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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말은 제선생이란 뜻이고, 백가란 수많은 파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 중에서 옛 서적을 분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벌은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論理學派)·묵가(墨家)·종횡가 (縱橫家:外交術派)·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는데,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장자 등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만큼 극히 활발한 상황을 나타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아야 한다.
제자백가 諸子百家 (병)Zhuzi BaiJia (웨)Chutzu Pacichia (영)Hundred Schools. 중국 선진先秦 시대부터 한대漢代 초까지의 각 학파 및 저작. 제자諸子란 각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보통 선진 제자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유가에는 공자孔子·순자荀子, 도가에는 노자老子 ·장자莊子, 묵가墨家에는 묵자墨子, 법가法家에는 상앙商앙·한비자韓非子, 명가名家에는 혜시惠施·공손룡孔孫龍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관학官學은 민간에까지 퍼져 있었으며, 또한 제후가 선비를 우대하는 풍습이 성행하고 있었다. 제후들은 학사學士나 대부大夫에게 온갖 사상을 섭렵하게 하고, 저서를 지어 자기 주장을 세우도록 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변혁이나 천도관天道觀·명실관계名實關係·예법禮法·왕도王道·패도覇道·인성론人性論 등의 문제에 관한 견해를 발표하게 했다. 그리하여 사상가들은 여러 학파를 형성하게 되어 깊이 있는 사상과 풍격 높은 걸작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한나라 무제武帝때 백가百家가 정책적으로 배척되고 오로지 유교만이 숭상되어,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제자백가시대는 중국철학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 논란이 되었던 여러 가지 철학 개념·범주와 명제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국철학 논쟁의 주요대상이 되어왔다. 그 가운데 유교와 도교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생각의 해방 - 제자백가
공자이후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불리워 지는 시간은 현재의 세계와 닮았다. 기존의 가치관과 존중되던 전통이 무시되고 새로운 것이 쉴새없이 밀려드는 중간기였던 것이다. 후대까지 살아 남아서 홀로 우뚝한 것은 유가儒家지만 그 외의 학설들도 나름의 명맥을 이어갔다. 실로 대부분의 중국사상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경제제도도 변했다. 삶의 환경이 바뀐 것이다. 사람과 제도가 바뀌어서 천명이 유신維新하고 한 제국이 서는, 인간 사유의 해방기의 시작과 전개가 이번 보고서의 주제가 될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
철학이라는 말은 본래 서양의 말이다. 이것을 대개 세 영역으로 나누는데
우주론 宇宙論 - "세계에 관한 이론"의 탐구
인간론 人間論 - "삶에 관한 이론"의 탐구
인식론 認識論 - "지식(인식)에 관한 이론"의 탐구가 그것이다. 철학을 하는 것은 이러한 영역에 대한 생각을 논리적이고 이지적으로 논증하는 것이다. 사유의 영역이 다르다거나 논리적인 논증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중국 철학의 양상은 약간 다르다. 중국의 철학자들도 우주와 인간과 인식 영역의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했지만 논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은 덕을 수립하는 것入德이다. 그뒤가 공을 세우는 것 立功이고, 그 다음이 주장을 수립하는 것立言이었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몸으로 철리를 실천하고 실천함으로써 공을 세움을 바랐다. 논증을 하는 철학자는 중국의 철학자가 보기엔 불우한 처지로서 피치못할 때에나 하는 것이었다.
만세사표 - 공자의 출현
공자는 인문학의 시작이자 유가의 시작이다. 전문적으로 강의만 하는 것은 공자 이전엔 없었다. 또한 교양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과 자신의 주장만이 아니라 두루 넓게 배우는 것은 이후에도 공자뿐이었다. 공자는 철학의 시작이기도 하다. 공자 이전의 중국의 사상은 생각의 수준이었다. 철학 사유의 영역에서 생각하고 논증한 것 또한 공자가 시작이다. 공자는 제자백가시대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다. 공자의 전통이 학문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 혼란기
주나라는 기본적인 사회의 틀이 잘 정비된 첫 왕조이다. 그 사회의 틀은 종법제도였다. 천자와 제후는 모두 동성同姓의 일가 친척 아니면 이성異姓이라도 외숙질간이었다. 이들의 관계를 뒷받침해준 것이 예禮이다. 천자와 제후가 지켜야할 규범이다. 서민들은 형刑에 의해서 다스려 졌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천자는 천하의 공주로서 약 300년에 걸철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여왕(려王: 기원전 878-842)때부터 나라기 기울기 시작하여 유왕(幽王: 기원전 781-771)이 견융犬戎에게 피살되고 왕실이 하남河南 낙읍洛邑으로 쫓겨났다. 그로 말미암아 주 왕실의 권위가 크게 떨어져 당시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기원전 7세기 중반기에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철기의 사용은 토지의 이용도를 크게 높였다. 관중管中은 제나라에서 토질에 따른 세금부과를 주장했고 이것은 지난날 귀족들에게 분봉해준 채읍采邑에서 일률적인 세금을 부과했던 것과는 크게 다른 제도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노나라는 밭이랑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점차 토지사유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귀족들의 토지에 대한 독점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주나라 초기에 제기된 명덕보민明德保民사상은 춘추시대의 사회변동을 거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이해가 싹터 나오게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
철기의 사용으로 경작지를 확대할 수 있었던 나라들은 그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또한 국가들끼리 힘에 의한 각축전쟁이 빈번해지자 당시 각국은 전투력을 갖추고자 하였다. 그런데 백성은 이러한 전투력과 노동력의 핵심이다. 그래서 당시 국가들은 서로 많은 민을 확보하고자 경쟁하였다.
당시의 사회문제를 인간의 힘과 지혜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노력은 현자등용정책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지혜로우면 썼다以賢擧. 자신과의 핏줄로 인해 쓴 것以親擧 과는 많이 다르다.
이에 서주시대의 지식인인 사士가 각각의 제후국으로 퍼지게 된다. 그래서 주나라 왕실에 집중되어 있던 지식이 민간에 전파되었다. 민간에 전파된 지식은 새로운 지식을 배양해내었고 지식의 내용도 풍부해지고 다양해 졌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자들이 가지가지 학설과 이론과 사상을 제기하였다. 그들 학자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들은 자기의 학파를 세웠다. 그래서 백가쟁명의 국면이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백가쟁명은 당시 학술사상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였고, 그 결과 제자백가가 출현하였다. 『한서』「예문지」 제자략에서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학파로서 10가家 9류流를 들고 그들이 연원과 저서를 소개하였다. 그것이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소설가小說家이다.
유가 - 인문학의 시작
유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육예는 당시 지식인의 기본소양이었다. 그것을 공자가 가르쳤던 것이다. 후대에 각 학파가 자신들의 학설만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육예는 유가의 전유물처럼 변한다. 유가 교육의 목표는 인재 양성이다. 인재는 덕이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인재로 쓰러지는 주왕실을 재건하려 했다. 주 왕실이 아직도 가치있고 쓸만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후대의 유가들은 주왕실의 재건보다는 인문학의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사람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바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자신들의 소임으로 여겼다. 바로 이점이 후대에 까지 영향을 끼친 유가의 장점이다.
묵가 - 민중들의 반란
유가의 시작이 공자라면 묵가의 시작은 묵자墨子이다. 묵가는 귀족들의 절용을 주장했다. 또한 서로 싸우지 않는 겸애를 주장했다. 또한 유가가 주장하는 장례나 의식儀式을 줄이거나 페지할 것을 주장했다. 바로 당시 피폐했던 민중들의 삶을 대변한 것이다. 굶어 죽는 백성들 속에서 예의와 과 3년상은 허식처럼 보였을 것이다. 묵가는 바로 이러한 일반 백성의 생각을 대변한다.
도가 - 내 터럭 하나를 다처서 천하가 이로와도 난 터럭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맹자에 의해 공격받은 이 극단적인 생각은 과연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학파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에 대한 의문을 들게한다. 누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겠는가.
논어에 보이는 은자들의 조롱에 대한 대답으로 공자는 자신이 해야할 일이기 때문에 한다고 답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은자들은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 은자들이 바로 도가의 시작이다.
법가 - 기준
법가의 핵심은 법이다. 법은 곧 기준이다. 기존의 가치가 허물어 지는 세상에 다시 엄한 기준을 세우자는 것이 법가들의 생각이었다. 세상이 방종한 만큼 정상으로 만들려면 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한 법의 집행은 기준을 만드는 것일 뿐임을 이들은 망각했다. 법은 수단이 이지 본체는 아닌 것이다. 백성은 농사 짓고 전쟁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이들의 극단적인 생각은 진나라 이후에 법가를 소멸하게 만들었다.
제자백가의 기원
우리가 因緣 인연하는데, 대개는 인간 관계 특히 남녀 사이의 문제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만사 인연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因緣의 因은 기본을 말하고, 緣이란 계기를 말한다. 기본과 계기가 맞아 떨어져서 세상일이 돌아간다. 비유하자면 因은 씨앗(種子)이고, 緣은 비와 햇볕이다. 씨앗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수확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비와 햇볕이 없으면 역시 수확을 거둘 수 없다. 인연의 관계는 이러하다. 남녀 관계에도 이렇지 않는가? 선진 제자백가라 한들 어찌 예외라 하겠는가. 제자백가는 그 이전의 종교 철학을 그 씨앗으로 하고, 춘추전국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비와 햇볕으로 하여 탄생한 것이다. 이제 그 씨앗(因), 그리고 비와 햇볕(緣)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씨앗....
아주 오랜 옛날, 원시인들은 좋든 싫든 宗敎的이었을 것이다. 내가 왜 宗敎的이라고 宗敎에다 的자를 붙였는가 하면, 그 당시 원시인들은 종교라는 말이나 관념이 없이 그냥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니까 宗敎같고, 그렇다고 꼭 오늘날 우리의 종교와 딱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그래서 宗敎的이라고 했다. 하여간에 아주 오랜 옛날, 그들은 종교적이었다. 자연환경에 대해 지금 우리들보다 무지했을 것이고, 그래서 천둥만 치고 벼락만 쳐도 하늘을 우러러 용서를 구했으며, 비가 오지 않아도 하늘이 노했다고 하고, 큰 나무나 거대한 바위만 봐도 절을 하며 섬겼을 것이다. 여하간에 자기보다 크고 힘세고 오래 살고 그러면 존경했을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이 하는 일보다 더욱 효율적이고 기억력도 강하므로 컴퓨터를 섬기는 사람들이 요즘 많지 않은가? 옛날이라고 그러지 않았을리 없다.
물론 종교적이라고 했지만 요즘의 종교처럼 교리도 복잡하고 체계적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이 살고 죽고 잠자고 깨어나고 하는 것을 보며 인간에게는 몸 이외에 정신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무엇인지 몰랐을 터이므로 그러한 동물이나 무생물에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몸 이외에 정신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동물이나 무생물에게도 정신이 있으므로 기원하고 숭배하면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배경에서 동물 숭배가 생겨난 것이다. 《禮記 郊特牲》에 보면 天子가 제사를 지내는데 農神 뿐아니라 고양이, 호랑이 심지어 제방과 도랑까지도 제사의 대상이었다.
고양이나 호랑이를 제사지낸 것은 이런 동물들이 농사를 해치는 들쥐나 멧퇘지를 잡아먹기 때문인데, 그런 동물들의 영혼에게 제사지내면 앞으로 더욱 열심히 들쥐나 멧퇘지를 잡아먹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동물 숭배의 흔적이다. 이런 시기의 사상이라고 해봐야 그 수준이란 게 대단히 낮았으므로 학술에 영향을 미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어 지금도 일부 국가, 일부 계층에서는 동물 숭배가 행해지고 있다.
동물 숭배에서 조금 발전하게 되면 조상 숭배가 된다. 고대 사회는 교통수단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므로 생활의 터전이라는 것이 상당히 제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여사는 집단은 대개가 친척들이었을 것이고, 서로 서로 도와주고 의지하였을 것이다. 이 때가 바로 氏族社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가는 도리라든가, 생존수단 등등은 경험으로 갈고 닦은 연장자가 꽉 쥐고 있을 것이다. 연장자들은 그런 면에서 젊은이들의 모범이요,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는 스승이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젊은이들은 같은 또래 보다도 연장자를 따르고 존경하는 풍조가 유행했을 것이며, 여기서 발전하면 어른을 섬기고 조상을 받드는 풍속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어느 집단의 훌륭한 업적은 대개 그 조상의 공적으로 돌려지고 우러러 보고 받들었으므로, 그러한 조상은 거의 신격화되다시피 하였을 것이다. 감정으로 봐도 내가 그 후손인데 조상은 나를 돌봐줄 것이고, 능력면으로 봐도 부족한 나의 스승이므로 나를 볼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조상 숭배는 자연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릇 氏族社會 시절에는 조상숭배가 보편적인데,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제사가 거의 형식화되었고, 그 형식도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혹자는 예의범절이 무너졌다고 야단치지만, 실은 현 사회가 氏族社會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해답은 간단하다. 氏族社會의 중요한 관계는 어른과 나이다. 수직적 관계이다. 그러나 요즘은 수평적 관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친척보다는 친구, 부모 보다는 사업상의 동료, 이렇듯 인간 생활의 연관 관계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났기 때문에 제사가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선조를 기리고 옛 것을 숭배하는 관념의 뿌리는 대략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시인들은 처음부터 농경이나 목축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자생하는 식품을 먹고 연명했을 것이다. 그러다 차츰 농경을 하고 목축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목축이나 농경은 모두 땅(地:생산지)에서 이루어지며, 그 수확량의 좋고 나쁨은 하늘(天:날씨--天氣)에 의해 결정된다. 적어도 이 정도는 당시 인간들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땅과 하늘을 경외하고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땅이야 가까이 있으니까 그렇더라도 저 멀리 있는 하늘은 정말 연구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天文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이 시기에 천문지식은 상당히 진척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개가 천문지식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생존에 관계되는 문제였으므로. 《詩經》을 봐도 천문에 관한 지식이 많이 나오는데 다 일리가 있다. 지금이야 천문에 대해 몰라도 잘 살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늘에 대한 숭배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봉건 시대에는 인간 사회에 계급이 있었다. 위로는 天子로부터 諸侯를 거쳐 卿大夫, 士 그리고 庶民과 奴隸에 이르기 까지 신분의 존비가 있었다. 당시 인간들은 이러한 계급과 맡은 바 직분이 저 하늘에도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북극성이 어쩌고 그 옆의 작은 별이 어쩌고 이렇게 계급과 직분을 매겼던 것이다.
그런데 단지 숭배의 대상만 있고 그 숭배의 대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한 이론이 없다면 학문이나 학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가 항상 먼저 생기고 이어서 이 종교를 이성적으로 따지는 가운데 철학이나 사상이 생겨난다. 철학가들이 다루는 문제는 현대에는 주로 認識論(인식이나 지식의 기원 구조 범위 방법 등을 연구)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宇宙論이 초미의 관심사였으며, 認識論은 나중 나중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도 그럴 것이 宇宙論이란 宇宙의 기원 생성 구조 등을 연구하는 것으로 지금은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이지 철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삼라만상은 우주 속에 살고있고, 나 또한 그 삼라만상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만물을 알면 내가 왜 나인지 알 수 있고, 또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옛 철학자들이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면 별 웃기지도 않는 우주의 기원과 생성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연구하고 논쟁한 것이 바로 이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를 아무리 해도, 논쟁을 아무리 해도 해결이 쉽사리 날 문제가 아닌게 宇宙論이 아니겠는가?(현재의 과학지식으로도 미해결 분야가 부지기수인데... 하물며) 그래서 옛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宇宙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일단 주위의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 宇宙論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우선, 매일 보는 인간에 주목했다. 보니까 신기하게도 엄마(女)와 아빠(男)가 이불 속에서 마구 뒹굴다 나오니까 얼마 후 애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들짐승을 보았다. 역시 신기하게도 어미(牝:빈)와 애비(모:牡)가 붙었다 떨어지니까 새끼가 나왔다. 이번에는 날짐승을 보았다. 역시나 그렇게도 암컷(雌)과 수컷(雄) 사이에 새끼가 생겼다. 여기서 큰 힌트를 얻은 사람들은 天地가 萬物을 생성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포하길: 「다 陰陽의 조화야」 또는 「(하늘과 땅이 합작하여) 하늘은 萬物을 낳고, 땅은 萬物을 키운다」(天神引出萬物, 地祇提出萬物--《說文解字》) 또는 「萬物은 하늘에서 태어나고, 사람은 엄마 아빠한테서 태어난다」(萬物本乎天, 人本乎祖--《禮記·郊特牲》) 이렇게 자신있게 말했던 것이다. 해와 달이 번갈아 하늘에 뜨며 낮밤이 바뀌는 것이며, 물과 불이 서로 상극인 것이며 모두 陰陽으로 해석하면서 우주의 근본은 陰陽이라는 二元論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계절은 春夏秋冬 네 계절이 있는데 이것은 陰陽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陰陽은 陰과 陽 딱 둘 밖에 없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陰陽을 낳았다는 太極을 설정하고는 이렇게 선포했다:「太極이 兩儀를 낳고, 兩儀가 四象을 낳았더라」(太極生兩儀, 兩儀生四象--《易·系辭傳》) 여기서 兩儀는 물론 陰陽. 陰陽이 새끼쳐서 四象이 되었다. 이제 숫자 넷은 모두 여기에 적용시켜 해석하였다. 이를 테면, 태양은 동쪽에서 생겨나서 서쪽으로 사라진다. 날씨는 남쪽이 덥고 북쪽이 춥다. 이런 東西南北의 방위를 四方이라 하는데 春夏秋冬 四季를 東西南北 四方과 연관시켰다. 숫자 5가 필요하면, 四方에 中央을 합쳐 五方이라 했고, 6이 필요하면 윗쪽(上方)을 포함하여 六方이라 했다. 四方에 네 귀퉁이(四隅)를 합쳐 八方이라 했고(四面八方이란 말 압니까?), 八方에 中央을 합쳐 九宮이라 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유추 및 확대를 하다 보니 五行說이 등장하게 된다. 五行이란 水火木金土인데, 이 다섯 가지는 아마도 인간이 활용한 가장 원시적인 물질이었을 것이다. 五行說이 발전하면서 생겨난 것이 五德終始說이다. 사상이 유치한 시절에는 하찮은 물질에도 깃든 神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五行의 물질에 각각의 神을 배치하였으며, 그러한 神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喜怒哀樂이 있다고 생각하여 德이란 말을 붙여 五德이라 했고, 세상만사는 순환하듯 돌고 돈다하여 五德終始說이 등장하였다. 우리가 중국역사를 읽으면 水德을 타고 났네, 火德을 타고 났네 하며 임금이 옷색깔을 바꾸다든가 무슨 색깔을 숭상하거나 하는 것도 모두 이런 주장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
德을 꼭 좋은 성품으로만 해석하지 말라. 惡德이란 말도 있다.
이렇듯 인간과 하늘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라는 天子란 용어가 자연스레 사용되었고, 위대한 인물은 엄마 아빠의 생리적인 결합보다도 하늘이 내렸다는 感生의 주장이 나오게 된다. 물론 지금도 하늘이 감동하여 자식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맥락은 이런데 있다.
생각해 보면, 思考가 단순하던 시절에는 어느 물질을 보면 그냥 그건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러다 생각이 좀 깊어지면 여러 가지 물질을 비교분석하여 몇 가지 큰 부류로 나누었을 것이다. 이른바 五行이란 것도 그런 과정의 産物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꼭 다섯 가지 부류로만 이루어져 있을까? 적용이 안되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좀더 본질적인 것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다 찾아낸 것이 바로 氣였다. 이 氣를 가지고 그 이전의 해석하기 난처했던 모든 주장을 해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五行說에 적용하여, 氣의 疏密에 의해 五行이 결정된 것으로 설명했다. 또한 五行의 순서도 水火木金土라 했는데 이것 역시 氣의 輕重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석했다. 기왕에 물질이 이렇다면 인간의 생명도 이럴 거라 유추하여 모든 생명체는 죽는데, 이 죽음은 氣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어에 斷氣하면 죽는다는 뜻) 우주의 본질이 氣라고 생각했으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도 맑고 가벼운 氣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겁고 탁한 氣가 아래로 내려가 땅이 되었으며,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온화한 氣가 중간에 뭉쳐 인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웬 놈의 氣가 이렇듯 제가 알아서 뭉쳤다 흩어졌다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단지 안 것은 그 氣란 것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항상 변화하는 우주의 본질 氣를 규명하기 위해 -- 즉 당시 사람들은 易(역 : change)을 해명하기 위해 --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 노력의 성과물이 바로 《易經》이며, 중국에서 가장 어려운 책으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여겨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우주만물의 생성과 발전을 설명한 책이라 했으므로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오죽이나 중요했겠는가. 항상 변화하는 것을 포착하려면 출발점을 확실하게 잡아야 하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 출발의 원동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元'이라 규정했으며, 그런 이유로 《易經》과 《春秋》는 그 시작을 '元'에 두고 있다.
이상과 같은 옛 중국 사람들의 생각은 어느 일개인이 창조했다고는 볼 수 없고, 이런 저런 사람들의 생각을 조직적인 두뇌의 소유자가 정리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춘추전국 시대의 인간들은 거의 대부분 보편적으로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우주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생활하였을 것이다. 제자백가의 학술이 서로 확연한 경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서로 같은 점이 의외로 많은 것은 바로 이처럼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司馬談이 <六家要旨>에서 제자백가의 요지는 본질에 있어서 같으나 경로가 틀릴 따름이라고 한 것이나, 班固가 《漢書·藝文志·諸子略》에서 제자백가의 학설을 물과 불에 비유하여 서로 相剋(원수)이면서도 서로 相生(협조)한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라 하겠다.
중국 철학은 自然의 힘을 가장 숭상한다. 자연의 힘을 가장 존중하고 숭상하기 때문에 자연의 힘에 순종하려할 따름이지 저항하거나 위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道家는 가장 철저했다. 道家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 無爲라는 것이 [없을 무·할 위] 로 보아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다} 로 해석해서는 잘못이다. 無爲란 人爲的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저 자연의 힘에 순응하여 쫓을 뿐 인간의 하찮은 지혜나 힘을 더할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 한마디로 無理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겠다. 이렇게 본다면 道家의 핵심 이론 '無爲'는 儒家에서 종종 언급되는 「높게 만들려면 반드시 산에서, 낮게 만들려면 반드시 골짜기에서」(爲高必因丘陵, 爲下必因川澤)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法家에서 「지혜를 버리고, 오로지 制度에 따라 행한다」(絶聖棄智. 專任度數)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자연의 힘은 한시도 정지할 때가 없다. 이러한 자연의 무궁한 운행을 바라보며 각 학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儒家는 自强不息의 도리로 받아들여 君子는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으며, 莊子나 列子 계열의 道家는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어마어마한 運行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옛 사람들은 자연의 운행이 순환(周而復始)한다고 보았다. 즉 돌고 돈다는 소리다. 따라서 道家는 행운 속에 불행이 잠재되어 있고 불행 속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나쁜 것을 찾았다. 기쁜 경우 울며, 슬픈 경우 웃기도 한다. 儒家의 경우에는 자연의 순환을 보고 변화를 통해 항상 새롭게 거듭나려는 생각에서 기존 制度의 적절한 개혁을 주장했다. 法家의 경우는 儒家보다 다소 격렬하여 기존 제도의 혁명적인 혁신을 주장하여 商[革+央]과 같은 과감한 變法을 단행했다.
萬物이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氣라 생각했으므로 그 본질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서로 다를 것이 없는 그 본질을 옛 사람들은 命이라 했으며, 각각의 사물 입장에서 보면 性이 된다. 그러므로 性命은 삼라만상이 自然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自然力의 운행은 질서있게 행해지며 서로 충돌하는 법이 없다고 옛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므로 인간들도 이러한 자연의 운행을 따르면 세상은 충돌없는 편안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까닭에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본질로 돌아가길 주장했다. 儒家가 그토록 주장하는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면 세상 일을 훤히 안다」(盡性可以盡物) 느니 道家에서 그토록 주장하는 「자신을 잘 돌보는 자라면 천하를 맡길 수 있다」(善養生者可以托天下) 느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儒家에서 흔히 말하듯 《春秋》의 큰 뜻은 소위 春秋筆法에 있는 바, 집필 순서를 보면 春 다음에 王이 나오고 王 다음에 正(月)이 나온다. 임금이 무슨 일을 하려면 응당 하늘의 운행처럼 순서대로 해야 한다는 뜻에서 王자보다 春자를 앞에 넣었던 것이다. 法家의 경우, 모든 법률과 그 운용은 道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그 道라는 것도 역시 자연의 무리없는 운행을 모델로 한 말이다.
삼라만상이 기왕에 氣에서 비롯되었다면, 겉모습은 천차만별일지언정 속으로 돌아가는 원리는 하등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따라서 老子는 그 변함없는 본질의 원리를 잡으라고 주장했고(抱一), 孔子는 중심을 지키라는 뜻에서 中庸을 강조했다.
자연의 운행은 한시도 정지하지 않으므로 항상 변하는 셈이다. 이러한 자연현상을 본받기 위해서는 역시 따라서 항상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眞理란 오직 하나, 變化란 두 글자일 따름이라고 보았다. 본질의 원리가 있다하여 시도 때도 없이 죽자 사자 붙들고 늘어져서는 變化를 저버리는 짓이다. 따라서 본질의 원리를 잡으면서도 고착되지 않는 자세를 요구하다 보니, 본질의 원리 자체를 초월한다는 虛無의 관념을 받들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절대적인 眞理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상의 시비 관념이나 선악 관념을 논할 수가 없게 되어 道家의 齊物論(절대적 상대주의)이 나오게 되었다.
흔히 이야기 하듯 道家는 자연스럽게 하라고 하고 法家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法 앞에 칼같이 복종하라고 한다. 즉 道家는 自由放任이고 法家는 엄격한 規律이라고 한다. 언듯 보면 정반대다. 그러나 法家 주장의 본뜻은 개인적인 잔재주를 접어두고 법률을 자연의 운행으로 생각하여 칼같이 준수하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道家의 自然이 法家의 法인 셈으로 하등 배치될 것이 없다. 또한 儒家는 仁을 귀하게 여기고 法家는 仁을 천시했다. 역시 정반대다. 그러나 法家의 주장을 살펴보면:「法이란 처음에는 괴롭지만 일단 적응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仁이란 처음에는 신나겠지만 나중에 괴롭다.」 이렇게 본다면 法家가 배격했던 仁은 儒家의 仁이 아니라 기준없이 잘해주는 고식적인 관대함이지 儒家에서 주장하는 남을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儒家는 學術을 중요시하는데 반해 法家는 다섯 가지 쓰레기의 하나로 강력하게 배척했다. 그러나 그 속뜻을 보면:「당장 굶어죽는 판에 어느 세월에 쌀밥에 고기를 구하려 하겠으며, 당장 얼어죽는 판에 비단옷을 찾아 헤매겠는가.」이것 역시 급한 불--富國强兵--을 우선 끄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지 근본적으로 學術을 배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商 의 고압정치를 끝까지 밀고 갔는데 실인즉 商 의 본뜻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道家 역시 學術을 배격하다 못해 文字 자체를 없애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그런 주장을 담은 서적은 그런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文字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다가 본질을 놓치고 세상을 시시비비로 가득차게 하지 말라는 뜻을 극단적으로 했을 뿐이다. 천하의 원수같은 儒家와 法家와 道家도 내적으로는 이처럼 일맥상통하고 있다.
요컨대 선진 제자백가의 학설은 물론 서로 다른 면이 확실하게 존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이질적이라 단정할 수 없으며, 그 속에는 서로 통하는 그 당시의 보편적인 관념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겠다. 제자백가의 서로 다른 주장만을 여기 저기 경로를 통해 들었을 여러분, 이 과목을 통해 "제자백가는 서로 통해여"를 깨달았다면 다행이겠어요.
제자백가의 시대배경
先秦 諸子百家의 사상은 후세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후세의 사상은 정치문제와 사회문제를 분리하여 다루고 있지만, 선진 諸子百家는 분리하지 않았다. 분리하지 않았다기 보다도 분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선진 제자백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배경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시대배경도 그저 춘추전국 시대는 그냥 亂世였다 하고 넘어가서는 안되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의 배경을 한 번 비교해 봐야 할 것이다.
시대가 뒤로 갈수록 국가의 영역은 넓어지고 국민은 많아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도 지극히 복잡다단 해진다. 광대한 국토에 많은 국민을 통치하기에는 완벽한 제도도 제도려니와 국민들의 수준도 들쑥날쑥하여 통치자 입장에서는 그저 난리만 일어나지 않게 다스리면 성공적이라고 평가되곤 했다. 우리가 중국 역사를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이른바 태평성대라는 시기가 얼마나 드문가를 금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통치자들이 한결같이 바보들이어서 그랬겠는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광대한 영토에 수많은 인간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지상의 파라다이스를 만든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진 제자백가의 시절에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나라라 해봐야 아무리 커도 지금의 일개 省의 면적을 넘지 않았으며 그 중에 쓸만한 땅은 경기도 정도에 불과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물며 작은 나라야 오죽하랴? 안산시보다도 작았다. 국토의 면적만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국민의 수도 따라서 적었으며 民風이 비교적 순박하였다. 순박한 국민이라면 상부의 명령을 잘 따랐을 것이다. 좁은 영토였다면 관리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번 마음먹고 잘 다스려보겠다는 통치자와 그 통치자를 잘 보좌하는 관리만 있게되면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게 된다. 그 어렵다는 태평성대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이다. 諸子百家들이 한결같이 들고 나와 목이
쉬도록 외치던 태평성대는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면 허무맹랑한 주장같아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던 일이었다. 경제문제 따로, 정치문제 따로, 사회문제 따로, 이렇게 따로 따로 문제를 풀만큼 국가의 영역이나 국민의 숫자가 거대하지 않았고 문제 또한 복잡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바로 선진 제자백가가 등장했던 시기의 시대배경이다. 이점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고 제자백가를 읽게 되면 구름잡는 소리로 들리거나 그저 환상적인 理想論으로 치부하기 쉽다. 얘들아, 中國古典文學批評論에서 다룬 <작가를 알고 시대를 논하고>가 여기에도 적용된단다.....
그렇다면 諸子百家들이 도달하고자 열망했던 그 태평성대란 과연 어떠한 경지를 말하는 것일까? 孔子는 大同世界를 추구했다. 大同세계란 어떤 세상일까? 《禮記·禮運篇》에 보면 다음과 같이 대단히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다:
「공익을 앞세우고, 양심적이고 능력있는 자가 관리가 되며, 사람들마다 신용을 지키고 화목하여 남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대하며, 노인들은 대접을 받고 젊은이들은 적당한 일자리가 있으며 아이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자란다. 그 밖에 홀아비·과부·고아·장애자들도 모두 나름대로 보호를 받으며 여자나 남자나 다 때가 되면 시집 장가를 간다. 서로 서로 아끼는 맘이 있어 남을 해칠려는 심보이 없으며 밤에 빗장을 걸지 않아도 도둑이 없는 이런 세상을 大同이라 하느니라..」
그러면 이번에는 老子를 보자. 《老子·第八十章》에 보면 비교적 소박하게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온다:
「상록수역을 중심으로 반경 1 km정도의 넓이에 국민은 이 수업을 듣는 수강생 정도면 좋겠다. 각종 기계도 필요없고 그저 땅에서 자라는 곡식을 맛있게 먹고 편안히 살면서 옆 동네의 닭소리 개소리 들려도 서로 아는체 할 필요없이 늙어 죽도록 상록수역을 떠나지 않는 그런 세상이 그립노라...」(의역)
이번에는 許行의 주장을 들어보자:
「한마디로 통치자고 관리고 전부 개나발, 전부 밭에 나와 백성들과 똑같이 바지 걷고 팔 걷어부치고 정강이의 털이 다 달도록 함께 일하고 먹고 그러면 누가 왕 해먹으려고 싸우나.. 이게 태평성대지」(의역)
주로 이런 식이다. 孔子의 경우는 理想이 너무 높은 것 같고, 老子의 경우는 말도 안되는 소리같고, 許行의 경우는 웃긴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현대적 관점에서 보니까 그렇지 당시로서는 결코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에 한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그것은 후세의 개혁처럼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혹은 어느 일부분을 개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탈바꿈하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백가의 학설은 이러한 완전한 변화의 당위성, 방법, 절차 등을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제자백가의 주장이 당시로서는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기 위해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사회변천을 간략하게 조명하기로 하자.
인간이 지구상에 처음 등장하여 활동했을 초기, 말이 인간이지 실은 일반 동물과 거의 다름없이 생존을 위해 무진 고생을 했을 것이다. 自然環境을 전혀 콘트롤 할 수 없는데다 약한 육체적 조건 때문에 먹이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지어 다녔을 것이며 자연속에 자생하는 식품을 찾아 그냥 줏어 먹었을 것이다. 이 시기엔 지상에 파충류가 우굴거려 나무 위에 간단한 움막을 지어 기거하거나 동굴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타'라는 글자가 현대 중국어에서는 영어의 it에 해당되는데, 고문에서는 그 옆에 [ :벌레 충]을 붙여 蛇로 해석한다. 원시 시대 파충류에 고생하던 시절, 자고 일어나면 서로 안부로 묻던 말, "밤새 그것( ) 없었어요?"에서 나온 말.
문화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수집단계가 이때쯤이다. 여기서 조금 발전하면 간단한 도구와 불을 발명하고 서로 협력하여 약한 들짐승 날짐승을 잡아먹고 또한 물고기도 잡아먹었을 것이다. 이때가 수렵단계.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들은 여전히 생활에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 도구가 더욱 발달하고 목축기술과 농경기술을 터득하면서 초원에서는 유목을, 평야에서는 농사를 짓는 시기에 접어든다. 이때를 유목단계나 농경단계라 하는데 이즈음에 이르러 인간은 비로소 기아와 추위에서 해방되어 기본적인 의식주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古書에 보이는 有巢氏, 燧人氏, 伏羲氏, 神農氏의 시대가 대략 이러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무개 아무개 氏들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라기 보다도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部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氏란 글자는 일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아무개 아무개 씨의 글자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有巢氏, 잘 보면 果자가 있다. 과일이다. 수집단계임을 알 수 있다. 巢는 둥지. 이 단계의 기거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燧人氏, 잘 보면 火가 있다. 불을 발견했을 시기이다. 간단한 도구와 불로 짐승들을 수렵했던 수렵시기다. 伏羲氏, 잘 보면 犬, 羊, 秀(禾+乃), 戈 등이 보인다. 초보적인 목축과 농경단계다. 神農氏, 아주 확실하게 農자가 들어있다. 정착시기인 농경단계로 점차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전설의 시기로 간주하는 '三皇'五帝의 三皇시대가 대략 수렵단계에서 초보적인 농경시대로 진입하는 단계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 시기만 해도 대체로 인간들은 自給自足했을 것이고, 말이 임금과 백성이지 그저 동네 어른과 주민들처럼 아프리카의 부락 酋長과 원주민처럼 그렇게 별 큰 싸움없이 화목하고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老子가 그리워하던 小國寡民의 세계나 孔子가 이상으로 삼던 大同세계, 그리고 許行의 이상향은 대략 이때쯤을 지칭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던 상황이 변한 것은 각 부족 사이에 利權이 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짐작된다. 다른 부락에 자기 부락보다 좋은 것이 있는 경우 욕심이 나서 서로 침탈하기 시작했다. 승리하면 정복당한 부락민들은 노예로 부리고, 이때부터 엄격한 신분과 상하관념이 생겨났다. 이런 추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夏殷周 三代를 거치며 이른바 天子가 있었지만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엉망진창 난리판이 극에 달한 시기가 바로 춘추전국 시대다. 지금으로부터는 너무 오랜 옛날 이야기지만, 그러나 그 당시 춘추전국 시대로 보아서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던 太平盛代를 의식있는 학자라면 마땅히 그리워 했을 것이다. 그리움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실현시키고자 목청을 높였다. 그들의 주장이 당시 한 나라 국토의 면적이나 그런대로 소박한 民風에 비추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계급사회의 단물을 맛본 통치자들에게 어필했던 것은 法家였다. 철저한 현실주의 학파로 富國强兵을 주장한 法家였다. 法家의 주장은 한마디로 통치자를 위한 학설이다.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역사상 최초로 통일한 秦나라가 法家를 적극적으로 채용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法家의 학설이 최선은 아니다. 秦나라는 14년만에 망했다.
[출처] 제자백가(諸子百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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