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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깨우침
사람은 과연 죽으면 끝일까? 아니면 죽은 뒤 영혼이 영원히 불멸할까? 아니면 다른 방향이 있을까?
지금 나는 우리 모두가 가장 알고 싶어 하면서도 살다보면 타성에 젖어 당연하고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치는 삶과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이것이 살아가면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자 철학이고 종교이고 가장 어렵고 해석이 분분한 내용이란 걸 알았다. 철학이라면 어렵게 씌여져있고 누구나 따분해한다. 아마 철학이란 책치고 고리타분하거나 어렵지 않은 것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이 글도 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인생 미지수X에 대해서 종교나 철학 등을 초월하여 좀 더 알기 쉽고 직설적으로 풀어가도록 노력하겠다. 가능한 간결할수록 더 좋다고 생각한다.
<나(我) - 1>
어릴 때 문득, ‘죽는다는 것은 뭐야? 죽으면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야? 그러면 나는...?’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내가 죽다니.’ 그때부터 엄청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만저만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이미 그때 내게는 하늘이 무너졌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이 없었다. “죽으면 그만이지.”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그 문제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태산과 같은 걱정으로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으면 그만이라니, 저들은 어떻게 죽음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까? 아니 본인들이 죽어 없어진다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다고 저렇게 태연할까?’
‘이 세상이 끝날 때 나도 같이 끝나는 것 아니었어? 아니, 둘 다 끝이 나면 안되지. 죽으면 끝이라니? 뭔가 있을 것이야. 와! 없으면 어떡하나... 틀림없이 죽고난 뒤에는 뭔가 있을 것이다. 가만... 뭔가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내가 갓태어난 후 또는 엄마 뱃속 시절의 생각이 가능할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뭐가 있는데 다들 이리도 태평할 까? 이상하다.’라는 생각으로 항상 고민하고 마음 한 구석에 큰 멍에를 짊어지고 살았다.
‘그냥 그냥 살다보면 나도 저들처럼 죽음에 대하여 저렇게 태연해질 수 있겠지.’라고 자위하며 대충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고, 너무 많은 질문을 하여 핀잔을 듣거나 질문의 방향이 이상하다고 이상한 아이 취급도 받았다. 또 질문 도중에 차단당하기 일쑤였고 좌절도 느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지도 못하면서 귀찮게 군다고 구박을 주는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었다.
어릴 때 자주 같이 살았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8살쯤 이었다. 처음에는 죽음이란 게 실감이 나지않아 눈물이 안나왔다. 병풍 뒤의 할머니가 관 속에 누워있다는 것이 궁금해서 들어가려하자 친척 아저씨들이 말려 울었다. 슬퍼서 울지는 않았다는 감정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한참 뒤 어느 날 느닷없이 동네 아이들과 자주 놀던 빈터를 지나가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없고 공허함을 느끼자 갑자기 죽는다는 데에 대하여 그렇게 걱정하며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그 후로 항상 삶과 죽음에 대해 남모르는, 아니 유별나게 근심을 한 것 같았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죽음이 가져다주는 ‘유한함’때문이었을 것이다.
<무(無) - 1>
초등 5학년 때 기마전 시합을 하다가 협공을 받아 떨어져, 거의 완전히 저세상까지 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얼마나 아프고 추웠는지... 너무 아프고 추웠던 시간은 칠흑보다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더 깜깜한 암흑으로 바로 이어졌다. 다른 부분은 기억이 나는 데 그 암흑의 시간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만 30년이 지난 뒤에 이 기억이 일어났다. 당시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던 시절 어느 서점에서였다. 어떻게 그곳에 가게되었고, 서있기도 힘든 상태의 무아몽중에서 UFO관련 책을 보다가 책속에 글 대신에 느닷없이 그 기억들이 새로운 힘을 주며 나타났다. 너무나 생생했다. 두 번째 죽음의 문턱이었을까? 곧 이 기억이 두 번 다시 없어지지 않게 글로 옮겨놔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겼다.
40년전 초등 5학년 때에 기마전 시합중 협공을 받아서, 머리가 먼저 떨어졌다. 아마 정수리로 혼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후 뭔가 나타났는데 무엇인지를 느끼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여러 사람들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고, 자세히 보니 그 사람들 사이로 어떤 아이가 땅에 누워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지 의아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워있는 아이를 알듯 말듯한 것 같았다.(나중에 그 아이가 나였을 거라는 느낌이 있다.) 눈앞이 점점 희미해지고 멀어지며 깨질듯한 머리통증과 추위로 모든 감각과 기억 등이 일순간 끊겼다. 극도의 아픔은 일순간 암흑세계로 연결되었다. 죽음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너무나 밝고, 맑고, 화창하고, 기운찬 빛의 하늘과 들판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유채꽃같은 화사하고 거의 투명색에 가까운 꽃들의 들판이 조금은 급한 듯이 내리막으로 맞은편 하늘까지 이어져 지평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확한 표현으로 들판의 꽃들은 흰색보다도 더 밝았기에 하늘의 밝음과 경계선을 찾을 수 없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고 내가 그때까지, 아니 내 평생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쾌청함과 온화함을 느꼈다. 온 몸에 힘이 용솟음쳤다. 여전히 얼었던 팔다리 부분이 미처 다 녹지 않았던 터라 환하고 따뜻한 빛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저 지평선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선의 방향 때문인지 그 밝은 빛이 약간 약해진 듯한데 대한 걱정스러움도 있었고, 몸이 어느정도 데워져 추위를 못느낄 때쯤 느닷없이 웬 여인이 하얀 개량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무 놀랐던 가슴은 그녀의 상냥함과 친절함 어디서 많이 본 듯하기도 한 포근한 인상에 많이 진정되었다.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녀는 뭐라 편하게 말을 하는데 나는 아무리 들으려 애를 썼으나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그 여인은 나를 안심시키려 했던 것이 분명했고, 뭔가를 열심히 설명을 하며 어딘지 자기를 따라가자며 손짓과 함께 설득을 했다. 놀라움과 무서움은 없어졌고 안심은 되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에 대한 불안감으로 나는 계속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 여인은 마치 시간이 없다는 듯 다급해하며 더욱 열정적으로 나를 설득하였고, 그 여인이 나타났던 꽃밭 길로 앞서가면서 자꾸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무조건 믿고 따라오라는 표정이었다. 의아심과 두려움이었을까? 나는 너무 망설이고 있었다. 한편으로 따라가고 싶은 호기심이 분명있었으나 나의 몸이 꼼짝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그렇게 실랑이를 벌였을까? 그 여인이 한숨을 쉬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참 후 그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안타까워하며, 그 여인이 지금 무슨 언행을 하려는지 놓치지 않으려하다, 그 여인의 고개 돌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면을 보고있을때 전혀 없었던 우측편 꽃들 사이로 꽃길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러자 웬 다른 여인이 새로 나타난 꽃길 저만치에서 불쑥 서있었다. 말없이 불쑥 나타난 그 여인에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랐다. 그 쪽의 꽃길은 먼저 우리가 있던 쪽의 꽃들보다 꽃들의 키가 높은 듯이 보였기에 두 번째 여인은 그 자리에 불쑥 나타났는지 계속 있었는지 몰랐다. 새로운 꽃길은 가만히 보니 꽃길이라기보다 사람 키높이의 빽빽한 진초록의 풀숲이었다. 새로이 나타난 여인은 아까의 여인과 똑같은 옷차림이었으나 나이가 더 들어보였고, 얼굴 생김이 엄격했고 약간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찌보면 남자인 것 같기도 했다. 의아심과 무서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웬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두 번째 여인은 첫 번째 여인의 설명에 아니라는 듯이 손을 가로젓고 있었다.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그런데 자세히 볼수록 무섭고 엄격한 저런 얼굴은 내가 바라던 얼굴이 아닌 듯했고, 또 이런 좋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 생각되었다. 점차 주변의 화사하고 찬란하고 화창한 빛도 그저 그렇게 느껴졌다. 아마 주변에 익숙해졌던 탓도 있었겠지만. 왠지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놀란 상태로 줄곧 계속 앞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하는 호기심과 첫 번째 여인이 마지막으로 아쉬워하며 강하게 설득했던 부분이 왠지 모를 기회를 잃은 듯한 불안감과 한편으로 될대로 되겠지하는 심정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여인의 행동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단호하면서도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과 함께 첫 번째 여인에게 뭔가를 계속 부정하는 듯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나 내 옆의 여인은 여전히 나에게 같이 가자고하며 새로이 나타난 여인에게 포기를 모르는 듯 뭔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었다.
옆에있는 여인의 여전히 계속되는 권유가 안심과 희망을 주고있었다. 그렇게 몇차례 두 여인은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내 옆의 여인은 마지막 호소인 듯 뭔가를 큰 소리와 제스처로 두 번째 여인에게 설명을 했고, 역시 그녀는 이번에도 엄격하게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가로 저으며 뭔가 화가난 듯 길게 설명을 했다. 마침내 내 옆의 여인은 뭔가 그 쪽 여인에게 수긍을 한 뒤 나에게 설득조의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마치 지금은 아니고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나를 약간 떠밀 듯 강제적인 행동을 취했던 것 같다.
그 순간 또다시 앞서의 두통, 추위와 함께 암흑이 이어졌고, 모든 것이 깡그리 잊혀져 버렸다. 아무 생각이나 의식, 느낌 같은 게 없었다. 전혀 어떤 기억도 불가능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딘가 내가 엎어져 축 늘어져있음을 차츰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양 팔뚝에서 어깨까지 그리고 양 허벅지 부분은 얼어있었다. 빠르게 녹아든다고 느끼는 순간 또 기억이 없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러한 내가 누군지를 전혀 몰랐다. 여전히 엄청난 두통과 온 몸의 부자연스러움 그리고 한기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생각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으며 한참동안 몸을 가누지 못했다. 엎드려진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기 위하여 팔 하나를 움직이는 데 몇 분이 소요됐다. 양쪽 어깨를 비롯하여 큰 관절부분은 빠져있었다. 입에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나의 급우라는 것을 가까스로 느끼자 나는 내가 교실 내책상위에 쭉 뻗어 늘어져 있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내고 있었다. 주변 학우들은 체육시간 기마전에서 거꾸로 떨어진 뒤 1시간 남짓 지났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다른 과목의 수업 중이었다. 무슨 과목 몇째 시간이라 했었는데 나는 책을 꺼내거나 바로 앉기조차도 할 수 없었으며, 시간표를 보며 흘러간 시간계산 등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참 동안의 멍청함 뒤에 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된지도 몰랐다. 그 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 때 급우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운동장에서부터 축 늘어진 나를 들고오느라 엄청 무거웠다고 했다. 몇몇은 내가 죽은 것 같다고 했다. 죽은 시체가 더 무겁다고. 다들 내가 기절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선생님이 급우들에게 화를 내며 교실로 옮기게 했다고 했다. 순간 선생님이 무책임하고 야속하다고 느꼈으나, 곧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기마전 사고에 의한 단순한 기절 정도였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후로도 사실 나는 30년 동안 그 사건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나 나는 우연히 그 기절의 순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단 혹독한 추위의 암흑기간을 빼고. 42세에 해외근무 등의 여파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로 실직을 한 후 바로 어떤 연수원에서 연수를 받고 있던 중 평생 처음으로 축농증, 폐렴을 앓아 병원에 입원을 하는 등 최악의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이가 젊다하면서, 그냥 미련하게 밀고나가고 있었다. 그 연수가 거의 끝날 무렵의 어느날 나는 내눈도 다 뜰수조차 없고 앞을 명쾌하게 보지도 못할 정도의 몸을 이끌고 과외집합에 참석하던 도중이었다. 시간이 좀 남아있어 쉬는 공간을 찾아서 동료 연수생 한명과 집합장소 인근의 서점을 들렀다. 거기서 나는 무심결에 철학 분야의 서가에서 UFO 관련 책들을 보는 순간 나의 눈은 책에 있었지만 30년전의 기억을 하나 하나 꺼집어내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바로 내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낮잠도 자지않던 한참 때였고 더구나 그때는 오전이었다. 온통 투명한 공기뿐인 우리 눈앞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아니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인간들은 눈, 귀, 코, 입 등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간다. 반면에 인간들은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족쇄가 채워져있는 것을 모르는 채. 공기속에 질소를 비롯한 많은 원소들이 포함되어있다. 그렇다 염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공기(無)중에서 원소(有)들을 추출하여 물질이나 생물들까지 만들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지만.
어쨌던 바로 눈앞에 불과 몇 십분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흰색과 빨주노초파남보,흑색 등의 범주가 전부가 아니었다. 더욱이 현세에 어느정도 물들어 있던 자아의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본 다른 세상의 일부가 그 정도였다. 우리 주변, 곧 우주에는 한계가 없이 다양한 차원의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태껏 눈에 보이는 잣대로 우리 인간들이 우주의 헤게모니를 쥔 양 사고(思考)하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임을 느꼈다. 인간들은 주어진 오감도에 갇혀있었다. 제 눈에 안경인 언어나 이론이나 논리로써 우주 대자연을 설명한다는 자체가 잘못일 게다. 저 세상(내세)은 현세와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체(同體)라는 것도 느꼈다. 뭔가 무한함을 느꼈다. 부즉불리(不卽不離-한계속의 무한계, 무한계속의 한계)이리라.
<나(我) - 2>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좀 엉뚱한 데가 많았던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六甲을 잘 짚고 설명도 꽤 잘했었던 것 같다. “時天權이 들어있어 말년에 권세를 좀 잡겠는데요.” “야, 대단하다!” 식이었다. 또 그렇게 하다보니 모든 것을 육갑의 틀로 해석하려했고, 점점 운명론에 빠져들기도 했다. 아마 六甲속에 심오한 인생 미지수 X를 찾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빠졌을 것이다. 또 우리네 풍수이론에 따른 墓의 五惡이론 - 죽은 자의 영혼은 해골에 남기에, 조상의 혼이 편안히 묘에 거처할 수 있어야 자손들이 조상의 도움을 받는다는 설임. 특히 蟲, 水 , 石, 風, 木이 묘를 침범해 들어가는 것은 안된다고 하는 이 이론은 한 동안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었다. 묘에서 벌레가 생기고 물이 스며들고 돌이 솟고 통풍이 있고 나무뿌리가 생기는 곳에는 조상들의 혼이 편안할리 없고 후손들에게도 해를 끼친다고 했다. 또 유골이 매장되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원한이 깊게 죽은 귀신들은 구천에 떠돌며 관련자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죽은 자의 시신을 좋은 땅에 잘 매장을 해주지 않으면 그 후손이나 관련자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론이다. 나는 화장을 최상이라 여기고 있다.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도 정작 중요한 현실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엉뚱한데 신경을 섰다. 나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정작 물질이나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양보나 손해를 많이 보면서까지 별 가치를 두지 않았고, 영혼적인 부분이나 내세(來世) 등에 대해 무척 따지고 밝혔고 일찍이 종교에 관한 토론도 많이 벌렸다. 영혼과 영원에 대한 집착이 훨씬 컸었던 것 이다. 육신은 가볍게 여기면서 영혼에 대해서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50년 동안 아무 종교에 내 영혼을 무턱대고 맡기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특히 아이들을 낳고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 아니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지금도 쬐끔 현실적으로 변했을 뿐 틈만 나면 영혼쪽으로 신경을 쓴다. 여전히 인생의 미지수X를 찾으려 인생의 대부분을 축내왔고 축내고 있다. 종교를 가진 지금도 그것이 너무 궁금하다. 어느 종교나 철학도 인생의 미지수X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인생 미지수X 부분을 모두 神으로 대입시키고 있었다. “수십억명, 아니 수천억명이 살아오는 이 땅에서 인생 미지수X의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다 말인가. 그러면서 왜 사니?”라고까지 했다. 또 그것을 안다면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할 만큼 궁금해했다.
그래서 도사같이 보이는 사람, 괴팍한 사람, 고상한 사람, 엄숙해 보이는 성직자, 고상 괴상한 이야기 등에 특히 호기심을 넘어 경외심까지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면서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경험도 많이 해왔고, 또 현실을 가볍게 여겨서 지겨울 만큼 삶이 고달픈 때도 있었다. 그 고통과 시련과 병마까지 겹쳐 최소한의 의식마저 가물가물할 때 죽는 것이 이것보다 못하랴 했던 적도 있었다. 거기서 ‘아하, 죽는 것보다 사는게 더 고달플 때 기꺼이 죽을 수 있는구나! 즉, 이렇게 고뇌의 경지가 최고조에 달하던지, 아주 도의 경지가 높아지던지, 오욕칠정을 완전히 버린다던지, 인생에 여한이 없던지 할 때, 그때가 바로 살고있어도 마치 살고있지 않은 양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없어지는 궁극의 경지이구나!’라는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
<나(我) - 3>
그러나 한편으로는 50을 지나고 현실의 위대함(?)을 많이 느끼고 난 뒤, 인생을 좀더 현실적이고 방정하게 살았더라면 오히려 좀 더 빨리 좋은 답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그리 뭔가에 쫓기듯 살며 큰 것 같으면서도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집착을 했을까 잦은 후회도 했다. 정말 교만도 했고 죄도 많이 지으며 갈팡질팡 빙빙 둘러왔다. 차츰 현실에 젖어 들게되었고 어느정도 인생 미지수X의 궁금증을 ‘그러려니’로 여기기도 했다. 현실의 위대함도 영혼과 내세의 위대함 정도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인생 미지수X를 찾으려고 했지만 딱 부러지게 설명해놓은 것은 찾지 못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타인의 말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따르려 했고, 오로지 자신의 양심과 자신의 영감을 지키려했다. 수 천년 동안 각종 집단의 강권과 소속감과 지배의 일방적인 주입식 철학과 종교 등에 휘둘리거나 부하뇌동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 사람의 영험과 직관력에서 나오는 양심이 더욱 정확하고 진실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 저 세상 문앞까지 두 번이나 갔다온 경험과 예지와 함께 삶과 죽음의 함수에 대해 정직하게 쓴 책들을 찾기에 골몰했었다. 명리학 책, 환생에 관한 책, 임사체험에 관한 책, 티벳 사자의 서, 인도 철학, 주역 등등. 50세에는 그렇게 실체적인 결과도 없고 영혼장사 집단이라고 부정하던 기성 종교에 입문까지 했다. 역으로 ‘현실을 배우기 위하여’라는 미명아래.
음양에 기반을 두고 5행으로 나뉘어진 명리학은 상당히 재미있었고, 그것에 인생을 대입시켜보면 상당부분이 들어맞기도 했다. 물만 먹어도 살이찌는 사람,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않는 사람 등, 운명론을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 여겼다. 음과 양으로 크게 대별되고 5가지의 성질로 다시 나누어지며, 다시 12支와의 연계로 세분화되는 다양한 틀을 만들고 있다. 재미있고 상당부분 감탄할 만큼 실제와 근접하며 빠지게 만든다. 특히 전생의 업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더욱 재미있다. 물론 결과론 적인 것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러나 미래 예방차원도 있다. 더 큰 아쉬움은 해석의 여지가 넓고, 좋은 사주라는 것은 五慾(食,色,財,權,名譽)을 채우는 철저한 현실세계의 길흉화복을 따지고 있었다. 六甲을 포함하여 그런 현실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은 결국 별 의미를 못 느끼게했다.
임사체험도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애트워터의 “죽음 또다른 세계로의 여행(P.M.H.Atwater “BEYOND THE LIGHT”)”에서는 나와 비슷한 임사체험자들의 임사체험들이 많았다. 글의 내용은 상당히 정직하며 방대한 논문이었다. 임사체험자 거의 모두가 죽는 순간 어떤 터널을 지나 터널 끝의 황홀한 빛을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이 책은 어느 정도 기독교 쪽으로 기울고 있고 현세와 내세의 중간 기간(바르도 기간)까지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다음 來世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 나타나는 최초의 투명한 이 빛을 또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태초의 빛’이라 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가야한다고 했다. 그 빛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진리의 몸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이때는 거의 죽은 상태인 나(我)의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로 현실적인 의식의 힘으로는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我)의 의식이 있는 것이 오히려 욕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라 했고, 오로지 카르마(현실의 업보)에 의해 그 빛을 따라갈 수 있거나 없거나 한다고 했다. 아니면 ‘바르도 퇴돌(죽어서 듣는 것만으로 자유에 이름)’해야 한다고 했다 - 이 부분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가미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현세에 살면서 나(모래알)를 버리는 습관, 고뇌와 철학이 베여있는 자는 가능하다고 했다. 모든 것을 환상이라 여기며. ‘바르도’란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어)로 이생과 來世사이에 있는 기간을 말한다. 보통 49일간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49祭도 이 기간을 말한다. 특히 인도의 철학 종교가 영혼은 “이생 - 바르도 - 내세”로 이어진다고 한다. “티벳 사자의 서”는 고대 인도 철학에서 근대 불교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이 책은 동양의 ‘장례의 의식과 바르도세계’에 대한 원전처럼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환생과 니르반야의 來世에대하여도 자세하고 중요한 뼈대를 설명하고있다. 단지 읽는 사람들의 경지(?)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이 책의 최고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라마 카지 다와삼둡 선생, 에반스 웬츠 선생과 류시화 선생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브라이언 와이즈 박사의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와 “전생요법”(Brian L. Weiss, “Many Lives, Many Masters”, “Through Time Into Healing”)도 미국 최고의 정신과의사인 만큼 前生에대해 아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상당히 긍정적인 부분이 많고 매력적인 책이다. 주로 바르도 기간과 전생을 표현하고 있는데, 바르도 기간을 관장하는 귀신(鬼神)들의 여러 층(level)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동양철학의 그것과 비슷하다. 또 종교학을 공부한 저자는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이전의 고대 기독교는 ‘환생’을 인정했다고 한다.
또 이 책속에서 언급되는 맨토귀신들의 직접적인 목소리에 의한 치유방법은 우리의 무속신앙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최면에 의한 전생퇴행(前生退行)이기에 어느 정도 피최면자의 상상력이나 의식이 포함되었나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한번쯤 경험을 해보고 싶은 분야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경험해보고 싶은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인도의 물만 먹고 38년간을 살아가는 요가승들의 경지이다. 이 요가승들은 기를 조절하는 특유의 자세로 바르도 기간까지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고 한다.
국문학자 서정범교수께서 40여 년간 무속신앙을 연구하며 쓴 ‘무녀별곡 등’은 무속신앙에 애착을 가지고 정직하게 쓰려고 한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너무 과학적으로 검증하며 쓸려고 했는지, 아니면 기성 종교와의 차별화를 한 건지 아쉬움이 있었다. 특히 저자가 미리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폄하하고 글을 쓰고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무속신앙인들을 기성종교의 성직자와 달리 醫師로 착각을 하고 있었던지. 우리는 기성 종교에 베푸는 존경만큼 무속신앙에도 똑같은 존경심을 가진다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종교라는 것도 그렇다고 믿을 때 효과가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의학에서도 많은 부분을 플라시보(placebo)효과로 변명하곤 한다. 오히려 무속인들이 영매로써 몸신(해당 무속인의 主神)의 空手(몸신이 주는 영감 또는 직접적인 가르침)를 받아 치유하고 예언해주는 부분은 기성종교보다 더 실체적이고 실재적이지 않은가.
또 무속인들이 吉한 동물을 먹지말라는 부분은 단순한 계몽적 차원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개고기는 4대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나의 경우 개고기를 먹고 복막염 수술을 두 번 했으며, 또 한번은 남녀 동료들과 운동 중 바지에 설사 똥을 쌌으며 그 뒤 30일간 설사를 했다. 자라와 거북은 용왕의 자녀이고 부귀영화의 화신이라고 한다. 나는 자라와 거북을 먹은 그날 밤 꿈에 탱화에서나 볼 수 있는 총천연색 벽으로 둘러쌓인 곳 안에서 놀라 잠을 깼다. 자라와 거북을 먹고난 뒤 코뼈가 부러졌고, 부부 성관계가 많아 졌으며 나중에는 골수까지 빠져 나가는 듯했다. 건강을 잃고 직장을 잃고 모든 재산마저 날렸다. 또 뱀과 구렁이를 먹고는 나뿐아니라 자식들의 시력마저 가고있다. 수년 뒤 자라와 뱀장어를 방생하러 다닌다고 나는 허겁지겁한 적이 있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다른 종교에 비해서 상업적으로도 정말 바닥이었다. 특히 처방에 따른 그 해결책을 너무 정확하고 정직하게 나타내려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 부분을 비교하면 다른 기성종교들은 아예 답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미지수X 부분은 하느님, 부처님, 상제이니까. 또 영혼 장사도 엉망이었다. 보이지 않는 神을 신성시하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조직적인 활동이 있어야했다. 교세 확장을 위한 선전, 광고, 유착 등도 부족했다. 아니 거의 없었다. 또 너무나 눈물 날 정도로 양심적이어서 너무 적나라하게 모든 것을 open하려 했다. 그것도 주로 혼자서... 실력을 너무 과신 했을까?
다른 기성 종교들처럼 제자들이나 도우미들로 앞세우고,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나 비유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갔어야했다. 우리 속담에도 “중이 제머리 못 깍는다.”고 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부분은 무속신앙은 기성 종교들 처럼 편을 가르고 서로 범주를 쌓아 집단으로 가두려하지 않는 자유스러움에 있다. 마치 무속신앙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같이 자생적인 집단이란 작고 약한 것일수록 순수하지 않을까.
<나(我) - 4>
가족들과 종교 단일화를 위해서 또 현실을 배우기 위해 종교에 입문할 때 역시 기대감과 경외감은 있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믿고 있는데 내가 너무 교만하다고 여긴 보편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이미 개똥철학이 어느정도 머릿속에 박혀있었기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우주 전체를 하느님으로, 사람들 중 우주의 섭리에 가장 표본이 되는 자를 예수로, 모든 여자 특히 어머니의 대표를 마리아로 상징했다고 여겼다. 제사를 엄숙히 섬기던 집안의 영향으로 진혼(鎭魂)에 대해서는 어떠한 종류든 신성함과 경외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사에 대해서도 거부감은 없었으나 좀 가볍다고 느꼈다. 그리고 ‘하느님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된 것에 신빙성과 신비성이 떨어진다고 느꼈고, 사람의 얼굴 형태를 취하더라도 우주를 포함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했다.’고 아쉬워했다.
몇 년 다니다 보니 점점 ‘최고의 기성종교도 실체적인 결과나 특이한 게 별로 없다.’고 식상해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인내심과 사회성이 없나?’라고 반문도 해봤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으로 빠지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인내나 사회성하고는 다른 문제이다. 다시 틀에 갇히는 답답하고 어색함이 생겨났었다. 더욱이 비대한 종교집단이 근원적인 信仰보다 현실과 타협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제들은 근본적인 신앙과 교리를 사랑이나 헌신보다 주입과 지배로 실천하고, 현실과 접목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오로지 자신들의 종교집단의 이익만을 위하여 너무 이기적이고 심지어 잔인하다고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집단에 反하여 형태없는 집단속으로 서서히 갇히고 있었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영리목적의 기업들이 종교단체들 보다 더 도덕적이고 겸허하다고 느낄때가 많았다. 진정 말대로 영혼에 책임을 지는것은 한번도 없어면서 신자들을 천사병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요즘 세상의 서민들이 오히려 성직자들 보다 더 성직자답게 고뇌에 차있다고 느꼈다. 사실 종교의 믿음이란 환영과 환상이 아닌가. 인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환상이라고 한다. 오히려 거기에 비하면 수 천년동안 기성종교들이 문학서적, 정치, 사회적 매스컴 등을 이용하여 미신으로 폄훼해왔던 무속신앙이 훨씬 더 양심적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무속신앙과 다른 신흥 종교들도 목적과 교리에 있어서 기성 종교와 별반 다른 것은 없다. 큰 문제점은 기성 종교단체는 이미 충분히 부유하고도 돈과 권력 등을 너무 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빈익빈 부익부화 되어가고있다. “하느님, 부처님, 상제님 등 神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해결받는데, 어떻게 유독 돈만은 신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와야하나?”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특히 십일조 등 헌금을 잘 납부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부유한 자들보다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한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들이다. 물론 현실적이지 못하기에 헌납을 잘 하겠지만. 심지어 가족들의 의식주는 신경도 안쓰고 많은 부분을 헌납하기도 한다.
이 부분이 가슴 아프다. 어떤 목적을 가진 현실적인 자들은 광고효과를 노려 큰 금액을 헌납하여 사제들과 종교단체에 영향력을 가진다. 심지어 요즘은 각 종교단체들이 현재의 크기에 만족을 못하고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별의별 행사를 하고있다. 종교 집단의 위력 또한 대단하다. 이미 문학, 정치, 시민단체 등을 통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확장 등을 위하여 사제들의 성향에따라 적재적소에 배치시켜 각종 이벤트를 창안하고있다. 집단이란 ‘이기적’이란 뜻으로 ‘장사속’이란 뜻과 서로 연결된다. 또 대상 고객들(?)의 경쟁심을 유발시켜야 장사가 잘 된다. 이미 기성 종교집단은 장사가 잘 되고 있다.
이제 기성 종교집단들이 너무 비대하여 본래의 목적과 다른 방향들로 나아가고 있음에 징그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더욱 문제는 집단에 스스로 갇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와이즈만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시작부터 祭政이 함께 엮여있던 세계최대의 종교집단은 순수성의 문제점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경제 등의 고통을 받으면서 몹쓸 천사병으로 종교에 헌신하는 불쌍한 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오히려 그들이 더 성직자답다. 한편으로 기성 종교에 종사하는 성직자들도 내세에 대해서만은 불안해 할 것이다. 불안을 버리는 최고의 방법은 나(집단)를 버리는 것이다. 즉, 양적으로 더 이상 고래등 같은 성전을 쌓기에 열을 올릴게 아니라 질적으로 正道를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희생하고 open하는 자세로 말이다. 秘書나 비밀 등으로 감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미래의 언어는 말과 글이 아닌 독심술로 형통하였으면 좋겠다.
<무 - 2>
우주와 비교할 때 사람은 너무나 미미하다. 그래서 창해일속(滄海之一粟:바닷속의 모래알:Dust in the wind)이라 한다. 그러나 그 모래알 속에 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몸에 세포의 수가 10(13승)개 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그 세포마다 10(13승)개 정도의 원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원자 하나에 비교할 때 인간은 무한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은하계의 별(위성, 항성 등)의 수가 10(13승)개라 한다.
그리고 우주에는 우리가 속한 은하계정도의 수가 10(13승)개 정도 있다고 한다. 우주 역시 무한이다. 그래서 이 닮은꼴의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한다. 눈에 보여지는 작은 몸뚱아리의 인간으로써가 아니라... 그래서 인간은 틀에 갇히지 않고 無限으로 나아가야한다. 종교의 궁극도. 바로 그게 인생 미지수X의 답이다. 또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하나하나로 인하여 세상, 우주에 미치는 영향만큼 나의 몸속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여겼다. 좀 심한 비약일지 모르지만 암같은 불치의 병도 그런 식으로.
주역(周易)은 ‘변화와 생성의 우주 섭리’를 간단한 기호(象)로써 잘 나타내고 있다. 無(道)에서 하나(一)로, 하나에서 음양으로, 음양에서 64괘로 퍼져나간다. 無에 있어서 완전한 無가 있고 혼동의 無가 있다고 한다. 하나에도 움직이지 않는 하나(太極)가 있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하나(乾元)가 있다고 한다. 중국 원고(遠古)시대 복희씨가 8괘를, 그리고 3500여년 후 주나라 문왕이 8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고, 또 약500년 후에 공자가 점서(占筮)로써가 아니라 순수철학적 관점으로 64괘상(卦象)과 괘효사(하나의 괘에 있는 6개의 효를 각각 하나씩 풀이함)의 문자를 해설하였다. 이것은 팽창(Inflation)하는 우주의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하겠다. 지구가 속한 은하계가 빅뱅이후 150억년여가 지났지만 계속 팽창하고 있는 것과 같다.
복희왕 시대는 약 7000년 전으로 씨족사회 정도였으니 단순하였을 것이고, 문왕과 공자의 시대는 점점 팽창된 복잡한 시대였다. 그래서 인구가 팽창하는 만큼 괘효도 8괘에서 384효로 팽창 세분화되었다. 이렇게 원래 우주 본연의 無에서 하나로 384효사로 팽창해 나가는 것을 형이하학, 즉 현실화라 할 수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과 같이 말년에 주역에 빠진 공자께서 형이하학을 주로 설명을 했다. 이와 반대로 세분화된 현실에서 하나(太極)를 거쳐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회귀(올라감)하는 것을 형이상학, 즉 道라고 한다. 이것이 블랙홀을 통하여 無(太極)가 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老子께서 무위자연(형이상학)을 주로 노래했다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내세지향(上學)과 현실지향(下學)으로 원도주류(圓道周流)를 하고있다. 거기에는 큰 원들이 있고, 작은 원들도 무수히 다양하게 얽혀있다고 한다. 너무 간단한 기호로써 해석에 다변성과 어려움이 있으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고회민 박사와 정병석 교수의 깊이있는 해설과 번역에 감사를 드린다.
현실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개인이나 집단들보다도 오히려 소외되고 있는 비현실적인 자들이 道을 갖춘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물질과 현실을 우습게 과감히 버릴 줄 아는 것을 道라고 하기에. 즉 道心이 있기에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도의 철학자들을 그런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인도에는 이름 모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인도의 가르침에는 주역 못지않은 무한함과 혜안을 가져다준다. 기호가 아니라 시(詩)적으로.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또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하지않는다. 인도 가르침에서는 아낌없이 주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있다. 그래서 인도를 슬퍼도록 좋아한 적도 있다. 또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어 있는 듯하지만 같이 깊게 녹아있다. 그 역사가 깊다보니 많은 국민들이 철학자의 면모를 지녔다. 최근에는 현실적인 지식인들을 비롯한 국민들의 노력으로 중국과 함께 세계의 강국이 되었음에 기쁨과 부러움을 느낀다.
<무(無) - 3>
우리의 영혼은 과연 영혼불멸 할까?
힌두교는 저급한 형태에서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840만 번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금 나(我)의 영혼은 누구의 영혼일까?
우리의 육체는 물을 비롯한 여러 원소들로 조합되어져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구성요소를 상상할 수 없으니 不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수 있다. 그러나 영혼도 분리되고 변하고 다시 조합된다. 그것은 간단한 임사체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했던 바이다. 정수리를 통하여 영혼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 이미 현세의 자기자신과 지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완전히 저 세상으로 넘어가기도 훨씬 전 바르도 기간에 들어서는 순간 정도인데... 그래서 최면 중이던, 임사체험 중이던, 현재의 나(我)와 관련된 약간의 의식이라도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나(我)의 영혼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르도 기간에 돌입해서도 나(我)와 연관된 기억, 의식이 있는 부분은 현세요, 나(我)와 연관되지 않거나 암흑 등 기억, 의식이 없는 부분은 현세가 아니다. 결국 영혼도 이생의 범주를 벗어나거나 죽을 때 육체와 똑 같이 분리되고 변한다.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현세에서 살아왔던 언행, 습관, 믿음(카르마(業))에 따라서.
결국 인간은 한평생을 살면서 나(我)속에 갇히거나 집단 등 어느 테두리속에 갇혀서 살아간다. 육체든 영혼이든 각각의 어떠한 요소들이 잠시 조합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고집을 불어넣으면 안된다. 더욱 실체없는 나(我)속에 갇혀서 이기심 시기심 질투심 등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집단은 더욱 그 파장이 크다. 집착인 것이다. 善意의 어느정도의 소속감은 좋은데, 그 어느정도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영혼 불멸 사상도 나(我)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영혼장사꾼들에 젖어있었다.
이생의 나(我)라는 테두리속의 영혼이 來世에서도 영원히 계속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영혼과 모든 것은 분해된 후, 재 생성되기에. 그것을 재조합이라 한다. 문제는 재조합되는 과정이다. 나(我), 집단이라는 테두리(범주, 한계)를 벗어나 무한이 되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순수한 한 바퀴의 원도주류(圓道周流)가 되고 남들(우주)과 동화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다양한 영혼의 재조합 중 최고는 대자연, 즉 우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방법은 이생을 살아갈 때 혼을 바쳐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나(我)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나를 괴롭힌 자나 원수까지도, 또 동, 식물, 광물 등 모든 것을 나와 다른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한몸으로 생각하며 혼을 바쳐 사랑하면, 죽어서도 자신의 영혼은 그 모든 것들에 박혀서 우주 그 자체에 동화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혼을 바쳐서 들풀을 보고 싱그러움을 감사하며 사랑하고, 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하고, 심지어 똥을 보면서도 천연 자원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라.
그러면 자신이 죽은 뒤 자신의 육체는 물론 영혼도 우주 곳곳에 자신이 혼을 바쳐 사랑하던 것들이 되어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태초의 원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궁극의 어려운 수행이다. 우주의 원상태(無)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이요, 하느님의 품이요, 상제님의 마음속인 것이다.
각 종교와 철학의 궁극은 바로 이것이다. 현세에 일시적으로 조합된 나(我)의 영혼과 육체에 빠져 고집을 계속 불리면 안된다. 이렇게 모든 종교도 궁극적으로 무한의 대자연, 우주가 되고자 노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숲은 보지 못하고 가지만을 보듯이, 중간에서 전달 역할을 하는 종교집단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것 같다.
우선 먹는 사탕이 달다고 ‘얄팍한 행복’에 무게를 더 놓는 집단의 아집은 안된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놓아야한다. 서로 자신들의 집단에 갇힐수록 서로가 비정상이고 이단으로 보일 뿐이지 않는가. 무한의 우주로 보면 갇힘과 경계가 어디있고 틀린게 어디있나. 모두가 맞고 모두가 같다. 모두가 무, 무한이 될 수 있고, 무<한>이 정답인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깨우침을 얻는데 42년이 소요되었다. 논리보다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대부분 오해를 하기쉽다. “혼을 바쳐 모든 것을 사랑만 하면 곧 우주가 된다. 나도 그럴 수 있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게 인생 미지수 X의 정답’이라고. 그러나 이때 가장 조심해야하는 것은 “나(我)는 없다(無).”는 것을 여기고 그렇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A라는 사람이 A자신의 영생을 위해 혼을 바쳐 사랑해서 이생의 A는 죽어도, 또다시 수많은 A의 혼으로 우주 곳곳에 박혀 영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것은 마치 A가 A를 버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A의 영혼 욕심이 남아있다. A라는 때가 묻은 영혼은 그 때(카르마)의 무게 때문에 절대로 우주 곳곳에 박힐 수가 없다. A라는 사람이 혼을 불태워(엄청난 노력으로) 모든 것을 사랑할 때, 즉 A자신은 無(없는 것)상태 임을 인식하며 모든 것을 사랑하고 수행할 때만이 우주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일말의 욕심마저 모두 버려야 우주에서 영생할 수 있다. 우주는 테두리(집단)가 없는 無限이므로... 그때가 진정 천당이요 극락인 것이다. 여기까지 또 10년이 걸렸다. 지식과 논리로써가 아니라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버리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
<現 實 - 결 론>
결국 세상에 이미 모든 답이 다나와 있었다.
사후세계는,
- 혼을 바치며 모든 것을 사랑하면 죽어서도 자신의 영혼이 다차원의 우주 곳곳에 스며들어 우주 그 자체가 되며 영생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우주 자체가 된다.
- 우주(대자연)를 하느님, 부처님, 상제님 등으로 상징화하여 잘 믿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
- 바르도를 통하여 사후세계에 여러 등급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으면 그렇게 환생된다.
- 업보 이론과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귀신이 있고 업보도 있다.
- 현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현 세상이 전부이다.
이와같이 우리의 사후세계는 여러층이 있다. 또 이 여러층들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위 해당층을 믿으며 행하면 결국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윗 층으로 올라갈수록 나(我)에대한 집착이 점차 없어져야하고 용서와 포용력 사랑 능력이 커야함은 당연하다. 진정한 탈아(脫我)요 無限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 알고싶어 했던 인생 미지수X에 대한 정답(철학)이다. 왠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급하고 짧지만 직설적인 이 개똥철학이 가슴에 와닿는 순간,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모든 종교와 철학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 단순한 깨우침 속에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여태까지 내세 지향을 위주로 이야기했다면, 이제 현실을 잘 사는데 대해 이야기해보자. 마치 모든 것을 내세지향과 현실지향으로 2구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세지향의 무<한>을 강조하다보니 마치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자칫 천사병에 들거나 허송 생활을 하기에 딱 알맞다. 그렇다고 돈의 노예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현세의 돈(물질)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독하고 약삭빠른 것이 최고일 게다. 그런 1차원적인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세와 내세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현실 50%, 내세 50% 서로 연관되어 원도주류하고 있다. 현실세상 없는 영혼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실세상을 잘 사느냐에 따라 영혼세계의 결과도 틀려진다. 현실 생활 속에 대자연, 우주와 철학, 종교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작은 모래알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했으니.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나의 경우는 봉사와 헌신으로부터 실마리가 보이는 것같다. 인생의 모두 부분은 시지프스의 뾰족산에 좋은 비교가 되는 것 같다. 사랑, 영혼, 건강, 행복, 돈 등의 지수는 뾰쪽산 꼭대기 쪽으로 비례하는데, 사람들은 한두 번쯤 정상에 서볼 수는 있지만 항상 정상에 머물며 살기는 힘들다. 결국 인생은 끊임없이 꼭대기 근접하도록 바위를 올리며 끈기있게 살아가야 한다. 평생을 하루같이. 결국 이러한 궁극의 신앙심이 나(我)를 우주 동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종교집단에 가입되고 안되고가 아니라.
현세에서는 개인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집단’이나 ‘사회체계’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 세계는 사상 최악의 경제대란과 혼란을 맞고 있다. 역사적으로 숱하게 보아왔듯이 ‘집단’이나 ‘사회(체계)’가 잘 하느냐에 따라서 수천수만의 개인들이 좌우될 수도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한국이라는 사회를 보자. 한국이란 집단으로 벽을 쌓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체제상 부득이해서다. 당파심이 많다고 한다. 특히 과거 조선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수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고 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자. 집단으로 찢어졌고 그 속에서도 니편 내편을 가른다. 지도층들은 더욱 道德心이 있어야한다. “소수의 지도자들이 편하면 다수의 시민들이 괴롭고, 소수의 지도자들이 괴로우면 다수의 시민들이 편하다.”하지 않는가. 그렇게 道德이 충만되어야할 자들이 갈래갈래 찢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도 별로 걱정이 없는 듯하다. 기업가들이나 서민들은 자신들 주변의 책임을 지고 자살까지 한다.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는 자들은 시민들인 것같다. 또 왜 굳이 政黨을 가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현재 우리의 당파병의 근원은 ‘지역감정’이다. 상당히 심각하다.
작금의 모든 문제는 지역감정에서 유발된다고 하겠다. 공공연히 “김일성, 김정일이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감정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고들 한다. 그러나 시민들이 걱정을 하지, 정치 관련 지도층들은 꿈쩍도 안한다. 동인, 서인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 그 이상으로 갈라지고 있어도. 원인은 정치 지도자들이다. ‘표’를 위하여 고객들(?)의 경쟁심을 불러일으켜야 흥행이 잘되기 때문이다. 또 그럴수록 자기네들은 야음을 틈타 더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적 선거는 왜 그리도 많은지. 선거 때마다 마음이 우울하고 조마조마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 대다수가 정신질환에 걸려있다.
과거만 해도 각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지역감정을 몰랐는데, 요즘 빠른 아이들은 중학생 그 이하도 지역병 정신질환에 걸려있다. 상당히 심각하다. 그런데도 정치인, 교수, 종교인, 언론방송인, 선생, 연예인 등 지도층들은 더욱 부채질만하고 있는 꼴이다. “니 탓이다!”를 외치며. 이 나라가 소수의 지도층들만 즐기고 가는 일회용이 아니다. 그런데도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본 뒤에야 알아차리겠는가?
물론 정당을 가르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장단점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강조해온 바와 같이 우리사회에 이 문제점보다 더 크고 우선적인 것은 없다. 특히 내홍의 결과로 나라와 수많은 국민을 잃는 불상사를 더 당하기 전에. 스포츠 등에서도 연고지 제도를 없애야 한다. 한계가 없는 것이 포용력이 가장 크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너무 필요하다. 여하튼 법 제정을 하던지 해서 모두를 위하여 과감히 재정비되기를 바란다.
약속을 올바르게 잘 만들어야 하고, 그 약속을 잘 지켜야하고, 책임도 반드시 져야하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신뢰가 생기지 않겠는가. 우주에서 최고의 에너지는 석유나 핵도 아니고 태양력도 아니고 정신력이다. 그 정신력을 잘 결집시켜야 한다. 인간과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과 분산과 변형을 하는 무한의 에너지의 집합체이다. (끝)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 꾸벅
예전의 제모습이 생각납니다.. 잘 읽고 갑니다.
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사체험을한 친구의 글입니다. 간결못해서 미안합니다. 끝까지 읽어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죽으면 육체는 썩어 없어 지지만 영혼은 살아있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이생은 잠간이지만 다음생애는 몇쳔년 아니 영원입니다. 죄짓지 말고 살아야겟다는 생각입니다.
잘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