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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인생을 이끌어 주신 최고의 스승 길 영희 교장 선생님!
만남의 복이 가장 좋은 복임을 어찌 부정 할 수 있을까?
6.25 전쟁으로 인해 맺게된 기이한 인연! 어버이를 대신 해주신 특별하신 스승!
6.25 한국전쟁은 모두에게 기막힌 비극이었다. 전쟁 한달전에 병사하신 아버지와 사업해서 물려주신 적지 않았던 재산을 피난길에 송두리채 잃어버리며 시작된 역경을 통과 해오든 과정중에서의 만남 이었다
실상 저희 동기간 중에 큰 오라버님은 인중에서 선생님의 진짜제자로 1.4 후퇴와 동시에 학도병으로 나가신 후 학업이 중단 되셨고 저야말로 선생님의 인중 제고 문턱에도 못가본 여자로서 남자 제자들만 두신 선생님의 특별교육을 그것도 선생님 댁에 입주해서 가정교육으로 받은 행운아 였다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버릇없음을 용서 바라며~
제자들은 자신이 스승의 제일 애제자였다는 자부심들을 가지는것이 통념이고 그리 생각함이 도리인듯하다
우리 선생님께서 불이익을 당하신 군사정부의 교육 특례법에 의해 앞당겨진 정년퇴직은 제가 선생님을 만날수 있는 기회로 하나님께서 주신 행운이었다
영재교육을 위한 대성학원을 설립하심과 동시에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재건국민운동의 군 간사로 위촉받아 농촌운동을 하던 내가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천 대성학원에 와서 강의 문제지와 시험지를 가리방 등사하는 일을 담당했다
선생님 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에대한 비난이나 원망의 말씀을 들어본 일은 없었다
저녁에는 야간 수업을 청강하면서 전후시대 유일한 독학 수단이었던 강의록으로만 씨름 하던 공부를
칠판 앞에서 명강사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되었다
* 일등인생이란? *
새벽녘 선생님이 기상 인기척을 알리시며
" 항진이 일어났으면 이방으로 건너오렴"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다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니?" 귀 기울여 들으니 " 똥퍼~~ 똥퍼~~" 겨울 매서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 예 인분 수거 하는이들 소리네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시간에 저 사람들중에 누가 보든지 않 보든지 한짐이라도 더 퍼 나르는 사람이 일등 인생이야"
자기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 하는 사람이란 말씀으로 받았다
<철자엄마> 이야기를 많이들어 그분이 누구시길래? 하고 내심 궁금했었다
어느날 저녁때 선생남께 보고를 하러 온 그 철자엄마를 드디어 보게 되었다
머리를 쪽찌고 수수하게 차려입은 한복에 순박한 미소의 아낙이 선생님앞에 조신하게 앉아 아버지께 말씀드리듯
선생님은 다정하게 끄덕이시며 들으시는 모습이 퍽 신뢰를 받는 사이걑았다
인중제고 교사들과 직원들 70여명의 점심 식사를 혼자 해내는 정직한 능력자라는 말씀이시다
기라성 같은 높은 학문을 수학하신 제자분들을 그렇게 많이 두신분으로 그분의 일등인생 평가는 각인이 보유한
능력을 나태함 없이 발휘하는 여부에 두시고 신분의 상하 귀천을 균등하게 대하신 대인관계 면모를 배우게되었다
해 지나간 금전 출납부에 시나 수필 습작을 시키시며 가끔 검사를 하시었다
공산주의가 기독교의 좋은 정신을 가져다가 잘못 사용한 결과 라는 말씀도 들으며 그러시기에 기독교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시며 초대 기독교의 공동체 정신으로 이상향 농촌 건설을 실현하시기위해 그 귀인들이 뜻을모아 일하셨던 역사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사극영화를 즐기셔서 덕분에 동자처럼 선생님 방석 들고 동인천에 있었던 인현극장을 다녀 온후 감상을 나누시곤 하셨다
몇일에 한번씩은 만수동 농장에서 생산해서 저장했던 채소를 실은 소 달구지가 선생님 댁에들리면 나는 추운 겨울 새벽 눈길에 농장 아저씨를 따라 언덕길에서는 달구지를 뒤에서 밀어가며 야채 집하장까지 가서 매매한 돈을 인수받아 오곤 했다
안전제일인 선생님은 겉 치례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 나였지만 그래도 부끄럼 타는 처녀아이에게 구지 전대에다 돈을 넣어 겉옷속 허리에 두루고 은행에가서 입금 하라시면 이의 달지 않았다
때로는 일손이 부족하면 강의실 난로에 화목을 때는일도 가리지 않았다
심부름으로 만나뵌 선생님의 주변 인물들 인품을 통해서도 선생님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시며 몇일 여행을 가시는 동안에는 금고키를 내게 맡기시고 강사 선생님들의 급여일에 맞춰 계산해 드리도록
나를 신뢰해 주셨다
세상 살며 내가 그 수많은 허접한 말을 뱉어냈다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들으셨을 한마디
피난가서 성경이 귀한때 "나는 나중에 시집 갈때 성경 세네벌만 사가지고 갈거야~" 한 말이고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린것은 처음 만나면서 "너의 봉급을 얼마로 정하면 좋을까?" 하실때 "선생님! 저 돈벌러 온것 아니예요 공부하러 왔어요 잘 먹고 따뜻하게 잘 수있는 것으로 족해요"
요것 맹랑하다 싶으셔서 달리 감정이입이 되셨나보다 "돈이 아니고 공부입니다" 드렸던 말 한마디~
수학 강사로 오시던 송도 고등학교 김 수봉 선생님께서 어떻게 아시고 "이양! 이양은 아직 세상을 잘몰라 선생님께 최선을 다해 충성스럽게 일해 드리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 주시는 봉급 받아 계획있게 사는게 바르지 않을가? " 진심어린 사랑의 조언 이었다 "알겠습니다" 하고 관념하지 않았다
물론 용돈과 철따라 바꿔 입을 옷은 마추어주셔 사람들 앞에 남루해 보이지 않았고 교회에 헌금도 드릴 수 있는
입장이였다
봉급에 비 할수 없는 나의 인생공부! 당시는 영어 수학 국어등 학과목으로 관심 두었지만 그것이 아닌 사람으로 가르치기 참 어려운 진귀한 공부! 수업료로 치면 평생 애써 벌어도 치를수 없는 가치다
나 만큼 횡재 한 사람이 있을까?
* 수강증 검사*
교문 앞에서 수강증 검사 당번이 내 차례였다
거의 제고 재학생들이고 인근 고등학교에 실력있는 재수생들이 대성학원으로 와서 명강사들의 강의로 일류대학 진학을 목표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나 나 아침에 깜빡잊고 수강증 못 챙겼는데 한번만 봐줘 응?~~"
"않되 너 교장 선생님 어떤 분인지 알잖아? 원칙대로이신 걸 빨리 가서 가지고와"
"지금 제일 중요한 과목 인데 한시간 못 들으면 난 어떡해?"
옥신 각신 하다가 후딱 뛰어 둘어가는 것을 멀지않은 거리에서 보시게 되었다
"항진이! 지금 뭐 하는거야?"
불호령 이셨다. 시간을 놓쳐 버리면 되 찾을 수 없었던 그 아이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변명하는 나에게
"네가 지금 저 아이를 눈감아 주면 어떡케 할게야? 저 아이가 나중에 나라의 국사가 될지 누가 아느냐 말이다
그때에 원칙 벗어난 일을 눈감아주거나 청탁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나라가 어찌 되갔느냐 말이야"
수강증 지참 못한것 한번 봐준것에 나라까지 거론하시니 속이 무척 상했다
(작금의 이 나라 상황에 가슴 아파하며 끄때의 질책의 뜻을 절감하며 선생님은 지금 무어라고 하실까?
근심이 감돈다)
<괴팍스런 고집불통 영감님! > 꾸지람으로 입은 상처가 잘 가라안질 않았다
그 당시에는 <석두> 라고 부쳐진 선생님의 별명을 내가 미쳐 모르고 있던 때였다
선생님은 아드님 자녀만 두셨었고 제자들도 모두 남자세계에서의 정서라서 그러신지 다독여 풀어주시는 테크닉은 없으셨다 그저 멋쩍어 하시며 넘어가시는 것이었다
그런 선생님을 이해 못하고 꾹꾹 상처를 누루며 한주간쯤 버티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직장을 구해 상경하여
3~4 개월 정도를 어느 소규모 자영업 회사에서 일하면서 또 다른세계를 경험했다
적당히 원칙과 근접하나 분명히 벗어나는 경영을 발견하고는 "이건 아니다!, 내가 여기서는 인생 사는 방법을
잘못 배우겠다!" 깨달으며 그제서야 "그 괴팍하시던 불호령 선생님께로 돌아가야 바로 사는 길을 배우겠다!"
는 마음이 강력하게 들어 전화를 드렸다
반색하시는 음성이 돌아가는 탕자를 맞아주시는 듯 했다
길 아니면 다시 돌아 갈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 터닝 포인트는 스승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적셔지는 그분이 내 정신세계에 아직도 계심이다 내재된 인간사랑을 겉사람에서는 잘 드러내시기를 자주 못하셨지만 지극히 따뜻하신 위인이시다 먼저 가신 부모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나의 인생교육을 그분께 의탁하신 듯 하다
부모님께 가끔은 죄송한 것이 부모님 생각하며 눈물 흘린 적은 많치 않은데 선생님을 추억하면 지금도 감사한 눈물이다 그분의 깊은 인성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실로 인정 하셨음이 느껴진다
* 제자들이 궁금해 하는 교가의 발원지 *
미션 스쿨이 아님에도 교가나 훈시, 훈화, 하사 해주신 휘호들 가운데서 기독교의 뉘앙스를
많이 느끼게 되는데 분명히 교회 출입은 않 하셨는데 어디로 부터인가? 직계 제자들 조차도
흥미로운 관심사이다
더욱이 선생님 노년에는 공자의 논어에 심취 하시어 논어중에 명구를 발췌하여 손수 쓰신 논어초는 그 제자를 보면 스승을 연상케하는 애제자 심 재갑 선생님의 헌신적 보급으로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드리고 계시다
학교를 매체로한 사제간의 제도권 밖의 제자라서 선생님의 심층면모 일부를 접할 수 있었던 에피소드 몇가지이다
100 ~ 200 여년전 우리 나라의 선각자들이 접하셨던 유, 불,선이 미친 영향을 간과 할 수 없듯이 선생남 출생후 유아기부터 접한 학문이 한학이셨다고 하니 충분히 성현들의 가르침에 겸손 하게 섭렵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천신만고 끝에 정상교육이라고는 대학 입학하여 4년 수학 한 감리교 신학교이다
입학 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소개장을 친히 쓰셔서 인봉해 주시며 "신학교에 입학하는 길로 이화여고에 재직하고 계신 오 주경 선생님( 김구 선생님 의 신앙적 멘토이자 암살 당하시기 전에 재혼을 약속하셨던 이화의 어머니로 성경 선생님) 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아라"
그 연고로 또 한분의 영적 멘토를 모시는 행운이 이어쪘다 그분이 바로 길 교장님 사모님 이셨던 전채오( 감리교 신학교 1933년 1회 졸업생) 님의 베스트 푸랜드 이셨다 재학당시 심훈의 상록수에 주인공 이셨던 최용신님과도 몇분 않 되는 여학생으로 동문수학 하신 관계이셨다
고 전 영배 배재대 교수께서 배재고등학교 교목으로 계실 당시 담 하나 사이인 이화여고 교목실을 찾으셨을때 일화이다
교장선생님에 대해 "그 영감 내 친구 전채오가 교회 전도 사로 있는데 7년간이나 따라다녀 결혼 하더니 교회도 못 다니게 했어!" 하셨다는 유감을 토로하셨단다 (영웅의 용기와 스승의 가르침ㅡ 고 전영배 교수님 글 중에서)
전채오 사모님께서 작고 하신 후에도 사모님이 그리우시면 그의 친구 오 주경 선생님을 학교로 방문 햐셨나보다
한번은 오셔서 가방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내 주시며 " 이것 출퇴근 하실때 교통비로만 쓰시요 교회에다 헌금으로 다 내지마시고~ " 그영감님이 그러시더라 하시며 이북사람 특유의 기질로 인정표현을 그렇게 하신 따뜻한 속정 을 들으며 한참 웃었던 일이 있었다
그분들이 감리교 신학교 선배 가 되셨던 것도 내가 오 주경 선생님을 만나뵌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전채오 사모님 께서 교회 출석을 못하신 것은 선생님으로부터 타의에 의한 강제성 이 작용 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시대적으로 혼란하며 지금처럼 일부의 교회 다나는 교인들의 부도덕한 면에 거리를 두다보니 무교회 주의 성향과 가까워 지시지 않으셨나 추정도 해본다
그동안 발간 됬던 추모 문집을 통해서도 추정해보건대 선생님의 진리탐구와 실천에 목마르신듯 사시며 유교나 불교 기독교에 담을 허무시고 진리로 확신 하신 부분은 존숭해 수용하신 그분의 겸손하신 인품이셨던 것 같다
기독교 색체가 짙게 풍겨진 것과 제자들중 기독교 성직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교류하시던 가까운 분들이 거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다수 였던 영향 이었음이지 않은가 싶다( 안 창호 스승의 신앙. 전채오 사모님 ,오주경 선생님 , 함석헌 선생님, 장기려 박사님 , 직접 교류가 있으셨는지는 확인 않 되지만 일본에서의 우찌무라 간조,김교신 선생님 가까이 왕래하신 평안의원 박정희 장로님댁등 ) 이분들 중에는 무교회 주의를 지향하는 다수의 분들이 계셨기에 교회 출석 않 하신 이유는 그분들과 공감 하신 부분 이셨을 것으로도 짐작한다
*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절제 하신 겸손 *
대성학원 에서 몇년 모셨을때 많은 제자들의 어려움을 도우시는 것을 보았으나 공치사를 하시는 것을 한번도 못 보았다 나중에 은덕을 감사하여 두고두고 기쁨을 드리는 분들도 많으나 감사를 저버리는 이들이 더러 있어도
베푸신 일에 대하여는 잊으시는 분이셨다
현 시대의 교육부재와 혼돈에 선생님을 몹시 그리워 하여 재 조명 하려는 작업을 하시는 분들 고백이 그분 자신이 유작을 많이 남기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보며 오히려 감히 그분의 심연의 인품을 뵙는것 같다
무엇을 후대에 남기려는 영예에 대한 욕심이 없으셨잖나?
현재에 가르침으로 최선을 다하시고 흙으로 겸손히 돌아가시는 삶!
그래서 가르침 받은 제자들이 스승을 뛰어넘을 인물들이 되기를 염원하시며 남기신 낙관도 <출람>ㅡ<청출어람 승우람>이라하셨으니~ 그 낙관은 심 재갑 선생닙께서 물려 받으신 영광 때문에 스승 닮아 사시는 모습이시다
오직 제자들 사랑에 인생을 걸었던분!
진리를 추구하기에 힘쓰신 면모를 보았다 김 희정 사모님과 결혼하신 1~2년 후쯤이다
하루는 홍여문 근처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에서 한 경직 목사님의 부흥집회가 있다고 참석하자고 하셔서 선생님과 사모님 ,나 셋이서 참석하여 경청 하신후 우리는 교회에 남아있고 선생님은 한 목사님과 사무실에서 30여분 이상 독대를 하고 나오셨다. 제고 근처이고 인천바닥이 훤 한데 학부형들 인식도 되셨으련만 진리를 구하는 순수하신 면을 뵈웠다
돌아가시기 일 이년 전 어느 초 여름날 찾아뵜을때 이제 떠나실 날이 직감 되시는지 집 앞 마당에 그늘을 드리워 주는 살구나무 잎새를 하나 따시드니 "항진아 내가 세상을 떠난다고해서 이런 잎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겠지?"
구두발로 바닦에 잔돌맹이 하나를 굴리 시면서 " 이런 돌 하나 꿈쩍 하지 않겠지?"
하시는데 당시의 내 신앙의 경지에서는 드릴 말씀을 찾지못했다
지금만 같아도 "선생님은 이미 가난한마음 빈 마음의 천국을 사시는거예요 "
말씀드리며 최고선 SUMMUM BONUM 의 진리 산상수훈을 진지하고 기쁘게 나누었을터인데...
연하장에 귀군이라고 칭해주신 사연은 여쭈어보지 못하고 남겨진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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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께서 사모님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귀한 스승을 만나게 하시고 배움과 사랑받게 하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연하장에 쓰신 “귀군”에 대해서는 제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지도 말고 여자라고 위축받지도 말 것이며, 대장부 같이 담대하게 의로운 일을 힘써 행하거라”
지금 사시는 것처럼 그렇게 사시라고 미리 예견해 주셨던 것같습니다~ ㅎㅎㅎ
영원히 기억되는 인생의 멘토, 좋은 선생님을 모셨기에 지금의 사모님의 반듯한 삶이 존재하는 듯.. 그스승의 그제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진정한 스승입니다.
장글 무척 진지하게 잘 읽었습니다.
사모님의 젊음의 삶을 훤히 뵌듯 상세하게
써 주셨네요~ㅠ
힘든 삶속에서도 귀인의 도우심으로 또다른
목표물을 향해 날개를 펴시고 배움의 길을
져버리시지 않고 실행하시며 일평생 사신듯
합니다.물론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에서
하셨으리라 믿지만요.
감사 합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신줄
믿어봅니다.어쩔수 없는 사정으로 사모님 곁을
떠난 이들도 종종 안부를 물으면 정말 진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내내 건강하시 남은 생 주님과
동행하시며 은혜를 나눠주시길 기도 합니다^^
황송합니다. 뉘신지? 우리 모두 한 성령안에 보호 받으며 사니 남은 것은 감사 뿐이지요
이시대의 교육부재와 상실의 어두움에 애타서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 고 외치신 정직을 가르침 받은 제자분들이 그분이 너무 그리워 열화 같이
늙음을 불태우네요 <교육의 장강이 맑아야 하는데> 장성중 교수저 를 35 주기 추모일을 맞추어 길영희 선생님 전기로
그동안 제7집 추모문집에 이어 출간하신다고 몇줄이라도 보충하라고 재촉하셔 본의 아니게 실명이 드러났습니다
영은 맥을 따라 흐르니 홍수에 흙탕물이 범람해도 깊은속 맑은 물 근원은 여전히 솟아 나는 것이 생수의 근원 그리스도예수
존재 자체시니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