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화재 Vol. 392 (2019 02-03월호)
한국 '인간문화재' 제도의 산파, 예용해
문화부 기자의 전설,예용해
신문 지면에서 1면은 정치부가 차지한다.
독자의 관심에 따라 지면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이어 경제면과 사회면이 들어간다. 문화면은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배치한다. 문화면 기사는 특종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언제나 중요성과 긴급성이 떨어지는 기사가문화면 기사였다. 그런데 한국일보 문화면이 이런 생각을 바꿨다.예용해 (1929
1995) 기자때문이다.
1975년 여름 내가 한국일보 기자로 일을 시작할 때
‘전설’ 이야기를 들었다. 고참 기자에게도 예용해 논설위원은 전설이었다. 새롭고 발상이 다른 기사를 써서 편집국의 ‘경이’였다고 했다. 문화면에 전면 편집한 ‘인간문화재’ 기사가 전설의 시작이었다.예용해는 I960년 7월부터 1962년 11월까지 50회에 걸쳐 ‘인간문화재’를 연재했다. 전국 각지에서 전통문화의 장인을 찾아 소개한글이었다. 참고자료도 함께 실었다. 기사가 나온 시기를 주목해야한다. 6.25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세계 최빈국 상태에서 생존에 급급하던 때였다.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짚어낸 이 연재기사는 독자들에게 매우인기였다. 가곡,판소리,가야금,거문과 대금,단소의 예인이 나왔고,줄타기,땅재주,꼭두각시 명인이 등장했으며,화각장,입사장,각자장이 소개됐다. 양주별산대,오광대,봉산탈춤,북청사자무가보여졌고^
조선왕조궁중음식,매듭장,나전장이 부각됐다.장인들이 대단했다. 임방울,신쾌동,이만봉,음일천,김봉롱,김천흥,한희순이 기사로 알려졌고,전승자 속에서 살아있는 전용선,박원식,하삼룡,유복심,정연수가 있다. 이 연재에 도움을 준 이상백,김원룡,김재원,마해송,석주선,성경린,이두현,임동권,장사훈,전형필,진홍섭,천관우,최순우,황혜성 등 42명은 당대 최고전문가들이다.
‘인간문화재’란 말은 예용해가 만들었다. 한국일보 기획기사의 제목이 ‘인간문화재’였다. 문화재는 건물 조각 책 그림과 각종 공예품 등을 말하는데 ‘인간문화재’는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에게 가치를 둔 용어이다. 문화를 만들어낸 장인을 높여 부르는 용어가
‘인간문화재’였다.
당시 예용해는 31살의 젊은 기자였다.
그는 사실상 편집국장이던한국일보 사주 장기 영과 상의해서 연재물 제목을 정했는데 그것이 ‘인간문화재’였다. 그 각박하던 시기에 장기 연재가 가능했던것은 장기영의 안목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백상 장기영과 예용해는 서로 각별히 아꼈다.
국립민속박물관 설립 추진을 주도한,예용해
‘인간문화재’는 1963년 어문각에서 호화 장정본으로 묶어 출판했다. 1년 뒤 인
1964년 2월 초 다시
‘속 인간문화재’를 연재했다. ‘무형문화재’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언론에서 연이어 나온 파격적인 기사였다.
이 시리즈는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가 ‘무형문화재’나 ‘인간문화재’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 둘째는 제도적으로보존과 보호가 긴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정부에서도 ‘인간문화재’ 보호와 전수를 위한 제도를 서둘렀다.
문화재관리국은 국립민속박물관 신설을 계획했다. 먼저 1964년하갑청 국장은 경복궁 수정전에 민속실을 설치했다. 그리고 1972년 6월 민속박물관설치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민속 자료를 수집했다. 1973년 6월에는 경복궁 내 현대미술관을 인수해서 1975년 4월 한국민속박물관을 개관했다.
1992년 10월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 예하에서 독립시켰다. 1993년 2월 국립민속박물관을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이전시켰다.
정부 기구의 설치와 운영은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용해는 국립민속박물관 창설의 산파였다.1974년 용인 한국민속촌의 개관과 전시물 구성에도 예용해의 제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뒷이야기지만,주요 정책을 결정했던 장관들이 예용해 기사의 독자이면서 동료였다. 김성진,이원홍,이수정 장관이 ‘인간문화재’ 연재시기에 한국일보 기자로 일했다. 예용해 기사의 충격을 편집국에서먼저 받은동료들이었다. 이수정은 국립민속박물관이 경복궁 전국립중앙박물관 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결정한 장관이 었다.
예용해는 문화부장으로 기자에게 조련이 필요한 사실을 잘 알았다. 무형문화 전문가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전공자를 학예사로 뽑아서 이론 공부와 유물 관리를 숙련시키는 전문기관이었다. 전국에서 인멸되는 유물을 민속박물관이수집 보전하고,각 분야 장인의 기예를 전승한다고 믿었다.
발로 뛰어서 나온 예용해의 영향력
예용해의 ‘인간문화재’는 사라지는 전통문화에 대한 충격적인 보고서였다.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문화재관리국에서 1961년부터 1968년까지 무형문화재 실무를 맡았던 고상열의 회고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했을 땐 전쟁 뒤끝이라 자료가 없었어요. 민속학자들을 찾아갔지만 연구 성과도 많지 않아 그리 도움되지 않았지요. 처음에 의존했던 자료가 기자의 인간문화재 기획연재물입니다. 기사 스크랩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공부하고,모르면 찾아가 자문을 받았지요.
무형문화재 관련 예산은 너무 적었다. 예용해는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을 찾아가도록 주선했다. 고상열은 “평생 하천민으로 멸시받던 장인들을 대우해야 전통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전승할 수 있다”고 장관앞에서 강조했다.
장기영은 직접 담당부서에 전화해서예산을 확보해줬고,무형문화재 전승제도가 시작됐다.
예용해는 문화재 전반에 대한 통찰력과 언론인의 영향력으로 문화재 정책에 공헌했다. 낙안읍성의 사적 지정이 하나의 실례가 된다. 원형을 잘 보존한 낙안읍성은 대목장과 와장이 만든 실물로채워진 삶의 공간이었와 줄타기와 꼭두각시놀음이 벌어진 공연무대였다. 문화재위원 예용해가 적극 사적 지정을 주장한 것은 이런 가치 때문이었다.
예용해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해외 유출 문화재 첫 조사에 참여했다.
1986년 조사단장으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김광언 인하대 교수와 함께 미국 메트로폴리탄과 뉴와크 등10개 박물관을 조사했다.
이 사업으로 유출 문화재의 상황을 비로소 파악했고,한국 문화재전문큐레이터가 없는 박물관에서 사장된 유출 문화재의 실상도 알게 됐다. 그 조사 결과는
1989년 ‘미국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라는 보고서로 나왔다.
예용해는 말년까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과 국립민속박물관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민속공예의 대부라고 할 만큼 공예분야의 문화재 지정은 그의 역할이 컸다.
함께 일했던 이들은 그의 발언이 영향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 영향력은 발에서 나온 것이 었다.
예용해는 한국일보 1962년 11월 30일자 ‘인간문화재’의 마지막 기사를 감상적으로 썼다.
인간문화재를 찾아 3년,이제 50명에 이른다. 수륙공계(水陸空界)를 누벼 다니기 3만여 리,사십대에서 구십대에 걸친 그들 연령의총화는 3천 2백여세,평균 연령으로 치면 60세. 이름 없이 태어나서 이름 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눈길과 눈길들은 못내 잊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 맑고 깊은 그 속에는 너나 없이 한가닥 슬픔과 같은 빛을 머금고 있었으니 웬일들이었을까.
예용해는
187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태어난 장인들을 만나기 위해 발로 뛰었다. 망국 과정을 보냈고,식민지 치하에서 살았고,일제의 전쟁과 6신5를 겪었던 장인들이었다. 이들의 삶이 갖는 의미,오랜 세월 닦아온 기예,그리고 꿋꿋이 지켜온 장인 정신이 예용해의 안목이 됐다.
『예용해 전집』발간
1996년 ‘예용해전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했다.
김광언,김권구,김양동,김종대,김희진,이종철,장주근,정경희,정양모 정재훈,조유전,흥선스님이 참여한
12명의 간행위원에 필자도 포함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에 관한 예용해의
모든 저술과 조사 보고서,기고문을 수집했다. 또한 필생의 과업이었던 전통 차에 관한 글들,한국일보에
실린 칼럼과 수필들을 모았다. 그리하여「인간문화재」「민중의 유산」「차를 찾아서」「민속공예의맥」「이바구저바구」「갈림길에
선 문화」란 제목으로 전집 6권을엮었다. 예용해가 만든 인간문화재란
말은 유네스코 공식용어가 됐다. 1993년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한국이 제안한 ‘소수민족과 지역공동체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인간문화재(LivingHuman
Treasures)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지금 외국에서 인간문화재 제도를 배우러 한국에 온다. 또한 2015년 제정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서 ‘인간문화재’는 한국의 법률용어가 되었다.
- 글. 사진.최성자 前 한국일보 논설위원, 前 무형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