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에비앙 생수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매끈한 피부. 에비앙 천연 광천수를 하루에 1리터씩 추가로 마신 사람 가운데 79%는
피부가 눈부시게 부드럽고 촉촉해져 결과적으로 더 젊어 보이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문구를 보고 나서 에비앙 생수와 우리나라 생수 중에서 무엇을 손에 쥘까요?
과학적 연구 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왕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에비앙 생수를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른 생수라도 하루에 1리터씩 마시면 에비앙 광고와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에비앙 광고를 보고서는 이런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방식이 있습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 쉽게 잠듭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영화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리고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면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나게 찬양하는 성령 기도는 조금 힘듭니다.
그렇다고 성령 기도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기도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갑니다.
다양한 길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를 이해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른 길을 갈 뿐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착한 아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큰아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아들만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관점에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원망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그만큼 당신의 잠재력이 개발될 것이다(데일 카네기).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