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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냉전의 일부) | |||
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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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국제 연합:
대한민국[1] |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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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이승만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채병덕 이응준 해리 S. 트루먼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월턴 워커 윌리엄 F. 딘 클레멘트 애틀리 타흐신 야즈즈 몽클라르 엘피디오 퀴리니오 |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김책 김무정 김광협 전우 마오쩌둥 펑더화이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 ||
병력 | |||
UN군 사령부: [2]
대한민국 590,911명 |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260,000명 | ||
피해 규모 | |||
군인 14만 9005명 전사 71만 783명 부상 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 22만 9625명 부상 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총계: 474,000명 이상 |
군인 29만 4000명 전사 22만 6000명 부상 12만 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만 6000명 사망 159만 4000명 부상 68만 명 행방불명 총계 70만 명 사망 182만 명 부상 80만 명 실종 총계 332만 명 사상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
한국 전쟁(韓國戰爭)[3]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정전 중이지만, 정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해 왔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적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다. 이 때 서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7월 14일에는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 주었다.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했다. 1950년 9월 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펼치고 같은 해 9월 28일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함락하고 통일을 눈 앞에 두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에는 휴전선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 존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정부의 호칭)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4], 그 밖에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초기부터 80년대까지는 6.25사변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80년대 민주화투쟁시국의 진보적 지식계층에서 외국(특히 미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타국의 사건을 다루듯 직역해서 "한국 전쟁"으로 번역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 출판계에서까지 따라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이라는 호칭은 이 전쟁이 마치 제3의 국가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한다.[5]
다른 국가들은 조선 전쟁(일본어:
한반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분할점령을 한국전쟁의 배경으로 보는 것 즉,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인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곧 한국전쟁을 대리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설명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할점령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1955년 분할점령을 끝내고 영세중립국으로서 통일국가가 되었고,[7] 독일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지만 동방정책이라 불리는 외교적 노력으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대화와 교류를 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이 1948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움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남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8]
미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0년대 당시의 미국군의 입장에서는 남한은 전략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땅덩어리에 불과하다 여겼다. 왜냐하면 당시의 미 군부는 동북아시아 안보 정책을 미-소 간의 3차대전의 잠재적인 격전지의 관점에서 바라봤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으로 남한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남한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남한과 대만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얄류산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
이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소련의 북한원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38선 분쟁도 한국전쟁의 배경이다.[9]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그를 설득하였고 스탈린 자신도 일부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남침계획을 세우면서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남한내 좌파가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이는 1949년 남한로동당 등의 남한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남한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10]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자본가를 포함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한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 주석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으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남한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파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구는 김일성과 이승만을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1950년 5월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1949년 12월 24일 문경 양민학살 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11]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구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한국 전쟁의 기록을 남한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12]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13] 그리고 CIA는 한국 전쟁 발발 엿새전의 보고서에서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하고 있었고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근거로 했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14]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2]
비교적 폐쇄적인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15]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이 엇갈리고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제기된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아래 있던 부리야드 공화국(현 몽골)의 기갑부대 요원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인민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16]
그러나 스탈린 주도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며, 한국전쟁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려 48번이나 한국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했다. 김일성의 요구를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지만 김일성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전쟁을 승인하고 만다. [15]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14]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북한 위주이거나 북한을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북한과 중공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로 북한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북한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코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북한의 수뇌부는 방문기간인 3월 17일에 동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17]
한국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의 요청과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팔로군(八路軍)중 한인 출신들로 ‘조선의용군’을 만들어 입북 시켰다. 이중 팔로군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4 사단은 만주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단일부대로 1949년 7월 20일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제 5사단으로 개편 되었다. 입북한 사단 인원은 10821명이다.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6사단은 국민당군을 쫒아 대만해협까지 진격한 역전의 사단이며 한중 혼성 부대이다. 원래는 166사단중 1개 연대만 한인이며 조선의용군으로 개편과정에서 중국인들을 한인으로 교체하여 1949년 7월 20일 입북 시켜 조선 인민군 제 6사단으로 개편 시켰다. 사단 병력은 10320명으로 한국전쟁당시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고 불리며 미 24사단을 괴멸시키고 한국군 사단 대부분을 격파한 최강의 부대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요청으로 팔로군 제 156사단을 중심으로 139, 140, 141사단의 한인들을 모와 1950년 4월경 입북하여 약 1만 4천 병력으로 조선인민군 제 7사단을 만든다.(이후 제 12사단으로 명칭 변경)
그외 중국인민해방군에 부대단위가 아닌 개인적으로 복무중인 한인들을 모와 1개 연대를 만들어 입북시키는데 이들은 오토바이 연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모택동이 보내준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 출신 조선의용군은 3개사단 5만명이다.(대안교과서 등 일부자료는 2개사단 3만명으로 나오는데 12사단과 오토바이연대를 누락 시킨 것이다.)
북한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18]
북한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남한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북한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북한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있어서 이 정도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남한에 거의 전무했던 탱크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아주 허술하게 대응했다.[19]
항목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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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 24대 | 54대 |
전차 | 0대 | 242대 (T-34) |
곡사포 | 105mm-m 388문 사정거리 6500m |
122mm 172문 76.2mm곡사포 176문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
대전차포 | 57mm 140문 | 45mm 540문 |
박격포 | 60mm 576문 81mm 384문 |
61mm 1142문 82mm 950문 120mm 226문 |
군용기 | 연습기 20대 | 전투기 등 170대 |
육군병력 | 9만 4000명 | 19만 1680명 |
해군병력 | 8866명 | 4700명 |
공군병력 | 1800명 | 2000명 |
총병력 | 10만 4666명 | 19만 8380명 |
전투경험 | 대부분 없음 (신병대다수) |
중국 팔로군 출신 한인 중 일부 국공내전 참전 경험 |
1950년 6월 당시 북한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20]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장갑차)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T-34를 격파할 수 없는 무기였다(미국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한국군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사단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21]. 전체적으로 남한군은 단지 15일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22][23][24][25]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26]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발언이 미국 측에서는 이승만이 북침을 노린다고 받아져 탱크와 전투기 등 공격에 필요한 무기를 한국군에게 제공하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이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27] 이에 정보국 요원 중 박정희는 적이 바로 앞에서 조국을 침략하기 위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놀고 먹는데에 여념이 없는 정부에 대해 매우 대노하여 얼마 후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군사반란을 일으키려 시도했지만, 장도영 등 박정희의 상관들은 전쟁 중에 반란을 일으키면 서로 멸망하기 때문에 박정희의 군사반란 시도를 막았으나 이후 1960년 박정희는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외 전쟁 발발 2주 전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하고(숙군 작업의 일환임), 1주 전 대부분의 전방 부대의 위치를 변경하고(여순 사건의 여파로 인한 것임), 전방 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 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 안에 통적 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이형근은 군번 1번 문제로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안좋은 상태이며, 이것은 국군 창설 첫날이자 최초의 파벌 싸움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의료부대인 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25일 오전 12시까지 치료준비사업을 완료한 병원은 전투준비상태로 대기하였다. 6월 25일 오후 2시부터 부대는 벌써 전상(戰傷) 환자 취급을 시작하였다. [28]
남한의 의견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남한)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남한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29]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30]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31]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32]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33]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이승만은 보도연맹 학살을 했다.[34]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35]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36]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37]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지 못 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38]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39]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39]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39]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는 여러 견해가 나뉘고 있는데,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남한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강원도와 6사단에서는 첫 번째 설을 정설로 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두 번째 설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2사단[40]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41]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42][43]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44]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유엔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은 현재 북한 괴뢰군의 불법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고전 분투하고 있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우리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45]임이 분명하다.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귀 안보 이사회에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46]
이러한 결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UN 안보리 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한국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47]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48]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의 경우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과 정규군과 황제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등등 참전국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49]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50]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51]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타이·터키·영국·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52]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53]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54]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55]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북한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남한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56]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7]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이 시행 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를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쪽은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쪽은 장진호까지 진격했고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하다가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북한은 지금의 자강도의 중심지인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했다(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미국 1 해병사단의 목표가 바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 하다가 중국군의 의해 밀린다).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국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3만 명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국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소련인들도 중국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공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명이 간부의 횡령에 의해서 아사했다.[58]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59]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 바로 위에는 중국과 북한군이 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동부(강원도 쪽)에서 북한과 중국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북한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이 무렵 소련이 소련마크를 달고 부분적으로 참전했었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정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공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공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은 소련 및 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60]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중국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뺏기고 남하했지만 다시 수복하고 38선 넘어 공산군을 쫓아낸 뒤 현재의 휴전선이 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61][62]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63]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정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정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그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국제 연합 총회는 결의 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64]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정전협정 이후 크고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여러번 있었다. 1968년에는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NLL부근에서 수차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의 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39]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39]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39]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65][66]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67]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인 보도연맹 사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강화 양민학살 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키는 실정으로 비판받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제가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68]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 (남한)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69]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남한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북한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남한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70]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다.
터키군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71]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까지도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72]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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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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