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토)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에 반하여 마귀는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마음을 넣어주었습니다(요 13:1-2절).
예수님은 마귀에 의해 팔려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물론 이를 촉발시킨 장본인은 마귀요 유다입니다.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지만 그 본질은 창세전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카이로스)에 따라서 이 세상의 일(크로노스)들이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의 눈에는 부적절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부적절한 도구가 되지 않고 온전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도 여전히 살아나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죽사오니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로 사는 자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요 영적 하루살이가 되어 이 하루를 넉넉히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날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60:1-12
제목 :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인도자를 따라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12,000명을 죽인 때에)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3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5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6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7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8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
9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돕에 인도할까?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1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 나의 묵상
본시는 다윗의 정복전쟁이 한창 수행되고 있을 때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표제에 나온 것처럼 다윗이 이스라엘 북쪽의 아람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남동쪽에 위치하였던 에돔이 이스라엘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큰 위기에 처하였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표제는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12,000명을 죽인 때로 기록하고 있음으로 본시가 마치 에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때에 쓰여진 듯이 보이게 한다.
하지만 사실 본시는 요압이 에돔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기 이전의 위기 상황에서 쓰여진 시이다.
본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올리는 언약에 근거한 선민의 승리 호소라 할 수 있다.
1-5절, 에돔의 공격으로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께 선민의 회복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이여, 주님은 우리를 버려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노를 퍼부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다시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주께서 흔들고 갈라지게 하신 그 땅을 다시 꿰매주십시오.
갈라진 땅의 틈을 메꿔주십시오.
땅이 중심을 잃고 흔들립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립니다.
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깃발을 높이 다셨습니다.
주의 강한 오른손으로 우리를 건져 주시고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6-8절,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을 간구하는 근거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며 주변 나라를 정복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상기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승리하면 세겜 땅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할 것이다.
길르앗과 므낫세가 다 나의 것이다.
에브라임은 내가 쓰는 투구이며 유다는 나의 지휘봉이다.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다.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질 것이며 블레셋에 대해 내가 큰 소리로 승리를 외친다.
9-1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에돔을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게 하여 주실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누가 나를 굳건한 성벽이 있는 성으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더 이상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적과 싸울 때에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사람의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2절, 이스라엘의 대적을 밟으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지금은 위기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18장은 오늘 시편 60편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다.
거기에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문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6, 13절).
물론 전쟁이 어디 쉬운 것이 있겠냐마는 다윗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일단 블레셋과 모압을 쳐서 정복하였다(대상 18:1-2절).
그리고 이번에는 주력 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아람을 상대로 싸운다.
당시 아람은 여러 부족국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공격해 오자 부족간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스라엘에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람과의 전쟁이 지체되고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틈을 타서 남동쪽에 있던 에돔이 이스라엘의 남쪽지역을 공격하였다.
결국 남부 지역을 수비하던 군대는 에돔에 패하고 만다.
북쪽에서는 전쟁이 지리하게 길어지고 남쪽은 전쟁에 패하는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크게 위기감을 느끼며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회복과 승리를 호소하는 것이다.
결국 다윗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런데 그 승리는 자기의 힘이나 용병술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함이다.
그래서 좀 위기에 빠질지라도 그는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심을 그는 믿었다.
그리고 다윗은 전쟁에서 빼앗은 각종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다.
(대상 18: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온 은금과 함께 하여 드리니라.
다윗은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는 결코 전쟁을 군사 숫자로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는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한다.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시지만 개선장군과 같이 군림하는 자로 오시지 않는다.
그는 이 땅에 죽으러 오시는 것이다.
그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만이 아들 안에 있는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영생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영생을 주기 위하여 아들은 먼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
그 죽으심을 통하여 이를 믿는 자들을 다 당신 곧 십자가로 이끄신다.
(요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들림을 받고 또한 우리도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은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연합되는 것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다윗의 위기는 죽음을 방불하는 위기이다.
그 위기 앞에서 그는 부르짖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다윗은 그가 외치는 단말마적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또한 이렇게 외친다.
(시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는 이렇게 이사야 53장의 메시야 수난에 나오는 그 모습 그대로 질고와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윗이 외친 그 부르짖음으로 외치신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단말마적 외침은 하나님 아버지와 창세전부터 시작하여 처음으로 분리되는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이다.
고아는 분리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는 처음부터 엄마의 품속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고아와 다름없다.
아담 이후로 나 역시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나님과 분리된 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품 밖에서 사는 것이 내게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런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잘 되기를 바라는 종교성에 매몰되어 산 자이다.
그렇기에 기도도 나의 유익을 위하여, 헌금도 나의 유익을 위하여, 심지어 목사가 되어 행한 목회 역시도 외적으로 잘 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복음의 핵심을 알지 못한 채 나의 뜻과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왔다.
그러다가 주님의 공의로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심판은 나를 죽이는 진멸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징계였다.
그 징계를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아버지 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고아로서 그 품속이 얼마나 따스하고 안락한지는 전혀 알지 못하였으나 날마다 말씀으로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속에 나아가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제는 안다.
나를 구원한 그 십자가 은혜에 감사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한 구약의 조상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따라 그들을 도우셨으며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율법의 시대가 아닌 은혜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고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율법이 기각되는 신약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오직 예수로 살아가는 믿음의 시대입니다.
그 주님 안에서 오늘도 넉넉히 살되 세상의 부요함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자족하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