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개요
Ⅱ.줄거리소개
Ⅲ.파워포인트
Ⅳ.자연의 의미 분석
Ⅴ.맺음말
원령공주의 자연의 의미
ⅰ.자연을 외적으로 해석한 의미
조금은 도가적인 사상 인데요 마야자키 하야오의 주된 주제라고 할 수 있죠.
과학의 발달로 자연이 파괴됨을 집고 넘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정의로우며 자연스러움으로 원초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를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는 나쁘게 보여지죠..
원령공주에서는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연의 신을 죽이려하는 인간때문에
모든 자연이 파괴되고 세계가 멸망에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재시합니다.
마지막에 자연의 신이 죽음으로써 선이 폭주해서 모든 생물, 특히 인간을
멸망케 하기 위해 변하는데 주인공이 이를 겨우 저지시키고 다시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머리를 돌려주죠...
모노노켓히메는 미야자키하야오의 다른 작품들과는다르게 그렇게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이지도않고 나오는 케릭터들도 이전작품들과는 다르게 예쁘거나
아기자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징그럽거나 무섭고 잔인하기까지하다.
왜 이작품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케릭터와 작품배경을 그려냈을까? 이 모노노케히메는 왜 인간을 공격하고 인간의 문명을 파괴할까?
이 원령공주가 활동하는 시대의 일본은 과연 어떠한 사회적배경과 정치적환경을 가지고 있는것일까?
왜 그들은 신들이 존재하는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들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것일까?
이런 물음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면 훨씬더 깊이있는 감상이 될수있을것이다.
아직 신들이 얘기하고 자연을 지배한다는 얘기는 그들의삶이 자연에 많은
영향을 받고있으며 자연을 신으로 여기는 토템의 세계라는것을 알수가 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되는 15세기의일본은 무로마치막부가 허물어저가
각번들의 할거로 100년전쟁의 시기에 접어들었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던
때였다.
이런 시대적배경이 이작품의 저변에 깔려있음을 알고 본다면 영화중에
나오는 전쟁장면이나 사람들의 폭력적인 부분을 이해할수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시신이 낮동안의 모습으로 있기위해 내려오는 매계체로서의 나무는 각 민족의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수의 다른 모습이며 또한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기도하다.
시시신의 모습은 생명을 주기도 또한 앗아가기도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겨울을 격어야만 봄이오듯이 죽음을 겪어야만 삶이
있을수있다는 삶의 변환이며 생명의 이면을 숨기고 있다.
그 시시신이 죽음으로서 파괴된 대지가 다시살아나는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이해할수 있을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손쉽게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시타카가 그렇게도 모노노케 히메에게 인간세상으로 갈것을 종용하지만 결코 그것에 따르지않는 원령공주의 모습에서 그것을 알수가 있다.
그렇지만 결코 완전한 결별을 말하지도않는다.
너는 숲에서 나는 마을에서살아가면 된다는 말에서
그리고 보고싶을땐 보러 간다는 말에서 우리는 아직 자연과 화해할수있는
마지막 희망을 남겨본다.
인간이 어머니 자연을 파괴하지않고 같이 살아갈날을 꿈꿔본다.
ⅱ.자연을 일본의 역사적 관점으로 본 의미
<원령공주>를 일본의 근대역사의 전철 없이 본다면, 그것은 환경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령공주>의 본질은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에 대한 가해자의 자위적인 해석이다. <원령공주>는 이미지나 관념에 있어서 여러 가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착시 같은 장난처럼 착각이 통용되고, 속임수가 난무하는 것이다.
이제 <원령공주>를 보자.
<원령공주>의 무대를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혼란기인 무로마치 시대가 아닌, 역시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산업혁명기로 보는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텐진조약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야하타 제철소를 설립한다. 원래 일본은 철강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중국의 요동반도에서 철강을 가져다 쓴다.
<원령공주>에서 제철공장 다타라장의 우두머리 에보시는 공장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해 숲을 황폐화시킨다. 일본이 자국내의 혼란진정과 대륙지배야욕을 위해 아시아(숲)를 도륙하는 타당성이 주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시각부터 잘못된 것이다. 일본의 산업혁명,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 발전한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5대 열강에 든다. 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아니라, 전쟁 그것이 목적이었다.
모로노가미(암캐)의 손에 자란 원령공주는 현재의 일본내 진보적 지식인들로-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보여진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들도 결국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사장연대 조직의 리더인 지코보는 외세(外勢)로 보여진다. 일본은 외세에 이용당하고, 이용하며 산업혁명기를 거친다.
주인공 아시타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 없이 저주를 받은 현재의 일본인이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시타카는 사슴신에 의해 저주가 풀린다. 깨끗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숲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제철소로 돌격해 가는 멧돼지떼는-그러다 신기술로 무장한 에보시 일당에게 무참히 죽는 그들은-누구일까. 불쌍한 그들은 우리다.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해준 사슴신 시시가미가 은유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누가 일본을 용서해줬단 말인가. 그것은 시간일까? 아니면 이제 지워질만하다는 일본인의 바램일까? 그 무엇이든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일본인은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하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역사의식뿐만 아니라, <원령공주>의 흥행기록도 우리는 눈 여겨 봐야한다. ‘전쟁책임’과 ‘전후보상’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추지 못한 일본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를 위시하여 ‘타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원령공주>가 제공한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미국의 <아마겟돈>이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건 오지 미국’이라는 미국우월주의로 문화 폭격을 가했다면, 일본의 <원령공주>는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는 식의 가해자의 궤변으로 역사를 가리고 있다.
처음 <원령공주>를 보고 지극히 철학적인 만화영화라고 감탄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에게 조소를 보낼 수 밖에 없지만...이 말을 미야자키 감독에게 해주고 싶다. 당신이 만든 <원령공주>가 낳을 수 많은 ‘저주신’을 생각해 봤냐고. 그것을 간과할 용기가 있었다면, 그 용기로 ‘역사’를 직시(直視)하라고 말이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