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38.
● 제 IV부 제1장 이장의 집
하에바루를 떠난 지 4일째, 구로시마와 나는 이토스(糸洲)라는 부락에 도착했다. 이토스는 아직 전화(戦禍)가 미치지 않은 녹색 부락이었다. 대나무 숲이 있고, 파초 나무가 있으며, 가주마루 나무도 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들려오는 것은 단지 우물로 흘러드는 물소리뿐이었다. 산의 돌틈을 통해 솟아나는 물이 사각 우물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닿았다. 우물가의 군인들 모습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평화 그 자체라는 인상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물을 마시지 못했다. 목이 말라 있었다. 우물 가장자리를 넘쳐 흐르는 물을 보고 나는 군인 중 한 명에게 반합을 빌려 반합에 물이 차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너무 목이 말라서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마시기 시작했다.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문득 하에바루의 침대에 누워 있을 환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 온 환자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어떻게 물을 마실 수 있을까. 내 입술은 반합 가장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물을 마셔 숨이 막힐 뻔했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물을 마신 후 비로소 심호흡을 했다. 우물에 서서 언덕을 올려다보니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언덕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히메유리(姫百合)의 학생들이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산책이라도 나온 걸까하는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죽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어"라고 그들이 말하며 나와 구로시마를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큰 집으로 데려가며 "하에바루 사람들, 여기 많이 와 있어"라고 말했다.
나무로 둘러싸인 큰 집은 마을 이장의 집이었다. 이장의 딸이 히메유리(姫百合)대의 한 사람이었다. 이장은 딸을 생각해서 집을 육군 병원에 제공하겠다고 했다지만,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병원에서 요구한 것이 틀림없었다.
가주마루 나무로 둘러싸인 훌륭한 집이었다. 툇마루 아래 디딤돌 위에는 여러 개의 군화와 게타(나막신)가 하나 놓여 있었다. 게타는 이장의 신발인 것같다. 툇마루를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되고 튼튼한 집이었다. 기둥과 창호의 훌륭함에 감탄했다. 나무도 판자도 고색창연함이 묻어나서 나하에 있는 우리 집을 떠올리게 했다.
이장에게는 집이 두 채 있었다. 육군 병원 사람들이 묵고 있는 안채와 정원 구석에 지어진 별채가 있었다. 히메유리(姫百合)의 학생들은 별채를 사용하게 되었다. 별채도 가주마루의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다미를 깔아놓은 안채의 넓은 방에는 군의관과 간호사 등 약 30명의 사람들이 눕거나 앉아 있었다. 모두가 느긋해 보였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이렇게 한가로운 적은 없었다. 방 한쪽에는 아시미네 선생님과 우치야마 선생님이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다. 선생님들의 어색한 얼굴이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라고 나는 사과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건강해서 다행이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아시미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선생님에게는 내가 담요를 버리고 온 것을 떠올리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구미코가 흑설탕과 팥으로 끓인 단팥죽 통을 들고 왔다.
구미코도 나를 보고 기뻐했다. 이전의 차가운 태도는 사라졌다. "모두 걱정하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나무 국자로 단팥죽을 퍼서 도자기 그릇에 담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 먹어. 배고프지.” 단팥죽은 딸을 생각해서 이장님이 제공해 주었다고 했다.
그날 밤은 습기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흐리기 쉬운 하늘에 달이 푸른 빛을 가주마루 나무에 쏟고 있었다. 나는 피곤해서 안채를 나와 별채로 향했다. 이미 친구가 5~6명 자고 있었다. 나는 다다미가 깔려 있지 않은 바닥 위에 그대로 누워 밤의 소리를 들었다. 귀뚜라미가 근처에서 울고 있었다.
안채 쪽에서 느긋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서 가주마루 나무가 바람에 은은하게 흔들렸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오키나와의 밤을 즐겼다. 피곤하긴 했지만 바로 자고 싶지는 않았다. 좀더 고요한 달빛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를 즐기고 싶어서였다.
덧문 틈으로 가주마루의 줄기혹이 보였다. 어렸을 때 들었던 '기지무나'라는 나무정령 이야기가 생각났다. 기지무나라는 것은 장난을 좋아하는 원숭이 같은 얼굴의 귀신으로, 그것은 가주마루의 나무에 산다고 하는데, 기지무나가 이곳 나무에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차츰 내 머릿속은 나카타니 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나카타니는 살아 있고, 시마지리(島尻) 어딘가에서 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살아 남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나는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눈이 떠지자 집 안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늦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세수라도 하러 갔을 것이다. 나는 짐을 펼쳐서 살펴 보기로 했다. 늘어놓을 장소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시 나카타니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작렬하는 포탄소리가 났다. 이토스에도 함포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함포 소리에는 익숙했지만 이날 아침의 포격 소리는 엄청났고 나는 너무 무서웠다. 함포를 전혀 예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세 번, 네 번- 떨어질 때마다 격렬함이 더해졌다.
"빨리 서둘러라!" 안채 쪽에서 톤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짐을 배낭에 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두 달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언덕의 벙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함포가 돌담에 떨어져 수백 개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돌맹이들이 굵은 우박 알갱이처럼 굴러갔다.
아시미네 선생님이 마을의 공동 우물 근처에 있는 벙커 앞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벙커 안에는 물이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 물이 새지 않는 벙커가 있었지만, 그곳은 병원 관련 사람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안채로 돌아가 바케쓰를 가져오라" 고 아시미네 선생님이 외쳤다.
선생님은 적의 비행기를 확인하기 위해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벙커의 물을 퍼내야 해..." 라고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바케쓰는 금방 발견되었다. 우리는 줄을 섰다. 한 줄은 물을 담은 바케쓰를 벙커 밖으로 운반하는 줄, 다른 한 줄은 빈 바케쓰를를 밖에서 벙커 안으로 운반하는 줄이었다.
우리는 바켓쓰 운반에는 이미 익숙했다. 15분 정도 양동이 릴레이가 계속되었지만, 퍼내기의 효과가 전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미네 선생님이 전해 왔기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 벙커는 지하수에 맞닿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장믈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이 벙커를 방치한 이유를 알았어. 병원이 이 벙커를 우리에게 넘긴 이유도 알겠다.” 아시미네 선생님은 별로 화내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아시미네 선생님의 추측은 맞았다.
벙커 앞을 지나는 위생병과 간호사들이 우리를 보며 안쓰럽게 머리를 젓기도 하고 의미 있게 웃기도 했다. 잠시 후, 만약 위급한 일이 생기면 병원의 벙커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가 우리에게도 내려졌다.30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