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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임휴사는 불조의 혜명으로 법등이 전수되어 1천년 세월을 국가에는 국태 민안을, 민족에게는 자비 화합을 안겨준 지역민의 귀의처로 발돋움했다. 지금은 대구시민의 기도도량이자 휴식공간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2004년 7월12일 타종교의 광신도로 추정되는 정체불명 괴한이 저지른 계획적인 방화로 인해 요사를 제외한 전각이 모조리 전소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법당 내부에 모셔진 불상이나 탱화를 단 1점도 꺼내오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휴사는 아직 화재를 일으킨 범인을 잡아내지 못한 채 고통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천년을 넘도록 지켜온 법등을 한순간에 소멸시킬 수는 없는 일. 임휴사는 2007년 완공을 목적으로 다시 대웅전 불사를 진행하고 관음기도도량으로서 기도와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거기다 지역민을 위한 ‘마야유치원’을 운영하며 어린이법회를 함께 이끌고 ‘불교전문교육원’을 개설해 교육과 포교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 다음 해인 2005년 부처님오신날에는 경내에서 산사음악회를 개최해 지역주민의 많은 참여와 함께 임휴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제 임휴사는 다시는 외부의 불순한 세력에 의해 삼보정재를 훼손하거나 손실을 입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옛날 태조 왕건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이 곳에서 가다듬었듯이 임휴사도 과거의 불행했던 일을 거울 삼아 불법 홍포의 의지를 다시 한번 드날리기를 염원해 본다.
임휴사의 창건배경 및 역사
임휴사는 일찍이 신라 말엽인 921년(경명왕 5년)에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행하여 크게 선풍을 진작하고 귀국한 영조대사(靈照大師:870-947)가 창건한 이래 서기 1811년(순조 11년)에 무주선사(無住禪師)가 중창하였으며 1930년에 포산화상(苞山和尙)이 3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寺名)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던 팔공산 지역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일대 격전을 치른 곳으로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돕고자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견훤을 만나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크게 패하여 생명 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왕건의 심복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이 이를 진짜 왕건으로 보고 쫓아가 죽이는 바람에 왕건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이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남게되었는데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齋), 왕건의 탈출을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다하여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대덕산은 은적사, 안일사와 왕건이 탈출하다가 임시로 군막을 치고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이 만들어 졌다.
왕건은 이곳에서 쉬면서 부처님 전에 기도를 드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결과적으로 후삼국통일의 발판이 되었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해오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무주선사와 포산화상의 중창 이후 1996년 혜담(慧潭)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중창했다. 그러나 2004년 7월12일 새벽 인화물질로 추정되는 통을 든 괴한의 방화로 1999년 완공한 대웅전 40평과 산신각 8평,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과 탱화 2점 등이 전소됐으며 반야당 일부도 소실됐다. 이에 임휴사는 장기적인 복원불사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먼저 소실되어버린 대웅전 불사를 오는 2007년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리하여 이 귀중한 역사의 현장을 오롯이 되살려 후대를 사는 이들에게 생생한 역사교육의 터전이 되도록 복원의 원력을 세우게 된 것이다.
임휴사 관람 포인트
1.현재 임휴사는 반야당(般若堂)이라는 요사와 옛 관음전 건물을 고쳐놓은 임시 대웅전, 승방 1동만 남아있다. 따라서 경내에는 현재 이렇다할 문화재는 없으나 반야당 아래 쪽 목조로 된 축대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조선시대 부도 1기가 외롭게 서있는데 조금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2.임휴사는 세인들 보다 특히 스님들 사이에 유명한 관음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관음기도로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여타의 사찰보다 수승한 도량이 되고 있다.
3.임휴사가 자리한 대덕산(앞산) 달비골은 수림보호가 잘 되어 있어 등산로 이용되고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 또 이 골짜기에는 위장병에 효험있는 석샘과 황룡샘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첫댓글 소개 감사합니다,
잘알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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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그동네 계발되기전 상인동 백조아파트에 살적에 자주 찾았는데, 거기가면 약수가 유명하죠...지금도 약수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화재로 인하여 다시 재건했다던데....도시계발로 옛모습이 없어서 저으기 실망을 했는데...여기서 임휴사 소개글을 보니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