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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北漢山·836.5m)은 명산이다. 국내에 17개의 육상 국립공원이 있지만 북한산처럼 도심 속에서 사방 어디서든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넉넉한 산세를 보여주는 국립공원은 없다. 최고봉인 백운대나 인수봉의 모습이 아이를 업은 듯하다 하여 부아악(負兒岳), 백운대·인수봉·만경대가 3개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렸고, 그 밖에도 횡악(橫岳)·화악(華嶽)·화산(華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온 북한산은 어느 기점으로든 산 안으로 파고들면 변화무쌍한 경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널찍한 암반에 비단 같은 계류를 흘리는 골짜기가 여기저기 파여 있고, 그 양옆으로는 기암이 얹은 능선이 힘차게 솟아 있는가 하면 산릉에 서면 삼각산을 이룬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는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와 가슴 설레게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기운찬 산세에 숲도 울창해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의정부시·양주시에 둘러싸여 녹색 허파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북한산은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비봉(碑峰·560m)의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증명하듯, 고구려와 신라가 맞부딪치던 곳이 북한산이다. 그로 인해 일찍이 백제 개루왕 5년(132) 산등성이를 따라 토성을 쌓았고, 조선 숙종 37년(1711) 삼각산 서쪽 골 안의 중흥동을 피란처로 점찍고 그 중흥동을 둘러싼 의상봉~문수봉~백운대~원효봉 산줄기를 따라 석성을 둘러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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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이 속살을 드러내면서 삼각산을 이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암봉이 우뚝 솟아올랐다. 나월봉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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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대문이라 하지만 실제 14개 문이에요.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시구문도 문이고 북한산성계곡에 있는 중성문도 성문이니까요. 아무튼 오늘 고생들 각오해야 할 거예요.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등 대남문까지 가는 데만 해도 암봉 7개를 넘어야 하고, 주능선을 탄 뒤 위문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다 다시 원효봉을 넘어서려면 8시간 이상 걸릴 겁니다. 8.2km라 하지만 실제로는 12km 이상 되는 거리예요.”
북한산성탐방안내소 앞에서 만난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분소 탐방안내원 이세흥(李世興·62·녹색순찰대)씨는 북한산성을 한 바퀴 도는, 일명 열두대문 종주 코스에 대해 설명해주며 만만치 않을 거라 하고, 그 말에 블랙야크팀 박용학씨와 유성용·박세영씨는 얼굴이 굳어진다. 더욱이 북한산성 진입로로 들어서는 사이 눈에 들어온 염초봉과 백운대, 노적봉은 3월의 문턱을 넘어섰음에도 흰 눈에 덮여 냉랭함과 함께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대남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오른쪽 산길을 타고 능선에 올라서자 묘법사 부근 숲에서 까치가 깍깍댄다. 열두대문 종주산행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그 소리에 산성길 따라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평범한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어로프 길로 바뀌고, 하루 전날 내린 진눈깨비가 얼어붙은 바윗길은 복병을 만난 듯 긴장케 한다. 그러면서도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지는 웅장한 암릉이 눈에 들어오면 모두들 감탄스러워했다.
와이어로프 길과 바위를 깎아내 만든 계단길은 험한 데로 길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바위와 흙, 나무가 뒤섞인 급사면 험로는 어제 내린 눈이 살짝 덮여 길은커녕 지형조차 분간키 어렵다.
의상봉 능선은 산 안을 샅샅이 살필 수 있는 북한산 조망대
“아야!”
/의상봉 정상을 앞두고 박세영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눈 덮인 바윗길을 걷다보니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리에 쥐가 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의상봉 정상에서 조망이 터지자 박세영씨의 얼굴이 환해진다. 어젯밤 밤하늘을 밝힌 둥근 달에 오늘은 분명 쾌청하리라 기대했건만 짙은 안개가 한강 조망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도 백운대·만경대·노적봉은 기운찬 암봉의 전형을 보여주고, 용출봉에서 용혈봉을 거쳐 나월봉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은 수묵화를 보는 듯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학 탄 신선이 나타날 듯 신비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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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햇살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의상봉 정상 바위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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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햇살에 힘을 잃고 주저앉는 눈을 밟으며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으로 내려선다. 험한 의상봉 등로 대신 백화사 길(2.8km)이나 국녕사 길을 따라 올라설 수 있는 가사당암문은 한낮의 맑은 햇살에 유난히도 반짝였다. 용출봉 오르막에 접어들자 다시 한겨울이다. 눈이 두텁게 쌓이고 나뭇가지마다 상고대로 치장을 하고 있다. 미끄러워 긴장되고 이마와 등에서 땀도 흘러내리지만 올 겨울 마지막 눈이라 생각하니 이른 봄 눈길 산행이 반갑게 느껴진다.
용출봉(571m) 정상에 올라서자 이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웅장하게 치솟고 그 오른쪽으로 비봉능선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반대편으로는 북한산성 계곡과 계곡 상부를 형성하고 있는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상봉 능선은 산 안에서 북한산을 샅샅이 둘러볼 수 있는 북한산 조망대였다.
“저기 보이는 게 동장대죠? 저기서 산성을 총괄하는 장군이 지휘를 했다면서요?”
유성용씨는 대동문과 용암문 사이의 동장대(東將臺)를 가리킨 뒤 “오늘 북한산성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게 되었다”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북한산성계곡에 지금도 남아 있는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7호)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 4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 만에 성곽과 성문 공사가 끝났고, 조선 영조 21년(1745) 승려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당시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고, 시설로는 14개 성문과 동장대(東將臺)·남장대·북장대와 행궁·군창(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과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틀림없이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지어졌을 어마어마한 규모의 북한산성은 숙종이 대서문과 행궁을 거쳐 동장대에 올랐다는 기록 외에는 왕조의 피신처로 사용된 적이 없었고 더욱이 승군의 은거지인 중흥사가 일제강점기 헌병 분견소로 이용되었고 1915년에는 폭우로 당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니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산성길을 따라 용혈봉을 올려치는 사이 바위에 걸린 고드름은 한낮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자 견디지 못하고 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그 박자가 빨라지며, 마치 거기에 맞추는 듯 국녕사 스님의 독경 소리 또한 유난히 급하게 느껴진다. 역사도 이렇게 고드름이 물로 바뀌듯이 허망하게 흘러갔다 하니 괜스레 허망해진다.
하지만 북한산성 길은 감상에 젖어 있게 하지 않는다.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가슴 설레게 하고 길을 재촉하게 한다. 용혈봉 정상 직전 바위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는 사이 증취봉은 오히려 계절을 역행하는 모습이다. 봄이 왔건만 온통 흰 눈으로 덧칠하고 나무마다 설화가 만발해 있다. 반면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진 바위능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뿌연 안개가 짙어지고 파스텔톤 풍광에 여성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증취봉에 올라서자 문수봉(727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급경사 오르막을 타고 나월봉과 나한봉을 넘어서야 문수봉에 오를 수 있다. 그래도 부암동암문에 내려서자 블랙야크팀은 “벌써 문을 세 개 돌파했다”며 즐거워한다.
나월봉은 한때 의상봉 능선에서 가장 험한 구간이었으나 능선 동쪽 허리를 따라 우회로가 나면서 순탄한 구간으로 바뀌었다. 그 허리길은 삼각산 조망대이기도 하다.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가 뫼산(山) 자를 그린 채 기운차게 솟구치고 그 앞에 노적봉은 세 암봉을 떠받든 듯 든든한 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