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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같은 선지자
신명기 34:9-12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34: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34: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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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대 사람이 모여 있다고 다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연락이 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님과 교류가 되는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 선지자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시편 44:3에 보면,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지키는 방도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칼이요 활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자기 근처에 선지자가 없을 경우에 그러합니다.
만약에 자기 주변에 선지자가 있다면
이는 곧 선지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주장은 듣기에 너무나도 터무니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46:10에 보면,
“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운데 제일 힘든 것이 바로 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괜히 설치는 그것이 나의 일을 훼방한다”는 겁니다.
왜 인간들이 설칠까요?
그것은 자기 방식의 연속성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하는 방식으로만 내가 꾸준히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만 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의식은 아무리 놀라운 기적들을 베풀어주어도
돌아서면 인간들은 또 선지자를 공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연속성 있는 인도하심은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인간들이 주장하는 자기 살고자 하는 방식이 틀렸음을 계속 입증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감한 사태를 자꾸만 유발시키십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선지자를 향하여 이렇게 따지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 뜻에 순복하기 위해 노력해왔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당신의 하나님이 왜 그리 힘들게 하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이런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더 당해야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성신이 주어졌던 구약은
이스라엘에게 2차원적 삶의 환경을 가지고 다루십니다.
이 대지의 소산물이 곧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양식 떨어지면 저주요 양식이 넉넉하면 복으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신약처럼 이 땅에서 자신이 이미 죽은 자가 된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그런 시대는 아닌 겁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2-3)
이는 성신이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야 될 입장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완성은 성령입니다.
신명기 18: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즉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예고내용을 전달받습니다.
장차 나와 같은 선지자 한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겁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최종적인 분이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전달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이란 바로 이분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연락책인데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대든’ 이스라엘 대신에 성령을 통해서
‘가만히 살면서’ 구원받는 자들이 곧 성도임을 알립니다.
아무 리듬소리도 박자도 없는 가운데서 춤을 추라면 난처한 상황일 겁니다.
선지자의 삶이 이런 삶입니다.
그 어떤 자의 호응도 없이 쓸쓸하게 묵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어떤 사심이나 나름대로의 이익을 고려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65:4에 보면,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뜰’이란 곧 주님이 계신 최종적 거주지입니다.
그 안 뜰을 내어주신다는 것을 최종적인 동거인으로 받아주셨다는 말입니다.
비록 선지자들이 이 땅에서 인간들의 방식들로 인해 온갖 천시를 받고 있지만
그들은 이 ‘주의 뜰’이 주는 최종적 휴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바로 선지자는 이런 고요함을 세상의 질타 중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46:1-3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또한 예언입니다.
선지자는 수시로 터져 나오는 분란과 불연속 속에서 연속성을 발휘해나갑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 함께 해주기를 간곡하게 바라지만
막상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서 모질게 구박합니다.
그들이 목적하는 바와 다른 것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성신의 시대에는 이처럼 미완료을 보여주기에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납니다.
외부 민족과의 전쟁도 있지만
그 전쟁의 승패는 이스라엘 내부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신뢰하느냐 여부에 달렸습니다.
이 방식에서 인간들은 철저하게 자신이 아는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반복적으로 선지자를 학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백성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선지자의 연속성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들은 이 연속성을 알리고 이어지도록
밖으로 배출되는 ‘불연속성적 요소’로서 다루어집니다.
비록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버려도
선지자는 꾸준히 예수님에까지 지어지고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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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강-신 34장 9 – 12절(모세 같은 선지자)201800520)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4장 9 – 12절입니다. 구약성경 319페이지입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보통 나라에서 인간이 지도자를 뽑아서 그 지도자와 백성들이 의견을 모아서
하나의 민족과 국가를 유지시켜 나갑니다.
근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유지가 됩니다.
보낼 때 그냥 보내면 안 되겠지요.
그냥 보내지 않고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씌워주는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의 신, 성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특징은
보통 인간에게는 성신이 없지만 선지자에게는 성신이 있습니다.
이 성신 때문에 선지자는 하나님과 연락이 가능하고 교류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대 인간의 평등사상은 사라지죠.
“너의 말도 옳고 나의 말도 옳다” 이것도 아니고
“우리 가운데서 신뢰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선지자에게 물어보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남보다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연락 체제가 되어 있어요.
하늘나라에 유일하게 통하는 무전기를 갖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는 어디 어디입니다. 하나님, 지시를 내릴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무전 연락이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이러한 선지자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벌이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자존심과 관련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생존과도 관련 없고.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자존심,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은 그 나라 구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약간 어렵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본인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빠져버리면, 달리 말해서 선지자를 우리가 밉상으로 여기고
우리가 선지자를 도외시하고 선지자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는 그게 이스라엘이라도 이스라엘 아니라는 점을 각오를 해야 돼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옛날 구약 이스라엘은 참 좋겠다. 선지자가 있어서 참 좋겠다.
선지자가 있는 이상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버리지 않을 거니까 참 좋겠다.’하는데
이 선지자가 구약성경을 쭉 보면서 갈수록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핍박 받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참 선지자여서 좋겠다.’ 하는 우리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선지자는 좋을 것이라고 언제까지 계속 생각할거냐는 이 말이죠.
과연 ‘선지자가 좋다’ 할 때 선지자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선지자 믿는 내가 좋은 거예요?
그 비교에서 우리는 ‘내가 좋다’ 쪽을 포기를 해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하죠.
‘선지자가 있다. 하나님이 있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이기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는 굉장히 밉상 덩어리이고 핍박도 많이 받고 서러움도 많이 당합니다.
그래서 점점 갈수록 선지자들이 미움을 받게 되는데
그 때마다 이스라엘에게는 위기가 닥쳐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을 한번 들어 보세요. 이런 뜻입니다.
선지자가 있는데 왜 우리에게 이러한 난처한 일이 벌어지느냐.
그 사람의 논리가 그런 논리에요.
‘예수 믿는데 왜 집안이 어려운가?’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예수님 사랑하는데 왜 교회가 안 되느냐와 똑같은 원리예요.
‘선지자가 있는데 왜 사는 게 위기의 연속인가?’라고 이야기 하죠.
그럴 때 선지자들이 이야기 한 것을 그들은 다 개소리로 들은 거예요.
전부다 그들은 그것을 하찮게 여긴 겁니다.
시편 44장 6편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흔히 사람들이 사용하고 기대하고 있는
무력이나 칼이나 활로 구원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무력이나 칼이나 또는 말이 많아서 이스라엘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있어요.
그래서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가만히 있어...
사람은 제일 힘든 게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우리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저지레를 했다는 거예요.
주님을 위한답시고 하는 짓거리가
자기 것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 맘부림 치는 거고,
자기 것 지키기 위한 거면서 핑계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핑계대고
얼마나 이렇게 엉터리같이 살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봐.”
이 가만히 있는 모델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곧 나라에, 이스라엘에 위기가 왔습니다. 적군이 포위를 했습니다.
유일하게 거기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선지자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엘리사 같은 경우에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화들짝 놀랐어요.
적들이 와가지고 이건 분명히 엘리사를 먼저 잡아야 이스라엘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요새말로 제갈공명을 잡아야 하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고 군대를 엘리사가 있는 쪽으로 모아가지고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게하시가 아주 안달이 났습니다.
‘이제 죽었다’
적들이 새카맣게 성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옛날 성은요, 이게 2차 평면적 전쟁이기 때문에,
드론도 없기 때문에 그냥 포위해서 굶겨 죽이면 끝이에요.
포위해서 물 근원 막아버리고 식량 보급품 막으면 끝입니다.
지금은 드론으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면 되지만.
인간은 2차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어요. 이게 성신적 사고방식이에요.
성령은 3차적 사고방식입니다.
성신은 2차적이에요.
이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할 때거든요.
여호와의 신은 성령에 비해서는 미완성의 영이에요. 미완성의 신입니다.
완료되지 않은 신이에요.
====>하나님의 뜻의 완성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할 때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2차선에서 2차적 평면 속에 지내게 합니다.
2차적 평면 속의 중요한 점은 인간은 땅에서 벗어나면 죽는다는 겁니다.
땅에서 해결 봐야 해요. 승부를 봐야 해요.
땅이 잘 되어야 하고 이스라엘이 잘 될 때 젖과 꿀이 계속 이스라엘 땅에 나올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에게 복 받은 티를 내게 되는 그러한 2차적 무대장치가 구약이에요.
그러면 신약에서는요?
신약에서는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해서 이거는 3차원적입니다.
2차원에서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 신약이고.
그래서 성령은 성신을 따라 오는 마지막 영이 성령이에요.
마지막 영입니다. 더 이상 영은 없어요.
그렇게 엘리사 게하시를 완전히 포위를 했습니다.
2차원적 입장에서는 게하시가 옆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요.
우리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극에 나오는 전쟁들을 보면 참 답답해해요.
고려시대, 삼국시대 때에 신라가 어떻고 백제와 당나라 싸우고 할 때, 칼 들고 싸우고 하면 참 답답하죠.
영화 장고에 나오는 그 기관총 있잖아요.
그거 한 개만 있으면 두루룩 갈겨 버리면 활이 날아오는 시간보다
총알 날아오는 시간이 짧으니 활 쏠 시간도 없이 다 죽어 버리잖아요.
‘아이고, 바보같이 그 때 연발 기관총을 왜 못 만들었을까? 아이고 답답해’ 하지요.
그 답답함으로 주님이 우리를 보고 얼마나 답답해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지옥 갑니까? 뭐 몸 아프고 하다고 지옥 가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구약 정도도 안 되고, 구약 정도밖에 안돼요.
자기 것 없어지면 큰일 나는 것처럼, 탈나는 것처럼. 천지개벽하는 것처럼.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영으로 오셨는데,
마지막 영 이전에 마지막 분으로 오시는 거예요.
마지막 분. 이 사람 일거라고. 이 사람 뿐이라고. 아침에 말씀 드렸지요?
마지막 분으로 오신 거예요. 최후에 분. 더는 없어요. 그 분이 가신 코스가 구원의 길입니다.
그 사람 옆에 예수님 옆에 12명이 따라 다녔는데 한번 비교해 보세요.
이건 엘리사와 게하시 관계와 똑같아요.
게하시는 답답해하는데 엘리사는 기도해서 게하시 눈을 뜨게 하니까
세상에 이쪽 엘리사 편에 있는 군대가 훨씬 많아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고, 세 번째 시험이 끝나고 난 뒤에 그 자리에 누가 나타났느냐 하면
천사들이 와서 예수님 수고 했다고 떡과 물을 드리면서 테스트 통과해서 감사하다고
수종 들고 천사가 도와줘요. 그게 수호천사잖아요. 주님은 지금 천사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성도 곁에는 수호천사가 있어요. 보디가드가 있어요. 우리가 타락하고 싶어도 타락 못해요.
보디가드가 옆에서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 뜻대로 출세하고 싶어도 안돼요.
보디가드가 출세 그만하라고 막아 버립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와서 꺼내 주었고 베드로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늘 혼자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완료된 시점에 오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돌보아 주고, 돌보는 것을 보혜사라 합니다,
돌봐주고 지켜주는 그런 양상으로 우리가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성신과 성령 사이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을 방금 이야기 했습니다.
연속성부터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연속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을 그 민족 안에 박아 놓고 심어 놓는 거예요.
그러면 연락책이 되어가지고 하늘의 뜻이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선지자가 있다는 연속성이 있으면 그 주변에 뭐냐 하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불연속성을 배출하게 되어 있어요.
아까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갔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적군이 오니까 뭐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다고
그렇게 제사 드리고 해도
막상 적들이 들이 닥치니까 벌벌 떨면서
우리에게는 왜 칼이 없느냐, 우리에게는 왜 활이 없느냐 우리는 어느 제국에 기대야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는가, 무슨 선물을 줘야 금을 다 벗겨서 바치면 앗수르가 도와줄까,
도와줄까 그렇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부작용 들을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부작용들을. 그 부작용이 불연속성이고 연속성이라 하는 것은 함께 있음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시편 65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주의 뜰에 거하게 했다는 말이죠.
주의 뜰에.
우리도 어떤 사람은 우리 집에 안들이잖아요.
특히 그냥 주택에 살면 누가 와가지고 그 주택의 뜰에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주인 허락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주의 뜰에 누가 거했다는 말은
주인의 허락이 떨어졌고 반겼다는 뜻이거든요.
“어서 오너라”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의 뜰에, 성전인데, 주의 뜰에 있다면 이미 거기에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소원할 게 없어요.
더 이상 목적으로 삼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오히려 주의 뜰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돼요.
“너는 주의 뜰에 없지? 그지?” 약을 올려야 되는 겁니다. 약을.
우리의 포지션이, 우리의 위치가 이미 주의 뜰에 도착했다면 이미 이거는 고정된 겁니다.
이게 바로 평화예요.
이게 안식이고 평화잖아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2차원적 인생을 살다가 보니까
내가 가져야 될 것, 소유, 내 재산, 장래에 대한 여유 있는 그 모든 것,
끌어 모으려고 하다 보니까, 어지간히 끌어 모아서는 늘 불안해요. 자기 장래가.
끌어 모으려고 시도하다 보니까 불안 불안 한데,
그 끌어 모으는 순간 우리는 내 것만 신경 쓰여요.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가 신경 쓰여요.
그러나 시편 65편 4절에 나오는 이 분은 그냥 끌어 모은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어느 자리에 기거하고 있는지만
생각하니까 이 주의 뜰에 거하는 것은 평소에 세상 적으로 봐서는 자기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남들처럼 내 것 이 만큼 끌어 모으는 게 소원이었지
그리고 남을 이기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런 나를 이제는 안 끌어 모아도 되고요,
내 것 계산하고 측정 안 해도 되고 그냥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없는 사람처럼 작게 생각해도 괜찮고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이 뜰, ‘이 뜰이 무슨 뜰이지? 어, 주님의 뜰이네.’ 이걸로 족한 겁니다.
이거 족하지 않으면 여러분 평생 마귀에게 시달릴 줄 아시기 바랍니다.
마귀한테. 이미 주의 뜰에 도달했잖아요. 남의 집에 들어왔잖아요.
내 집 아닌 남의 집에. 하나님 집에 들어왔잖아요.
이미 고향에 왔는데 뭘 더 원합니까? 이러한 완성 된 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 완성을 향해서 가는 그 과정에서의 백성들과
이미 완성된 자리를 확보해서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같이 동행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뭐냐?
신명기 18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상당히 이 말씀이 신학 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에요.
신학 하는 그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뭐 때문에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학 한다 하면 그건 믿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 지니라”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민수기 11장 29절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있어요.
이걸 오늘 설교시간에 하면
“모든 사람의 불연속성에서 연속적인 위치에 있기를 원한다”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 돼요.
선지자 되기를 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연락책이 되기를 원해야 됩니다.
“나는 지금 여호와의 전 뜰에 와 있다.
시편 64편 4절처럼.
주의 뜰에 와 있는데 너는 지금 뭐하고 있지?” 이렇게 비교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주의 뜰에 와 있는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세상에 남겨두는 이유가 무엇이냐.
지금 성령 받은 우리를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 남겨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선지자가 가는 길을 우리가 갈 수 있는 가를 가지고 검증하는 거예요.
선지자가 가는 길에는 불연속성,
즉 지옥 가는 것, 그 지옥 갈 세상과 섞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신 주의 뜰에 거하는 복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한 사실을 대비해서
갈수록 더 크게 느끼고 고마워지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 모세 같은 사람이
그저 자기 것만 챙기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섞여서 그들로 하여금 티격태격 밉상 받는다는 이 말은 장차 오실 선지자도, 모세 같은 선지자니까 사람에게 밉상 받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을
신명기 18장 15절에서 그렇게 예언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예언은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에게 그대로 이전되는 겁니다.
제가 ‘버닝’이라는 영화를 개봉 날 봤어요. 제가 벼르고 있었어요.
하도 이상한 영화가 많아서 볼만한 영화가 없는데 ‘버닝’이라는 영화를 꼭 보고 싶었어요.
이창동 감독이 ‘밀양’이라는 영화를 했지요.
그 영화 평을 우리교회 십자가 마을에 올려놨는데
그 ‘밀양’이라는 영화 주제는 피해자나 가해자나 전부다 주님 앞에 용서 받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그 내용이에요.
피해자나 가해자나.
이 세상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투고 있다고요.
“너 때문에 못 살았다. 아니, 너 때문에 못 살았다.”라고 하는데
주님 앞에서는 주님에 의해서 용서가 된 자라면
인간들의 모든 갈등이나 인간들의 모든 비교에 대해서 주께서는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남들 보고 산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보고 산다는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이 나의 구원을 방해할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나를 존경하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에
내 존경을 이어주지 아니하면 그게 예수님이라도, 하나님이라도
우리는 멸시하게 되어 있는 그런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 이 말이에요.
이창동 감독이 그걸 설명해서 깜짝 놀랐어요.
복음도 모르는 사람이 희한하게 복음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그래서 이창동 감독이 내 놓은 영화를 다 봤는데
이번에 ‘버닝’이라는 영화를 보고 제가 평을 올려놓았습니다.
‘버닝’은 태운다는 뜻인데 그 영화의 장면들을 보면
그 장면 장면마다 중요한 요소를 어떤 암호처럼 다 심어 놓았어요.
심어 놓으니까 비평가들은 그걸 알지만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어려운 영화라고 하는데
또 어렵다고 해서 다들 도전하려고 영화를 보니까 어렵다고 하겠지만
그 장면 중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여자 주인공이 부시맨 춤을 추는 게 있어요.
조용해요. 조용한데 손을 만세를 하고 흔들면서 춤을 추는 거예요.
참 민망하죠. 반주 없는데 노래 불러 보세요. 그것도 민망하지만 춤은 더 합니다.
고요한데 혼자서 손을 흔들면서 춤을 추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것을
여자 주인공이 아프리카에서 보고 온 거예요.
부시맨들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배고파서 고함치는 인간과 삶의 의미를 몰라서 고함치는 인간,
즉‘Great Hunger’ 큰 배고픔을 아는 자로 나눠요.
부시맨들에게 진짜 그런 게 있는지 확인은 안 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에는 그렇게 나와요.
큰 배고픔,
인간의 삶의 의미를 몰라가지고 그렇게 느끼는데
그러면 배고픈 인간이 인간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부시맨은 연속성을 둡니다. 단절이 아니고 연속을 해요.
춤을 손을 반쯤만 올리고 추다가 두 손을 번쩍 들어서 흔들면서 추면
이거는 삶의 의미를 아는 기운 속으로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좀 인간답게 살려면
손을 번쩍 들고 추면 부시맨의 신이 어여삐 여겨서 삶의 의미를 준다는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면 불연속성이 아니고 연속성이 돼요.
인간의 어떤 행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서 우리에게 복을 준다는 거예요.
이게 부시맨이에요.
이 부시맨이 오늘날 한국 교회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춤을 추는데 아무 장단도 없고 박자도 없고
고요한 가운데 춤을 추는데
그때 못돼먹은 벤이라는 남자가 보고 하품을 하는 그 하품이 그 영화의 핵심입니다.
하품.
‘돈도 없는 게 무슨 건방지게 삶의 의미를 찾아?
네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꿈꾸고 있구나.
저거는 갖고 놀다가 죽여 버려야지.’
그래서 나중에 죽여요.
영화의 주제는 뭐냐 하면
없는 것들이 왜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계급 지어진 이 세상을 왜 애써서 억지로 외면하고
여기서 건방지게 삶의 의미를, 개코도 돈도 없는 게 삶의 의미를 찾느냐는 거예요.
삶의 의미는 얼마나 돈을 가졌느냐로 그걸로 끝났다고 본거예요.
이 세상은 가진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없는 인간이 돈만 밝히면 되지
무슨 삶의 의미를 찾느냐는 거예요.
그 영화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해답을 내놓는 이창동 감독은
그 해답을 이 세상에 있더라도 이것은 전부다 메타포(metaphor),
즉 이 세상은 환상에 불과 하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살게 되면 그게 삶의 의미라는 겁니다.
삶의 의미라 하는 것은 그냥 생각하는 거다.
없지만 있다고 치고 판토마임 하듯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고양이는 있는데 고양이는 안 보이는 이것처럼,
안 보여도 사료 주어야 하는 것처럼, 현재 나는 없지만 내가 있다고 하면
그게 나의 삶의 의미라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살자는 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까불면 불태우고.
이창동 감독은 뭘 모르느냐 하면
이 세상이 허상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실상이 왔기 때문에 허상이 허상이 된다는 것을 몰랐어요.
실상은 뭐냐?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이에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거 빠뜨리면 세상은 헛되고 헛됨으로 끝나버려요.
그냥 해답도 없고 정답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돈이나 벌고 쓰고 싶은 데로 쓰자. 끝.’ 그게 끝이에요.
오늘 본문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신을 받았잖아요.
이제 모세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신을 받는가.
34장에 보면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하나님의 지혜의 신이 충만하다는 겁니다. 성신이 임했어요.
제가 아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신이라 하는 것은 미완료예요.
미완료든 어떠하든 간에 뭔가 완성을 향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고 이어지고 하는데 갈수록 성신 받은 선지자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밉상 받고, 핍박 받고, 미움 받고, 죽임을 당하고, 돌로 침을 당하고 해요.
그런데 그게 연속성이에요. 고난의 연속성.
영화식대로 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있기 때문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허상인 줄 모르고.
그리고 마지막에 완성이 되면
예수님 오셔서 이 땅에 없으신 분이, 없어야 될 분이 있음으로 등장하고
그 있으신 분이 없어졌어요.
없으신 분이 그 뒤에 오순절 날 오신 분, 성령이 오신 거예요.
성령이 오셔서 다녀갔다고 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분이 다녀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심판하실 분이 다녀갔다는 겁니다.
사람만 사는 이 땅에 하나님이 다녀갔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너희들은 못 박아 죽였다는 겁니다.
회개하면 성령을 받고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지자처럼 주님의 연락책으로
주님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할 것이 뭐냐?
이 세상과 달리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무수하게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 겁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시편에 보면 시편 46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세상이 아무리 흔들기 흔들기 하와이 화산 터지고, 지진 터지고,
미국에는 총기 사건, 한국에도 사건 사건 여러 가지 복잡하게 살아가면서 온갖 것 당하더라도,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리든지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우리는 오직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리로다”
왜? 이미 주의 성전 뜰에 기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