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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답사기(2008.01.06-13)
‘장강을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을 찾아서’
6일 새벽, 집을 나서서 일주일을 중국 장강을 따라 겨울 대륙을 이동하며 꿈같이 지내고 왔다. 답사 일행은 대학생, 활동가, 교수 등 이렇게 22명이었다.
첫날, 1월 6일 (인천-상해)
상해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상해임시정부청사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부터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떠나야만 했던 1932년 5월까지 상해에 존재했다. 이곳은 상해를 방문하는 동포들이 제일 먼저 꼭 찾는 필수 코스다. 그러나 이 유적지는 도시재개발로 인해 조만간 어떻게 변모될지 모른다.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교포 1천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였다. 그리고 처음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초대 의정원 의장 이동녕과 부의장 손정도를 잊을 수 없다.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등을 창립하여 활동 중이던 도산은 이 소식을 듣고 6천 달러를 모금하여 뉴욕을 출발,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하였고, 5월 28일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였다. 상해임시정부청사에는 초창기 주요 활동인 연통제실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창간호 등에 대한 사진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쉬운 것은 도산의 ‘독립운동방략의 청사진’이나 대한적십자사 설립(7.13), 임시정부사료편찬위원회설립(7.17) 등과 관련된 사료들이 전혀 전시되어 있지 않고, 도산의 친필인 ‘愛己愛他’만 한 점 쓸쓸하게 걸려 있었다.
앞으로 상해 임정청사 기념관에는 반드시 도산의 업적과 그 구체적인 내용 기록들이 보완되어서 이곳을 찾는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할 것이다.
임정청사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 조계 지역 내에 있던 임시육군무관학교터와 당시 조선인거류지와 상해거류민단 사무실, 독립신문사 옛터 등이 있던 곳, 그리고 김구선생의 가족거주지 주변도 찾아 갔다. 목숨을 걸고 일경의 눈을 피해 활동했던 지역이다. 현재는 흔적이 전부 없어지고 재개발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거나 현지인들이 살고 있어 옛 주소지로나마 쓸쓸하게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있는 유적지인 셈이다.
그리고 흥사단원동지부와 도산이 거주하였던 집도 찾았다. 같은 건물에 윤봉길선생도 살았었다. 지난 2007년 6월에 상해를 방문했을 때 최부득 동지가 안내해 주었던 곳인데 그 때 밤길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찾아 갔다. 다행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변에 고층 신축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지만 허물어져 가는 그 장소는 쪽방생활의 서민들이 밀집되어 있어 몇 년은 더 버틸 것 같기도 했다. 흥사단 단우들이 아니라면 도산이 쉼 없이 드나드셨을 거리와 옛 원동위원부 단소를 누가 찾아보기나 할 것인가?
다음 날, 1월 7일 (상해-가흥-항주)
상해 오전 방문지는 매헌 윤봉길 선생의 거사 유적지 홍구공원이었다. 지금은 중국의 대문호 노신을 기념하여 노신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이 공원 안에는 1994.08.18에 윤의사 의거를 기념하는 梅亭이라는 정자가 건립되었고 1998.04.29에 윤봉길의사 기념비가 건립되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정자 안에는 윤의사와 관련된 사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친필 휘호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중략)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1932.04.29 오전, 상해 興業路에 있는 흥륭다원이라는 찻집에서 김구와 윤봉길이 이날 거사에 대한 최종 점검 밀의를 했다. 그리고 11시 40분 홍구공원에서 일황 생일 축하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중앙 단상을 향해 정확하게 도시락 물통폭탄을 날렸다. 거사는 성공했다. 상해 점령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등이 즉사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12.18,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총살됐다. 체포에서 총살되기까지 일경에 의해 그가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이 거사로 애꿎게도 도산은 체포되었으나 당시 만보산사건 등으로 감정이 악화되었던 조중간의 관계가 호전되었고 임시정부는 중국인과 국민당정부의 환대를 받게 되었다. 이후 백범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일제에 쫓겨 장강을 따라 대 장정의 역사의 길을 걷게 되는데 항주와 가흥에서 1932년 5월부터 1933년 12까지, 남경에서 1933년 12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진강에서 1934년 3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다시 남경에서(1935.11-1937.11), 장사로(1937.11-1938.07), 광주로(1938.07-1938.10), 유주로(1938.10-1939.03), 그리고 기강(1939.03-1940.03)을 거쳐 중경(1940.03-1945.11)에서 해방을 맞기까지 장강을 따라 피난을 다니면서도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광복의 그날까지 의연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921.05. 임시정부 세력 통일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임시정부에서 물러나온 도산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성립을 위한 갖은 노력을 하였고, 대한적십자 활동, 인성학교 교장 취임(1921.11) 교육활동, 흥사단원동위원부 조직과 활동, 만주독립군단체인 총의군 결성(22.1.23)에 참여하여 총장에 취임, 한국노병회 창립(1922.11.28), 남경에 동명학원 설립(1924.03), 만주시찰과 이상촌 후보지 탐사(1924), 미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고, 1926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길림성 일대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면서 대독립당의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8년에는 상해에서 이동녕, 김구, 이시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를 제창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이상촌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에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면서 동분서주하던 중, 1932.04.29 윤봉길 거사로 이날 오후에 프랑스 관헌에게 체포되어 일경에 인도되었고, 6월 7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7월 25일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명으로 4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과 대전 감옥에서 치욕의 세월을 겪게 되었다. 도산이 1932년에 그렇게 피체됨으로써 이후 독립운동의 노선통합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지도자를 잃는다는 것이 역사에서 얼마나 큰 손실인가를 뼈아프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저 세상에서 도산과 매헌과 백범이 서로 만나서 당시 상황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을까? 의거 당사자 매헌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마침내 사형(25세 1932.12.19)되었고, 도산은 이로 인해 피체되어 감옥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서거(60세 1938.3.10)하였고, 백범은 끝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대륙을 장강따라 유랑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이후 남북의 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해방조국 서울 한복판 종로 경교장에서 정적에 의해 암살(73세 1949.6.26)되었다.
7일 상해에서 답사팀은 만국공묘(손중산의 부인 ‘송경령능원’으로 개칭)에 묻혀 있는 5인의 묘 터를 답사했다. 박은식, 김인전, 안태국, 신규식, 노백린 등. 이들은 모두 상해임시정부 초기에 활동한 주요 인물들이다. 1993.08.05 이들 5인의 유해는 봉환되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해에는 이밖에도 찾아가 볼 곳이 참 많다. 나라를 잃고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를 구성한 만큼 독립운동의 발자취도 많다. 육삼정 의거 현장, 독립신문사 옛터, 한국노병회 결성회의 및 창립총회 장소, 병인의용대(이유필 등)의 활동무대, 인성학교터, 임시정부의정원 제1차 회의 유적지, 남화한인청년연맹 본부, 상해거류민단 사무실, 임시육군무관학교터, 조선인 거류지, 백범 부인 최준례 여사 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회의 장소, 의열단 활동무대였던 황포외탄부두 등.
7일 상해를 떠나 답사팀은 항주와 인접해 있는 가흥으로 이동했다. 가흥에는 임시정부청사도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 특히 김구선생이 여사공 주애보가 노를 젓던 나룻배로 선상 피신생활을 했던 사연이 담긴 남호와 운하 유적지가 있었다. 이 남호에서는 1935.10. 임시정부가 노선투쟁으로 심각한 분열위기에 빠졌을 때 백범이 의정원 위원 5명을 이끌고 남호 유람선에 올라 제1차 특별회의를 주재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가흥의 남호는 1921년 모택동 등이 유람선을 빌려 타고 중국공산당 창당대회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밤에 찾아간 이 남호의 야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흥은 백범의 생애와 임시정부의 정신과 실체에서 역사상 매우 중요한 획을 긋는 대전환의 핵심 근거지였다. 매만가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전용버스로 항주로 이동했다.
답사 삼일 째, 1월 8일(항주-남경)
소동파와 서호 10경으로 유명한 역사 도시이며 관광 명소로 유명한 항주는 우리에게는 임정 유적지로 더 유명하다. 상해임시정부가 홍구공원 의거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항주로 이동해 온 것은 1932년 5월이었으며 이후 1933년 12월까지 항주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제2차 항주임시정부청사는 2007년 11월 30일 상해와 중경의 임정청사에 이어 세 번째로 복원되어 개관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답사팀이 개관한지 한 달 여 만에 찾은 셈이다. 이날 개관식에는 김구 선생의 차남인 김신(백범기념관장) 선생과 김신 선생의 아들인 김양(상해총영사) 씨도 참석했다고 한다.
제2차 항주임시정부청사는 허술하긴 해도 이제 막 개관한 탓인지 보존 상태는 양호했다. 주변 난민촌들이 재개발된다 해도 쉽게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상해를 떠나 처음 항주에 도착한 제1차 임시정부청사는 군무장 김철이 머물던 곳인데 현재는 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청사는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마련되었다. 이 시기는 독립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무정부상태에 빠지기도 했던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항주에는 한국독립당 사무소가 상해에서 1934.01에 이주해 왔던 장소도 있고,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거주지도 남아 있다.
백범이 이끌던 임시정부가 1932년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경을 피해 상해를 떠나 가흥, 항주 등으로 이전해 올 때 도산은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어찌 보면 백범이 고난의 피난길을 걷고 있을 때 도산은 대신 수감되어 기꺼이 온 몸으로 그 고난을 감당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독립운동의 거목, 도산이 감옥에서 병들어 시들어 갈 때 임시정부는 백범과 함께 장강을 떠돌며 유랑을 한 셈이다. 문득 신경림 선생의 ‘떠도는 자의 노래’ 시구가 생각난다.
“어느 외진 별정 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길을 쏘다니며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나는 무엇인가를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해매고 다닐지도 모른다.”
서호를 구경하고 이날 오후 남경으로 이동했다. 중국공산당원 10만 여명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현장, 즉 붉은 피(꽃)가 비처럼 내렸다는 우화대를 보고 경항대운하가 있는 부자묘 주변 민속 거리에서 휘황찬란한 야경을 즐기면서 저녁식사를 하고 야시장을 떠돌아다니다가 호텔에 숙박했다.
답사 4일째, 1월 9일 (남경-중경)
남경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오전에 남경대학살기념관을 견학했다. 중일전쟁의 상흔, 일본군에 의한 참으로 끔찍한 학살이 1937년 12월에 시작해서 40여일에 걸쳐 무차별로 자행되었다. 약 30만 명이 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치가 떨렸다. 역사의 비극이다. 우울하고 속이 메슥거렸다. 어디 피비린내 나는 곳이 남경 이곳뿐이랴. 장개석 국민당 정부에 의해 중국 공산당 10만 명이 처형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우화대열사능원이라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 나오는 우화석이란 돌은 물에 잠기면 투명하게 변한다고 한다. 사연이 가슴 아리게 한다. 이념 내전으로 희생된 무고한 넋들이 우화석이라는 아름다운 빛깔의 돌로 변한 것일까?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손문(손중산)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남경총통부와 하늘 높은 곳에 우상처럼 잘 꾸며진 중산 무덤도 방문했다. 남경총통부는 하루 사이에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점령했던 청사이기도 해서 오늘날에는 남경중국근대사 유지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있었다. 민생, 민주, 민족의 3민주의와 애국주의가 하나 더 첨가된 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중국이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로 새롭게 통합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왠지 간담이 서늘해 진다. 우리는 이웃 나라 거대한 중국을 잘 살피고 정치 외교적으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남경에는 임시정부청사(1935.11-1937.11)가 있고, 한국독립군특무대 본부가 설치되어(1934.02) 활동하였던 곳이 있다. 또한 안공근이 건의한 남경학생훈련소(1935.02)와 김원봉의 조선혁명간부학교 터 등이 있다. 저녁 8시 40분 남경을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3시간에 걸쳐 중경으로 이동했다.
답사 5일 째, 1월 10일 (중경)
중경은 인구 3천만 명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중국 4대 직할시(북경, 상해, 천진, 중경)의 하나다. 중국의 드넓은 평지에 발달한 도시만 봐 와서 그런지 중경은 아주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카르스트 지형이어서 동굴, 협곡, 온천 등이 많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굴 속이 천연 요새의 거주지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협곡에 발달한 수 십층의 낡은 고층 아파트들을 허물고 새로 신축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먼지가 자욱하다. 해는 거의 볼 수 없었다.
1940년 3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일본에 쫓겨 중경에 임시수도를 정하자 장강을 따라 중국 중남부를 떠돌던 우리 임시정부도 중경에 자리 잡고 마지막 5년(1940.03-1945.11)을 머물게 된다. 중경에서도 우리 청사는 3번이나 옮겨 다니다가 1944년에 제4차 청사인 연화지 38호로 옮겨와 이곳에서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1940년 중경으로 이동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전쟁수행과 광복 후 조국 재건을 위한 체제를 정비했다. 1940년 9월 17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키 위해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1941년에 조국재건의 기본이념과 정책을 담은 ‘건국강령’을 발표했고, 1942년에는 좌우이념과 정당을 초월한 통합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1944년에 광복된 조국헌법의 기초를 닦았다. 마침내 8.15광복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부터 조국으로 환국하게 되었다. 광복군이 연합군에 참전을 실행했어야 했는데..... 답사일행은 이곳 규모가 잘 갖춰진 마지막 청사에서 잠시 김구선생 자리를 탐해 사진을 찍어댔다. 감회가 남달랐다.
중경 번화가 한 복판에 있는 해방비 근처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과 한국광복군창설기념식장 터가 남아있다. 그리고 토교한인촌,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묻혀있는 화상산한인공동묘지,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본부 유적이 있으며,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김원봉 거주지와 한국광복군 창설을 알렸던 중경국제방송국터인 광파대하가 있다.
답사일행은 이밖에도 중경에서 주은래 등이 활약했던 홍암촌과 장강과 가릉강이 합수되는 조천문, 인민대례당, 해방비 등도 가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답사지 서안으로 가기 위해 중경 역에서 야간열차에 올라탔다.
답사 6-7일째, 11일-12일 (서안)
서안은 중국의 가장 오랜 문명의 발생지이자 역사,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다. 이른 아침 야간열차에서 내린 서안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잘 오지 않는 눈이라는데, 마치 우리 답사 일행의 마지막 지역 역사탐방의 발길을 축복해 주려는 듯이 그렇게 따뜻한 눈발이 시작되었다. 이 머나먼 곳으로 나는 큰 아이를 18세에 유학을 보냈었다. 서안 변두리에서 고등학교 2년을 보내고 상해로 날아가 거기서 대학을 마치고 지금은 육군 소위로 복무중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서안은 1940년 9월에 중경에서 창설된 광복군이 대일전쟁을 위해 항일전선에 근접한 서안에 전방사령부를 설치했던 곳이다. 당시 1년 만에 병력 3백여 명을 확보했고, 기관지 광복(光復)을 발행했다. 이후 사령부는 제2지대에 임무를 맡기고 1942.09. 다시 중경으로 이전했다. 서안에 있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각 지대를 통합 재편하여 이범석 장군이 총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제2지대 90명, 제3지대 22명이 선발되어 1945년 5월에 3개월 과정의 미국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을 받았다. 서안에 있는 서안광복군사령부 터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터는 모두 사라졌다. 이범석 장군의 숙소나 중앙군관학교 제7분교 터는 다른 목적의 건물들로 변모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나 군사특파단주둔지, 한국청년훈련반 훈련장소, 한미군사협정체결지, 한국광복군 제2지대 OSS훈련 장소, 보계수용소(대동학원) 등도 없어졌거나 다른 목적의 건물로 변했다.
우리가 해방운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지 않는다면 머나먼 이국땅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의 숨결은 타향에서 떠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발길이 그래서 중요하다.
서안지역은 가볼 만한 관광 역사유적지도 많다. 진시황릉과 병마용, 비림, 당현종과 양귀비의 화청지, 서안사변과 장학량 유적지,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대안탑, 서안성벽, 섬서역사박물관 등등.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섬서성 정부는 서안성벽 둘레 13.7Km 성 내부 전체를 수년 내에 민속관광지로 재개발 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단한 프로젝트다.
서안에서의 2일은 내내 눈 축제와 함께 했다. 12일 밤 서안 공항으로 가는 눈길은 그래서 긴장감이 있었다. 내륙지방으로 다니는 비행기는 모두 결항되었다는데 우리는 밤 12시 30분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에 무사히 탑승하였다. <끝>
<후기>
‘죽은 자의 숨결, 산 자의 발길’ 역사답사교실은 나라가 망했던 시절, 1913년의 흥사단 독립운동 정신과 상해시절 도산이 임시정부에서 펼쳐 보였던 독립운동의 방략과 노선통합의 정신을 계승한다. 그리고 1932년 이후로 상해임시정부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유랑을 하면서도 생사를 넘나들며 꿋꿋하게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끌었던 김구의 민족주의 정신을 계승한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도망이나 망명을 하지 않고서도 당당하게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 그리고 나라 없이 떠돌던 유랑하던 고난의 역사가 아니라 21세기 일류국가의 비전을 갖고 과거를 돌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도산의 시대정신을 자기 근간으로 하여 현실을 직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죽은 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이 담고자 하는 시대정신으로 앞날을 함께 도모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2008.1. 15 이은숙 씀
첫댓글 답사기를 써 놓고 우물쭈물 하다가 대구까지 왔습니다. 대구팀들도 여전히 역사답사 여행을 많이 하시지요?
이은숙 부장님,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요. 오늘에사 이 글을 보았습니다. 가히 학술지에 기고해도 좋을 글을 이제사 보다니.... 해박한 지식과 도산을 생각하고 우국지사를 그리며 오늘의 우리 현실을 되돌아 보는 이 좋은 내용을 이제서야 보게되어 죄송...역시 이부장 답습니다요
댓글 소식이 눈에 띄어 와 봤더니... 근데, 무슨 칭찬을 그리 과분하게 해 주시나요. 송구하게요. 어쨌든 이렇게 써서 알렸더니 안산시민의 신문이란 곳에서 답사기 연재 요청이 와서 10회 예정으로 내용을 더 보완해서 연재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