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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치유의 기도문 (마6:9-13)
교회의 예배에는 어김없이 “주기도문”이 들어갑니다. 이 기도의 이름을 우리는 “주기도”,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의 기도가 아닌 이유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게 이 기도는 필요없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기도가 불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모범적인 기도로 삼아야할 기도의 모범이고, 표준이 되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1940년대에 미국의 백만장자 중에 '밀턴' 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공하여 큰 재산자였던 그는 성공했으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을 안고 살았습니다. 급기야 밀턴은 불면증에서 온 합병증으로 몸의 일부 기능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가 병을 고쳐 보려 애썼으나 어떤 의사도 그 병이 누슨 병인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구스타프 칼 융' 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밀턴을 진찰한 융 박사는 특이한 처방을 내렸다고 러시아 모스코바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한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 상담을 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밀턴은 융 박사의 말을 듣고 즉시 러시아에 수도원을 찾아가 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그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이색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존경하는 밀턴 선생님! 제가 어떤 부탁을 해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시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처지에 있던 그였던지라 무조건 따르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수도원 원장이 말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저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첫날 내일 오실 때에는 주기도문을 300번을 외우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밀턴은 속으로 화가 났지만,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후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와 함께 동행 했던 보좌관과 비서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병을 고치려 온 사람에게 웬 주기도문 300번을 하라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보좌관들은 여기에 온 목적이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이고, 그 수도원 원장이 이 병을 낫게 해 주신다니 힘든 것도 아니니까 원장님 분부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자 밀턴은 숙소에서 열심히 주기도문 300번을 하고 다음 날 수도원 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수도원 원장은 만나마자 밀턴에게 말했습니다. "주기도문 300번을 하셨다면 잘한 일입니다. 다시 돌아가시어서 내일 오실 때에는 주기도문을 600번을 하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3일 째 되는 날 밀턴을 만난 수도원 원장은 말했습니다. "주기도문 600번을 하셨다면 잘한 일입니다. 다시 돌아가시어서 내일 오실 때에는 주기도문 900번을 하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300번씩 불어나 매일 900번씩의 주기도문을 기도한 20일 째 되는 날 그에게 신령한 은혜가 임하고 육신이 병에서 치유되는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밀턴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놓이면 기도하는 것 조차도 힘들어 집니다. 특별히 우울증이나 여러가지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기도하기 어렵고 힘들다 하시는 분들에게 가끔 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반복해서 드리라고 권합니다. 여러분! 이 주기도문 속에는 엄청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 속에는 우리의 내적 상처나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는 복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1. 주기도문은 우리의 열등감을 치유합니다.(6:9)
마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열등감이란?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하게 낮추어 평가하는 마음입니다. 이 열등감이 왜 생길까요? 내가 남과 비교해서 생기는 겁니다. 남을 경쟁의 상대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외모, 학벌, 재산, 직장, 출신, 능력 등을 비교하여 자신이 모자란다 생각하여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216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쳐들어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칼타고의 영웅 한니발 장군 초상화에 관한 유명한 실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 날 한니발 장군은 화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장군은 화가 앞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초상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자신의 초상화를 손에 든 그는 그 자리에서 화가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니발은 외눈박이였는데 화가는 이를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열등감을 건드렸다는 것이지요.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다른 화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매우 재치 있는 화가였습니다. 먼저 다른 화가가 한니발의 외눈을 사실 그대로 그려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그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꾀를 내었습니다. 장군의 눈을 하나만 그려도 문제가 안 되게 옆모습만을 그렸다는 것지요. 이윽고 한니발 장군은 초상화를 받아들자 기뻐하면서 그 초상화가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열등감이 있고 열등감을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살인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아파합니다. 평소에 무심코 건네는 말 가운데 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한 말 때문에 원만했던 인간관계가 평생 원수로 끝나는 일을 수도 없이 목격합니다. 열등감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미국 말츠 박사의 말을 빌리면, 98%의 사람들이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열등감은 인간의 필연적인 감정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는 그 어느 누구도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신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도록 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이셨던 그 분이, 드디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위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까? 여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늘에 계신다는 의미는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만물과 달리, 이 땅의 유한한 생명체와 달리, 이 땅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의미는 우리 인간은 땅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간격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누구도 건널 수없는 절대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인간은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운 아버지가 되셨다는 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깊은 곳에서 “아버지여!”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는 이미 용서받았으며, 이미 받아들여진 자녀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유업을 받을 자, 즉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롬8:15-1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2. 주기도문은 우리의 좌절감을 치유합니다.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이루어지이다” (6:10)
좌절감이 어디서 옵니까? 자신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다가 안 되고, 자신이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 내가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내 뜻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1서2: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라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주기도문은 불안(염려)감을 치유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6:11)
이 기도로 모든 불안감(염려)은 사라집니다. 염려와 불안감은 마음이 편하지 않고 초조한 느끼는 것입니다. 염려는 ‘마음을 놓지 못함’,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염려는 “어떤 일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안달하고 속을 썩이는 걱정”을 뜻합니다. 염려를 영어로는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독일어 <부르겐>(wurgen)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의미는 ‘질식시키다’ 혹은 ‘목을 조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염려란 ‘정신적인 질식’입니다.
왜 염려합니까? 왜 우리가 불안합니까? 염려는 대부분 불신앙에서 옵니다. 염려는 믿음의 부족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인 너희야 말할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조지 뮐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는 어떤 전쟁과 질병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영국의 크롬웰이 화이트 락을 스웨덴의 특사로 임명했습니다. 하이트 락은 나라 걱정으로 잠을 잘 못 이루었습니다. 그 때 사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렸지요? 물론이지.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리시겠지요? 물론이지! 당신께서 살아 있는 지금도 잘 다스릴 줄 믿습니까?”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평안히 잠에 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런 시대에 우리는 불안 대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자원이 되신다는 것을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지요. 빌립보서4:17“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또 시편23:1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4. 주기도문은 우리의 죄책감을 치유 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는 이 기도할 때 모든 죄책감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죄를 인정할 때마다 주께서는 모든 죄를 다 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뭔가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책감 그 자체가 모든 죄 중에서 치명적인 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자에게는 죄와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자들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죄책감은 치유됩니다. 요한1서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했지요.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의 죄보다 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일수록 죄책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하는데도 자신이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내가 친구시계를 제가 훔쳤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중에 뉘우쳐서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그 친구의 시계를 돌려줬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을 볼때마다 '미안하다 내가 시계를 훔쳤지' 하고 계속해서 '용서해 달하고' 반복하여 말하나면 그 친구가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친구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고 용서해준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용서받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의외로 예수를 믿고 사죄의 은총을 받음에도 그 사죄의 은총을 믿지 못하고 죄책감에 빠져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이미 회개한 죄를 기억하게 하여 과도한 부끄러운 마음,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영적인 수치심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믿고 아주 뻔뻔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책감에 관해서는 "뻔뻔한 사람"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으로 살다보면 아버지 앞에 잘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기쁘게 해드리는 아들이 따로 있습니다. 과도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스스로 멀어지는 자식이 아니라 얼굴에 철판깔고 아버지앞에 뻔뻔하게 서는 아들입니다. 탕자는 무조건 아버지 품에 돌아와 안기며 이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아버지...저 아직도 사랑하시는 거 맞죠?, 저 아들 유효한거죠?"뻔뻔한 아들이 사실은 하나도 밉지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당신은 뻔뻔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고 살면 실패한 인생입니다.치명적인 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사이에는 뻔뻔하다는 말은 오히려 최고의 칭찬이 됩니다. 뻔뻔함이 통하는 관계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사하여 주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구할 때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5. 주기도문은 내적인 상처인 공포감을 치유해줍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6:13)
우리가 이 기도하면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한꺼번에 사라집니다.왜? 시험도 이기게 하시고 악한 공격도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인간은 시험과 악에 걸릴까봐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하여 죄를 짓는 것이 시험이라면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는데 화를 당하는 것 예를 들면 강도, 사기, 전쟁 등이 악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공포, 두려움, 피해망상, 출퇴근 길의 두려움 -유괴, 성추행범, 죽음의 공포...코로나바이러스 공포, 전쟁공포, 사건공포...... 등등. 인간은 미래에 이와같은 시험과 악의 공격을 받을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시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했습니다. 이사야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엔 차디찬 기후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나게 하셨습니다.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 주시고 계십니다. '어제는 역사고, 오늘은 선물이고, 내일은 신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문을 통하여 과거는 에벤에셀(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로, 현재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미래는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시고 예비하신다)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공포와 두려움이 찾아올 때 문을 활짝 열어주지 말고 선포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나와함께 계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도우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시는 분임을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밀려오는 공포감에서 치유되는 것입니다.
6. 주기도문은 우리의 허무감을 치유해 줍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나이다’(마6:13)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합니다. 전도자는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합니다.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 영원한 목표에 매여 살아간다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잇대에 살아가는 것이 되기에 허무가 아닙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3"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6: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기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으로 인도하는 영원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모르면 안타깝게도 허무와 저주로 끝나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성도에게는 죽음조차도 축복입니다. 주안에서 죽는자는 복되도다 했습니다. 죽음은 종말이 아닙니다. 허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기독교는 그러기에 절대 희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우리의 영원한 목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어떠한 순간의 시간도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주문처럼 외우시지 마시고 기도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기억하고 기도하여 우리 속에 있는 열등감, 좌절감, 불안감, 죄책감, 공포감 그리고 허무감이 온전히 치유되는 복을 누리는 행복한 성도들 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