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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절기(3)
신 16:1-17
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9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신 16:1-17 / [유월절] 곡식을 추수하기 시작하는 ㄱ) 초봄이 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이 기간의 어느 날 밤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ㄱ. 히. 아빕월.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를 말한다) 2) 그때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양이나 소를 잡아 여호와께 유월절 제물을 바치고 잔치를 베푸십시오. 3) 또 그때에는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만을 먹으십시오. 여러분이 애굽 땅에서 황급히 탈출할 때에 누룩을 넣어서 부풀릴 사이도 없이 반죽하여 금방 구워서 먹었던 것처럼 다시 그런 떡을 7일 동안 구워서 먹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고난의 떡을 먹음으로써 여러분이 애굽 땅에서 탈출하던 날을 평생토록 기억하십시오. 4) 묵은 누룩은 모조리 폐기하고 새 누룩이 나오기까지 7일 동안 전국에서 어느 누구도 집안에 누룩을 보관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또 여러분이 유월절 첫날 저녁에 잡은 제물의 고기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5)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이라고 해도 아무 데서나 자기 마을에서 유월절 짐승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6) 꼭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이 애굽에서 출발하던 때인 해지는 시각에 잡으십시오. 7) 여러분은 그 고기를 여호와의 성소에서 요리해 먹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8) 그래도 계속 6일 동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만을 먹고 7일에는 다시 성소에 모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를 베푸십시오. 그리고 이 잔칫날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9) [칠칠절] 여러분은 곡식 추수를 시작한때로부터 7주를 계산하여 10)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ㄱ) 오순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논밭에 복을 내려 주셔서 여러분이 일년 동안 수고하여 거둔 것인 만큼 자진해서 추수 감사 예물을 가져다 바치십시오. (ㄱ. 히. 칠칠절) 11) 여러분은 자녀들과 남녀 종들과 여러분의 마을에서 함께 사는 레위 사람들과 외국인들과 고아와 과부들까지 모두 데리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즐거운 잔치를 베푸십시오. 12) 여러분 자신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규정들을 지켜 실천하십시오. 13) [초막절] 여러분은 봄철 곡식을 수확한 때뿐만 아니라 초가을에 올리브와 포도를 수확한 다음에도 일주일 동안 초막절 잔치를 베푸십시오. 14) 여러분은 자녀들과 남녀 종들과 여러분의 마을에서 함께 사는 레위 사람들과 외국인들과 고아나 과부들과 함께 이 잔치를 즐겁게 베푸십시오. 15)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를 베푸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잔치에서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16)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씩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곧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는 여러분이 여호와의 얼굴을 뵈어야 하는데 언제나 빈손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17) 많든지 적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가지고 가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따라서 예물을 가지고 가십시오.
< 설 교 >
곡식을 저장하고 광야로 나가라
신명기 16:1-17, 요한계시록 21:1-8, 요한복음 7:37-44 / 인명진 목사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단순히 출애굽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중다한 잡족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저들은 40년 동안 농사하지 않고 길쌈하지 않았는데, 굶지 않았고,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했고, 옷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가나안 일곱 부족이 살고 있는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일을 역사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에서 해방된 사건, 광야에서 함께 하신 사건,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사건을 대대손손이 잊지 않도록 세 가지 절기를 정하여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절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나 절기에는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신명기 말씀에 나오는 무교절, 맥추절, 초막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기의 이름이 하나의 명칭으로 불린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종종 혼란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무교절은 유월절로, 칠칠절은 맥추절, 초막절은 수장절이라 불립니다.
이렇게 하나의 절기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 속에 농경 요소와 신앙의 사건이 결합되어 있고, 인간의 사건과 하나님의 사건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절기인데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농사와 관련해서 세 가지 절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농부들은 우리나라와 농부들과 달리 1년에 세 번 추수를 했습니다. 겨울 보리를 거두고 묵은 누룩을 제거하는 무교절, 여름 보리와 밀을 거두는 맥추절, 올리브와 포도를 거두는 수장절이 바로 절기의 이름입니다...
이런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절기가 형성되었고, 이 절기에 신앙적인 의미와 사건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겨울 보리를 추수하고 묵은 누룩을 없애는 무교절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결합되어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누룩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애굽에서 장자의 죽음과 함께 해방된 것을 기억했습니다. 여름 보리와 밀을 거두는 맥추절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계명을 받은 역사적 사실과 결합되어 칠칠절이 되었습니다. 곡식만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계명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반면에 1년 중 마지막 추수를 축하하는 수장절은 광야 생활 40년이라는 유랑생활과 결부되어 초막절이 되었습니다.
절기를 정할 때에도 농사해서 결실한 단독 사건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 역사적인 사건과 결합시켰습니다. 인간의 사건과 하나님의 사건이 만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절기 정하면서도 이렇게 세밀하게 만드셨습니다.
한때 한국교회에서 추수감사절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굳이 미국 청교도들이 지킨 11월 셋째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켜야 하느냐 추수감사절을 우리 문화에 맞게 지켜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토착화 논쟁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추석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하고 지켰습니다.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추수감사절이니까 토착화 된 감사절을 지켜야 되겠다는 취지였지요.
그래서 몇몇 교회에서 추석에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물론 추석날 가족과 함께 하기 때문에 실패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추수감사절 추석은 신앙고백적 의미가 없는 명절입니다. 농사로 결실한 단독 사건으로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추수감사절은 추수뿐만 아니라 신앙의 사건, 역사적 사건, 하나님의 사건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추수 감사는 한 해 동안 결실한 것을 감사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구원 받은 것 감사하고, 내 영혼이 주님 부르시는 날 천국 창고에 알곡으로 들여질 것까지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농사의 결실은 기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때로는 농사를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추수할 것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떠올리는 것이 하박국의 감사 아닙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추수한 사건만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전천후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했는데, 구약의 절기로 본다면 수장절 혹은 초막절에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추수감사절 초막절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농사의 사건과 하나님의 사건 두 가지 중심축을 잡고서 이해해야 우리가 바르게 절기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장절 혹은 초막절이라 불리는 이 절기는 세 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명절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초막절은 레위기에서는 “여호와의 절기”라고 불렀고, 에스겔서에서는 “그 절기”라고 불렀습니다. 먼저 농경적 요소로 보면, 이 절기는 올리브와 포도 등을 추수하는 절기였습니다. 태양력으로 약 10월 중순경에 해당하는 이 절기는 올리브와 포도는 물론 곡식을 추수하며 감사하는 기간인 까닭에 수장절이라고 불렀습니다. 곡식을 추수해서 창고에 저장한다는 의미에서 수장절이라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23:16은 이렇게 말한다.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따라서 초막절은 추수 감사절 축제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감사절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절기를 통해 40년간 광야의 초막에 살며 유랑하던 시절을 기억했습니다. 초막절은 히브리어로 ‘수콧’이라고 부르는데, 수콧은 우리말로 초막, 장막, 혹은 텐트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유래는 흥미롭게도 야곱에게로 거슬러 갑니다.
창세기 33:17은 이렇게 기록한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숙곳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돌아와서 처음 정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처음 진을 친 곳이기도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숙곳은 초막이요, 임시 거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막절은 광야 유랑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을 어떻게 지켰습니까? 레위기 23장에 기록된 대로 두 가지를 지켰습니다. 하나는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떠나 야외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그 초막 안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초막을 지을 때 지켜야 하는 중요한 규칙은 잎을 엮어 지붕을 만들 때, 최소한 밤에 별이 보이도록 듬성듬성 엮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집도 없이 떠돌아다녔고, 지붕도 없는 사막에서 머물렀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했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는 종과 나그네,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조상들이 남의 나라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騎馬欲率奴기마욕솔노라 했습니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는 종두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고서 스스로 행복해 하고, 더 편해지려고 할 때에 초막을 치고서 광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옛날 너희 조상들이 남의 나라 종살이 했고, 머물 곳이 없어서 광야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40년 동안 유랑했던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농사지어서 수확한 이 땅은 여호와께서 선물로 주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고에 저장한 곡식으로 너와 너의 가족만 기뻐할 것이 아니라 옛날에 너희 조상처럼 종 되었던 자들과 나그네들과 가난한 자와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의 초막살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은 일 년에 딱 하루 지성소에 들어가 시은소에 손을 얹고 온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주시고 이 백성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성막 앞에서 온 백성을 향해 용서와 화해를 선포합니다. 이렇게 해서 수장절과 초막절 절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여러분,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살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첫 마디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그래도 내 집 같은 곳은 없네?” 아닙니까? 이때 비로소 마음에 깊은 감사가 우러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농사할 수 있는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일상 전체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고백 나오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옛날 임금이 살던 궁궐보다 더 편리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집안에 화장실 있지요. 수돗물이 집안에서 꽐꽐 나오지요. 장작지피지 않아도 방안은 뜨끈하지요. 얼마나 좋은 집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입은 옷은 어떠합니까? 옛날에 임금과 왕비도 오늘 우리처럼 좋은 옷 입지 못했습니다. 세종대왕이 양털로 만든 순모 옷 입었습니까? 우리가 먹는 것은 어떠합니까? 산해진미와 육선이 가득합니다. 이뿐 아니라 옛날 궁궐식탁에 오르지도 못한 열대 과일까지 흔하게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심리적으로 가장 가난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감사가 가장 빈약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곡식을 저장하고 광야로 나가지 않자 창고는 욕심의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곡식을 저장하고 하나님께 드리지 않자 그 추수는 영혼을 썩게 만들었습니다. 곡식을 저장하고 가난한 자와 나누지 않자 마셔도 목말랐고, 가져도 불안해졌습니다. 이런 인간성을 꿰뚫고 계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고 광야로 나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주신 수장절의 본래의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초막절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과 초막절이었습니다. 3대 절기 중 하나였던 칠칠절은 유월절과 초막절에 비해 신약 시대에는 그 중요성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비록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명절은 유월절이었지만 초막절에도 그에 못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에 비해 초막절은 보다 자유롭고 들뜬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신약에서 초막절을 단순히 ‘명절’혹은 ‘기쁨의 시기’라고 불렸는데, 이는 초막절이 절기 중의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온갖 곡물과 과일들을 추수한 후 추수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초막절을 축하했습니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은 제단을 둘러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그곳을 빙빙 돌며 행진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득 채운 물을 제단에 부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친 후 제단에 포도주를 붓는 것과 달리 이 절기에 물을 붓는 것은 초막절 이후에, 곧 밀과 보리의 파종기가 다가오기 때문에 비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신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나가 초막을 짓지 않았습니다. 초막과 광야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단지 풍년을 기원하는 성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외치신 말씀이 바로 37절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하는 비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변질 된 초막절 끝 날에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 나아오라”고 외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초막절, 추수감사절 정신은 예수께로 돌아가야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초막절은 많이 먹어도 우리를 배고프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추수감사절은 실컷 마셔도 우리를 목마르게 합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께로 돌아가야 우리가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초막절의 본래의 정신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시대에 사도들은 이 초막절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초막을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수 지은 영원한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계시록 말씀에도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잠시 살다가 가는 광야의 초막과 같고 하늘의 영원한 우리의 장막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튼튼하고 영구적인 궁궐이 아니라 일주일 밖에 견딜 수 없는 풀잎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이런 초막에 살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여서 40년을 부족함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초막이라도 잠시 동안만 머무는 거처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말라비틀어질 초막이 아니었다면 더 이상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스펄전 목사님이 몰려드는 사람으로 런던에 새로운 교회를 건축했을 때 그 교회의 이름을 ‘테버너클교회’(Tabernacle Church), 곧 ‘장막교회’라고 한 것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감을, 그리고 이 땅의 삶이 일시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이 땅에 있는 집을 영원한 집으로 생각하고 하늘에 있는 장막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배당을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변질시켜 이 땅에 영원한 장막을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처소는 하나님께서 지으십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천국을 향한 나그네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아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바라보면서도, 양손에 쥐고 있는 떡을 먹으면서도 초막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고에 가득한 곡식도, 양손에 쥐고 있는 떡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먹을 수 없는 것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매여 사는 사람도 아니며, 이 땅에서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일희일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천국을 향한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러므로 초막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더 큰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창고에 저장한 곡식은 가득한데 광야의 초막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먹어도 배고프고, 가져도 가난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바로 우리가 광야로 나가 초막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을 향해 나눌 때에 세상 사람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깊은 감사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원한 장막은 하늘에 있음을 믿고 살아갈 때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고 광야로 나가 초막에 거하십시오. 가난한 자의 마음으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십시오. 이 감사는 물질과 탐욕에 물던 우리를 정화시켜 줄 것이고, 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랑의 메아리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곡식을 저장하고 광야로 나가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16:1-22.
평생에 기억해야 할 일
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칠칠절과 그리고 초막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 언급한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회적으로 지키도록 주신 것이 아니고 매년 정해 주신 날 영구히 반복하여 지키도록 주신 절기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영구히 반복하여 지켜야 할 절기들을 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을 주신 것은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16:1-8). 유월절(아빔월 14일)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됨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다. 하나님은 권고의 말씀을 끝까지 거역한 바로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됨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첫 새끼를 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려운 심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치시던 바로 그 밤에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집을 넘어가셨다. 그래서 유월절이라는 말은 “넘어가다(Pass over)”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유월절을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능하심을 기억하도록 하려 하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신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함으로 항상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 또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구원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 어떤 환경에 직면해 있든지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살 수 있는 믿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통하여 이와 같은 기억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에 대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이 처해 있던 현실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의 힘 앞에서 전적으로 무기력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됨에서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백년을 사는 동안 삶의 대부분이 애굽화 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것은 그들의 삶의 모습이 애굽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위로만 판단한다면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그 심판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부하고 이스라엘이 이 두려운 심판에서 제외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기억한다면 스스로 무기력함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리고 세속화로 인하여 영적 침체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유월절을 통해 주시는 교훈들을 기억하므로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칠칠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16:9-12). 칠칠절(오순절)은 보리 등의 농작물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로 유월절 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다. 그래서 이 날을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본문은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헤아려 자원하여 예물을 드림으로 지킬 수 있고(16:10), 다른 하나는 자녀를 비롯하여 성중에 거하는 이웃들(특별히 돌보아야 할 대상들로서 특히 레위, 고아, 과부, 나그네 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함으로 지킬 수 있고(16:11), 또 다른 하나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킬 수 있었다(16:12).
언급한 것처럼 칠칠절은 추수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다. 추수는 이스라엘이 수고함으로 얻은 것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수고해도 추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 여기 “심는 것과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은 추수를 위한 농부의 수고가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실제로 농부의 수고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자라는데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신다면 결실을 가져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심는 것과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매년 칠칠절을 지킴으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또한 은혜로 받은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칠칠절을 통해 주시는 말씀 즉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자신들의 수고로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말씀으로 인하여 환경을 초월하여 필요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칠칠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환경을 초월하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초막절을 지키도록 말씀하셨다(16:13-15). 초막절은 칠월 십오 일 부터 한 주간 동안 지켜는 절기다. 초막절은 장막절 또는 수장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 장막절이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에 장막에서 살았던 것을 회상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수장(收藏)절이란 이 시기가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할 때이므로 이와 같은 계절에 의미를 부여한 이름이다(출23:16). 그러므로 초막절은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동시에 곡식을 저장한 것을 감사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통하여 광야 생활을 기억할 때 지금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감사의 이유가 될 것이고, 또한 수확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고 사는 것 역시 감사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초막절은 이스라엘에게 축제의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함께 즐거워하되”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등과 같은 말씀은 초막절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은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 살피라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지금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여 창고에 양식을 쌓아 두고 사는 삶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베풀어 주신 은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은혜를 누릴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지나간 날들을 돌아봄으로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이 지난날에 비하여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16:16,17).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년 정하신 날에 이와 같은 절기들을 지키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들은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 그리고 날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풍성함으로 인도해 주시는 은혜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킴으로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살 수 있었고, 칠칠절을 지킴으로 자신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삶의 요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 것을 믿을 수 있었고 초막절을 지킴으로 어제보다 오늘이 그리고 오늘 보다 내일이 보다 더 복된 삶이 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절기들을 지킬수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 수 있었고 또한 이로 인하여 그들은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루를 마칠 때마다 하루의 삶 가운데 어려운 일들을 기억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 보다는 그 환경 가운데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친다면 우리는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더욱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절기들을 정해주셨고 또한 그 절기들을 영구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깨서 정해 주신 절기들을 지키도록 명하심으로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을 기억하며 살도록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기억하도록 주신 것들을 기억함으로 날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더욱 복되게 해 주옵소서.
평생에 기억해야 할 일
신 16:1-22 / 양인국 목사
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칠칠절과 그리고 초막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 언급한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회적으로 지키도록 주신 것이 아니고 매년 정해 주신 날 영구히 반복하여 지키도록 주신 절기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영구히 반복하여 지켜야 할 절기들을 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을 주신 것은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16:1-8). 유월절(아빔월 14일)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됨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다. 하나님은 권고의 말씀을 끝까지 거역한 바로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됨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첫 새끼를 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려운 심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치시던 바로 그 밤에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집을 넘어가셨다. 그래서 유월절이라는 말은 “넘어가다(Pass over)”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유월절을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능하심을 기억하도록 하려 하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신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함으로 항상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 또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구원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 어떤 환경에 직면해 있든지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살 수 있는 믿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통하여 이와 같은 기억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에 대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이 처해 있던 현실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의 힘 앞에서 전적으로 무기력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됨에서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백년을 사는 동안 삶의 대부분이 애굽화 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것은 그들의 삶의 모습이 애굽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위로만 판단한다면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그 심판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부하고 이스라엘이 이 두려운 심판에서 제외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기억한다면 스스로 무기력함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리고 세속화로 인하여 영적 침체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유월절을 통해 주시는 교훈들을 기억하므로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칠칠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16:9-12). 칠칠절(오순절)은 보리 등의 농작물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로 유월절 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다. 그래서 이 날을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본문은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헤아려 자원하여 예물을 드림으로 지킬 수 있고(16:10), 다른 하나는 자녀를 비롯하여 성중에 거하는 이웃들(특별히 돌보아야 할 대상들로서 특히 레위, 고아, 과부, 나그네 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함으로 지킬 수 있고(16:11), 또 다른 하나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킬 수 있었다(16:12).
언급한 것처럼 칠칠절은 추수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다. 추수는 이스라엘이 수고함으로 얻은 것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수고해도 추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 여기 “심는 것과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은 추수를 위한 농부의 수고가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실제로 농부의 수고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자라는데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신다면 결실을 가져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심는 것과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매년 칠칠절을 지킴으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또한 은혜로 받은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칠칠절을 통해 주시는 말씀 즉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자신들의 수고로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말씀으로 인하여 환경을 초월하여 필요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칠칠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환경을 초월하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초막절을 지키도록 말씀하셨다(16:13-15). 초막절은 칠월 십오 일 부터 한 주간 동안 지켜는 절기다. 초막절은 장막절 또는 수장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 장막절이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에 장막에서 살았던 것을 회상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수장(收藏)절이란 이 시기가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할 때이므로 이와 같은 계절에 의미를 부여한 이름이다(출23:16). 그러므로 초막절은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동시에 곡식을 저장한 것을 감사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통하여 광야 생활을 기억할 때 지금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감사의 이유가 될 것이고, 또한 수확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고 사는 것 역시 감사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초막절은 이스라엘에게 축제의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함께 즐거워하되”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등과 같은 말씀은 초막절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은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 살피라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지금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여 창고에 양식을 쌓아 두고 사는 삶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베풀어 주신 은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은혜를 누릴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지나간 날들을 돌아봄으로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이 지난날에 비하여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16:16,17).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년 정하신 날에 이와 같은 절기들을 지키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들은 구원해 주신 은혜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 그리고 날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풍성함으로 인도해 주시는 은혜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킴으로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살 수 있었고, 칠칠절을 지킴으로 자신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삶의 요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 것을 믿을 수 있었고 초막절을 지킴으로 어제보다 오늘이 그리고 오늘 보다 내일이 보다 더 복된 삶이 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절기들을 지킬수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 수 있었고 또한 이로 인하여 그들은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루를 마칠 때마다 하루의 삶 가운데 어려운 일들을 기억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 보다는 그 환경 가운데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친다면 우리는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더욱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절기들을 정해주셨고 또한 그 절기들을 영구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깨서 정해 주신 절기들을 지키도록 명하심으로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을 기억하며 살도록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기억하도록 주신 것들을 기억함으로 날이 더해 갈수록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더욱 복되게 해 주옵소서.
평생에 항상 기억할 것
신 16:1-8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을 왜 지켜야 하며 어떻게 지켜 행할 것인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했습니다. "아빕"이란 이삭을 말합니다. 아빕월은 보리이삭을 수확하는 달로서 오늘날 우리의 3월 중순부터 4월중순 사이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유월절을 행하라는 것은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내신 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라"고 그 정확한 시각까지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인 것입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5-6절에서도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각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었지만 이제부터는 오직 한 곳,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성소에 모여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 땅에서 죽음의 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간 사건은 개개인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한 민족의 구원사건이고 출애굽은 개개인이 자유를 얻은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자유독립국가가 형성되는 사건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백성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포하신 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절에서는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병을 먹었음을 기념하는 무교절과 연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무교병 즉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급히 나왔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떡반죽에 누룩을 넣으면 그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리느라고 출발이 지체될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가라는 출발명령에 즉각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체됨을 막기 위해 아예 집안에서 모든 누룩을 없애고 무교병을 먹게 한 것입니다. 노예상태로부터의 즉각적인 출발의 시급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무교병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만 발견하는 의미 있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 한 것입니다. "고난의 떡"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겪은 가난과 고통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빈궁하고 고된 삶, 출애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떡을 부드럽게 부풀려 먹을 여유도 없이 애굽을 빠져나와야했던 긴박한 상황, 출애굽 후 수십 년간의 광야에서의 거친 삶의 여정 등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무교병은 결코 좋아서 일부러 먹을 맛있는 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고난의 떡"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매년 아빕월에 무교병을 먹게 한 것은 아빕월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큰 사건 즉 출애굽을 전후한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역사는 대대로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에 항상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 하신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출애굽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나온 애굽에서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함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생에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고난의 떡 무교병을 먹으면서 기억하라 했겠습니까? 부유해지고 편안해지면 그 옛날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풍요와 행복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하게 누린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임을 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백성의 도리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복된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는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라" 했습니다. 누룩뿐 아니라 고기를 먹다 남기면 그 다음날 아침식사 준비로 시간을 소모할 수 있고 그래서 출발의 지체시킬 수 있으므로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출발은 지체 없이 실행해야 한다는 뜻을 기억시키고 전하기 위하여 유월절 규례 속에 아예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라"는 지침을 박아 넣은 것입니다. 이 지시는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가정에서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명절기간 동안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미량의 누룩이라도 남기지 않고 찾아내 던지는 행사에 아이들을 참여시킨다고 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숨겨진 누룩을 찾아내 던지도록 일부러 소량의 누룩을 감추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룩이 악한 것의 상징이 되고, 보이지 않으면서 강력하게 활동하는 어떤 것, 그것이 어디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전체를 변질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뜻으로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셨습니다(마16:6, 11-12). 사도 바울도 고전5:6-8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했습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시킬 수 있는 이방민족의 불신앙의 삶과 결별시키신 사건입니다. 묵은 애굽의 누룩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유월절의 첫날에는 출애굽 때 한 것처럼 어린양을 잡아 먹고 이어지는 엿새 동안도 출애굽 때 한 것처럼 무교병을 먹고 그리고 일곱째 날은 성회로 모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백성이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백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일하지 말지니라"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백성임을 분명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유월절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의미 있는 명절이 아닙니다. 유월절의 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요구하신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사건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가득 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유월절을 즈음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크게 의미 있는 것으로 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죽음의 사자가 그들을 지나가게 한 그 때를 맞춰 십자가에 달려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흐리신 것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유월절 대속의 어린 양이심을 확증하시고, 그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그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가르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시킬 수 있는 이방민족의 불신앙의 삶과 결별시키신 사건이었듯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치적 예속과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영적 자유와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유월절 규례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이 출애굽을 기념하고 그 출애굽사건을 절대로 잊지 않게 하기 위한 명절이라면 우리 또한 우리의 출애굽사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의 사하심을 받고 죄적 삶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는 35년간의 일제의 압제와 6.25전쟁과 이로 인한 공산화의 위기와 그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적화통일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죽음의 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간 사건이 개개인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한 민족의 구원사건이었고, 출애굽이 개개인이 자유를 얻은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자유독립국가가 형성되는 사건이었듯이, 이 땅에 복음 전파되고 교회들이 늘어나며 주를 믿는 백성들이 많아진 것은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도록 택하심을 받은 역사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 짧은 세월에 세계 제2의 기독교선교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백성이며 대한민국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임을 증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애굽을 나가라고 명하실 때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무교병을 먹게 하시고 누룩을 집안에서 다 없애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상태에서 떠나라 하실 때에는 즉시 전적으로 떠날 것을 원하심을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 한 것은 애굽에서의 빈궁하고 고된 삶, 출애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떡을 부드럽게 부풀려 먹을 여유도 없이 애굽을 빠져나와야했던 긴박한 상황, 출애굽 후 수십 년간의 광야에서의 거친 삶의 여정 등 이스라엘이 겪은 가난과 고통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듯이 우리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에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부유해지고 편안해질 때 그 옛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풍요와 행복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누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받은 백성의 도리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시킬 수 있는 이방민족의 불신앙의 삶과 결별시키신 사건입니다. 묵은 애굽의 누룩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이 한반도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되게 하며 우리의 삶을 복된 삶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평생에 항상 기억하며 자녀손들에게 가르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니다.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신명기 16:9-12 / 김철한 목사
신명기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두 번째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여 하나님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도록 부탁하는 내용이다.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여 부탁하는 모세의 설교로 이루어진 신명기(申命記)의 주제는 하나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잘 섬기라는 명령을 따라서 모세는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였다.
히브리 백성들이 지킬 절기는 세 가지다.
① 무교병의 절기 - 유일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7일간 무교병을 먹고 그 때를 회상하는 절기다.
② 맥추절의 절기 ? 첫 열매를 거둔 날이기 때문이다.
③ 수장절의 절기 ? 이는 밭에서부터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다음 주에 맥추감사절을 맞이하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맥추절은 구약의 절기 중의 하나다. 지금은 보리를 심지 않는다. 아니 농사를 짓는 사람도 거의 없고, 도시에 살고 있기에 맞지 않는 절기다. 그렇기 때문에 맥추절을 패한다고 한다면 오산이다. 현대의 시대라고 하여 고전이 필요가 없는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다. 즉 옛것을 익힘으로써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구약의 절기의 의미가 복음의 교회력과 무관하지 않기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칠칠절은 다른 이름으로 오순절이기 때문이다.
칠칠절이란 글자 그대로 신16:9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하나님 앞에 칠칠절을 지키는 절기다. 즉 오순절이 유월절의 안식일이 지난 그 이튿날부터 7주간이 지난 그 이튿날까지니 결국 오순절과 칠칠절은 같은 절기인 것이다.
오순절이란 말인 「카치르」는 ‘추수하다’, ‘수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 칠칠절을 지키라는 것은 오순절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자연스럽게 땅에 씨를 뿌리고 밀과 보리를 거두는 시기이므로 이를 맥추절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절기다. 그러므로 칠칠절은 보리 열매를 거둬들이는 것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감사 절기이다.
결국 맥추절과 오순절은 교회 탄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맥추절은 보리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의 날이었다면 오순절은 성령의 열매인 성도들을 수확하는 기쁨의 날인 것이다. 어찌 교회 시대라 하여 사람이 열매로 수확되는 이 신령한 절기를 패하고 살 수 있겠는가? 땅의 열매의 절기도 지킨다면 맥추감사절로 바뀐 신령한 오순절을 잘 지켜야 한다.
2. 율법을 주신 날에서 성령을 부어주신 날이기 때문이다.
왜 칠칠절을 지켜야 하는가? 더욱 자원함으로 지켜야 한다. 오순절은 헬라어로 「펜테코스테」이다. 이는 50일째란 말이다. 출19: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고 하였다. 그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수여하셨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 120문도들에게 성령을 수여하셨다. 칠칠절은 구약에서는 율법을 수여하신 날이요, 신약에서는 성령을 부어주신 날이다. 그러니 율법을 주시므로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게 해 주셨다면 성령을 주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칠칠절을 잘 지켜야 한다.
3. 제사장 사명에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약의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것이 자기 백성을 불러내신 최종의 목표다. 오늘 복음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새 언약 가운데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 증인은 순교자라는 말이다. 사명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날이 오순절의 사건이었다.
사명을 알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명이기 때문에 죽어도 된다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명자는 결국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이 날이, 사명의 사람이 되는 이 날이 맥추절, 오순절, 칠칠절인 것이다. 칠칠절을 지킨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은 지키고 권능을 받아 증인이 되는 자로 나서자는 것이다. 땅의 보리 열매를 50일간 다 거둬들이는 것도 기쁨이지만 하늘의 힘, 신령한 힘으로 사는 구원의 열매로, 전도의 열매로 거둬지는 날이기에 더욱 기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령한 명절을 지키자. 이 명절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지키자. 분명코 하나님 앞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지킬 것인가?
첫째,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지키자. (신 16:10)
신16:10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칠칠절을 지키는 것은 자원하는 예물이다. 억지로 드려지는 예물이 되면 안된다. 사실 레23:15~22을 보면 이 칠칠절 제사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어린 양, 어린 수소, 숫양을 소제물과 함께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 속죄제, 요제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제사는 반드시 떡 두 덩이를 드렸다. 레23:17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라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자원하는 예물이어야 한다.
예물을 드리는 원리는 자원함이다. 자기가 받은 복을 헤아리고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원함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가 드리는 예물의 원리도 자원함이다.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 내는 자, 자원하여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상을 주시고 큰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 모든 이들과 즐거워함으로 지키라. (신 16:11)
맥추절, 칠칠절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추수를 하였다. 레19:9, 신24:19, 레23:22을 보면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를 위해 밭모퉁이 곡식을 거두지 말고 남겨 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하였다. 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의 정신은 칠칠절을 지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16:11을 보라. 모든 사회적 약자, 가난한 자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절기는 사랑으로 지키는 절기다. 사랑으로 사람을 품는 절기다. 그리고 너와 네 자녀들도 함께 해야 하는 가정의 절기다. 모든 이들과 사랑하며 즐거워하는 절기, 이것이 맥추절이다.
셋째, 지난 날을 기억하고 지키라. (신 16:12)
신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애굽에서 종 되었던 기억,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이다. 그런데 자유민이 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니 밭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었다.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눈물이다. 그러나 자유민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감사다. 행복이다. 이 날은 특별히 레23:21의 규례를 보면 성회를 공포하고 어떤 노동도 하지 않고 새 노래를 포함한 다섯 제사를 드리며 지켰다.
예배하는 오늘이 애굽의 바로에게 눌려 신음하는 과거의 역사, 그것을 기억할수록 하나님의 구원이 새롭다. 하나님이 떠오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 칠칠절은 결국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다. 잘 먹고, 잘 살 때,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안전 장치다. 그래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Think), 감사하는 것(Thank), 생각해 내는 것이 감사의 비결이란 말이 된다. 사람들은 생각 없이 산다. 이전의 삶을 망각하기에 오직 불평한다. 원망한다. 절기조차 외면하고 무시한다. 절기를 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규례와 뜻과 마음을 잊는다는 것이다.
맥추절을 지키라. 21세기가 되어도, 다음 세대의 자녀들도 지난 날을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이 절기의 정신을 알고 맥추 감사에 감사함으로 서는 성도가 되자. 절기는 지켜야 하는 것이지 망각하는 것이 절기가 아니다.
받은 복을 헤아려 봅시다
신명기 16:9-17 / 황의봉 목사
어느 국가나 단체, 가족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모두 명절이 있습니다. 설날과 같은 국가적 명절이나 생일과 같은 개인적 명절이나 명절의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명절 혹은 절기의 의미는 ‘회상, 기념, 그리고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지난 일을 돌이켜 잊지 않도록 기념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데 명절을 지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민속명절과 국경일, 그리고 각종 기념일이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안식일과 희년, 나팔절, 속죄일, 초실절, 부림절, 수전절과 같은 많은 절기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지키는 3대 절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칠칠절은 오순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불렀고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세 절기에 모든 남자는 예루살렘에 올라와 지켰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스라엘의 명절이 우리 한국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절들을 영적 절기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즉 유월절은 사탄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로 새 출발하는 날을 기념하는 것이요, 칠칠절(맥추절)은 은혜 받고 새롭게 변화 받은 날을 기념하며, 초막절(수장절)은 물질과 생활의 복을 받고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는 날로 기념하는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절기들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명기 16장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읽은 앞부분 즉 16:1-8은 유월절을 지키라 하셨고, 오늘 우리가 읽은 16:9-17은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 지켜야 하는 농사와 관계된 절기는 세 절기가 있습니다. 초실절,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초실절(初實節)은 유월절 다음날인 무교절 기간(종교력으로 1월 15-21일) 중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을 말합니다. 이 날은 보리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로서, 보리 수확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곡물을 거두게 되면 첫 이삭 한 단을 먼저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합니다.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에 그 곡식 단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칠칠절(七七節)은 초실절 이후 7번째 안식일을 계수하여 만 49일이 지난 다음날, 즉 제 5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이때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나가고 밀 추수가 새로 시작될 무렵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리 추수 때와 마찬가지로 밀 추수의 첫 소산을 하나님께 먼저 봉헌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보리 수확을 은혜 중 무사히 할 수 있게 하신 여호와께 기쁨과 감사를 표시하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앞으로 새로이 추수할 곡물(밀)을 주신 하나님께 그 곡물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초막절(草幕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해의 각종 곡물과 과일, 등의 수확을 모두 끝내고 그것들을 저장한 후 지켰습니다. 출애굽 직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고 또한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뜻으로 제사를 드리던 일종의 추수 감사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칠칠절과 초막절은 날짜는 다르지만 그 의미는 비슷합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맥추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본래 칠칠절은 50일 후에 온다는 뜻으로 오순절이라고도 불렀는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날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라고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이날을 맥추절이라 불리게 되는 것은 보리를 추수한 뒤에 오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칠칠절과 오순절 그리고 맥추절은 같은 날입니다. 그렇지만 요즈음의 한국 교회들은 오순절과 맥추절을 분리해서 지킵니다. 유월절 즉 부활절이 지난 후 50일 후에 오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며(지난 5월 23일이었습니다), 맥추절은 한해의 절반이 되는 7월 첫 주에 지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칠칠절과 초막절을 지키라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과거를 회상하고 기념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헤아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1) 먼저 과거를 회상하여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칠칠절을 지킬 때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 지니라”(12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생활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비참하고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기억이었습니다. 바로의 노예가 되어 평생 그를 위해 고생하고 어떤 대가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모르고 살던 우리의 과거와 흡사 비슷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때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2-3)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때 우리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습니다.
(2) 오늘 우리가 받은 복을 헤아려 봅시다. 과거를 회상해 볼 때 오늘의 우리들은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먼저 믿음의 복을 헤아려 봅시다. 사탄의 종이 되어 따라다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그뿐 아니라 은혜 받고 믿음이 이만큼 성장했으니 복을 받은 것이며, 우리교회 한 가족이 되어 함께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또 가정의 복, 물질의 복을 헤아려 봅시다. 주 안에서 우리 부부가 서로 화목하고 사는 것이 복이요, 온 가족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조그마한 사업이지만 점점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이것이 복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도무지 감사한 일이 없다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의 자녀는 속만 썩이고, 사업은 불경기를 만나 고전을 하고 있는데 헤아려 볼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분은 “만약 이런 때 내가 예수를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때 만약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스펄젼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등불을 주시고, 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태양을 주실 것이며, 태양을 보고 감사하면 생명의 빛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3) 또한 앞으로 주실 복을 생각하여 봅시다.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를 위해 남겨놓으신 복이 더 많이 있습니다. 아직 받아야할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4)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립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 처음 익은 열매를 드렸습니다. 받은 복을 헤아려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힘껏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16-17절) 하신 말씀은 이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고 오늘의 받은 복을 헤아려 보면서 감사와 기쁨이 담긴 예물, 자원하는 예물을 담아 드릴 때 참 소중한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서로 나누면서 지켜야 합니다.
(1) 먼저 이웃을 생각하고 지켜야 합니다. 칠칠절이나 초막절은 즐거운 명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 모두 즐거운 명절이 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칠칠절을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11절) 하였고 초막절을 지킬 때에도 마찬가지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14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뿐 아니라 노비나 나그네, 고아와 과부들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은 이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주라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칠칠절이나 초막절은 구제하고 봉사하는 절기입니다. 과거에 어려웠던 내 생활을 기억하며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맥추절을 맞는 오늘, 우리는 이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복 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받은 복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면서 이날을 지켜야 합니다. 낙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면서 격려하고 소망을 심어줍시다.
(2)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지켜야 합니다. 칠칠절을 지키는 장소는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안식일까지도) 가정에서 식구들과 이웃들과 지내게 되어 있었지만 이 정해진 명절에는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지켜야 했습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물론 처음에는 모세가 만든 성막이었습니다. 그 후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곳이었고 이제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전국 각처에서 다 모여들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절만 되면 모두 고향을 찾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이처럼 맥추절은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했던 분들까지도 다 찾아오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날 이 시간 교회에 와 있지 않고 어디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소속을 한번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며 지켰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받은 복을 헤아려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통장을 꺼내 차곡차곡 쌓여진 재산을 헤아려 보는 즐거움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받은 복을 나누는 또 다른 즐거움도 있습니다. 내가 즐거울 때 주변에 즐겁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칠칠절이나 초막절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소중한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하셨습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모든 열매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농사를 짓고 나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나이다” 하고 돌려 드릴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칠칠절이나 초막절을 지키는 사람에게 풍성한 소출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초막절)을 지키라.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출 34:22-23)고 말씀하시면서 정하신 절기들을 잘 지키는 백성들에게는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출 34:24)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약속이요. 보장입니다. 여러분의 산업과 가정을 누가 탐내거나 누가 엿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거두게 하신 소중한 열매를 드려 칠칠절과 수장절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산업이나 가정의 지역이 더 넓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받은 복을 헤아려 감사하는 칠칠절과 수장절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맥추감사절의 교훈(敎訓)
신 16:9-17 / 이규영 목사
오늘은 맥추(麥秋)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맥추절을 지켜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1년에 3차에 걸쳐서 꼭 지켜야 하는 3대 절기를 명령하셨는데, 첫째 절기가 유월절(무교절)이고, 둘째 절기가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이고, 셋째 절기가 수장절(추수감사절)입니다.
그 중에 맥추절은 여름곡식을 거두어 먹게 된 것을 감사하며 함께 기뻐하는 여름축제로서 유월절이 지난 50일째 지키는 절기로 오순절이라고 하고,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씩, 7주간이 지난 후에 지키는 절기라 해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모든 절기가 그러한 것처럼 맥추절은 단순하게 여름곡식을 거두어 먹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맥추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 되심을 믿게 하시고, 본래는 빈손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케 하고, 희생이 있는 제사나 누룩 없는 제물, 최상의 것을 바치게 하심으로 하나님에게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데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모세가 맥추절에 십계명을 받았으며, 신약시대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어 교회가 탄생한 날로서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연례행사의 하나로 정도쯤으로 생각하면서 피상적으로 지켜서는 안 됩니다. 맥추감사절의 교훈을 바로 알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여 주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깊은 감동과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지나간 일을 감사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사하는 것은 마땅한 자세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어떠했든지 간에 알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태어나, 단 하루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지금 존재하는 것은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에 많은 이들의 도움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며, 그 관계는 무엇보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더욱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肉身)만이 아니라 믿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지혜로 성경을 터득하고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구원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임은 물론 주변에 누군가 나를 위해 오래 동안 기도해준 사람들과 교회로 인도하여 성경의 진리를 깨우쳐주어 오늘에 이르게 한 사람들의 사랑의 보살핌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며 하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더욱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아름다운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사랑과 감사가 넘쳐야 할 인간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갈수록 사랑과 감사가 식어져가면서 정반대로 제거되어야 할 갈등과 미움과 증오가 전염병처럼 만연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자(歷史學者) ‘닐 퍼거슨’(Niall Ferguson)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이 유럽을 앞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산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삶의 철학, 방향, 태도에 관한 문제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는 신앙 윤리적인 면에서 근면한 기독교 윤리가 미국의 성장과 유럽의 퇴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피거슨 교수는 “미국과 유럽간의 이 같은 차이점은 어떻게 생겼을까? 북유럽 국가들의 노동시간 감소(減少)는 교회에 가는 횟수의 격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웨덴, 덴마크의 경우 10%미만의 인구만이 최소 한 달에 한번 교회에서 예배(禮拜)를 드린다. 최근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민 약 50%가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미국 사람의 경우 82%가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될 경우 유럽은 계속해서 미국에게 뒤처질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나라 사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열매를 거두게 만들었던 그 근본요인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개인과 민족을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절기(節期)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재조정하기를 원하시고 신앙의 순수한 면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너무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점점 감사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비극은 감사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 바이러스에 의한 독감이 많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독감의 종류도 많고, 한번 걸리면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평, 불만의 바이러스입니다. 바로 이 불평과 불만의 바이러스에 걸리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각박해갑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영적 상태를 진단해보면서 요즈음 유행하는 불만 바이러스를 치유하기 위해서 맥추감사절의 교훈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불만 바이러스에서 치유함을 받아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맥추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맥추감사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절기입니다.(10절,12절,17절) : 본문 10절과 17절에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본문 12절에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가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에는 “기억하라”는 단어가 16번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신명기서는 출애굽을 경험(經驗)하지 못한 출애굽 이후의 세대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교육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인데, 그 중심적인 강조점을 보면 “여호와 네 하나님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신 8:11-20).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일의 이스라엘의 역사(歷史)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조금 잘되면 교만해지고, 조금 어려우면 낙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리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세월이 오래 지나거나 그냥 내버려두면 지난 과거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되고, 감사가 희석이 되고 변질이 되어서 감사는커녕 불평, 불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1년에 3차에 걸쳐서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① 유월절(무교절)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절기이요 ② 맥추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첫 수확을 거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드리는 절기요 ③ 수장절은 한해 농사를 다 추수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3대 절기는 공통점은 받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감사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각 절기마다 의미가 다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공통점(共通點)은 세 가지가 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는 공통된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가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존재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많은 형제들이 있는 집안에 막내둥이처럼 강대한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그의 후손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내셨기 때문에 세상 역사 속에 햇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인큐베이터 속에서 숨을 몰아쉬는 미숙아처럼 특별한 보호 속에서 온갖 시련을 견디고 태어난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한 귀퉁이에 불과한 고센 땅에서 강대한 이집트 사람들에게 무려 430년 동안이나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온갖 고난을 다 당했던 약소(弱小)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력(自力)으로는 도저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수 없는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심으로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여 주신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광야 40년 동안 낮에는 불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을 쳐서 물을 주시고, 불 뱀에 물려서 죽어갈 때에 놋뱀(구리뱀)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살게 하시고, 마라의 고통에서 엘림으로 축복으로 인도하여 주셨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도록 하셨고,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신 8:1-2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그 땅에서 첫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곧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감사하는 것보다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기뻐하다고 금방 불평하고 원망하고, 원망하다가도 좋은 일이 금방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변덕(變德)이 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민족 특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지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갈 것을 명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00편의 기자는 4절에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화) 영국의 제레미 테일러(Jereme Tayler) 교수는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만약 세무서의 직원들이 교수님의 모든 재산을 차압해도 감사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실 수 있습니까?"
제레미 테일러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저의 재산을 다 빼앗았다고요? 그러나 빼앗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의 해와 별,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도 여전히 나의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내 친구들과 내 마음에 있는 신앙의 고백도, 말하는 입도, 글을 쓰는 손도 차압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의 약속과 천국에 대한 소망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잃었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물질(物質)을 잃어버리면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낙심(落心)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란 우리 인생에 있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방황함으로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에 주목함으로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소원을 묻자, 솔로몬은 겸손하게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솔로몬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나이가 들면서 받은 은혜와 감사를 점점 잃어버리고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솔로몬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하면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과거에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기억하면 현재를 올바르고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감격이 희미해지면 그의 삶은 반드시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결국 영적 패인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던 다윗은 비록 한때 순간적인 정욕과 마귀의 유혹으로 인하여 엄청난 죄를 지울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 철저히 기도하면서 간구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권(王權)도 아니었습니다. 건강(健康)도 아니었습니다. 명예(名譽)도 아니었습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성신(聖神)을 거두어 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즐거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 11-12절에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철저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어버리면 오늘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가정, 섬길 수 있는 직장, 믿음으로 교제할 수 있는 공동체인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 1031의 말씀처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면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공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분주함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나 죄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3:12-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罪)의 유혹(誘惑)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모든 죄의 출발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모든 은혜의 출발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부족한 나에게 일마다 때마다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인생의 비참(悲慘)함은 잊어버림으로써 발생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잊어버리면 불효자가 됩니다. 조국의 사랑과 보호를 잊어버리면 매국노가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면 불신앙자가 되어서 자신도 남도 망하게 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후대하셨는가에 대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첫 열매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는 절기입니다.(출 23:16 상, 출 23:19)
본문의 말씀에는 첫 열매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맥추감사절에 대해서 다른 성경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출 23:16 상반 절과 출 23:19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첫 열매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라고 명령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에 들어서 정착한 후 파종하여 첫 번째 추수를 하자마자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그치고 첫 열매의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수확에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첫 열매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사실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 물량은 얼마 되지 않는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물량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열매”란 “으뜸가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순서상의 첫 번째만이 아니라 첫 수확을 하게 하신 하나님을 으뜸 되게 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첫 열매는 수확한 것 중에 제일 좋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큰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헌신의 자세가 곧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제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좋은 첫 열매를 맥추 감사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것을 하나님이 잡수셨습니까? 민 18:12-14에서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이스라엘 중에서 특별히 드린 모든 것은 네 것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정성만을 받으셨을 뿐이지 결국 그 첫 열매는 그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맥추절에 크고 좋은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 감사제를 해마다 계속하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일 좋은 첫 번째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소산물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함으로 우상 앞에 제사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시고 땀의 열매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아십니다. 땀을 적게 흘리고 많은 유익을 받겠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자신이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수고했다고 열매가 항상 거두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복을 주실 때 우리는 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이 우리의 가치 중에 하나입니다. 그 땀과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오늘 주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누릴 분량이 있습니다. 오늘 성실하지 못한 자가 내일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마음을 다하여 믿음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미래를 더 영광되고 아름답게 하실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절기입니다.(출 23:16 하) : 출 23:16절에서 "수장절(收藏節)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미래가 더 영광되고 아름답도록 절기를 지키는 날입니다.
유월절이나 맥추절이나 수장절은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연속성(連屬性)을 가집니다. 유월절은 유월절 어린양 되신 우리 주(主)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실 것을 예표(豫表)합니다. 수장절은 우리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천국의 알곡으로 모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하실 것을 예표 합니다. 주님은 과거에 주신 은혜를 보아서 미래에 받을 은혜도 기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대 절기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맥추절 감사절은 유월절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으로 살리셨을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자유를 주신 것이 유월절입니다. 중생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월절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맥추감사절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정말로 유월절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맥추감사절의 은혜도 계속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맥추감사절은 신약의 오순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 주심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유월절 없이 오순절이 없고, 오순절이 없이 유월절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유월절을 통과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오순절의 당사자입니다. 교회의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인데, 여러분 개인의 오순절은 언제입니까?
2. 어떻게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합니까?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합니까?
첫째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대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10절, 16-17절) : 본문 10절과 16-17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대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빈손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맥추감사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은혜로 다시 주님 앞에 돌려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에게 풍성히 갚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정성담긴 봉헌을 기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마음만 드리면 되지 꼭 물질을 드려야만 하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우리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행동을 자극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사람과 대화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사람과 물질을 거래해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이 남을 구제하고 도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즉흥적(卽興的)으로 지갑을 여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9:5-7에서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세대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서로 나누며 즐거워하는 날입니다.(11,14절) : 본문 11절과 14절에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대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서로 나누며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복 주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어드릴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즐거워하는 축제의 공동체로 사는 것이 주님의 기대와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 대하여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는 객과 고아와 과부 같은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구별된 레위인이 있습니다. 신분적으로는 주인이 있고, 노비가 있습니다.
아버지 세대가 있고 자녀 세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열린 교회, 열린 성도가 되어서 서로 기쁨도 함께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적으로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공동체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맥추감사절의 의미를 오늘에 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맥추감사절을 통하여 마음껏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셋째는, 이미 주신 복에 대한 감사 뿐 아니라 앞으로 복 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해야 합니다.(15절) : 본문 15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복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복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그것은 과거의 은혜입니다. 과거의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매일 새로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에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은 이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빛을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햇빛을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햇빛도 소용없는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빛이 밤낮으로 비췰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만의 고유한 축복입니다. 감사(感謝)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위대한 영광의 수단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사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멀어진 감사를 다시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생활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내버리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험난한 인생길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를 계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비하면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수준은 아주 미약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계발되어야 할 부분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건전하게 성장하고, 가문을 세우고,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결단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기억합시다. 우리의 땀과 수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거둔 삶의 열매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립시다. 과거에 주신 은혜를 보아서 미래에 받을 더 아름답고 영광된 은혜를 기대하는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각자가 가정과 교회와 민족의 대표자로서의 사명을 재확인합시다. 우리 각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가정과 교회를 믿음으로 세우고 민족을 하나님백성답게 세우는 은혜와 축복의 당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면서 맥추절을 지키면 하나님 말씀과 은혜로 마음의 창고를, 재물로 땅위의 창고를, 하나님의 상급으로 하늘의 창고를 가득히 채워주십니다. 또 새 포도즙이 넘치게 됩니다. 이제 바라기는 맥추절을 바르게 지켜 하나님이 주신 박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맥추절을 즐겁게 지키라
신 16:9-12 / 문기태 목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신 것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경의 모든 비밀들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아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이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시키는 절기를 크게 셋으로 주셨습니다. 그 절기가 바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오는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칠칠절 즉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를 거둡니다. 그래서 처음 열매를 거둔다고 해서 초실절, 유월절 후 칠주가 지났다고 해서 칠칠절로 표현합니다.
또 가을이 오면 농사를 지어서 모든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고 장막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수장절, 장막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며 즐거워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는 아무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만 지켰습니다. 똑같이 출애굽을 했지만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은혜받지 못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절기의 축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축제는 공동체의 기쁨을 말하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만이 이 절기를 맛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제의 깊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그냥 탄식하다가 인생을 끝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종류로 구별합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똑같은 이스라엘 백성인데 애굽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 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왔을 때는 광야라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앞세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다 죽고 여호수아, 갈렙과, 제2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와, 절기를 지키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첫째 애굽 신자입니다.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택함을 입었지만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광야 신자입니다. 광야 신자는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와서 광야에 있듯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여전히 은혜를 받지 못한채 의심과 믿음을 오가며 힘들게 예수 믿으면서 세상 사람도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가나안 신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신령한 신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감격하며 지내는 신자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이끌어내어 교회로, 교회에 온 광야 신자들을 인도하여 천국의 맛을 볼 수 있는 신령한 신자로 변화시킵니다.
광야 신자는 교회에 오기는 왔는데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신자가 되어 광야를 빨리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꼴로 심령을 채우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맥추절을 맞이해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맥추절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맥추절을 지키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요?
1. 맥추절에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11절하)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11절하)
은혜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즐거워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받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애굽의 세계, 세상의 세계를 못잊어서 거기에 매여있는가 한번 돌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행복하게 살려고 사는 것입니다. 어디에 행복이 있나? 어디에서 즐거움을 얻나? 인간은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얻기까지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나는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기까지 이 세상의 즐거움은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는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했고 솔로몬은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누렸던 다윗은 그의 즐거움이 영원한 것이요, 하늘의 즐거움이요, 환난이나 곤고나 어떤 역경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낙으로 즐거움을 누렸던 솔로몬은 일시적인 것이요, 공허한 것이요, 결국 후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낙을 누리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다 헛되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같은 즐거움을 찾으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인생의 어떤 낙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즐거움은 없습니다. 기왕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라면 빨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광야에서 배회한 만큼 자기 생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했습니다.
포도주와 젖이 뭡니까? 포도주는 즐거움이고 젖은 만족입니다. 사람들은 목마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만족을 얻을까, 즐거움을 얻을까' 해서 참 양식도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만족할 수 없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전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인생을 즐겁게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즐거움을 여기에서 얻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돈을 뿌리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돈을 쓰지만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돈이 없이도 얼마든지 만족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헤매고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움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함을 얻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은혜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즐겁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즐거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 즐거움을 주님안에서 맛보았기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부르짖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맥추절은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제를 벌이며 즐거워하라고 이 절기를 주셨습니다. 즐거움이 넘치게 하려고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앞에서 참 즐거움을 맛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함으로 더 행복해지기 바랍니다.
2, 맥추절에는 이웃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11절)
"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할지니라."(11절)
이 즐거움은 사랑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이웃과 나눔으로 맛보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즐거움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먼저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사람들은 가족들입니다. 가족들과 웃고 살아야 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 하라(잠언5:18)" 그리고 노비는 오늘로 치면 종업원 또는 직장 동료를 의미합니다. 또 레위인은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당시에 레위인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추수할 밭도 과수원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 가족과만 잔치를 하고 즐기면 레위인은 다른 백성들과는 달리 아주 우울한 절기를 보내야 합니다. 교인들은 주의 종과 즐거움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거나 가족을 잃고 가난하게 사는 이들입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절기가 고통스런 시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위에 외로운 사람, 불행한 사람을 찾아 돌아보고 함께 즐거움을 나눌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주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서로 이웃과 나눔으로 확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독점해서는 안됩니다. 하늘은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누어야 합니다. 나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의 슬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즐거움이 모두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즐거움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의 은혜가 됩니다. 천국은 공동체의 즐거움을 나누는 세계입니다. 너와 내가 함께 즐거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공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절기는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공동체의 즐거움이요, 축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움에 취하여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가족만을 챙기기 쉽습니다. 우리가 서로 돌아보며 적극적으로 주는 삶, 베푸는 삶을 실천할 때 받는 것을 통해 누리는 기쁨보다 열 배나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혼자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아보아 한 사람이라도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맥추절을 복되게 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맥추절에는 하나님 앞에 드리며 즐거워해야 합니다.(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11절)
이것은 소망의 즐거움인데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입니다. 16절을 보면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드릴지니라.'했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시험드는 사람이 있고 은혜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빈손으로 여호와께 오지 말라? 야 복받을 기회다.' 하고 하나님 앞에 올 때마다 빈손이 아니고 무엇인가 들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와 외가에 갔는데 우리집이 너무 너무 가난하니까 가지고 갈 것이 없는데 어쩌다가 저희 어머님이 무언가를 싸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외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그냥 오지 뭐 이런걸 가지고 왔냐? 가난하게 사는 것을 다 아는데..."
'그냥 와도 되는데 뭘 가지고 왔느냐'하시지만 어려운중에 드리는 선물이 부모님의 마음을 더 감동하게 합니다. 자녀의 것을 탐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가난한 자녀라도, 어린 자녀라도 진심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적은 것으로도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감동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즐거움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입니다. 부모에게 드리는 자녀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때마다 바치는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심령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즐거움을 얻으시고 내 가정에서 가족의 즐거움을 얻으시고, 내 이웃들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생애가 온통 즐거움으로, 축제로, 잔치하는 삶으로 이어지기 바랍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옛날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어키 노병들을 취재한 내용입니다. 그중에 한 노인이 한국말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리랑을 비롯하여 한국의 노래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불렀습니다. 리포터가 "할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과 노래를 잘 아세요?" 하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과 노래를 배우게 됩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50년이나 지났지만 우리 대신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들은 지금도 한국을 사랑하여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벌써 그들의 희생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한국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형제의 나라로 여깁니다. 한국 사람을 아주 반가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신을 내어 주며 사랑을 하였고 우리는 저들에게 아무것도 준적이 없습니다. 목숨까지 희생하며 싸워준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금방 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주심을 너무 빨리 잊고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증거로 독생자 예수까지 주셨건만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빨리 잊는 것입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무리 구원받은지 오래 되었어도 주신 복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아들까지 희생하셔서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희생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사랑을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까지 드린 사람은 쉽게 사랑이 식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받은 은혜를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행복해질 것입니다. 맥추절을 맞아 주님안에서 즐거워하고,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리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복을 주신 대로 힘을 다하여
신16:9-11 / 박덕기 목사
‘생명의 단비!’ 104년 만의 가뭄이라는 중부지방에 어제 내린 장맛비에 대한 뉴스의 타이틀입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마도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크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장마가 봄철에 찾아온다면 그 아름다운 꽃들이 어떻게 피어나겠으며, 가을에 온다면 애써 가꾼 곡식을 어떻게 수확할 수 있겠으며, 겨울에 온다면 꽁꽁 얼어붙고 추워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해마다 찾아오는 장마도 절대로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장마가 우연이라면 어떤 해에는 오기도 하고, 어떤 해에는 오지 않기도 하며, 어떤 해에는 장마가 봄에 오기도 하고, 어떤 해는 겨울에 오기도 할 것인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장마는 해마다 어김없이 여름철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철의 더위를 한 달 가량 지나가게 해주니,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보리나 밀 옥수수 감자 등을 거둬들이면서 지키는 감사 절기였습니다. 맥추 감사절을 가리켜 초실절이라고 했는데, 이는 한 해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고, 또 칠칠절이라고도 했는데,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칠 안식일 다음날에 지키는 절기라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또 오순절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오십일 째 되는 날로,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까?
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고 살았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해주셨고, 물이 없을 때는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여 마시게 하여 주셨으며, 배가 고플 때 ‘만나’라는 신비한 양식을 날마다 내려 먹여 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에는 메추라기를 몰아주어 먹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해주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사 가나안 복지에까지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은망덕 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백성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농사를 수확한 후에 “너희는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기막히게 맛 있은 요리를 먹고서 크게 감탄했습니다. “이제껏 먹어 본 요리 중에서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만든 요리사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임에 틀림없다. 많은 상을 주어야겠다.” 그러면서 요리사를 불러들였습니다. 요리사는 임금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겸손해 했습니다. “임금님, 칭찬해 주시니 대단히 기쁩니다만, 이 요리는 제 기술이 좋아서 만이 아닙니다. 만약 좋은 야채를 파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칭찬해 주시려거든 좋은 야채를 많이 파는 채소 장수를 칭찬해 주십시오.” 임금은 그렇다고 생각되어 채소 장수를 불렀습니다. 궁전으로 불려 간 채소 장수는 칭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임금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야채를 팔았을 뿐이며, 칭찬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야채를 키운 농사꾼이겠지요!” 이번에는 농사꾼이 불려갔습니다. 농사꾼은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임금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농사한 야채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얘기를 듣자 깜짝 놀랐습니다. “임금님, 그것은 틀립니다. 저는 그저 손질만 했을 뿐이지요. 제가 땅을 갈아 씨를 심어도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없으면, 저는 잎사귀 하나, 열매하나 만들지 못하지요. 단지 저는 대대로 농사꾼이었기에, 봄에 씨 뿌리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지요. 감사의 인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모든 일에 이렇듯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감사하므로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함입니다.
11절에 “너희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절기를 지키도록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절기가 돌아오면 전 민족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풍족하고 부요한 것이 반드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70년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생활 조건이 72가지가 있었고, 절대 필요한 것은 18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필요한 것은 5백가지이며, 절대 필요한 것은 50가지라고 사회 과학자들은 분석합니다. 필요한 것과 절대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이, 과연 70년 전보다 더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줄 모르며 불행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즐거움과 감사만이 진실한 의미에서 참된 축복이요, 참된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즐거움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는 즐거움은 길지 못합니다. 물질, 명예, 권세, 쾌락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잠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즐겁기만 했던 것입니다.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 은혜로 살 때만이 얻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생이 즐겁습니다. 감사를 하면 할수록 행복하여집니다. 반면에 은혜를 모르면 그때부터 불행하게 됩니다. 불행은 곧 은혜의 상실이요, 감사의 빈곤입니다. 이 땅에 저주받은 인생이 있다면, 그는 바로 감사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에논’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놀라운 치유의 비결이 숨어 있다.”고 했으며, ‘스피로즈 조해테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악마를 대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3.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신 16: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앞으로도 복 주실 것을 믿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반드시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출 34:24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적을 다 쫓아 내주시고, 지경을 넓혀 주시며,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태풍이 불면 열매가 다 떨어지고, 홍수가 나면 모든 수고가 헛됩니다. 재물이 많아도 육체가 병들거나 도둑을 맞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면, 지금까지 수고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녀를 잘 키워도, 한 번 크게 사고가 나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시며, 사업의 지경을 넓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베풀어주신 만 가지 은혜에 보답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더욱 풍성히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주신 자세한 규례가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1)가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신 12:7에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면 먼저 온 가족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가운데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 얻어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 가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슨 축복이든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아서 온 가족이 감사하고 즐거워한다면, 참으로 복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2)노비 곧 종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농사지을 때에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해 주었던 밑에 있는 사람들의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사업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가져야 합니다. 빈손 들고 노동자들과 함께 회사를 일으켜 거부가 되었으면, 그 이익을 종업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재벌들은 오직 자기 자녀들에게만 재산을 몽땅 상속케 하므로, 노사 간에 따뜻한 인정도 신뢰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기업가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3)레위인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 주고,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로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지은 열매를 가지고 레위인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이 세운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비록 적은 것이라도 주의 종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성도들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복을 받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전혀 하나님이나 주의 종들과 함께 즐거워할 줄 모르다가, 고통당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주의 종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감정이 없는 목석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주셨으면 그 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아니하는가 보시고, 주의 종들과 함께 즐거워하는가 아니하는가를 보시고, 섭섭하게도 생각하시고, 기뻐하시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을 때, 그 중 한 사람만 와서 감사하니까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시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4)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부가 편중되어 부자는 더욱더 부요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빼앗고, 나눠주는 것을 거부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복을 받고 교회가 부흥할 때, 가난한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가 더 크게 부흥하고, 그래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 많이 나눠주며, 어려운 농어촌 교회나 도시의 미자립 교회를 더욱 많이 도와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돌보아야 할 객과 고아와 과부가 있습니다. 곧 객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아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과부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인생길의 객과, 고아, 과부를 찾아서, 신령한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주는 사랑과 긍휼에 풍성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온 백성이 지키라고 했습니다.
민 16:16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보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려움 당할 때만 하나님께 얼굴 내밀지 말고, 복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고, 복을 받고, 창고가 가득 차고, 호주머니가 두둑할 때, 복을 주신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감사의 절기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한 사람도 빠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맥추절을 지켜야 했듯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모두 감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믿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보이되 빈손으로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물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 있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6)각기 힘대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민 16: 17절에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예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봉헌자의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성도들이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드리는 예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레 14:30에 보면 “그는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하나나 집비둘기 새끼 하나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지극히 작은 예물이라 할지라도, 봉헌 자가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준비하여 봉헌할 때,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힘껏 드리는 예물을 통해 큰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한 소년이 주님께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낳게 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된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감사는 없고 불평과 불만과 원망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 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감사 절기를 지키도록 하셨는데, 곧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었습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월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정월에 해당되는 절기이고, 맥추절은 한 해의 중간에 해당되는 절기이며, 수장절은 한 해의 끝자락인 가을에 해당되는 절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 내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항상 감사하며 살면,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고,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서 내려 주신 줄 알아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은 하루에 자그마치 10만 3689번을 뜁니다. 몸속의 혈액은 놀랍게도 하루에 1억 6800만 마일을 달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에 무려 2만 3040번 숨을 쉽니다.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심장이 그렇게 많이 잘 뛰어주고, 내가 달리라고 해서 혈액이 그 먼 거리를 달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나의 폐가 그렇게 여러 번 호흡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약간의 차질만 와도 나의 생명에 금방 이상이 오는 것인데, 내가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그처럼 여러 번 심장이 뛰어주고, 폐가 호흡을 해주니, 내 생명을 지으시고 지탱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또한 시 75:1에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 감사하고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유명한 주석가 메튜헨리는 도적을 맞고서 다음과 같이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1)내게 도적을 만날 수 있는 재물이 있는 것을 감사하고, 2)지갑만 가져가고 생명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3)재물보다 더 귀한 믿음을 도적맞지 않음을 감사하고, 4)내가 도적질한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을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감사의 마음입니까? 그래서 마이로 H 게이트는 “사람의 성격을 알아보는 가장 정교한 방법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실속 있는 감사를 하느냐로 판명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간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도록 합시다.
?1)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감사해 2)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기쁨과 슬픔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길가의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 감사/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평안을 감사/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4)내게 건강 주심 감사, 또한 연약함 감사/햇빛을 주심도 감사, 구름 또한 감사해/땀 흘리는 수고 감사, 저녁의 안식 감사/부요도 가난도 감사, 모든 것 다 감사해? 우리 모두 한 해의 절반을 결산해 보며,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건강 주심을 감사하고, 찬란한 천국의 소망, 영생의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아는 믿음 주심을 감사하여, 복을 주신 대로 힘을 다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