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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금요일 저녁의 목욕탕은 언제나 옳다며 나는 그날도 한주동안 쌓인 학업스트레스와 함께
몸에 묵어있는 때를 한바가지 벗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때 빼고 광내어 기분 좋은 상쾌함을 만끽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항상 들리는 슈퍼 집에 그날따라 뚱땡이 바나나 우유가 다 떨어졌다는 것.
“어쩌지, 방금 이 학생이 마지막으로 남은 거 사버렸는데.”
“아….”
주인아줌마는 내가 찾는 걸 알기 때문에 적어도 하나 정도는 꼭 남겨놓는데
그마저도 방금 이 녀석한테 빼앗겼다는 것.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아줌마를 보니 괜히 녀석이 미워졌다.
목욕 후에는 언제나 뚱땡이 바나나 우유가 진리 인 것을….
그냥 초코 우유랑 바꾸자고 해볼까?
“저기….”
“돈 여기다 놓을게요.”
녀석은 바나나우유와 맞바꾼 돈을 계산대 위에 당당하게 올리고는
“수고하세요.”
채 붙잡기도 전에 쌩-하니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어정쩡한 상태로 허공에 떠 있는 손가락을 재빨리 가지고와
아쉬운 대로 요쿠르트 한 줄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바나나 우유가 진리라고는 하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그렇다고 우리 집 반대편에 있는 편의점까지 가는 건 오바였다.
그러니 한 줄에 다섯 개가 들어있는 이 요쿠르트에라도 만족할 수 밖에….
나는 요쿠르트에 빨대를 톡 꽂아 쪼로록 거리며 슈퍼 집을 나왔다.
얼마 뒤 집 근처에 다다랐고 길모퉁이를 돌아 걸었는데,
“……으읍….”
옴마…야.
3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남녀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헐…….
…나 여기 지나가도 되는 건가.
이런 강도 높은 애정행각을 눈앞에서 보는 게 처음이라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주춤거렸는데
“…쪼로록… 쪼록쪼록….”
하필이면 그때 뒤쪽에서 어떤 카랑카랑한 소리가 눈치 없이 끼어들게 뭐람.
고요한 정적을 깨뜨려버린 그 무언가로 인해 한 순간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뭐, 주변이라 해봤자 서로의 입술을 격렬히 빨아대던 그 두 남녀, 둘 뿐이었지만….)
“쪼록…쪽쪽….”
참으로 경박한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 슈퍼 집에서 봤던 그 녀석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녀석의 입을 틀어막아 앞에 있는 연인의 오붓한 시간을 훼방 놓은 것에 대한 예를 갖추었고,
“아…씁.”
그 결과, 바나나 우유의 따스하다 못해 따가운 눈총을 한 몸에 받고야 말았다.
왠지 연인 사이를 훼방 놓은 것 보다 이 녀석을 건드린 것이 더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자
놈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까닥이고(목례하듯),
남은 요쿠르트를 그대로 목욕탕 바구니에 처박아 넣고 냅다 집으로 뛰었다.
밤이라 어두워 얼굴을 잘 못 봤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야 정어리!”
“…으악!”
“뭐하냐?”
“…아니……헉헉….”
이수열이다.
“…너 여기서 뭐해?……허헉.”
“내가 여기서 혼자 뭐 하겠어. 너 기다렸지. 현주이모가 오늘 못 들어온다고, 너랑 같이 저녁 좀 먹어 달래서 왔다 왜.
근데 어디 갔다 이제 오냐. 전화도 안 받고, 죽을래?”
“아- 그래? …아침까지 그런 말 없었는데…. 엄마가 요즘 바빠서 깜빡했나보다. 암튼 들어가자 얼른~”
나는 혹여 라도 바나나 그놈이 쫒아올까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이수열을 떠밀 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탕 갔다 왔어?”
“아, 응.”
“혼자?”
“응. 나 혼자 목욕탕 잘 가.”
“헤에- 왜 혼자 갔어~ 나도 목욕탕 좋아하는데.”
참나-
표정이 왜 저래.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냐? 이상한 생각 하지!”
“내가 뭐. 그냥 나도 좋아한다고. 근데 집에 먹을 거 이거 밖에 없어?”
수열이 놈이 보란 듯이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는데 내가 봐도 없긴 너무 없다.
그래도 명색에 여자 사람이 두 명씩이나 사는 집인데 먹다 남은 반찬 몇 개랑 샐러드 하나가 뭐람.
그 흔한 주스나 과일 쪼가리도 없고 말이지.
내가 초대한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온 손님에게 대접하기에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형색이었다.
“나 이거 먹어도 되지?”
질문과 동시에 냉동실에 있던 하겐다즈를 꺼내 거실로 향하는 이수열.
이건 물어본 것도 안 물어본 것도 아녀.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래니.
“맛있어?”
“응…뭐.”
잡지 보느라 정신이 팔려 대답이 건성이다.
슬쩍 들여다보니 남,여 모델들이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에라이.
“근데 말야 이수열, 너도 그래?”
갑자기 아까 본 쪽쪽 커플이 생각나서 녀석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녀석은 연애 경험도 많고 왠지 키스도 무지 잘 할 것 같았으니까.
“…그… 막…. 있잖아. 왜~”
“뭐래?”
“아니, 너두 막… 길에서 여친이랑 키,키스 같은 거 하고 막 그러냐고.”
“또 뭐라고.”
“너도 그래?”
“글쎄다. 난 그런 건 좀 별로.”
“그치? …아무래도 그건 좀….”
“난 안 보이는 데서 몰.래. 하는 게 더 좋은데.”
헐-
아까 그들보다 니가 더 음흉해 보이는 건 왜인지….
“근데 그건 왜?”
“아냐.”
“설마 너. 길거리에서 남자랑 키스했냐?”
“아니거든?”
“나 몰래 그러고 댕기기만 해. 걸리면 죽는다.”
“웃기시네. 니가 뭔데?”
“오라버니 말이니 새겨 듣거라,”
참네.
저놈의 허세, 개나 물어가라지.
그날 녀석은 내가 아무래도 수상하다며, 나를 이대로 혼자 두고 집에 갔다가는 뭔가 내가 큰일을 저지를 것 같다며
아예 거실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내 보기엔 그냥 제 놈이 집에 가기 귀찮아 눌러 앉은 거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았지만.
“아, 그리고.”
“또 뭐여.”
“새벽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나 보고 반해서 덮치면 안 된다. 알았지?”
녀석 하는 짓이 귀여워 못 이기는 척 봐줬다.
***
“어리 누나,”
“응?”
“저랑 사귈래요?”
귀여운 연하남의 사귀자는 진지한 고백.
지금의 이 상황을 네 글자로 줄이면
대.략.난.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지만 내 나이가 열아홉이니 나보다 4살 어리면, 연하의 그는 열다섯.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이란 말이지. 혹시 내 친구 강주은의 하나뿐인 동생 강치윤이 그 유명한 중2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누나~”
“저기 치윤아? 누나가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까…”
제발 그 입 다물지 못 할까아-!
“누나 남자친구도 없다면서요.”
흠. 그렇지.
내게 남자 친구가 없기야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너와 내가….
“풉.”
……응?
…
“어이.”
갑자기 끼어든 이 굵디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뉘신지?
“…저요?”
한눈에 보아도 자신보다 체격조건이 좋은,
이 낯선 이의 부름에 살짝 당황한 연하의 남자 치윤이.
“할 말 다 했어?”
“예?”
“이 여자한테 고백 다 했냐고.”
“다 하긴 했는…”
“끝났으면 내가 데려가도 되지?”
뭐야?
뭔데, 이 남자?
누군데 날 데려간다는 거야?
“어?”
그렇게 협박하듯이 눈에 힘 빡 주고 말해도 나를 사모하는 이 중2병의 연하남은 그리 쉽게….
“아, 그럼요. 되죠.”
실망이다 강치윤,
이렇게 쉽게 나를 포기 하기냐.
“그럼 갈까?”
연하남을 단번에 제압한 그 남자는 내게 온화한 미소를 날리며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인양, 친한 척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렀고 이내 나를 데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저,저기요. 누구신데 저를….”
추측할 만한 단서라고는 이 녀석이 입고 있는 교복과 가슴팍에 새겨진 고유신이라는 녀석의 이름 뿐.
그리고…
“뭐야.”
이 목소리…
“기억 안나?”
“……어…!”
그때 그 바나나 우유!
“기억났지.”
“아,아니요. 글쎄….”
“뭐, 상관없어. 내가 기억하니까.”
그 말이 더 무섭구나 얘야.
그 때 입 좀 막았다고 원한 품고 보복 같은 거 하려는 건가.
이거 이거 사이코 패스 뭐 이런 거 아냐?
”근데 저를 어디로 데려 가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편의점.”
겁을 잔뜩 집어먹고 내뱉은 질문에 비해서는 꽤나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제일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고 그 안에서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샀다.
물론,
“돈 안 내고 뭐해.”
계산은 내 몫이었다.
이유인 즉슨,
녀석은 나를 만나기전 배가 몹시 고파 편의점에 들렀는데 지갑을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마침 지나가던 나를 발견하고는 지난번 바나나 우유 사건을 빌미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했다는…
뭐 요약하면 이 정도랄까.
“이제 가봐.”
돈 내줬으니 이제 나는 필요 없다는 건가.
쿨내 쩐다.
“그럼, 전 이만.”
다시는 보지 말기를.
***
“강치윤 이 시키를 그냥! 내 동생이지만 진짜 미친 거 아냐?”
뭘 또 그렇게 까지.
”너무 뭐라 그러지 마.”
“계속 귀찮게 따라다니면 그냥 패버려. 그 자식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애 좀 그만 때려. 누나가 되가지고 어떻게 동생 눈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그러니까 맨날 나한테 와서 니 욕 하지.
너희 남매 땜에 아주 내가 살이 쭉쪽 빠진다고.”
한 마디로 말해,
나에 대한 치윤이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피난처인 것이다.
못된 누나를 피해 마음의 안식을 찾는 피난처.
“아, 몰라~ 그건 그렇고 그때 그 남자, 요즘도 가끔 본다며?”
이 여인네가 말하는 그 남자라 함은,
바나나 우유 이콜 컵라면 되시겠다.
“치윤이 말로는 겁나 잘 생겼다던데.”
“잘생기면 뭐해.”
양아치에 상또라인걸.
내가 지 꼬봉도 아니고 진짜. 어우!
“근데 우리 학교에 그 정도로 잘생긴 애가 있었던가?”
그리고 하필이면 왜 우리학교냐고.
“3반에 새로 전학 왔다는 걘가?”
“친구야. 그 얘긴 이제 그만.”
머리 아프….
“좋은 아침.”
응?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누군가 내 머리를 토닥인 것 같은데.
“야 정어리, 쟤 뭐야? 완전 훈내 폴폴 풍기면서 지나간 쟤 누구냐고!”
검정색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녀석이 3반의 전학생이란 것쯤은,
그리고 그가 바나나 우유 이콜 컵라면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야 어리버리. 감기약 있냐? 콜록콜록]
“어디서 감기는 또 걸려가지고.”
“응?”
“아니, 너한테 한 말 아냐.”
[아프면 양호실 가든가]
녀석을 통통 튕겨내는 문자를 하나 보내고는 고개를 돌렸는데,
그런 나를 매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이렇게 묻는 그녀.
“아까 걔가 바나나 우유지?”
“아닌데.”
지이잉
지잉-
귀찮게 누가 자꾸….
[나 양호실 가 있을 테니까, 빵 좀. 지갑을 안 가져와서.]
이런 호로 자식을 보았나! 대체 그 놈의 지갑이란 건 있기는 한 거냐?
그리고 내가 그동안 이런 식으로 네 놈한테 당한 게 몇 갠데 또 속을 줄 알고?
흥이다, 요 놈아!
혼자 울그락 푸르락 얼굴까지 변해가며 열을 올리자 주은이가 내 이마에 손을 뻗는다.
젠장.
“우리 전 시간에 어디까지 했지?”
“42페이지 할 차례요.”
“다들 책 폈지…!@#$%^%$#@….”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징-
징-
징-
“어리 너 카톡 계속 오는데?”
흠흠.
반장 너도 들었구나.
본의 아니게 내가 너에게 피해를 줬네.
진짜 징그러운 놈.
간다, 가!
“선생님! 저 배가 아파서 그러는데 양호실 좀….”
한 두 번 써먹은 수법이 아닌지라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는 선생님.
그동안의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최대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겨우겨우 교실을 빠져나왔다.
근데, 얘는 어디 있는 거야?
“왔냐?”
아오 깜짝이야.
혼자 있는데 마스크는 대체 왜 쓰고 있는 거야.
“빵은.”
옛다.
“자-.”
“헤헷. 고맙다.”
감기라면서 왜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 걸까.
근데,
“약 먹으려면 빵보다 밥을 먹어야…… 헐? 너 입가… 왜 그래? 누구랑 싸웠어?”
고유신의 왼쪽 입술이 찢어져 파란 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오늘 마스크 쓰고 온 거야?”
“야, 우유는? 설마 센스 없게 진짜 빵만 사온 건 아니겠지?”
참나,
얻어먹는 주제에.
나는 주머니에 있는 우유를 녀석에게로 홱 던져버렸고,
“도대체 정체가 뭐야 너? 학생이, 그것도 전학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녀석이 싸움질이 웬 말이야.”
“아 시끄러. 좀 조용히 해.”
“그리고 다쳤으면 병원 가서 치료를 받아야지, 고작 그 마스크로 가리면 그게 나아?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계속 떠들면 내가….”
치이익-
소리와 함께 빠르게 커튼이 걷혔고
“어리 너….”
“……!”
“여기서… 뭐해?”
놀란 토끼 눈을 한 수열이가 나와 고유신을 번갈아 쳐다봤고,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도 못했으면서 무작정 나를 고유신에게서 떼어 놓는 이수열.
그리고는
“이 미친 새끼, 얘한테 뭔 짓 했어!”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고유신을 노려보는 그 녀석.
그에 반해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승리 자의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고유신.
“보시다시피. 아무 짓도.”
“그래, 수열아.”
니가 그냥 오버 하는 거야.
“우리 아무 일도 없었어.”
“뭐야. 남친 없다더니.”
나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이 녀석에게 남친 아니거든!-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깐족 됐다간 이수열군을 도발하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참았다.
“나가자.”
“아 응.”
“또 봐. 어리버리.”
내게 묘한 웃음을 흘리는 고유신의 침대를 발로 뻥- 차버리는 이수열.
남자들은 참으로 단순한 것 같다.
“똥개야. 진짜 아무 일 없었어.”
아오-
내 말을 안 믿는 녀석을 뿔난 족제비 눈으로 쳐다보니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다고.”
“어휴- 어련하시겠나이까.”
“건성으로 듣지 말고.”
“나도 니 여친한테 가서 이래 볼까? 남자들은 다 똑같으니까 이수열도 조심하라고!”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어린애냐? 왜 자꾸 애 취급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녀석은 그랬다.
나보다 키가 더 작았을 때도,
나보다 힘이 더 없었을 때도.
항상 나를 어린 아이 취급하면서 그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녀석의 위로가 제일 필요했을 때는 정작 다른 사람 옆에 있었으면서.
***
지이잉-
지이잉-
[남친이랑은 잘 풀었냐]
뭔 상관이람.
[신경 끄셔]
지이잉-
지이잉-
[뭐야, 왜 부정 안 해? 걔가 진짜 남친?]
“그래. 그러니까 연락하지 마….”
“싫어.”
……?
“그래도 연락 할 건데.”
아 정말, 간 떨어질 뻔 했네!
“너 뭐야~ 뒤에서 자꾸 놀래 킬래?”
“찡그리지 마. 되게 못생겨 보여.”
일부러 나를 열 받게 하려는 심산인지,
못 생겼다면서 욕 할 땐 언제고 나 보고 왜 웃는데.
“오빠가 밥 사줄까?”
니가?
나한테?
밥을?
콧방귀하나 제대로 껴주고는 심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녀석을 보니
고유신이 왜-라며 되물었다.
왜긴-.
몰라 물어?
“또 지갑 없다면서 나한테 얻어먹으려고 그러지 너?”
그러자 녀석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어 주는데, 신사임당이 아줌마가 꽤나 들어있는 지갑이었다.
“많이 먹어.”
“어. 어허- 그래.”
그 많던 신사임당님은 나에게 자랑 질을 하려고 보여준 건가 싶다.
니가 말한 밥 사줄까-란 겨우 컵라면에 삼각 김밥이었다니.
너의 그 깊고 넓은 그릇을 내 오래전에 알아봤어야했는데.
…기대한 내가 바보지.
“너 친구 없지.”
“없어.”
쳇, 왕따 주제에 되게 당당…
“너 밖에.”
“…어어?”
“너 밖에 친구 없다고.”
“…….”
“학교 옮긴지 얼마 안됐잖아.”
“아….”
그 말이었구나….
미쳤어, 정어리!
너 지금 무슨 생각한거니?
혹시 너, 얘가 지금 너 밖에 없다고…!
뭐, 그래서 살짝 설렌 거야?
허, 참나. 되게 웃긴다 너~
“뭐해?”
“어?”
“어디 안 좋아?”
“아,아니. 다 먹었으면 이제 갈까?”
그 한번이 어려웠던 걸까.
한번 쿵쾅 거렸던 심장은 녀석의 자그마한 행동에도 반응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그 이후 고유신과 마주칠 때마다 별 시덥지 않은 말에도 하나하나 의식하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리야, 저기 봐. 고유신 또 고백 받나봐?”
그녀가 가리킨 곳을 향하니 정말로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고 있는 고유신의 모습이 보였다.
“요즘 부쩍 늘었다니까. 하긴, 나도 쟤 처음 봤을 때 좀 끌리긴 하더라.
얼굴뿐만이 아니라 쟤는 진짜 여자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니까. 넌 안 그래?”
“어어? 아,아니! 난 절대 아냐.”
“뭐지 이 격한 반응은? 둘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있긴 뭐가 있어. …됐고! 핸드볼 연습이나 하러 가자… 아…!”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나 체육관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누군가 내 후드티 모자를 잡고 놔주지 않는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고유신이다.
“뭐야 너. 이거 놔.”
내가 빠져나오려 버둥거리자 그 모습이 웃긴지 킥킥 거리며 비웃는 못된 놈.
그리고는 이내 나를 제 품에서 휘리릭 돌려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쟤가 너 좀 보자는데?”
그곳엔 방금 전 고유신에게 고백을 하던 그녀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서있었고,
녀석은 곧바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쟤가 나 좋아한대.”
“그래서.”
“반응 뭐야, 질투 안 해?”
이 자식이….
“내가 지,질투를 왜해?”
최대한 아닌 척, 괜찮은 척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건만,
돌아오는 건 허를 찌르는 녀석의 한 마디.
“너 나 좋아하잖아.”
허-.
대박.
어떻게 알았지?
“…어이, 정어리양?”
녀석이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한동안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얼음이 땡-하고 깨진 것처럼 녀석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게 졌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창피하기가 그지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자리에 있기가 민망해진 나는 배탈이 난 척 죄 없는 배를 부여잡고 양호실로 냅다 뛰었다.
보이는 대로 빈 침대에 올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동안 있으니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어져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으응?!”
“쉿!”
잠에서 깨어난 내가 고유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해 여기서?”
“쉬잇~ 양호 쌤 알면 큰일 나.”
모기만한 소리로 내게 주의를 주며 피식 웃어버리는 그 녀석.
“근데 넌 어디 아파서 온 거야?”
“나도 너처럼 꾀병.”
“나 꾀병 아니거든?”
“그래, 아니라고 믿어줄게.”
“이씨,”
“아오, 귀여운 자식. 잠깐 눈 감아 봐.”
갑자기 눈은 왜?
호기심에 내가 더 동그랗게 뜨자 녀석이 손으로 내 눈을 가린다.
“…쪽.”
이마에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에 눈을 떠버렸다.
“으응?”
놀란 눈으로 고유신을 쳐다보니 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쪽.”
이번엔 입술.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는데,
녀석이 나를 붙잡아 다시 눕혔다.
“야아!”
“사귀자.”
“…….”
“내가 더 좋아해.”
“…….”
“그러니까 사귀자고.”
풉….
고유신 답지 않은 달달한 그 멘트에
나는 대답 대신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왠지 녀석을 처음 본 그 날처럼 바나나 우유 맛이 나는 것 같다.
“빨리 응-이라고 대답해.”
“응.”
첫댓글 감사 ..
감사합니다!
좋네요ㅎ.ㅎ
달달하네요ㅎㅎ
훈훈하니 좋습니다
시작은 바나나우유였던걸까요..달다리해요~
우아..달달해용
풋풋 달달이네용ㅋㅋ
바나나우유마냥 달달하네여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