. 이발이 다 끝나자 목사님은 “얼마죠?”물었습니다. 이발사는 “저는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발료는 내지 마시고 그냥 가십시오. 저도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싶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은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책 몇 권을 우편으로 보내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들어왔습니다. 이발을 다 하고 난 다음 경찰관이 "얼마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이발사는 “돈은 내지 마세요. 저도 지역 사회에 봉사 한번 하고 싶습니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돈은 안 받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관도 고마워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미안해서,‘고맙다'는 카드와 함께 작은 선물을 보냈습니다.
또 그 다음날은 국회의원 한 사람이 금배지를 달고 들어왔습니다. 이발을 다 하고 난 다음, 이번에도 역시 이 이발사는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발료는 안 내셔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국회의원은 고맙다는 소리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국회의원들이 줄지어 찾아오더랍니다.
이것은 누군가 재미있게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하는 교훈을 줍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봉사하면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일에나 큰 일에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마귀에게는 감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속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평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오늘 전반기를 살아온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은혜주신 복을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한 후반기의 삶속에도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복 주실 것을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된 감사를 드리는 절기가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 성도들에게는 축복 있는 감사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 인생이 되라
신 16:9-17 / 이종철 목사
오늘은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중 맥추절은 봄에 보리나 밀을 수확한 후 드리는 감사축제입니다. 흔히 유월절 이후 일주일의 일곱 번, 곧 7 X 7 = 49 일 후에 드리는 절기라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하고 또 50일째라고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절기상으로는 오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켰습니다. 한국교회는 봄의 보리 추수가 끝 날 무렵, 1년의 전반기를 마치고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 첫 주를 맥추절로 지킵니다. 감사절기들과 관련된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감사의 참된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복 주심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 절기를 주신 이유는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예컨대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 해방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이 자기 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2절 말씀대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은 원래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종 되었던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의 어떤 어려움에도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 사회도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더 잘 살게 되었습니까? 50, 60년대만 해도 보리 고개라는 것이 있었고, 대부분 자기 집도 없이 쪽방 같은 곳에서 세를 얻어 살았습니다. 온 가족이 한 방안에서 자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는 않지요. 대부분 자기 차도 있고, 자기 방도 있으며, 먹는 것도 부족하지 않지요. 그러나 오히려 우리 삶은 과거보다 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1998년도에 런던 정경대학(LSE)에서 국가별 행복지수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모두 54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주관적인 만족도를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놀라왔습니다.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한 나라는 방글라데시였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와 국민소득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연중 홍수로 고난을 겪는 나라이며, 콩나물시루처럼 인구 밀도가 최고인 나라입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도 많고, 생활조건은 최악입니다. 바로 이런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1위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방글라데시는 2002년도 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3위는 나이지리아 였고, 5위는 인도였습니다. 전혀 모자랄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미국은 꼴찌에서 열 번째인 45위, 가까운 나라 일본은 44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는 41위, 예술의 나라 프랑스는 37위였습니다. 영광스럽게도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을 제치고 23위를 차지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진국 순서로 행복지수가 높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우리나라는 살기 좋아졌습니다. 먹는 것도 옛날의 왕후장상의 식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6,70년대만 해도 좁은 단칸방에 한 식구가 모여 생활하고 잠을 잤습니다. 위생 관념은 엉망이었고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자동차는 꿈도 꿀 수 없었고, 텔레비전만 있어도 부유층에 속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우리는 행복한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만큼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부채만 있을 때는 선풍기만 있어도 감지덕지 할 것 같은데, 이제는 에어콘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듭니다. 비교의식도 문제입니다. 일전에 하버드 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남들이 2만 5천 달러 받을 때 자신은 5만 달러 받는 경우와,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자신은 10만 달러 받는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대다수의 학생들이 전자의 경우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생활수준이 높더라도 비교가치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과 같은 감사 축제를 통해서 자기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맛없는 무교병을 먹고 쓴 나물을 먹게 합니다. 옛날 출애굽 당시 어려웠던 형편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지요. 초막절에는 일주일 동안 자기 집을 떠나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살게 합니다. 40년 광야에서의 힘들었던 삶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삶에 감사하십시오. 지금의 삶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잘 드는 예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예화를 생각할 때마다 제 인생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장미꽃이 하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가시를 주셔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에게 가시를 준 적 없다. 오히려 가시 나무였던 너에게 장미를 주었다” 같은 인생을 살지만 한 사람은 ‘가시 때문에...’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가시 같은 자기 인생에 장미로 아름답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천국은 감사하는 자의 심령 속에 있습니다.
맥추절은 봄 추수 후 드리는 감사제요,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마친 후 드리는 감사제입니다. 이는 먹고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고백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따뜻한 햇볕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 노력이라는 것은 1%에도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모든 것이 자기 손으로 된 냥 우리는 자기 것이라 주장합니다. 농사를 예로 들어 보지요. 먼저 씨앗을 보세요. 그 씨앗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토지는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그 안에 있는 거름은 누가 뿌려 놓은 것입니까? 적절한 때에 햇볕과 비를 준 자는 누구입니까? 농기구를 자기 손으로 만들었습니까? 시장이란 시스템을 만들어 열매를 팔아 다른 물건을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누구의 솜씨입니까? 인간은 서로 얽혀 있고 서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자기 노력이라고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남 저음 목청으로 나지막이 깔린 목소리로 설교하면 온 청중이 빨려듭니다. 저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못하다 생각했기에 참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 사무실에 갔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 동생이 거기 있었는데 목소리가 똑같아요. 생긴 것도 똑같이 가난하게(?) 생기셨어요. 그때 제가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 다 물려받은 거구나.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절기들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 주셔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감사에 대한 보답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빈 손으로 와서는 안 됩니다. 16절에서는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가졌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의 일부를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역대기서에서 다윗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담은 아주 전형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역대상 29장 14절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감사 절기를 드리며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감사
우리는 감사하되 이것이 자기만 즐기는 이기적인 감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객과 고아와 과부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가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과 큰 민족의 축복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민족만 잘 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이웃도 축복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워렌 버핏’이라는 세계 두 번째 가는 부자가 자기 재산 37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37조 원을 빌 게이츠가 운영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부가 마치 왕조적으로 세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현 부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상속세 감세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 받은 몇몇 소수가 출발선에서 한참 앞서 달려 나가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얼마 안 되는 재산세도 더 못 내겠다고 버티는 우리나라 부자들에 비하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버핏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부자인 빌게이츠도 자선사업으로 유명합니다. 빌 게이츠는 기업재산이 아니라 순수 자기 사유재산 중에서 매년 2조 원 이상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전 재산 55조 원 중 120억 원만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선 사업에 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빌 게이츠의 자선금은 주로 에이즈 퇴치나 저개발국의 의료 백신 개발 등에 사용되는데 게이츠 재단이 가난한 국가의 백신사업을 집중 지원하면서 지금까지 최소한 7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게 의료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미국 사회가 강한 것은 이런 부자들의 윤리의식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로는 강철왕 카네기나 석유와 록펠러도 기부로 유명합니다. 이들은 사실 기업사냥꾼들이며, 이들 때문에 독과점법이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벌어들인 부를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악명은 곧 사리지고 말았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부자인 채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부자의 인생은 두 시기로 나누어야 한다. 전반부는 부를 획득하는 시기이고, 후반부는 부를 분배하는 시기여야 한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 등의 명언을 남기며 자신이 죽을 때는 한품도 남김없이 도서관과 공공시설, 이웃을 위한 자선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신 이유는 혼자만 잘살라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하게 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진정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아직 이런 건강한 부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기 것을 움켜쥐고 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 중에 그렇게 존경받는 부자가 없습니다. 중산층이 많은 이 곳 강남은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닙니다.
물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맥추절을 맞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손에 쥔 열매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즐거움의 감사
짧은 절수지만 절기와 관련된 오늘 본문에는 ‘즐거워하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초막절을 언급한 14절 하반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즐거워하되)” 15절 하반절입니다.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불안하고 고단한 현실에서 위로처를 찾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살 때 또 하나님께 바치며 살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에 감사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누며 살 때 행복하기에 이웃과 더불어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일곱 날 빛을 주신다”(사30:26)
감사도 훈련입니다. 기도 훈련 하듯이 감사도 자꾸 습관적으로 반복하다보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궂은일에 감사하면 그 궂은일이 지속되는 시간이 단축되고, 오히려 우리의 축복의 발판이 됩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면 그 형통함이 오래 지속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란 말은 우리 신앙인들의 습관적인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 인생이 됨으로써 행복하고 축복받는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이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누가 “개척교회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 집사람과도 서로 “즐겁게 하자”고 격려합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도 개척교회 티를 안 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반 개척교회의 전형이 지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항상 물질과 사람에 쪼들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힘드니까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가정이 파괴되고, 목회자가 자신감이나 믿음을 잃기 쉽습니다. 비굴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께 떼를 썼어요. “저 그렇게 못하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즐겁게 목회하길 원합니다. 하나님도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쪼들리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개척교회는 개척교회인지라 빈자리를 보면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속으로 다짐합니다. “즐겁게 하자”
즐거움이란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개신교 목회자들이 너무 고생한다고 생각해요. 목회자도 스님이나 신부님들처럼 구도자의 삶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형편이 그러질 못합니다. 교회를 성장 시켜야 한다는 기업가적 자세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기독교 목회현장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대형교회 목회자들 중 크건 작건 병에 걸리지 않은 분들이 드문 것 같습니다. 제가 섬기던 이전 교회 목사님도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쉴 틈 없이 일하셨는데 그 게 화근이 되신 것이지요. 스님이나 신부가 암에 걸렸다는 말은 저는 잘 못 들었어요. 마음의 평화와 수양을 추구하는 종교인이 이런 병이 걸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을 즐거운 목회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가정이 즐거워집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목회도 즐거워집니다. 내가 즐거워야 창의력도 나오고 추진력도 생겨 일이 잘 됩니다. 일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시55:22)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처럼 우리의 행복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5)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는 인생이 되므로 우리 늘 행복하며 즐거운 인생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와 나눔의 잔치
신 16:9-17 / 윤영택 목사
추석 명절에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추수감사주일이 하나님께는 감사, 가족과 이웃들에게는 축복의 날이 되길 바랍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던 세 가지 축제가 있는데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감사축제라고 한다면, 칠칠절과 수장절은 땅에서 난 식물들을 거둔 후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칠칠절과 수장절은 비슷한 부분도 있고 각각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축제가 끝난 다음 날부터 49일을 계산하여 50일째가 되는 날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보리와 밀 등 그 해의 첫 곡식에 낫을 댄 날부터 칠 주간이 지난 50일이 되는 날에 하나님 앞에 모여 감사제사를 드렸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옛날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때 고생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는 축제였습니다.
수장절은 한 해의 모든 추수를 마치고 농산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열린 축제라는 점에서 칠칠절과 시기가 다릅니다. 이때 사람들은 집 밖에 풀과 나뭇가지 등으로 천막을 지은 후 거기서 7일 동안 생활했는데 옛날 조상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유월절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 기념이었던 것처럼 칠칠절과 수장절 역시 애굽에서 나온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자유와 풍요를 누리게 됨을 감사하는 축제라는 점에서 세 절기들이 서로 연결이 됩니다.
애굽으로부터의 자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자유 회복이었고 가난과 인권 말살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복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수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로서는 도무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잊지 않도록 세 가지 축제를 정하여 주시고 이스라엘이 자손대대로 이 날들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 수치스러움 등 나쁜 기억은 할 수 있으면 속히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하시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마저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들의 연약함이고 뻔뻔함입니다. 오늘 내가 있는 것은 나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감사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망각하는 습관이 있음을 잘 아시기에 옛날을 기억하고 오늘을 감사함으로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칠칠절과 수장절은 서로 다른 축제였지만 지키는 방식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생각해보고 내 힘껏 자원하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감사예배를 드리는데 거기에는 직계 가족뿐 아니라 그 집에서 일하는 종들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레위인들 그리고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청하여 함께 즐거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밭에서 내가 수고하여 거둔 곡식들이지만 그것은 나와 내 식구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웃들과 나누며 살라고 주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애굽에서 종살이 할때 내 손으로 지은 곡식을 내 맘대로 먹지 못하였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것을 활짝 열어 이웃과 나누며 잔치함으로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칠칠절의 축제는 그 해의 첫 곡식을 거둔 후 복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잔치라고 한다면 수장절은 한 해의 모든 농사를 마감하고 긴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곡간에 저장하고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한 해 동안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또 내년에도 우리의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맡겨드리는 즐거운 잔치였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이 모든 것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앞으로 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 고백하던 이 잔치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정신과 동일합니다.
쌀을 의미하는 한자 ‘米’는 쌀 한톨을 얻기 위해 농부가 씨뿌리고 거두기까지 농부의 손이 88회 거쳐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지요. 그만큼 힘들여 지은 농사이며 소중한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람의 수고만 담겨있을까요? 씨를 뿌렸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 싹을 내지 못하여 시작부터 실패하거나, 한 여름 가뭄으로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새까맣게 말라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농부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눈물겨운 수고를 했지만 추수 전에 불어닥친 태풍과 홍수로 모든 것을 잃고 통곡하는 농부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하늘의 도움을 바라며 추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졸이고 그날을 기다립니다. 사람이 수고하였지만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열매를 얻을 수 없음을 아는 농부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는 추석의 덕담이 있듯 추석이 되면 농촌 마을들은 활기가 넘칩니다. 황금색 들판에 알알이 영글어 고개 숙인 곡식들이 농부의 낫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가지마다 잘 익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황금빛 물결 치는 논에는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고 농부들은 논둑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쓰러진 볏단을 일으켜 세우고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으려고 마지막 손질에 쉴틈이 없습니다.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하느라 온 몸이 저리고 아프지만 잘 익은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은 잘 자란 자식들을 바라보듯 만족감에 젖어있습니다. 이렇듯 가을 농부의 훈훈한 마음은 농촌 마을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그 온기가 전해집니다.
일년 내내 이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수의 계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위로는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위를 돌아볼 때는 함께 어울려 사는 가족과 이웃들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감사와 나눔의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넉넉한 마음에서 풍성한 나눔이 나옵니다. 이 넉넉한 마음은 내 손에 들린 풍성한 열매를 바라보는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내 마음을 채우고도 넘치는 넉넉함이 이웃을 돌아볼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감사절 축제의 나눔은 우리의 기쁨을 배나 더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제물로 드리는 곡식단이나 짐승의 기름으로 배불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눔으로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그 제사를 즐거이 받으십니다. 이 나눔의 제사가 하나님께는 즐거운 드림이 되고 이웃 사람에게는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 받는 즐거움이 크지만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과 나눔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많이 가진 사람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선 나의 필요를 채운 다음에, 내 가족 먼저 넉넉히 챙긴 다음에 그래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는 평생 단 한번도 나눔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기름과 밀가루로 작은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먼저 공궤하였던 사르밧 여인은 그것 때문에 생애 최후의 식사를 빼앗긴 어리석은 여인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핍과 구차함 중에도 기꺼이 나눔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 집에 양식이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쓸 것을 아시고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추수감사절 그리고 추석 명절을 맞이한 믿음의 가족들 모두 하늘을 여시고 땅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기쁨으로 열어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여 땅의 소출을 얻지 못하던 레위인들과 그 땅에 나그네로 머물며 토지 소유권이 없어 농사 짓지 못하던 외국인, 그리고 종들과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의 소출을 함께 나눔으로 살았던 보살핌의 대상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턱 없이 적은 수입으로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여 어깨가 축 늘어진 가장들과 배고픈 어린이들이 있으며, 취업의 길이 막혀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어깨가 부서지도록 일하여 풍작을 이루었지만 농산물이 제 값을 받을 수 없어 실망한 농부들의 눈물도 있습니다. 자식처럼 정성껏 가꾸며 기른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 비용조차 나오지 않아 그 자리에서 갈아엎어야만 하는 농민들의 분노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번 추석이 이런 분들에게 외로움과 허망함이 아니라 넉넉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넉넉하여 쓰고도 남는 재물을 주심은 이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쌓아두고 곰팡이가 피도록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곳간 문을 열어 함께 나누어 균형을 이루라고 맡기신 사명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누구나 즐거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나누고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나누는 법입니다. 그래서 나눔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믿음에 비례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홀로 지키려고 하늘에만 머물러계셨다면, 하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남아계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고 고단한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거절하셨다면 이 세상의 구원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 위해 내어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나누셨기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떡과 잔은 예수께서 주신 주님의 몸을 나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하여 떼어주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보혈이 그 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얻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사는 드림과 나눔에서 고백됩니다. 하나님께 즐거이 드리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즐거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마음을 나누고, 물질도 나누며, 시간을 나누고 복음을 나눕시다. 기쁨과 즐거움도 나누지만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함께 나눕시다. 해외에서 나그네 삶을 살며 학업과 생활에 대한 긴장감이 지속되고 경제적인 압박이 시시때때로 밀려올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그라들고 삭막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고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다가 놓쳐버리는 소중한 것들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는 추수감사의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리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나눔으로 누리는 기쁨이 오늘의 감사잔치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금년 남은 시간들을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