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아리우스
리비아 출생.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분열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破門)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被造性)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主敎)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또 파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되었다.
-또다른 자료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이 독립된 3본질(ousiai),삼위일체의 부인으로 칼빈과 피터지게 싸움.
아리우스는 실체(hypostaseis)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신성(神性)을 물려받았을 뿐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가 성부와 '닮았으나'(homoiousios) '동일 본질'(homoousios)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알수있듯이 반아리우스 주의자들이 주장한 삼위일체도 현재의 삼위일체설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할수있다.
고대 그리스어의 '요타'(ι) 1자로 구별되는 2단어를 둘러싼 이 교리 논쟁 때문에 "그것은 요타 하나만큼의 차이도 없다"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통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그 요타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아리우스주의나 반아리우스주의 모두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다(325).
아리우스주의가 그리스도의 이성과 신성을 모두 부인함으로 구원의 능력에 막대한 손상을 입힌다. 어쩌면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많이 존재한다. 교회는 단지 그들을 비난하고 멀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