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知彼知己 百戰不殆 라는 말이 있다. 현재 애국세력들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않던 국가체제를 위협하는 세력들과 대결 중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운동권 세력들이다.
운동권이라는 표현은 원래 사회변혁운동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를 줄여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동권은 서구사회의 사회개혁운동과는 달리, 대부분 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반(半)합법, 비(非)합법적인 정치활동을 하는 일단의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또한, 그 지향하는 바가 주로 사회주의 혁명 노선이나 기존 사회체제, 질서의 해체를 추구하고 있어 운동권이라는 말은 곧 혁명세력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권은 그 뿌리를 1927년 결성된 사회주의동맹 등에서 찾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갖춘 운동권의 시초는 1940년대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해방 후 남로당 등을 건설한 세력들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필자 또한 처음에는 현재 활동하는 운동권들의 역사를 30년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현재 운동권의 원로로 불리는 자들과 각종 기념 사업 등에서 나타나는 자들의 인명 기록을 토대로 파악한 바 이들의 역사가 반세기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이들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40 년대 ~ 1960 년대 초
1940년대 해방 직전까지 한반도의 독립을 위한 다양한 세력들이 활동했다. 그 중에서 공산주의 세력 또한 독립 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들 중에는 독립 운동 세력 강화의 차원에서 공산주의와 연대를 시작한 계열과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방편의 하나로 독립 운동을 지원한 세력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중국 팔로군 등에서 활동한 일부이며, 후자는 소련군으로 활동한 세력과 일본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활동한 세력들 위주였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의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심각한 혼란이 있었고, 이 와중에 북쪽은 소련군의 점령 하에 공산주의 세력이 정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반면, 남쪽의 경우에는 미군정 등의 지지를 얻은 미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 일본 등에서 귀국한 세력,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세력 등이 서로의 의견을 내세움으로 인하여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됐다.
이런 와중에 생겨난 것이 바로 남조선 노동당이다. 이 남로당 계열 이외에도 사회당, 민족 진보당 등 다양한 공산주의 계열 정치 세력들이 서로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과 남한 내부의 불안을 야기하기 위해 폭력을 벌이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 사건들이 조선공산당이 선동한 서울대 종합화안 반대 사건(1946년 8월), 조선공산당이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한 내 위조지폐를 만들어 유통시킨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년 5월), 남조선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일어난 9월 총파업 사건과 10월 대구폭동사건, 1948년 UN 결의에 따라 파견된 UN한국위원단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무장 폭동인 2.7 폭동 사건 등이 있다.
결국, 한국 전쟁을 겪고 난 후에야 1940 년대 남한 내에서 지하당 구축 및 공산주의 혁명을 시도하던 세력들이 표면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북한 정권의 지원 하에 지하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전반은 지하조직과 운동권에 의한 남북 대결보다는 주로 무력 시위를 통한 열전의 형태를 띄었다.
이후,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고 시위를 하는 것이 당연시 됐다.
북한은 이 때를 남조선 해방의 시기로 간주, 한국전쟁 이후 지하 활동을 하던 세력들의 합법화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었다.
이 때 당시 가장 유명한 것이 1961년에 만들어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이다. 처음에 이들은 1943년 김창숙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던 ‘민족건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생겨난 중도적 단체였으나, 이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회당 등의 혁신계 정치인,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공산주의적 시각에 동화되어 점점 더 좌익 색채를 띄게 된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재미정치학자 김용중을 내세워 그의 ‘영세중립국화를 통한 민족통일’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소련을 배제하고 무장해제를 하여 ‘영세 중립국’을 만드는 것만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부적인 지배권은 북한과 연계한 세력들에게 빼앗김으로써 중도적이라는 위치는 잃어버렸다. 한편, 5.16 혁명을 계기로 수많은 좌익 단체들에 대한 검거가 실시됐고, 이 중 상당수의 친북-연북 좌익 단체들이 해산됐다.
그리고, 운동권 세력들은 다시 지하로 숨어 들게 된다. 이 시기 매우 중요한 사실들 중 하나가 바로 현재 운동권의 뿌리가 되는 소위 원로라는 자들이 이 때 참여했던 공산주의 계열이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종린 汎民聯 명예의장, 나창순 汎民聯 남측본부의장 겸 통일연대 상임대표, 정효순 汎民聯 대전-충청 의장, 김규철 汎民聯 서울의장, 서상권 汎民聯 부경연합의장 등 80대 운동권 인사들 대부분이다.
1960년대 ~ 1970 년대 초반
5.16 이후 한국 정부의 강력한 반공 정책과 계속된 북한의 무력도발 때문에 국민들의 반북 정서는 심화되고 지하세력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편, 북한은 4.19 당시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크게 후회하며 제2의 4.19를 만들기 위해 직접 간첩을 남파하여 지하 조직을 구축하고, 무력 도발을 통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시기의 사건으로는 동백림 사건, 통일 혁명당 사건 등이 있으며, 이 때 소위 지식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북한의 조종을 받는지도 모르고 북한이 주장하는 것 중 어느 정도 온건한 방향을 지지하다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북한의 시도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통일 혁명당’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4년 3월 15일 공작원 김수영을 따라 월북한 김종태가 북한노동당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지하당을 구축하여 혁명을 완수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을 광범위하게 포섭,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수도를 점령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내전 상황을 일으키려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조직이 대부분 검거됨으로써 북한의 시도는 실패하고 이 사업을 지시했던 허봉학은 숙청당했다. 당시 사건 주모자인 김종태는 북한에서 차관급으로 대우받던 거물 간첩이었으며 현재 해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사범대학이 있을 정도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 됐을 때 한국 정부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학생 운동권의 발아가 시작됐다.
특히, ‘청맥’ 등의 좌익 편향적 잡지들이 발간되고,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좌파적 시각에 대한 호감을 지니게 됐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유명한 사람이 바로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한명숙 前 여성부장관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등이다.
이들은 남한 내에서 본격적인 운동권의 뿌리로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운동권들은 주로 이념서클 등을 중심으로 지하활동에 주력했을뿐, 본격적인 사회활동은 하지 않던 시기였다.
1970년대 중반 ~ 1980년
197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발표와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났고 지하 세력들은 4.19 실패의 교훈을 기억하고 있기에 유신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불안요소를 놓치지 않았다.
한편, 북한에서는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NLPDR)이 처음으로 한반도 공산화 정식전략으로 규정되었으나, 남한 내 지하좌익 세력들이 이를 한국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신 선포와 전태일 분신 사건 등으로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자 지하 세력들은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이 열망하던 것을 이용하여 지하 조직을 토대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상적 토대가 필요하다며 각종 이념 서클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권 내에서조차 북한과의 연계사실은 금기사항 이었기에 지하 세력들은 공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발언을 내뱉지 않았다. 또한, 자금지원, 법률지원, 투쟁교육 등으로 학생 세력들의 측면 지원에 주력했을 뿐 혁명을 수행할만한 전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이때부터 민주화 운동과 민중 운동에 좌익 색채가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1975년 경에는 처음으로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으로 구분되는 내부 사상 논쟁이 발생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서울대 내 지하 이념 서클인 ‘한국문학연구회’의 “정치 투쟁이 투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한국사회연구회’의 “노동운동, 민중운동이 투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단지 투쟁방법에 대한 논쟁이었을 뿐 그들의 큰 줄기를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때는 남북한 간의 치열한 첩보 전쟁 와중에서 학생 운동권들이 양쪽으로부터 희생당한 사례가 많았는데 바로 인민혁명당 재건사건(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회 사건(민청학련 사건, 1974년) 등이 그것이다.
한편, 북한 사상 최고의 간첩으로 불리는 정경희는 이 때 남파공작을 통해 대규모 공작망을 구축하여 그 공로로 장관급인 대외연락부장이 되기도 했고 채수정은 남한 내 7개 간첩망을 구축-운영하다 1974년 5월 검거되기도 했다. 이중 정경희의 공작망은 지금까지도 파악이 안될 만큼의 거대한 규모로 최근 열우당 이철우 의원이 관련되어 논란이 됐던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조차 정경희로부터 물려받은 조직 중 일부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지하세력들이 일으킨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사건(남민전 사건, 1979년)은 6.25 이후로 계속된 지하당 세력들이 지하당 재건과 좌익 혁명을 추구하여 벌인 사건으로 관련자가 100명이 넘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 시기 좌익 사건의 특징은 사건 관련자의 대부분이 순수하게 민주화를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노동 환경 개선을 추구하는 노동자, 사회의 불합리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다수로써 親北 세력과의 연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사건의 핵심 세력들은 親北 세력과 연계를 통한 좌익 혁명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결국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핵심 세력들에 의해 이용당하여 결국 좌익 세력으로 함께 매도 당했고, 실제 좌익 세력들은 그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숨긴 채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참가자들을 선동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당시의 참가자 중 소위 핵심으로 불리는 자들과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 대한 지향으로 참가한 사람의 현재가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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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동권의 분열과 발전 written by. 전경웅
1980년 ~ 1985년
사회주의 혁명 세력과 親北세력들이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1980년대부터이다. 공안 전문가들에 따르면 1980년대는 좌익 운동의 질적ㆍ양적 혁명을 불러 일으킨 시기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다름 아닌 10ㆍ26 사태에서 5ㆍ18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나타난대한 절망과 사회 혼란에 대한 반응, 이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 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1980년 하반기부터 1981년까지 서울대 좌익 운동권 내부에서 투쟁 노선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난다. 이 논쟁의 한 축은 ‘무림’ 계열로 불리는 세력으로 지금(1980년 초)과 같이 극단적인 투쟁은 정부에 대한 탄압을 유발하고 혁명 역량을 소모하므로 투쟁을 지양하고 대중 역량을 확보한 다음, 적절한 투쟁의 시기를 도모하자는 단계적 투쟁론(투쟁 지양론)이었고 다른 한 축은 ‘학림’ 계열로써 무림의 주장 은 투쟁을 포기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가장 조직적인 운동 세력인 학생들이 더욱 강한 투쟁을 통하여 당시 정부의 문제점을 대중들에게 폭로하고 전면적인 정치 투쟁을 통해 정권의 재집권을 분쇄하자는 주장이었다.(그 당시 유명한 釜林 사건은 부산의 학림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들은 이 노선 분쟁으로 결국 갈라지게 된다. 이러한 논쟁은 1982 년에 다시 일어나는데, 무림 계열의 노선을 계승한 ’야비(야학비판)’ 와 학림 계열의 노선을 계승한 ’전망(학생운동의 전망)’간의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무림 계열은 ‘야학 비판’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현재는 혁명 전위 세력이 없으므로, 이를 만들기 위해 각각의 운동 주체들은 단계적 발전을 통해 정치적 혁명을 위한 주도력과 역량을 이루어 내야 한다’며, ‘학생 운동 세력은 지나친 정치 활동보다는 다른 세력의 정치 운동을 돕는 매개체 역할과 동시에 전위 세력의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학림 세력은 ‘학생운동의 전망’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학생운동 세력은 현대 사회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전위 세력이며, 정부에 대해 끊임없는 폭로와 투쟁을 통해 전면 대응에 나서야 한다’며 ‘학생운동세력이 전면 활동을 통해 공간을 확보해야 다른 운동 세력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 이를 위한 투쟁 방식을 가두시위를 통한 정치 활동으로 보았다. 이들의 논쟁은 학생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방법이 아닌, 적극적 정치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저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일어난 논쟁은 1982 년 하반기, 소위 MT-MC 논쟁으로 불리는 ‘깃발-反 깃발’ 논쟁이다. 이 논쟁은 무림 계열의 ‘민주화투쟁위원회(MT)’에서 당시 학생 운동의 주류 세력(MC: Main Current)의 투쟁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시작된 논쟁으로 주로 전술적 행동에 대한 논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다음에는 1985년 학생운동세력 분파의 분수령이 된 CㆍNㆍP 논쟁, 일명 사회구성체 논쟁, 또는 사회변혁 논쟁으로써 그 이전까지의 논쟁이 학생 지도 세력 간의 헤게모니 논쟁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이 때는 사회 전반에 대한 접근 방식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한 논쟁이었다. 이 때 소위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이라고 불리던 ‘민주화청년운동연합(民靑聯)’의 내부에서 ‘시민민주혁명론(CDR)’계열과 ‘민족민주혁명론(NDR)’계열, 그리고, ‘민중민주혁명론(PDR)’로 나뉜 입장으로 나중에 CDR 은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小시민적 사회관과 낭만적 운동관이라고 비판 받음과 동시에 사회혁명가의 입장에서 지양해야 할 자세로 인식되어 소멸되고, 결국 학생 운동의 갈래가 ‘민족민주혁명론(NDR)’ 과 ‘민중민주혁명론(PDR)’,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변 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이때 사라진 ‘시민민주혁명론(CDR)’계열이 소위 경실련 등의 온건파 시민단체들이 추구하는 성향이다. 이에 대해 성공회大 曺喜聯(조희연) 교수는 ‘이 논쟁은 변혁운동의 주체세력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사회의 변혁운동단계는 무엇이며, 무엇을 대립물로 하는가’ 라는 것을 주제로 한다고 보았다. 즉, 기존에는 주도 세력 간의 선도 세력의 노선과 활동에 대한 것 위주였으나 이 때부터 본격적인 사회 구성원들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 혁명에 대한 구상을 하는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5년 ~ 1989년
1985년 CNP 논쟁과 三民鬪(민족통일-민주쟁취-민족해방 투쟁위원회)의 검거 이후 학생운동세력은 두 가지 계열로 완전히 갈라지는데, 바로 1986년 反美자주화反파쇼 민주화투쟁위원회(自民鬪)와 反제反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民民鬪)라는 운동노선의 등장과 상호 대립이다. 이들 중 自民鬪 계열이 바로 ‘민족민주혁명론(NDR)’을 계승한, 주체사상파의 활동 조직이다. 이들의 투쟁 노선은 북한의 對南 혁명노선과 동일한 것으로 북한노동당 제5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노선(NLPDR)’을 지도 이념으로 삼고, 북한과의 연계는 물론, 학생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후 自民鬪 계열은 전국 反외세反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등을 결성, 조직 확대 과정을 거쳐 1987년 8월 19일 사상 최대 규모의 학생 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를 결성,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全大協 결성 이후 이들은 북한의 對南 혁명 노선으로 “자주ㆍ민주ㆍ통일”을 채택하고, 북한과의 연계 및 親北 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체 사상파의 효시는 1986년 3월 결성된 구국학생연맹(求學聯)이다. 이 계파는 1985년 일부에서 제기된 반제반파쇼민족민주해방노선, 즉, AIPDR 에서 시작됐으며, 김영환이 이를 본격적으로 해석하여 강철 서신-한 노동자가 청년에게-라는 팜플렛을 통해 전파하게 된다)
한 편, 民民鬪 계열은 레닌 노선을 수용하여 전면적이고 극단적인 투쟁을 전개하며 북한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民民鬪 계열은 모든 학생들의 이념학습과 전면적 투쟁을 주장했으나, 행동보다는 말만 무성한데다 조직 운영에서의 권위주의적인 태도, 대중과 동떨어진 사회인식, 지도자로써의 자질 부족 등으로 인하여 내부적 혼란을 겪게 된다.
결국, 民民鬪 계열은 또 다시 내부 분파를 거쳐 CA파, CPC파, CPA 파 등으로 갈라졌다.
이 중에서 CA 파는 1987 년 대선과 1988 년 총선을 거치면서 다시 다수파와 소수파로 갈라졌고, 또 다수파 내에서 A 그룹과 B 그룹으로 갈라졌으며, 이 중 A그룹은 NL 非주사파 계열, B그룹은 反제국주의 PD 계열로 변하였다. 한편, CPC, CPA 파는 反파쇼PD 계열로 분파되는 등 그 이후에도 수 많은 내분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때 주체사상파인 自民鬪 계열이 그 이전까지 운동권 세력을 주도하던 民民鬪 계열을 능가하게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한 곳에 있다.
民民鬪 계열은 운동권 지도자의 능력이라는 것을 주로 언변, 이론적인 박식함, 노선의 과격함에 중점을 둠으로 인하여 그 언변과 지식에 의해 지도자가 바뀌는 경우가 많았으며, 선후배 간의 권위주의적 태도로 인하여 내부적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도덕적 기준에서도 점점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반면 自民鬪 계열은 운동권의 투쟁이라는 것은 결국 대중과 함께 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론무장은 지도자들을 위주로 하고 일반 대중에게는 간단명료한 자료집 등의 제공을 통해 운동권의 저변을 확대하며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지도자의 자질과 인격, 도덕적 결백성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거의 대부분 운동권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즉, 가족 중심 사회,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선시되는 한국적 정서에 맞춘 이념과 노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들의 활동이 이전과 확실히 구분되는 점은 과거의 재야 활동이 민주화 운동을 목표로 했던 것에 반해, 80 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대부분이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위한 反체제활동이었다는 것과 북한과의 연계를 통한 공산주의 혁명ㆍ통일을 지향하는 활동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이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 활동이 공개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나타나고, 이념적인 부분에서도 점점 더 체계화를 이루어가게 되었다.
또한, 단순한 운동 노선에 대한 갈등 개념이 아니라, 헤게모니 쟁탈전과 노선에 따른 분열-대립 양상까지 일어나게 된다. 한편, 운동권 내부에 숨어 있던 親北 세력들의 활동이 점차 증가하면서 그 외부 활동 양상 또한 조직적 폭력과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親北 색채를 드러내게 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 시기의 학생 운동권은 단순한 학생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노동 현장에 침투, 노동계 내부에서 혁명가를 발굴ㆍ교육하여 노동운동가를 적극 양성하는 한편, 각종 재야 단체, 노동 단체, 농민 단체, 빈민 단체 등과 연대하거나 직접 만들고 이들에 대한 각종 지원 활동을 통해 그들의 이념과 조직 구성, 활동 지침 등을 공유하며, 나중에는 재야 세력 전체를 장악하게 됐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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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공개에서 공개로, 그리고 권력 창출 written by. 전경웅
1990 년대 이후
1986년 5월 3일 인천사태를 계기로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운동권은 기존의 이론 투쟁을 벗어나 본격적인 대중 선동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대협 등 대규모 조직을 결성하는 동시에 지도권의 필수 교양 서적으로 병법서, 심리전 교범 등을 통해 전략, 전술에 대한 학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전략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도 전에 1987년 6.29 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되었고, 1993년에는 민선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국민들은 이제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생각, 운동권들의 끝없는 민주화 이야기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됐다.
당시 운동권의 핵심들은 대부분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는데 투쟁에 관한 전술적 지침이나 투쟁의 방향성조차 북한에서 운영되는 한국민주주의민족전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운동권 학생들은 더 이상 학생으로만 있기도 어려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운동권 내부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일어났고 운동권 세력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이 때부터 시작된 방향이 바로 민중운동, 통일운동, 합법운동이다.
1990년대부터 운동권들은 사회로 진출하면서 법조계, 전문직 등으로 진출하는 세력, 직업 혁명가로 활동하는 세력, 정치권 등으로 진출하는 세력, 언론문화계에 진출하는 세력 등으로 나뉘게 된다. 명문대 출신들이 압도적인 운동권들은 사법시험이나 각종 전문직 시험 등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특히, 변호사, 회계사 등이 우리사회에서 가지는 권위를 통해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이 모인 대표적인 전문직 단체가 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이하 민변)’이다. 현재에도 ‘민변’은 대부분의 시민단체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 정권에서는 핵심 중 핵심으로 통한다.
그 다음, 학생 위주의 활동에서 벗어나 빈민운동, 인권운동, 외국인 노동자 지원, 노조 활동, 언론개혁 등의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소위 시민 단체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된다. 운동권들은 이러한 단체를 만들면서 과거의 조직화 경험을 발휘하여 다양한 단체들을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도 부족했고 시민들의 인식 또한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정부에서 이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 실례로는 현재 활동하는 시민단체 중 1997년 이후에 생긴 시민단체의 비중이 75% 에 달한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운동권 핵심들 중에서는 과거 학생 운동권 당시의 지도력이나 통솔력 등을 인정 받아 정치인의 보좌관이나 정당 사무처 등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이 매우 많은 편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 정치권은 과거 군사 정부와의 차별화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명문대 출신에다 운동권 경험이 있는 젊은 사람을 영입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정당 등에서 운동권 출신들을 환영하며 영입했다.
마지막으로 전대협은 1989년부터는 전국 대학 방송국 연합회, 전국 대학신문기자연합회 등을 만들어 언론계 진출을 지원했다. 이들은 중앙 조직을 통해 정기적으로 취재, 보도, 방송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들의 사회진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언론계는 공채 이외에도 다양한 인맥을 통한 인력확충이 존재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각종 언론사에 진출하게 됐다. 또한, 시위 등을 통해 활동하던 노래패나 집회 기획의 경험을 살려 이벤트 기획사 등을 만들고 이를 통해 문화계에 상당수가 진출했다. 이들은 지금 문화계 중견 인사들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결국, 이 같은 다양한 사회 진출 전략을 통해 운동권 출신들이 각계 각층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반을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 중심에서 합법적 활동으로의 변화에는 운동권의 중요한 인식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학생 운동권으로써, 그리고, 민중 운동권으로써 사회혁명을 이루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졸업 후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위해 각종 동지회와 동우회를 만들고 그 유대를 결속해 나갔다. 이를 통해 제도 속에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40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자신들이 참모가 되어 정권을 차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운동권 내부에서 공감대를 얻게 되었다(월간 말지 1995년 3월호 안희정 인터뷰 참조)
한편, 학생 운동권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지도권 선배들이 대거 사회에 진출하고 자신들이 내세우는 목표가 대중들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으로 내부분열을 겪게 된다. 이 때문에 1993년 전대협이 해체되면서 ‘사람사랑파’라는 비주사파 민족해방 계열, PDR 계열인 ‘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의 대를 이은 ‘한총련’ 등 다양한 분파로 해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는 ‘사람사랑파’나 PDR계열이 내부의 극심한 사상 투쟁으로 계파 자체가 대부분 소멸됨에 따라 한총련이 다시 학생 운동권의 중심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후 ‘한총련’은 ‘전대협’보다 더욱 강력한 중앙 집중식 체제를 선택하고 그 규모를 크게 확대한다. 또한, 이때 급격하게 늘어난 대학의 수도 ‘한총련’의 거대화에 중요한 몫을 했다.
한편, 1991년 출범한 ‘범민련’은 산하 기관인 ‘범청학련’을 만들고 대표를 ‘한총련’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한총련’은 북한과의 공조를 통한 통일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한총련’은 범청학련 남측본부 대표라는 지위를 매우 중요시하는 편이다.
1995년 이후,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통해 운동권에서는 제2의 도약기가 시작되었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인터넷의 보급이었다. 운동권은 이미 1987년 경부터 PC 통신을 통해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PC 통신 전체에 공개된 것이 아니라 ‘폐쇄형 사용자 그룹’을 통해 자신들 내부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이미 운동권 포탈 사이트인 “진보넷”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대중 활동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1998년부터 진보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운동권 포탈 사이트를 추진했다.
이후, 운동권은 인터넷이 대중적 사상 교양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학생 운동권도 ‘한총련’ 산하에 ‘정보통신지원단’을 두고 운동권들의 IT 기슬능력 향상과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인터넷의 상당한 부분에서 운동권들이 중요한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다양한 사건으로 운동권 세력은 대한민국 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운동권들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정치권의 핵심으로 활동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2000년 4월 13일 총선이 열린 후 이러한 현상의 타파를 위해 앞서 이야기한 ‘새로운 정권 창출’을 위한 논의를 시작됐고, 2000년 5월 17일 광주에서 ‘노사모’를 결성됐다. 그 후의 일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 2004년 4월 15일 총선을 통해 운동권 출신들과 ‘민변’, 직업 혁명가들의 총본산인 ‘민주노동당’ 출신들이 대거 정치권에 진출하여 새로운 기득권 세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운동권 활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산업의 발달에 발맞춰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전략을 발휘한 것이다. 이들은 특히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통해 새로운 것, 앞선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인터넷의 강점이자 중독성을 야기하는 편리함, 시각적 이미지 등을 십분 활용, 운동권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앞서가는 이미지, 좋은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둘째, 기존의 학생 내부에서의 활동이나 비합법적 활동이 아닌, 합법적 활동을 통해 권력을 쥐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것이다. 특히, 엘리트나 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호감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철저히 이용했다는 점은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셋째, 세계와의 정보 유통이 정부의 통제가 아닌, 각 개인의 언어 차이, 문화 차이, 질적 차이로 인하여 아직은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십분 활용, 해외의 사회단체나 정보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가공하여 보급함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넷째, 과거에는 특정한 이념, 즉, 주체사상이나 소비에트 공산주의, 일본 공산주의에만 얽매여 사회현상을 다양하게 분석하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나, 합법적 운동을 추구하며 일어난 해외 유학, 대학원 진학 등을 통해 습득한 이탈리아 공산당, 유럽 공산당의 사상을 활용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이고 이를 실제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현재 그람시나 알튀세의 저작, 체 게바라의 전기 등이 토크빌, 하이예크나 미제스, 프리드먼의 저작보다 더 많이 출판되고 알려지는 것이 바로 이런 활동의 결과이다.
이상이 운동권의 약사이다.
주요 사건들은 설명을 줄이기 위해 배제했지만, 그 큰 흐름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과거 1920년대의 공산주의자로부터 현재의 운동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목표는 현 체제의 타파이다. 또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에 만들어진 역사가 있는 체제가 아니라, 한 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머리 속 환상의 제국’이다. 지금도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기득권으로써 수구적인 발상과 자세로 혁명을 꿈꾼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념과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혁명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수구로 매도하며 합법적으로 사회에서 매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이들의 노력은 우리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들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국가안보기관, 외교안보기관, 사법기관, 입법기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언론, 문화, 종교, 출판, 금융, 정보통신, 교육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혁명 이념을 교육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봐야 할지는 모두 독자들의 판단에 달린 것이다. (konas)
정말 좋은말을 해야겠군요. 국민 수준이나 교양이 세계최대의 경지에 올라있는 한국인입니다. 오래 전부터 똑똑하다든 아희들이 이젠 어른이 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어러움도 극한 고통도 슬기롭게 이겨낼 힘이길려져 있습니다. 다만 현 정치와 사회활동 구조가 이에 못미치는 무능에서 젊음을 잘못인도하고
잘못한 어른들의 책임이 큼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 교육열이 뒷받힘되어서 경제계발이 성공될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시대 착오 정치로 오늘날 경제가 망국적 어러움을 격고 있습니다 만 박근혜대표님은 박대통령과같이 이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재활력의 힘이있습니다
공산주의 좌파 지향 운동권이 어떻게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는지? 우리나라에서 "운동권"이라고 함은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미화시킨 것이 바로 DJ 정권과 현 노무현 정권입니다. 반대를 위한 명분없는 반대 세력을 마치 사회 지도층으로 포장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개혁을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봐습니다
정말 좋은말을 해야겠군요. 국민 수준이나 교양이 세계최대의 경지에 올라있는 한국인입니다. 오래 전부터 똑똑하다든 아희들이 이젠 어른이 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어러움도 극한 고통도 슬기롭게 이겨낼 힘이길려져 있습니다. 다만 현 정치와 사회활동 구조가 이에 못미치는 무능에서 젊음을 잘못인도하고
잘못한 어른들의 책임이 큼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의 교육열이 뒷받힘되어서 경제계발이 성공될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시대 착오 정치로 오늘날 경제가 망국적 어러움을 격고 있습니다 만 박근혜대표님은 박대통령과같이 이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재활력의 힘이있습니다
공산주의 좌파 지향 운동권이 어떻게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는지? 우리나라에서 "운동권"이라고 함은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미화시킨 것이 바로 DJ 정권과 현 노무현 정권입니다. 반대를 위한 명분없는 반대 세력을 마치 사회 지도층으로 포장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개혁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기득권층으로 매도함으로서 젊은 층의 교육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의 피해보다는 아직 교육을 받고 있는 세대들한테 미치는 악영향이 더욱 심각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교육부터 바르게 시켜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