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적토마를 학원에 메 두고 경복궁 투어를 시작했어요. 북촌과 삼청동
입구에서 내렸는데 ‘국립민속 박물관’이 보여서 들어갔어요. 티케팅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무임승차했고요, 외곽 쪽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입니다. 말뚝 박기 조형물 앞에 잠깐 멈춰 섰어요.
아시나요? 게임은 원래 목숨 걸고 해야 재미가 있다는 것을.
제 키가 커진 것은 고 삐리 때 이고 덩치는 군대시절 전후에 늘어났습니다.
누나들 영향인지 성격도 소심했고 ‘공기’나 '핀 따먹기‘ ’비석치기‘같은
주로 여학생들이 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는데 사춘기를 겪으면서 껄렁해
지더니 고 삐리 때는 7공주 파 여학생들과 '말뚝 박기‘나 ’기마전‘을 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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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닥 장소에 제한이 없는 말뚝 박기는 먼저 편을 가른
다음에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합니다. 그 다음 술래 쪽 주장이 벽이나 나무
등에 기대고 서 있으면 나머지 무리가 차례로 허리를 구부려 양 다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댑니다. 공격 팀은 도미노로 등에 올라탄 후 공격 앞으로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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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와 간격을 최대한 좁힙니다. 만약 공격수의 발이 땅에 닿게 되면 아웃입니다.
"Are you ready?"무슨 놀이든 이기는 싸움을 하려면 타깃을 정해 밟아줘야
합니다. 가위 바위 보를 안 하는 공격권은, 상대가 자빠져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1.2.3.4.5. 5번을 집중 공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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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1 빳 따.
2 빳 다,
3 빳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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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장군을 지나 근대화 연쇄점, 이발소, 만화방, 다방까지 속속히 추억이
있지만 패스합니다. 어린이 박물관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총독부 내리고
새로 지은 집인데 어째 왜놈 야스꾸니 분위기가 납니다. 어린이 박물관도 패스,
낟가리 둥지가 올해 이엉을 새로 쌓았는지 새털처럼 부풀어 있습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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낟가리를 보면 ‘의좋은 형제‘가 생각납니다. 박물관 내부에 들어가 보니 이것
저것 볼거리가 있었지만 ‘1964‘와’1991’이 눈에 확 들어와서 한 컷 찍었어요.
상여가 무지 화려하네요. 보통은 습자지 같은 종이로 만든 꽃상여를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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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막새를 일일이 조각을 한 상여는 처음 봅니다. 가격이 조금 나갈 것 같네요.
가마가 천장이 없어요. 크기도 생각보다 작고요. 호패와 인장, 저것은 비손
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저를 낳고 빨간 고추를 새끼줄에 매달았을 것입니다.
“물러가라, 호이, 호이" 무당이 쓰는 종입니다. 곤장 중에 가장 큰 놈이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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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네요. 저놈으로 볼기짝을 맞으면 많이 아플 것입니다.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완전체 지석이 국립박물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바로 경복궁
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티켓 팅을 했어요(2600). 경복궁은 서울 생활 40년 동안
5번 정도 온 것 같아요. 가장 가깝게 왔다 간 것은 15년 전 경복궁 역 쪽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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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서 돗자리를 깔고 온 가족이 야외스케치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미술을 하는 이유가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고궁의 가을은 컬러로 오는 것 같아요. 노랑, 빨강, 파랑이 선명한 원색을 뽐내고
있었어요. 옛날 중앙청 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문민정부 때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형태를 변형시켰는데 괜히 건드렸나싶어요. 아무리 얼룩진 역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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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그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훨씬 순기능이 많다고 생각하는 저를 지지해
주시라. 경복궁은 고종과 관련이 많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단행한
근본 목적은 아들의 왕권강화 때문이었어요. 저는 흥선 대원군을 싫어했는데
자나 깨나 자식 생각하는 부심을 알고부터 존경하기로 마음을 바꿔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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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 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으로부터
한양 성으로 옮겨 신도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을 착수했어요.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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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던 것입니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 신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
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답니다. 명칭은
‘군자만년 개 이 경복(시경)’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는데 풀이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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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의 큰 복을 도우리라 "는 뜻입니다.
경복궁의 히스토리는 태조 이성계가 태조4년(1395)애 창건했습니다만,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없어졌고, 그 후 273년간 재건되지 못하다가
고종5년에 복원되어 고종은 그해 7월에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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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종 32년 명성황후가 건 청궁에서 시해 당하자 고종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 바람에 경복궁은 정궁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국권을 강탈당하면서 궁궐 전각 200여동이 파괴되었고, 경회루와 근정전등 10여동만
남았었는데 궁의 남쪽에 근정전 정면을 막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조선 정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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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모를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총독부 건물을 부순 것일 겁니다.
경복궁은 왜놈 낭인들이 국모를 시해하고 주검을 불에 태운 통곡의 장소입니다.
원통하지만 나라를 빼앗겼으니 뭔들 성한 것이 있겠어요. 최근 기사에 명성황후
시해를 목격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글을 전시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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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 저차 다음주도 덕수궁을 들려야겠습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 물가에 세트를 만들고 축제를 하네요. 경복궁을 창건
할 때 태조가 지은 누각이 있었으나 태종 12년에 이를 크게 고쳐짓고 주위에
네모난 연못을 팠다고 합니다. 지금 보니 경회루 연못이 생각보다 크고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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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는 곳이냐고요? 연회를 베풀고 풍유를 즐기던 곳입니다.
경회루도 임진왜란 때 일부 불탄 것을 고종4년에 재건했어요. 48개의 육중한
돌기둥이 지금까지도 침하현상 없이 수평을 유지한다니 조선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경회루는 성석교회 청년들과 맨 처음 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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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국보 제223호)은 문무백관이 공식 행사를 하는 곳입니다.
'자경 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 대비를 위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고종의 양 어머니인 신정왕후가 거처했던 자경전 앞 꽃담이 상당히 길고 멋진데
복원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꽃담에 새겨진 글씨가 '낙강' '만년 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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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라는 글귀가 들어가야 하는데 가운데 있어야할 '만세'가 누락됐다는 것
같습니다. 늦게라도 발견돼서 다행입니다. 승질내지 말고 다시 꼼꼼히 복원하시라.
대원이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경복궁이 불이 나서 고종 25년에 다시 지었어요.
근데 경복궁에 누가 불을 질렀을까요? 자경 전 뒤 켠 담에 붙어있는 십장생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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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담과 어울려 돌출되지 않게 축조한 기발한 착상과 모습이 빼어나 보물 제
810호로 지정되어 있고 꽃담은 서쪽입니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앙에는 대청을 동서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습니다. 이 건물도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어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쓰여 졌는데 지금 건물은 1994년에 복원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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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 후원의 아미 산 굴뚝은 조형미가 뛰어나 보물 제 811호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강녕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의 중심 건물로 동서 양측에 여러 개의 방을 두었고
그 중 가운데 바에서 임금이 주무시고 그 둘레 옆방에는 상궁들이 숙직하였답니다.
강녕전 동쪽에는 동 소침인 연생전이 있고 ,서쪽에는 서 소침인 경선 전이 있으며
연길 당 등의 부속건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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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 은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보던 편전 건물 중 하나인데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에 다시 지었습니다. 동쪽으로 만춘 전, 서쪽의
춘추 전과 함께 편전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고궁 투어 하는데 3시간이 걸렸고
내킨 김에 북촌으로 넘어갔어요. 북촌이 생각보다 사이즈가 커서 2시간 동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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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지 못했어요. 배고파서 김치 찌게 하나 먹고 전망대로 올라갔어요.
자잘한 카페들과 의류 숍들이 홍대처럼 상권을 이루고 있었어요. 북촌은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촌 역시 북악산과 인왕산이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형상입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대부분 국내 관광
객들입니다. 전망대 부근 어느 곳은 신혼 때 살았던 만리동처럼 가파른 골목 계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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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있었어요.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네요. 차는 어떻게 끌고 온 것이여?
발렌시아가 신발이 16만원이라고 해서 한참을 갈등하다가 그냥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 아직도 명품 욕심이 없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백 만 원 짜리 운동화가
16만원이라는데 어떻게 그냥 갑니까?
2020.10.18.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