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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재판
신 17:8-13
8 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10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2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3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신 17:8-13 / [최고 법정] 만일 여러분의 지방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기에 어려운 문제들 곧 우발적인 살인이나 고의적인 살인 문제나 사유 재산의 분쟁들이나 폭행 사건 등이 일어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정해 놓으시는 최고 법정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9) 여러분은 그 곳에 있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나 그때에 임무를 맡고 있는 최고 재판관들에게 판결을 내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10) 그러면 여호와께서 지정하시는 그 최고 재판관들이 여러분에게 내려 주는 판결대로 하십시오. 또 그들이 지시하는 것은 모두 꼭 그대로 지키십시오. 11) 그들이 여러분에게 지시하는 명령이나 판결은 모두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무슨 판결을 내려 주거든 더 강하게도 하지 말고 더 약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12) 누구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이나 최고 재판관의 판결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를 처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에서 죄악을 척결하십시오. 13) 그러고 나서 온 백성에게 그 소식을 알리면 모두 두려워할 것이며 다시는 그렇게 건방진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사자 간에 판결이 어려운 일은 레위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묻고 그 판결에 순종해야 합니다.
판결하기 어려운 일에 대하여(8-9) 성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치리와 지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질서 안에서 조화롭고 화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난해한 사건이 일어날 때 그분이 택하신 곳에서 최고 법정을 열어 제사장과 재판장이 함께 주재하도록 하셨습니다. 최고 법정에 대한 규례(8-13)로 신명기 16장 18-20절에 묘사된 지역 법정에 관한 내용의 연속입니다. 공동체 가운데서 다투거나 피를 흘리거나 서로 간의 고소 사건 속에서 판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면, 중앙 성소에 가서 제사장과 재판장에게 판결받아야 합니다. 중앙 성소의 재판정이 발전해 후대에 예루살렘 공의회, 일명 산헤드린이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은 모두 71명으로, 그 구성원은 24명의 제사장과 24명의 장로, 그리고 23명의 랍비 학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재판의 절차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당시 최고 법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정성(10-11)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성입니다. 중앙 성소의 판결이 공정성을 상실한다면 아무도 가장 권위 있는 법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중앙 성소에서 율법의 뜻에 따라 공정한 판결이 내려졌다면 반드시 그대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 언급됩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기록된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수 1:7). 만일 우로나 좌로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 법의 도에서 벗어나게 되고 성경은 이를 가리켜 죄라고 표현합니다.
지켜져야 할 결정(12-13) 중앙 성소에서 결정된 판결을 듣지 않는 사람은 즉결 처분해야 합니다. 중앙 성소의 상급 법정에서 내린 판결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내려진 최종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에 불복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거부행위였기 때문에 마땅히 극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 백성이 이로써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은혜만 강조한 나머지, 법과 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세상 법과 교회법을 바로 알고 준수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 세우신 법과 질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까? 거역하고 거스르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받을 형벌은 무엇입니까?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다름 아닌 진실성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만 믿고 따르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달라도 그만의 확고한 신념과 원칙이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믿고 따릅니다. 반면 자신과 생각이 같아도 말과 행동이 다르고, 원칙과 신념 없이 흔들리는 사람은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생각과 원칙과 신념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행되는 판단과 선택은 정확해야 하고,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가 필요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제사장 판결
신 17:8-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7장 8-13절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 두 종류의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나아가는 해석이 있고, 미래에서, 완료된 상태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를 전부 다 삼켜 버리고 없애버리는 쪽으로, 그렇게 두 종류의 시간 층이 있고 두 종류의 해석이 있습니다. 미래에서 오게 되면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정답을 알고 있는 입장인 반면에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차올라오게 되면 정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해도 이게 정답이 아니면 어떻게 할까? 내가 판단하는 것이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믿는다는 것이 믿음이 아닌 걸로 들통 나면, 나는 헛수고잖아? 늘 이게 불안, 불안해요. 이것은 바로 두 개의 시간 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항상 과거를 근거로 해서 현재를 분석해서 미래의 보다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본질을 그냥 유지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그 방식도 있어요. 그리고 율법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해석도 있고, 율법의 완성된 미래에서부터 출발해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에, 나는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했었구나, 하고 살펴보는 그런 방식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두 가지 다를 제가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여기에 8절에 보게 되면 “네 성중에서 송사로 다투는 일이 있으되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절,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이래 됩니다. 너와 나는 1과 1, 합해서 2가 되겠죠. 근데 율법은 1과 1에서 해결 짓지 말고 제 3의 요소를 끌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 3의 요소가 뭐 그리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근데 제 3의 요소가 과거에서 현재로 나아갈 때는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재산문제나 여러 가지 이웃하고 다툼문제에 있어서 판결하기가 힘들다, 그러면 제 3의 요소인 재판장이나 레위인에게 물으면 된다, 그러면 그거만 생각하면 ‘그래, 이게 궁금했었어? 그거 해결했으니까 앞으로 잘 살아야지.’ 이렇게 돼버리면 과거에서 현재로 그냥 미래로 쭉쭉 나아가는 방향이에요.
근데 미래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뭔가 구타하거나 때리거나 싸우거나 피 흘리는 일이 있거든 재판장에게 물으라. 이 본문을 미래의 관점에서 이렇게 봐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그 재판을 시작할 때 기대했던 재판의 판결이 나오지 않더라도 상관없음.’ 이렇게 돼요. ‘내가 고소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거봐! 내가 옳잖아. 내가 잘 판단했잖아.’ 라는 그런 기대가 생기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엔 슬퍼하거나 노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가는 거예요.
도리어 이렇게 하겠죠. 내가 왜 이 재판, 판결에서 지더라도 상관없느냐? ‘그 재판에서 반드시 이겨야 되는데, 그래서 내 뜻을 반드시 관철해야하고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돼.’ 라는 그런 것들이 나의 미래에 오실 분을 자꾸 가로막고 과거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자꾸 고수하게 만들어요.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방법을 자꾸 고수하고 지탱하려고 하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가 실패로 끝납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을 갈아타라고 이야기했죠. 과거로부터, 현재로, 미래로 가는 것을 갈아타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가는 시간 노선으로 갈아타셔야 해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두 개의 빌딩이 있는데 한 41층 되어서 이쪽 건물과 저쪽 건물 사이를 건너갈 수 있는 통로, 스카이 브릿지가 있어요. 서울에도 그걸 본 따서 높은 건물 중간에 있는데, 아주 고난이도의 기술인데, 삼성에서 그렇게 만들었답니다. 이쪽 시간에서 저쪽 시간으로 건너가는 통로가 있는데, 그 통로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라는 통로로 이렇게 건너올 수가 있어요.
내가 과연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로 건너가는 시간에서 건너왔는지, 돌아봐서 십자가가 보이면 이미 이쪽에 속한 거예요.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로 간 겁니다. 그러면 미래에는 무슨 말씀이 있기에 율법 해석에 있어서 미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도대체 신약에는, 완성된 상태에는, 마지막 때는 뭐 어떤 구조로, 어떤 체계로 되어 있기에 그렇게 재판에 져도 상관없단 말인가? 이렇게 궁금하실 거예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라는 것이 나와 있고요. 팔복하면 사람이름 같은데, 그건 아니고요. 팔복하면 제가 별로 안 좋아해요. 하도 복이 8가지밖에 없다는 그런 뜻 같은데, 복은 여덟 가지가 아닙니다. 복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항상 1로 가야되지, 네 개, 다섯 개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복의 마지막에 뭐냐 하면 10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고 고소를 당하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방금 본문을 보게 되면 항상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차올라옵니다. 뭔가 가정사나 이웃 간의 다툼이 있거든 제사장에게 가거라. 이게 바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모호한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이에요. “제사장한테 가게 되면 해결 받습니까?”꼭 이렇게 되거든요. “제사장한테 가라.” “그럼 하나님 제사장한테 가게 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이 됩니까?” 라고 할 때에 미래에서 내려오게 되면 제사장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소원풀이해주는 제사장 말고, 마지막 때는 제사장이 따로 있어요. 재판관이 따로 있습니다. 최종 판결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만 알아도 이미 너는 복된 자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복된 자냐 하면, 자기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복된 자에요. 자기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엄마가 애를 키우는데, 아이가 너무 이쁠 때는요, 자기 인생은 망가져도 좋다. 이 아이만 잘 된다면. 서슴없이 자식 사랑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아가씨일 때는 그렇게 몸매 관리하다가는 애 하나 놓고는 몸매 관리 같은 것은 신경 안 써요. 애가 너무 예쁘니까. “내가 뚱뚱해도 좋다. 살쪄도 괜찮다. 그러나 너만 잘되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 물론 이게 몇 개월 가지도 않지만. 그렇게 예뻤던 애가 예상 밖에 영 아니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몸매 관리나 신경 쓰죠. 인간인 이상은.
그렇더라도 너무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목숨에 연연하지 않아요. 자기 목숨에 연연하는 것은 너무, 너무 좋은 것이 없다는 논리밖에는 안 됩니다. 그거밖에 안 돼요. 뭔가 ‘까짓것 내 목숨하나 없어져도 괜찮아.’ 라고 할 정도로 그 괜찮은 분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리고 그 나타난 분이, 나타났다가 또 다른 분으로 바뀌면 안 되잖아요. 확정지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나타난 분이 세상 모든 변화를 좌지우지하고 모든 세상의 마지막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최종결정자이면 참 좋겠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주님이여!” 라고 부를 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이게 합류되어 있다고 보면 돼요. “주여!” 라고 할 때는 “죽여도 괜찮아요.” 이런 뜻이 밑에 딱 보태져있습니다. 그런데 “주여!” 라고 기쁨으로 하면 되는데, “주여, 주여, 집 사 주세요!” 라고 하면 이거는 엉터리에요. 이거는 뭔가 엉뚱한 거예요. 이거 잘못된 겁니다. “주여!”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주님만 계시만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나이다.” 그게 바로 미래의 최종적으로, 마지막 저 세상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세리라도 창기라도 괜찮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옆에 같이 달린 강도라도 괜찮아요. 불의한 청지기라도 괜찮습니다. 전혀 그런 것은, 천하의 죄인이라도 문제 삼지 않아요. 거지나사로가 되어서 온 몸이 종기로 뒤덮었어도 그거 괜찮아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주님이 버티고 있는 이상에는, 최종적인 것, 바로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서는 그걸 마지막 복음, 그게 바로 복이 있다. 나로 인하여 니가 어떤 수모를 당해도 오히려 니는 흥얼대도 괜찮다 이 말이죠. 좋아라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앙 안에서의 자유고 성령 안에서의 희락입니다. 거칠 게 없는 하이킥, 인생은 거칠 것 없는 하이킥이에요. 승진 안 되고 그만이고, 퇴직 되도 그만이고, 짤려도 괜찮고, 누구하고 다퉜는데 얻어맞아서 코피 나도 괜찮고, 쪼르르 달려갈 게 없어요. 쪼르르 달려간다는 것은 아직도 과거에서 현재로 해가지고 모호한 미래, 확정되지 않은, 뭐가 뭔지 아직까지 남아있는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볼 때는 기어이 내가 재판에서 이겨가지고 소송금이라도 따내겠다. 반드시 전세금이라도 받아내야 되겠다고 하겠지만, 이미 최종적 시점에 와버리면, 그러한 내 욕심을 채우는 그것조차도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최종 제사장과 성도의 만남의 전형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무사히 십자가 다리를 건너와서 갈아탔다고 치고, 다시 본문을 보면, 오늘 본문은 왜 있느냐, 오늘 본문을 이렇게 보게 되면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말씀을 먼저 설명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서로 치고 받다가 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하니까, 너와 나 2밖에 안되니까 3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원활하게 처리가 안돼요. 그래서 제사장을 불렀어요. 불렀는데, 그럼 제사장이 해결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라는 그런 의문점이 들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재판을 했는데, 판사가 제대로 해결을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불안감이 드는데, 이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천자히” 라고 합니다. 천자히, 교만하게, 건방지게, 제멋대로, 이런 뜻입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재판장을 찾았다는 말은 이제는 나한테 손해가 오고 내가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한다 할지라도 재판관의, 제사장의 판결이 그게 이미 확정이 된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재판장에게 가라 이 말입니다.
자, 쉽게 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니한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서 니가 미리 짐작할 그런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다는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박혀 있는 제사장의 권한을 위해서 니가 해결 못할 일이 벌어졌으니까. 이러한 관점이 참을 수 없는 거예요. 정말. 우리 사적으로,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내가 사는 입장에서는요. 도대체 이런 논리가 이게 가슴에 안 들어와요. 판사 니가 뭔데?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판사 니가 뭔데? 해서 3심제에요. 상고하고 항소하다가 그것도 안 되면 헌법재판소에다 하는데, 그것도 안 되면 어떻게 할랍니까?
뭐 ‘김영란 법’ 해서 정해놓고 이게 옳은지를 헌법재판소에다 고소를 해요. 그것도 만약에 원하는 대로 어떻게 하려고? ‘김영란 남편 법’을 또 만들어야 되겠네요. 이게 자기 뜻이 관철될 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용납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중심성 문제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이 중심으로 버티고 있는 이유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데, 인간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직접 하나님과 해결하라고 그래요. “하나님이여 이런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하옵소서.” 본인은 억울하죠. 근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솎아내라는 겁니다.
어떻게 솎아내는가, 12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리하며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이럴 것 같으면 한 번 꾹 참고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괜히 고소하다가 목숨 달아날 수가 있습니다. 괜히 나대다가. 억울하다고 동네방네 발설하다가 재판까지 가게 되면, 억울한 정도가 아니에요. 돌에 쳐 죽임을 당해서 니는 저주 받아라 해서 지옥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바로 구체적인 것은 출애굽기 22장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깊이 알 필요 없고요. 한 번 쭉 일어볼게요. 1절,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그러면 소를 도적질 당한 사람은 멱살 잡고, 왜?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밖에 안 갚아 줍니까? 나는 소 한 마리 잃고 정신적인 피해 보상은 적어도 소 한 마리에 소 열 마리는 갚아야 내가 약간은 만족하겠는데, 재판장 니가 뭔데, 니 소도 아니고 내 소인데, 나는 열 마리 갚을 것을 기대했는데 다섯 마리 판결합니까? 재판장이면 다야? 이런 인간은 소는 없고 지 목숨 달아나는 판결뿐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3절,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놈이 밤중에 들어왔을 때에는 누구야! 하고 망치를 휘두르다 맞아 죽었으면 살인죄가 아니지만, 훤한 대낮에 도둑이 온 것을 잡아놓고 죽으라고 막 패가지고 죽으면 그 때린 사람이 도둑한테 배상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피 흘린 죄에 대해서 그 가족에게 배상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재판장한테 “어이, 김판사 당신은 도둑맞아 본 적 없지? 도둑이 와서 간이 철렁 내려갔는데, 그 앞에서 대낮이면 어떻고, 들어와서 나는 패고 싶어서 팼다. 도둑놈이 잘못이지, 정당방위를 왜 벌하느냐? 벌금 못낸다.” 이래 나오면 그 사람을 잡아다가 쳐 죽여 버려라. 도둑 때리다가 지가 죽게 생겼어요.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보면서,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뜻대로, 원대로 해줄 것이라는 이런 터무니없는 욕망을 가지고 교회 와서 성경을 보게 돼요. 그런 하나님 없습니다. 중심 잡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 그 제사장이라는 중심과 마지막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 중심과 서로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동네가 아니에요. 천국은 율법 지켜서 갈 수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나를 떠나야 되는 동네에요. 내가 떠나려면 억지로 떠나서는 안 돼요. 아주 나 같은 인간은 죽어도 괜찮아요. 아주 너무 좋아서 서슴없이 자기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사람.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을 아주 지긋지긋한 그런 뜻으로 얼른, 미래의 확장된 상태에서 현재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그런 식의 시간 층으로 건너온 사람만, 이미 확정된 사람만, 구원이 결정된 사람만, 느긋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신명기를 보고 읽을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을 쳐 죽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내가 설계한 인생 노선에서는 구원의 요만한 어떤 접촉점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하고 상대하세요. 1대1로. 그래서 2가 되는 것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번 수련회 할 때 용서라는 말을 할 때 이랬습니다. 1대 1로는 용서가 안 되고 제 3의 요소가 들어와야 용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저 사람을 7번 용서하고, 또 얼마나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주님께서 7번에, 7번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제 3의 요소를 끌어들입니다. 어떤 임금이 있는데 신하가 빚을 졌는데 빚을 탕감해줬다. 그런데 그 빚을 탕감 받은 신하는 얼마나 지 맘대로, 지욕심대로 했는지, 자기 하인이 요만큼 빚을 졌는데 그걸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그래서 임금은 아예 그 되바라진 신하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이처럼 용서라는 것은 어떤 누구도 남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나한테 죄 지었다? 나한테 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남이 나한테 해코지 했다? 남이 나한테 해코지 한 게 아니에요. 아무리 해코지해도, 아무리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죽어도 좋다는 분이 계신다면 그 쳐다봄 자체가 저 사람한테 용서로 가는 거고, “니가 감히 나한테 대들어? 주님이여 정의가 살아있죠? 제가 정의를 실시하겠습니다.” 하고 나대는 자는 “니가 바로 진짜 정의를 훼방하는 나의 방해물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일본의 횟집에 가면 “이랏세이마세!” 우리말로 하면 “어서 오세요!” 그렇게 영접해놓고 갈 때는 별로거든요.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 되어가지고 일본 횟집 보면 너무 잘 느껴져요. “스미마셍” “소오데스까” 이런 얍삽한 것. 그처럼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 구축되어 있는, 내 노동과 내가 인사 잘하고 내가 겸손하고, 이런 것들이 지금의 횟집을 유지했다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는 앞으로 뭐 잘하겠지, 모호하게 남겨 둘 때에, 그 인간들은 나는 나로 인하여 즐겁고 행복한데, 그게 만약에 위에서 누가 폭행을 가해서 피를 흘리게 되면 고소하게 될 거에요. 바로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가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오직 자기만 챙기고 자기의 행복만 챙기면 그만이기 때문에 폭력사태라든지 본인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근데 이스라엘은 그 폭력사태의 의미는 당하는 본인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중심에 있는 제사장에게만 그 의미가 있어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고 그 제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제사장은 장차 모든 게 완료된, 한 분 밖에 없는 제사장, 그 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제사장 중심나라가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율법 해석입니다.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서 설명하는 것.
이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수련회 강의에 보면, 마태복음 23장 23절에, 너희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된다고 할 때, 이것도 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내고, 의와 인과 신도 해야 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된다는 이런 본문이 적혀 있어요. 근데 그 뜻은 그 뜻이 아니고 이런 뜻이에요. 의와 인과 신은 행하되 소득의 십일조를 외식으로 하는 것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헬라어로 그렇게 적혀 있는 거예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의와 인과 신이 되지 않으면, 건성, 건성 드리는 어떤 십일조도 십일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석해야 될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료된 상태에서, 예수님이 희생된 제사장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되어 되는 거예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행함은 거절되어야 하거든요. 거절되어야 할 십일조의 행함을 이것도 행하라고 하면 말이 되요? 안 되죠. 그러면 왜 십일조를 그렇게 좋아하느냐? 평소에 행하는 행동이 내가 이렇게 행해서 현재 내가 이만큼 됐으니까 앞으로 더 잘되면 미래는 더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그 시간 층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지고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바리새인 길을, 지옥의 길을, 악마가 기다리는 길을, 악마와 합치되는 그 지옥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율법을 주신 것을 바로 예수님과 연관시켜서 주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껏 살아온 것이 내 덕이다. 정말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는 맞습니다 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 천국 안에서의 성도의 고백인 것을 이제는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악을 제거하라
신 17:8-13 / 의정부중앙장로교회 컬럼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공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임을 보았습니다. 공의를 따르라, 즉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1. 악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오늘 (17:8-13)은 또다시 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은 너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입니다. 재판장들은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감독하는 상급 기관일 뿐이고, 백성들 자신이 공의로운 삶을 살고,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결론이 악을 제거하라는 것인데 악이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악은 단순히 나쁜 것, 불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깨뜨리는 것인데, 하나님을 우상 중 하나로 생각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안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7장 8절-13절)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무슨 죄를 가지고 사형까지 시키라고 하는 것일까요? 8절을 보면, 그 죄는 단순한 다툼이나, 구타 사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곳,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복종하고, 불순종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이 최고, 절대의 권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2. 신앙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온 몸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해 버린 것은 아닙니까? 온몸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공의로운 사회(공의로운 교회)를 위해서는 바로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깨워서 말씀을 읽고,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내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나의 전 인격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때 그분은 나를 자기 온 마음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과 나를 바꾸실 정도로 나를 그렇게 귀하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분에게 그렇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3. 자기 욕심과 우상숭배
하나님의 뜻에 온몸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제 욕심을 기준 삼는 걸 우상숭배라 합니다. 왜 하필 이스라엘은 많은 우상들 중에서 아세라와 바알을 섬겼을까요? 그것들은 풍요를 위한 신으로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섬기는 것 뿐입니다. 그게 우상숭배고, 성경이 말하는 악의 한 현상입니다. 17장 1절을 보면,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흠이나 악질이란 큰 결함을 가진 제물인데, 나에게 절실한 문제가 없을 때는 그러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아주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도 신실하신데, 그렇게도 은혜스러운 분인데,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한 방향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긍휼과 진실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진실합시다! 성공이 아니라 거룩해지려고, 말씀 앞에서 몸부림을 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회메일
신명기 11:8-17
‘역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꾸로 달린 비늘이라는 말입니다. 역린이란 용의 목 아래에 거꾸로 붙어있는 비늘을 가리킵니다. 용은 역린을 건드리면 성을 냅니다. 반드시 자기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역린이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역린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역린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역린은 대표적으로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가나안 바로 앞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전체가 서른 장이 넘으므로 상당히 깁니다. 그러나 그 긴 설교 내용은 단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것을 되풀이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설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명기를 설교할 때는 사실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설교이기 때문에 설교를 또 다시 해석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잘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정탐가서 보았던 것처럼 가나안 족속들은 강하다. 40년 전 너희들 조상들은 겁을 먹고 내 말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너희들 일이 아니라 나 하나님의 일이고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 전쟁에서 너희들이 이기도록 결정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너희 조상들은 끝내 내 말에 불순종했다. 그래서 너희 조상들은 가나안에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며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그러나 이번에는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고 가나안 땅을 여러분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9:1-3) 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신 그 까닭은 40년 전에 불순종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다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은 이제 물러갔고 새로운 세대가 왔기 때문에 그때 그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허락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40년간 광야에서 그냥 방황한 것이 아니라 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 40년 훈련으로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 40년 방랑 생활에 대해서 ‘광야교회’라고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중요한 한 정의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란 가나안 곧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다 왔다고 뛰어노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교인들이 체력을 기르고 실력을 기르는 곳입니다. 그 체력과 실력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교인들이 교회에서 가장 먼저 배울 것, 중요하게 배울 것이 순종입니다. 이 순종을 잘 배워야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순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다시 광야로 돌아가서 또 40년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주의해야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착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 실력 때문이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상으로 가나안을 주신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북한에서도 착각은 자유라고 합니다. 또 착각은 커트라인도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그런 우스개 같은 착각까지 포함해서 모든 착각은 정도껏 해야지 정도를 지키지 못하고 도를 넘어가게 되면 멸망의 지름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절대로 그런 착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또, 너희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물리친 것은 너희들 힘으로가 아니라 나 하나님이 한 것이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이 워낙 악하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신9:4-5)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신9:6) 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5) 라고 가나안을 주신 까닭은 너희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내가 너희 조상들과 한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너희에게 한 약속을 지켰으니 너희도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신 약속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다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약속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중요한 말씀은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 너희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같이 살지 말고 그들과는 다르게 의롭고 바르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복을 받고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나안 족속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듯이 너희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 오늘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잘 알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대표적인 표현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9장 6절에서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9장 1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목이 뻣뻣하여 자기 고집만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표현은 ‘거역’입니다. 하나님을 늘 거역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9장 7절에서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라고 말씀하시고 9장 23에서 24절까지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것을 말씀하시는 단어는 ‘격노’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화나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장 7절에서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8절에서는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18절에서는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 라고 말씀하셨고 22절에서도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론 핫다아와에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몇 번이나 멸망시키려고 작정까지 하셨습니다. 여러 번 그랬습니다. 다시 9장 8절을 보겠습니다. ‘호렙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느니라’ 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는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신9:19-20)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신9:25-29)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하고 강하게 말씀드림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멸망당하는 것을 면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신10:10).. 모세가 하나님께 늘 기도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보신 이 여러 가지 말씀들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 늘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 너무도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신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신9:9-12)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신9:22)
이어지는 23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라는 말씀은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또 11장 6절에서 ‘르우벤 자손 엘리얍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지도자 몇 명이 작당하여 250명이라는 제법 많은 사람을 모았고 모세는 아론과 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앞에 나와서 우리와 당신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사람이므로 우리는 당신 지휘를 받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잘났거나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켰기 때문이라고 만류했지만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향로를 가지고 오게 하셨습니다. 그때라도 모세의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화가 나신 하나님께서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다 살라 죽게 만드십니다.
바로 우리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틈만 나면 교만하고 틈만 나면 불순종했습니다. 죽을 위기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교만해지고 이제는 먹고 살만하다 싶으면 불순종했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목을 쳐들어 목이 곧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다간 망하는 것은 옛날 가나안 족속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마찬가지라고 경고하십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든, 과거에 얼마나 잘했고 충성했든 얼마나 잘 했든 다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일마다 때마다 절대로 잊지 말고 그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9장 7절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크게 어려운 것 없습니다. 이것을 10장 12절과 13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레를 지킬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10장 16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고 20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11장 1절에서는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라고 말씀하시고 11장 마지막인 32절에서는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바르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르게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옳게 살아야합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10장 17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라고 뇌물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8절에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주 강하게 요구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포를 삼으며’(11:18)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은 여러분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지겹다고 할 때까지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11:19-20)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의 근본이 바로 이것이고 문제 해결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고 선한 일을 하고 이 말씀을 명심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고 해결점입니다.
순종하면 행복이 있고 평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신11:14-15).. 잘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11장 21절과 22절에서는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런 복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신11:2-5) 이 모든 것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장 7절에서 12절까지는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13절에서 15절에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지키라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라고 말씀하시고 21절에서 25절에서는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백성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27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불순종하면 멸망과 불행이 온다는 것도 분명하게 빠뜨리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11장 16절과 17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에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라고 말씀하시고 28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행복과 불행, 평화와 멸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전적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시기도 하고 불행과 멸망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11장 26절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선택하는 것이니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11:29)라고 말씀하십니다. 축복을 받을 산, 저주를 당할 산, 두 산이 있으니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디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냥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행복을 틀림없이 누리게 됩니다. ♥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
신 11:8-17 / 김경민 목사
우리는 과거의 일을 통하여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갖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를 한 번 도와주었던 사람은 다음에도 또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곤 하죠. 또는 과거에 비교적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경험이 있다면 미래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처리하곤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은 우리의 귀한 자산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앙에서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자산이 될까요? 이 또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하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신명기 11장 초반부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과 올바른 길에 있지 않을 때 징계하시는 교훈으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모세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촉구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미래의 축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는 8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본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접속사죠. 그리고 그 의미 또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뒤에 등장하는 일을 확실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므로’ 접속사 뒤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누릴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축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기 때문에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지 사랑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 축복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죠.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장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1서 4:19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 또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죄에게 구원하여 주심으로 먼저 사랑을 보여주신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도,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안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여야 참된 의미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또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에 대한 축복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각 절마다 ‘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12절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 14절 “너희의 땅”, 17절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 이렇게 다양한 표현으로 가나안 땅을 설명함으로 이 땅에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땅인지 보여주고 있죠.
무엇보다도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심으로 은혜를 받는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11절에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분명하게 나타나는데요. 모세는 여기서 애굽의 땅과 가나안 땅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애굽은 발로 밭에 물을 댈 수 있을 만큼 농사가 쉬웠던 땅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땅은 이미 ‘채소밭’이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많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땅이었죠.
하지만 그에 반해 가나안은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땅입니다. 애굽처럼 발로 물을 댈 수도 없는 땅이고, 그렇다고 농사가 쉬운 평평한 땅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는 그 땅은 14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내리셔서 풍성한 소산물을 얻을 수 있는 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굽 땅은 수고하고 노력하면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노예로서 참된 자유와 만족을 누리지 못하였죠.
반면에 가나안 땅은 비록 척박하고 험난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려주시는 비를 의지하면서 배부를 만큼 넉넉하게 얻을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많은 것을 갖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어디에 투자해야 더 쉽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요즘 시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얼마전 한국의 한 젊은 만화가가 현재 한국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코인 뿐이다라는 만화를 그렸습니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또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가치적 희망은 없고 남은 것은
내가 산 비트코인의 금액이 상승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세상의 관점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죠.
그러나 비록 척박하고 험난해도 하나님이 돌보아주시는 땅은 만족이 있습니다. 세상적 풍요로움은 없을 지라도 영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하늘의 비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을 의지하며, 그 사랑에 만족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 느니라”
바라기는 오늘 한 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길이 비록 어렵고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와 만족을 누리시고, 또 오늘도 부어주시는 은혜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므로 감사로 하루를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