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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0일 . 제1독서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어,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오늘의 묵상
(루카 10,25-37)
<평생토록 풀어야할 숙제 하나> 성인(聖人)중의 성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을 지냈다. 성인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덕행 가운데,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는 ‘만인형제애(萬人兄弟愛)이다. 그분에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다 형제요 자매였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내편이건 저쪽 편이건, 내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건,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이건, 모든 것이 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담긴 소중한 존재였다. 당시 나타나면 다들 멀찍이 돌아가곤 했던 나병환자를 온몸으로 포옹했던 성인이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자매인 죽음이여!” 늑대는 형제요, 비둘기는 자매였다. 오늘날도 프란치스코 성당 복도 한쪽에는 한 쌍의 흰 비둘기가 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깥으로 날아가지 않고 성당을 지키고 있다. 철저한 자연주의자, 환경운동가, 생태주의자, 인본주의자, 평화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의 그런 모습 앞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다. 물고기든, 산짐승이든 뭐든 움직이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기를 쓰고 생포하려는 제 모습과 너무나 크게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만인형제애’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바로 그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 이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 별것도 없으면서 쓸 데 없는 우월주의에 빠진 유다인 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뇌리 속에 가득 차 있던 ‘만인형제애’를 드러낸다. 당시 유다인 들에게 있어 이웃은 동족들뿐이었다. 하느님 구원의 대상도 이스라엘 백성뿐이었다. 지독한 선민의식이다. 그럼 다른 민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을 모두 통칭해서 ‘이방인’이라 불렀다. 사람취급도 안했다. 구원되든 안 되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이런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을 다시금 설정해주신다. 본문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참된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다른 등장인물들, 사제와 레위인, 그들은 유다인 가운데서도 유다인 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인간 이하의 행동이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가 보시오. 그는 참된 봉사가 무엇인지? 참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여러 행동 가운데 눈여겨 볼 것은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한 생명이 내 눈앞에서 고통 받고 있다는 그것이었지, 그가 유다인 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없었다. 그가 북한주민이든 남쪽 사람이든 문제없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위험에 처한 한 사람의 생명, 그것만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하나는 사랑의 대상, 사랑의 개념, 사랑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나가는 것이다.
연중 제15주일 2016년 7월 10일 - 서공석신부 루가 10, 25-37. 신명 30, 10-14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하였고, 예수님이 답하시면서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는 유대교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합니다. 그는 무엇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오늘 율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그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 갔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주고, 그를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도 말합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율사가 대답하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율사의 질문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어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에서 성무(聖務)를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역시 성전의 성무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성전과 율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탈출 33, 19)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선하심을 사람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생활지침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전담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사람들이 제물을 봉헌하게 하면서 성전에서 일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 때문에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배경으로 우월감을 가지면서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무섭게 군림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율법 지킬 것과 제물 바칠 것만 바라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는 강도 맞아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제와 율사는 성전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원초적 체험,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 17)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알려주고 실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초기신앙인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 3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해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 합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고린 3, 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는 초주검이 된 사람을 버려두고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의 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가 계획하고 만든 일 안에, 우리 계획의 산물(産物)로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선한 마음 안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말씀은 하늘에 있지 않다...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 ♣ 울타리를 허물고 다가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 ♣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10,29). 그러자 그분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이 누구이며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 벗김과 폭행을 당하여 초주검이 됩니다(10,30). 폭력적인 이웃을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는 그 어떤 생명의 숨결도 창조의 손길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단절과 파괴로 치달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이 이렇게 초주검이 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립니다(10,31-32). 괜히 도와줬다가 변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일 경우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 등을 해주어야 하니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기는 하였으나 멀찍이 피해 지나쳐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할 생각뿐이었고, 고통받는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발생시키는 진정한 만남, 성사적 만남이 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있습니다. 이런 스침의 관계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없고 진정한 사랑과도 무관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마리아인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10,33-34). 그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떠납니다(10,35).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한 그 사람에게 다가간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10,33) 다가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아낌없는 사랑과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한 동료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 부당한 현실과 비인간적 상황 앞에서는 오직 사랑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종교나 이념, 종족과 신분, 개인적인 차이 등 그 어떤 조건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도 한계도 없고, 그 어떤 울타리도 머뭇거려야 할 중립지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만남을 갖습니까?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만날 때,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때, 교통사고로 위급한 상황을 당할 때 외면하거나 비겁한 침묵을 하고, 못 본 척 하며 지나쳐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적극적으로 다가가 지켜나가며 억울한 이들의 인권을 되찾아주며, 고통 받는 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고통 중에 있는 원수에게 오직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의 안위와 행복에만 몰입하는 이기주의에서 탈피하고, 동료 인간들의 아픔과 비인간적 상황에 적극적이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웃이 누구이냐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로 힘쓰면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지인들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주일에 미사를 공지하니, 다른 곳에서 오신 교우들도 함께 미사를 참례하였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데, 주님의 성체 앞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고맙고, 기뻤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두 가지를 경험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로 인해 머무는 곳이 정전이 되었습니다. 불과 하루였지만 전기 없는 생활은 많이 불편하였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어둠이었고, 냉장고, 에어컨, 텔레비전은 기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초를 밝히고, 제 방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촛불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제대를 밝히는 초가 그렇게 밝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 촛불을 들고 오시는 교우 분들의 모습은 천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들이 다시금 밝아졌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면 이 세상의 모든 전기를 합한 것보다 더 밝은 빛 속에서 살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전이 되면서 실수로 스마트폰을 물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불편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상과 소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스마트폰에 의지하면서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 지냈음을 알았습니다. 84-0684는 중학교 때 집 전화번호입니다. 3-7397은 전주 고모부 댁 전화번호였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는데, 스마트폰에 의지하면서 생각나는 전화번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은 편리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스마트폰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잊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깊은 성찰을 하게하는 독서의 습관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신경외과 의사인 저자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의 의식, 마음, 정신, 생각을 조절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수술을 통해서 의식을 잃어가는 사람,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은 하나의 하드웨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의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신호를 받아야 기능을 할 수 있듯이, 우리의 뇌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호를 받는 수신기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의 인식과 과학의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우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 우주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사랑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사랑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굳이 ‘임사체험’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이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통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 멀리 여행을 가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오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 해 주십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를 베푸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그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저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여름날, 성당에 오셔서 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치우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형제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방앗간을 하시면서 형편이 어려우신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던 형제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를 해 주신 형제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김치를 해서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시던 자매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신장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셨던 자매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조미료를 가미하지 않은 음식이 입맛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건강에 좋은 것처럼, 조금은 재미없고, 눈에 차지 않는 것 같지만 평화방송, 가톨릭신문, 평화신문은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빛으로 사는 것은 거창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한주라도 교회의 소식을 가까이 하고, 영적인 서적을 읽어보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앙의 빛은 우리의 어둠을 밝게 비추어 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치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가서 그대도 그렇게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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