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이탈리아어: Foro Romano)는
라틴어인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며
고대 로마 도시의 중심에 있던 큰 광장의 유적지입니다.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며 대화의 광장이었지요.
캄피돌리오 광장 로마시청사 옆길로 내려오다 보면 눈이 번쩍뜨이며 보입니다.
고대 로마 시절 대부분의 도시에는 스톤골룸(영어 '포럼'의 어원)이라는 것을 두었는데
'포로 로마노'는 수도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포럼이며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네요.
원로원 의사당과 여러 신전 들이 당시 공공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포로 로마노의 전경을 한꺼번에 담아내질 못했네요.
포로 로마노는 기원전 179년부터 건설된 로마 건국의 시발지입니다.
283년 대화재와 410년 서고트 족의 로마 침입으로 황폐화 될때까지
로마 제국의 발전과 번영 쇠퇴와 멸망을 지켜 본 2,500년 로마 역사의 산물이지요.
중심도로(신성한 길) 좌측 하얀기둥이 삼두정치를 성립 시켰으며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인 '줄리어스 시저'의 신전이 있던곳이며
뒤에 양철로 덥여있는 곳이 '시저'가 화장된 곳이라고 합니다.
전쟁을 앞두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최측근 브루투스가 배신의 칼을 들이대자 운명의 순간엔 <
부루투스 너 마져도!> 등
우리에게 낮익은 유명한 명언을 남긴...'줄리어스 시저' 였지요.
중심도로(신성한 길) 우측은 '바실리카 줄리아'
시저가 짓기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대제가 완성한
로마의 법이 만들어지고 많은 재판이 이루어진 법원입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그대로 방치되어 토사에 묻혀 버렸고
중세 이후엔 성당과 별장, 요새등을 축조하기 위해
이곳 건물을 뜯어가 건축자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페허가된 이곳이 양치기 목장으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며
1871년 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이 이루어 지고있습니다.
좌측 아래 '베스타신전', 가운데 큰기둥 세개가 '디오스쿠오리 신전'
우측 언덕이 '팔라티노 언덕' 과 밑으론 베스탈이 살던 집터
1871년 부터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한 작업은
현재도 이렇게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유적지 담 밖에는 소박한 로마의 시가지가 펼쳐져있습니다.
산타루카에 마르티노사원
베스파시아누스 신전과 산타루카에 마르티노사원
개선문 뒤로 삼각지붕에 붉은 벽돌집이 입법 자문기관인 '원로원' 건물입니다.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설치하여 로마 건국 때부터 존재했다고 하며
최고 신분의 종신회원들이 모인 국정운영의 실질적인 중심기관 이었고
원로원 결의는 법률과 똑같은 효력을 가졌답니다.
또한 '줄리어스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 곳이기도 하지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AD 203년에 자신의 즉위 10주년과
두아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답니다.
'라피스 니제르'
'라피스 니제르'는 라틴어로 '검은 대리석'이라는 뜻입니다.
개선문 과 노란 꽃이 있는 중간에 검은 4각형 지붕이지요.
전설에 의하면 이것이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라피스 니제르' 옆에 붉은 벽돌 쌓인 곳이 로마의 중심 0점을 나타내는 곳이랍니다.
'사트르누스(새턴) 신전'
기원전 5세기에 지어졌으며 현재 8개의 기둥만 남았습니다.
주피터의 아버지인 땅과 농업의 신 사트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
Satur day(토요일)는 이 신의 이름을 기원으로 한다고 하더군요.
머리에 이고있는 얼마 남지않은 건물 파편에도
기둥뿌리가 왠지 불안해 보입니다
'포카스의 기둥'
높이 13.6m이고 코린트양식의 원주가 정육면체의 흰색대리석 기단위에 세워져
유적 한가운데에 독립적으로 서 있어 로마 포룸의 상징적 역할을 한다.
포룸의 마지막 건축물로 비잔티움 황제였던 포카스가 로마를 방문한 기념으로 세워졌답니다.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포룸에서 가장 오래된 장소중 하나로
14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내 파우스티나를 위해 세운 신전
161년 황제가 죽자 원로원이 그를 신격화 하여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수리중인듯 입구에 흰지붕을 씌워 놓았습니다.
우측에 둥구런 등대같은 건물의 신전이 '로물루스신전'
다음 이동 할 곳이 콜로세움 이라 했는데
이것이 콜로세움인가 봅니다.
뒤에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해서 세운 '티투스 개선문'
로마의 개선문중 가장 오래됐답니다.
앞에 기둥 세계는 '디오스쿠오리 신전' 또는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으로 불리죠.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이며 별자리 쌍둥이 자리의 주인공인
'카스토르'와 '폴룩스(폴리데우케스)'를 모시는 신전으로
쌍둥이 형제는 캄피돌리오 광장 입구에도 동상이 세워져 있었지요.
공화정기에 원로원 집회장으로 사용되었고
2세기 중반부터 연사들이 주춧돌 앞을 발언대로 사용했으며
제정기에는 무게와 수치을 재는 공관이 들어왔고 국가의 보물을 보관하기도 했답니다.
어느 신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인지?
얼마나 많고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인지?
광장 이곳저곳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잔재들이
비 바람도 못피할 곳에 널부러져 나딩굴고 있더군요.
시커머케 변한 대리석 파편을 보면서
어릴적 봤던 영화 '쿼바디스'를 생각케 하더군요.
네로황제가 로마시내에 불을 지르고 시을 읇던 장면을 떠올리며
그때 화재로 대리석이 시커머케 되었을까?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의 상부
베스파시아누스 역시 로마제국의 황제였는데
내전을 종식 시키고 제국을 안정시키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답니다.
18세기 발굴이 시작될 당시 이 신전의 세 기둥은 거의 묻혀있었답니다.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베스타신전'
왕정 시대엔 국가의 상징인 왕의 화로를
공화정 시대(기원전 509~27년) 이래로는 공용화로를 보관하였다.
신전에서 신성한 불을 지키던 6명의 무녀(巫女)들을 '베스탈레' 라고 불렀는데
6~10살 사이 귀족의 딸 중에 선발해 30년 동안 순결을 지키며 사제의 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베스타의 신녀들에 의해 지켜지는 이 성화는 나라의 영속을 상징했다.
베스탈의 집터
이 불을 지키는 '베스탈'은 국가로 부터 상당한 급료를 받았으며 사회적 지위도 높아
공공행사나 축제때에 고위 정무관들과 같은 수준의 특별석에 앉을 권리가 주어졌다.
그들의 존재는 매우 신성시 되었는데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여사제와 마주치면 즉시 사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씨를 꺼트리거나 순결을 잃으면 생매장 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매장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로마 역사상 이 벌을 받은 베스탈은 10명 정도라는 기록이 있단다.
악의 들판이라 불리는 곳의 토굴 속에
빵 한조각과 등잔 하나와 함께 생매장 되었다고 한다.
베스탈들에 대한 대접도 극진해서 신전옆 베스탈이 살던 집터엔
길이 70m의 장방형 정원엔 물이 담긴 팔각형 수조가 있었으며
정원을 둘러싼 이층 회랑과 회랑 바깥을 둘러싼 3층 건물로 방이 50개나 되었다.
장대하게 펼쳐진 이곳은 책이나 영화 그리고 사진으로만 보며 믿기지 않던 역사의 현장이다.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잔재만이 남았지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 여러 신전과 원로원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 모든것이 지어낸 옛날 이야기가 아니며 셋트장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영화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였다는걸 실감하며 내내 멍한 기분에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첫댓글 토론을 의미하는 '포럼'이란 단어가 바로 저 곳에서 유래되었군그래
로마가 잘 나가던 시절이니
밥먹고 나면 저곳에 와서 놀아야 지식인으로 체면유지 했던 모양이야
팔라티노 언덕, 캄피돌리오 언덕, 콜로세움 등
사람들 모이기 좋게 주변이 뺑둘러 유적 가운데 낮은지역에 있더군....
서울의 유적지는 경복궁, 비원, 창덕궁, 창경궁, 종묘가 한데 어울어져 있듯이
이곳 분위기가 서울의 그곳을 연상케 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