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8월10일 [(홍)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제1독서 코린토 2서 9,6ㄴ-10
복음 요한 복음 12,24-26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
2019년 다해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축일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
복음: 요한 12,24-26
영화 ‘붉은 가족’(2012)은 행복하게 위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위험한
비밀 활동으로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고정간첩 가족
‘진달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간첩 가족은 돈 타령이나 하며 서로 싸우기 바쁜 옆집 가족을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비판합니다. 옆집 가족은 화목하고 단란해
보이는 위장 간첩 가족을 동경합니다.
콩가루 집안이지만 가족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남한 가족과,
겉으로는 단란한 가족이지만 계급으로 무장된 지령에 의해 조직된 간첩
가족과 우리는 어느 가족을 희망해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고정간첩 진달래 가족은 위계질서가 아닌 피로 맺어진
옆집 가족을 동경하게 됩니다. 북조선의 명령으로 맺어진 가족은
그만큼 결속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진달래 가족은 당의 지령을
따르는 만족도가 콩가루 집안의 만족도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뜻하지도 않게 태어나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부모님도
나와 같은 아이를 낳으려는 의도는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공동체가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결속을 주는 계명들이 존재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해야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그 공동체를 만들어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계명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부모에게 대든다든가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 공동체는 결속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가족에게서 오는 행복도
잃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목적이 강합니다.
학교에 속하고 직장, 새로운 사람과 만드는 가족에 속하기 위해 삶을
살아갑니다. 결국 그 속하기 위한 준비를 잘 해 왔다면 그 공동체에
속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데 놀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게 되면 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계명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계명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쁘게 내어주라”는
계명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고도 말합니다.
의로움이란 어떠한 공동체에 속할 자격을 말합니다. 빚을 떼어먹은
사람은 의롭지 못하여 그 돈을 빌려준 가족 공동체에 속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기쁘게 내어주는
계명입니다.
죽음에 이른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니?”라고 물을 때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해야할까요? 그냥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저는 기쁘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을 가졌습니다.”라고 말해야합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축일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담당하는 성직자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그 재산을 바치느니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 덕에 석쇠에
구워지기는 하였지만 그 뜻을 기꺼이 지켰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간 것은 내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느님 마음이고 그 마음을 간직했다면 하느님
마음을 간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어주는 것이 즐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지고 있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미워해야 한다는 말은 오물처럼 더럽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물을 어떻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 가치를 알기는 하지만 남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때 미워하는
것입니다. 돈의 가치를 알지만 남에게 흘러갈 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을 끊임없이 받는 것입니다. 생명을 끊임없이 받으려면
나의 생명을 끊임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고 있어야합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내어주려는 마음”만 남기고 죽어야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그분의 일화 중에 석쇠 위에 누워서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제 한 쪽이 알맞게 익었으니 뒤집어 놓게!” 하셨다고 한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에서
이교 신앙이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 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는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10일 토.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는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존중이라는 단어입니다.
참된 존중을 배우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짧은 우리의 여정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섬기는 밀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밀알은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존중으로 우리를 모으십니다.
존중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존중하시는 예수님의 삶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섬김과 존중이 우리를 살리는 구원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존중으로 감싸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존중의 열매가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존중안에 삶의 해답이 있습니다.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존중이 성 라우렌시오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2019년 다해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지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착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복음 12장 24~25절)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펴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 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닌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019년 다해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은 출입국에서 시작합니다. 출국과 입국이
수월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탈리아 입국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자동출입국 심사가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서로 협약을 맺은 것 같습니다. 아무런 질문 없이,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양국이 서로의 문을 쉽게 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 여권을 가진 사람이 러시아를 방문하려면 비자를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 시민권자의 러시아 입국은 상당히 까다롭다고 합니다.
비자를 내려면 비용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의 문을 쉽게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은 도시를 보는 것이 아니고, 산을 오르는 여행이었습니다.
걷고, 산장에서 자면서 힘은 들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살면서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 많은 것을 먹었고, 너무 많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자체의 동력에 의해서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움직일 것입니다. 영적인 성찰은 좀 더 느리게, 좀 더 내면에 가까이,
좀 더 낮게 움직일수록 깊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움직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시기심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욕심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의무감으로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부부는 의무감으로 살아서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아
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의무감으로 한다면 날개는 있지만, 새장에 갇혀서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새와 같을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가뭄도 견디고, 바람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집도
기둥이 있어야만 오랜 세월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람, 건물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힘든 사람의 짐을 들어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식사 준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도
많은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분,
삼계탕을 끓이는 분, 어르신들 간식으로 전을 부치는 분, 수박을 나르는
분, 사진을 찍는 분, 고기를 굽는 분,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는 겉으로 드러난 꽃이라면 봉사자들은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도 바로 그런 봉사자였습니다.
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처음 사랑
오늘은 ‘처음 사랑’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말씀에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처음 가졌던
마음을 지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쉬우면서도 너무나 어렵습니다.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지만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처음
사랑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방법은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쉽게
이어갈 수 있습니다.
즉 처음 시작이 10이라면 다음날은 11, 그 다음날은 12로 이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처음 시작을
10으로 했으면 그 처음 시작이 큰 먹고 한 것으로 생각해서 그 다음
날은 10의 노력을 하지 아니하고 9나 8로 느슨하게 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자세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자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마음 자세는 결코 승리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에서의 승리방법은 단번에 기적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바로
점진적인 성장이 진정한 성공을 이룹니다. 즉 10에서 11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것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즉 ‘처음 사랑’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유지하고 발전하고 승화시키는
것은 매일 매일 실행할 때는 그리 힘들지 않다는 사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성공과 실패와 같이 엄청난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이 작은 선택이 우리 일생이 승패를 좌우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처음 사랑을 전진해서 성장시키는 성도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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