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사서 15년 독점하던 항로 승객 늘면서 3개 업체가 경쟁 뱃삯 50% 할인 등 파격 서비스 8만원에 왕복, 초저가 여행 즐겨
등산광인 조호국(55·부산시 중구 중앙동)씨는 지난 12일 주말을 맞아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시를 다녀왔다. 오전 8시20분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 코비호를 타고 출발해 1시간45분 만인 오전 10시5분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항에 도착했다. 조씨는 해발 558m인 아리아케(有明)산을 등반한 뒤 오후 3시40분 이즈하라항을 떠나 오후 5시30분쯤 부산으로 돌아왔다. 쓰시마 여행 경비로 50% 할인된 왕복 뱃삯 8만5000원밖에 들지 않았다. 점심은 집에서 싸온 김밥으로 해결했다.
조씨는 “외국의 산을 당일치기로 다녀왔다는 게 신기하다. 면세품을 싸게 구입했기 때문에 사실상 공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그는 출발 하루 전 롯데백화점 면세점에서 아내의 화장품 40만원어치를 구입해 돌아왔다. 화장품을 면세점에서 시중 가격보다 20%쯤 싸게 구입했으니 뱃삯과 비슷한 8만원 정도 이득을 본 것이다.
부산∼쓰시마 항로의 국제 여객선이 늘면서 요금 할인과 서비스 경쟁이 치열하다. 부산∼쓰시마 항로를 오가는 선사들은 지난달부터 왕복 요금을 15만∼17만원에서 50% 할인하고 있다.
이렇게 뱃삯이 내려가자 조씨처럼 당일치기로 쓰시마를 다녀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면세품을 구입해 여객선 요금을 뽑는 승객도 많다. 이 항로는 ㈜대아고속해운이 1997년부터 독점 취항을 했다. 이 회사는 드림 플라워호와 씨 플라워호 2척을 투입해 주 5회(화요일 제외) 운항하고 있다. 그러나 승객이 늘어나면서 부산∼후쿠오카 항로에 다니던 ㈜미래고속이 지난달 1일부터 쾌속선 비틀호를, ㈜JR큐슈고속이 지난달 28일부터 코비호를 투입했다. 코비호는 수요일을 제외한 매일 1회 부산∼쓰시마 이즈하라항을 왕복한다. 비틀호는 평일에는 매일 1회 부산∼쓰시마 히타카쓰항을 왕복 운항하고 주말에는 매일 2회 왕복한다.
경쟁하다 보니 요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아고속해운과 미래고속은 부산∼쓰시마 항로의 뱃삯을 50% 할인해주고 있다. 미래고속은 쓰시마를 다녀온 승객이 내년 2월 말까지 부산∼후쿠오카 표를 구입할 경우 50% 추가 할인한다. JR큐슈고속도 부산∼쓰시마를 다녀온 승객이 부산∼후쿠오카 배편을 이용하거나, 부산∼후쿠오카 승객이 부산∼쓰시마를 다녀올 경우 요금을 50% 깎아준다. 쓰시마를 찾는 한국 관광객은 2004년까지 연평균 6만 명을 유지하다가 2008년 15만 명까지 늘었다. 그러나 엔화 강세의 영향으로 줄기 시작해 지금은 10만 명 선이다.
해상자위대(일본어: 海上自衛隊, Japan Maritime Self-Defense Force, JMSDF)는 일본이 1954년 일본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한 조직으로 1947년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는 국가간의 교전권(交戰權)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국 헌법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형태로 1950년대 이후 계속해서 자위대의 전력을 확충하고, 1990년대부터는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집단자위권 행사 등의 명목으로 헌법을 바꾸면서까지 명실상부한 일본의 군대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방안을 검토해 왔다.
육상자위대·해상자위대·항공자위대로 나뉘는데, 모두 지원제이며, 편제는 하사관과 장교로 구성되어 있다. 해상자위대의 규모는 병력 약 4만 6000여명이며, 2척의 헬기항모, 10척의 구축함, 39척의 호위함 그리고 18척의 잠수함 등을 보유하고 있다.
아소만 연안과 북부 해안 등은 이키쓰시마국정공원[壹岐對馬國定公園(일기대마국정공원)]에 속하며, 특히 아소만연안에는 경승지가 많다. 이곳 도노자키(殿崎)도 풍광이 아름다우며 몇해 전까지도 1911년에 세운 일본해 해전 기념비만 하나 썰렁하게 있었으나 도로를 개설하고 개발하였다. 특히 2005년에는 일본해 해전 100주년을 맞아 "日露慰靈의碑" 및 "友好 平和의碑"를 세우고 "러일우호의 언덕"으로 명명하며 일러양국의 우호와 평화를 다지는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대마도에서는 세계의 평화를 이곳 도노자키공원에서 부터 찿았으면 한다.
(우호 평화의 비 : 6,000여명의 병사와 함께 포로가 된 제2태평양함대(발틱함대)의 로체스트벤스키(Rozhestvensky) 제독을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八平郞) 제독이 병문안한 사진을 형상화하였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八平郞) 제독)
일본해 해전
1905년 1월 초 발트 함대는 마다가스카르 섬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인 노시베 섬에 기항하였는데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여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데에는 4개의 항로가 있었다. 첫 번째 항로는 대한 해협, 둘째는 대마도 해협, 셋째는 일본 혼슈우(本州)와 북해도 사이의 쓰가루(津輕) 해협, 넷째는 북해도와 사할린 사이의 소오야(宗谷)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일본 해군의 주력이 대만 부근에 있을 것이라 예상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최단 항로인 대한해협을 통과하기로 하였다.
일본 해군도 발트 함대가 어디를 통과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소오야 해협 아니면 대한해협으로 보았는데, 참모들 다수는 소오야 해협으로 예상하고 있었으나,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八平郞) 제독은 발트 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
5월 17일 발트 함대는 반퐁 항에서 출발하였다. 25일 발트 함대는 속력을 늦추고 무전도 끊은 채 북상을 계속하였다. 2만 8800km에 달하는 장거리를 항해해 온 발트 함대는 지쳐 전투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함정의 탐조등을 끄게 하고 항해하였다.
1905년 5월 27일. 총 38척의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으로 들어섰다. 그러나27일 오전 2시 45분 경 일본 순양함「시나노마루(信濃丸)」는 발트 함대 병원선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포착하였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는 함대 최선봉의 수바로프호에 타고 각 함대를 종렬진으로 편성하여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함 발견!’1905년 5월 27일 새벽, 쓰시마해협 남쪽에서 활동중이던 일본의 가장(假裝) 순양함 ‘신농환’에서 ‘적함 발견’이란 무선전보가 전파에 실렸다.
진해만에서 도고 해군 대장의 지휘하에 대기중이던 일본 연합함대는 ‘적함 발견’이란 무선전보를 접수하고 즉각 전투태세로 돌입하여 발틱함대를 기다렸다. 정오 무렵, 드디어 러시아와 일본의 해군 주력이 조우하게 되어 세기적 해전이 시작되었다.
27일 새벽 1시 55분 기함 미카사(三笠)에서 도고 사령관은 “제국의 운명이 이 전투에 달려있다. 모든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의 “Z" 신호기를 게양했다. 새벽 2시 2분 도고 제독은 남서쪽으로 자신의 항진을 고정시키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적 함대까지의 거리가 8km에 접근할 때까지 3분간 항진한 뒤 2시 5분 도고 사령관은 자신의 함대에게 항로를 180도로 줄줄이 바꾸도록 명령했다. 소위 ”도고의 회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2열 종렬진으로 항해중이던 러시아 발틱함대에 맞서, 한국 진해만에서 남하한 일본함대는T자형 전법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의 항로변경을 이용하기 위해 러시아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은 발포를 명령했다. 2시 10분 러시아 함대와의 거리를 6.4km로 좁힌 후 도고 사령관도 발포를 명령했고, 치열한 소위 쓰시마 해전이 시작되었다. 12척의 일본 전함들은 완전히 180도 회전하여 도고의 미카사 기함을 선두로 직선의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일본의 함대는 우현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으며 러시아 함대는 선두의 미카사함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전투 시작 1 시간 뒤인 3시 10분 경 러시아의 전함 오실라비야가 일본의 집중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였고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의 기함 수보로프도 화염에 싸여 대열에서 이탈했다. 다섯 시간의 전투 후 러시아는 네 척의 주력함을 잃었다
수바로프호는 진로를 가로막고 함대의 앞과 뒤의 발포로 쉴새없이 공격해 오는 연합함대의 함포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파손되고 말았다.그 전함에 타고 있던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도 중상을 입어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고, 급기야는 전함 자체도 침몰하게 되어 승무원 900명이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기선을 제압한 연합함대의 끈질긴 공격에 오슬리아비아호, 알렉산더호, 보로디노호 등 발틱함대의 주력이 속속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1905년 5월 27일, 28일 이틀간의 해전에서 발트 함대는 대한해협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였다. 38척의 러시아 군함 가운데 19척이 격침되었다.그 가운데 주력전함 6척과 순양함 3척이 포함되었다. 항복 후 포획된 함정은 전함 2척을 포함하여 모두 7척이었다.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함대 대형 후방에 있던 순양함 3척은 도주하여 6월 초순 필리핀의 마닐라 항으로 들어갔다. 기타 보조선박 수척이 중국의 상하이 등지로 도주하였다. 4800명의 장교와 사병이 전사했고 6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일본 해군의 손실은 3척의 어뢰정과 전사자 117명이 전부였다.
이때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 발트 함대에 비해 몇 가지 우월한 점이 있었다. 우선 영일 동맹 체결 후 일본 해군은 그 편제와 훈련법 등 해군 운용의 전반에 관하여 영국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일본 연합함대의 신형 전함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발주한 것이고 그 운용법도 영국 해군 군사고문단에 의해 전수받아 일본 해군 승무원의 숙련도는 당시 세계최강의 영국 해군에 필적할 정도로 우수하였다.
또한 러시아 해군이 모르는 기발한 사격지휘법이 있었다. 당시 함대 간 포격은 발사명령이 나면 군함들이 각자 사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동시에 발사된 수십 발의 포탄이 일으키는 물기둥으로 인하여 자신이 쏜 포탄의 탄착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구경별로 다른 색의 화염을 일으키는 포탄을 쏘았다. 그리고 사격도 포대의 포수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포술장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방식은 훗날 1차 세계대전에서 일반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고였다. 그리고 포 구경은 작았지만 신형속사포를 많이 장비하여 분당 발사 수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여기서, 쓰시마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무선으로 전해진 전보였다. ‘적함 발견’이라는 그 전보가 없었다면 쓰시마 해전은 물론 러·일전쟁의 승패와, 세계 역사의 전개 방향도 변화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정찰중에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을 최초로 발견한 가장 순양함 ‘신농환’이 ‘적함 발견’이라는 무선전신을 거문도의 무선중계소로 보냈고, 거문도 무선중계소에서는 이 전보를 ‘엄도’로 중계했다. 이어 ‘엄도’에서는 진해만 해군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로 전보를 보냈고, 연합함대에서는 그 정보에 따라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반면 러시아의 발틱함대도 본국을 출발하기 전 독일 텔레푼겐사의 무선전신기를 구입하여 설치하고 독일인 기사를 태웠다. 그러나 독일인 기사는 군대 규율에 반발하여 마다가스카르섬에서 배를 내려 버렸다.
이후 일절 무선통신을 하지 못한 러시아 발틱함대는, 일본함대에게 집중 포화를 받으면서도 구조요청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신속한 무신통신망을 이용하여 함대를 전쟁터에 효율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에서 발췌)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에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八平郞) 제독의 시)
接敵艦見之警報聯合
(접적함견지경보연합: 적함대를 맞아 연합함대에 알린다)
艦隊欲直出動擊滅之
(함대욕직출동격멸지: 즉시 출동하여 적을 격멸하고자 한다)
本日天氣晴朗波高
(본일천기청랑파고: 오늘 날씨는 맑으나 파도는 높다)
- 平八郞書
이 비석의 정식명칭은 <송진포 일본해 해전 연합함대 근거지 기념비>입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1904년 1월 거제도 송진포를 강제로 빼앗아 해군기지로 만들고 일본의 연합함대를 이곳으로 옮겨와 본부로 삼았습니다. 러일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1931년 이 비석이 송진포의 옛 연합함대 사령부 위치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거제의 유지들이 기금을 많이 협찬 했다고 전해집니다. 해방이 되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어 거제시 장목면 소재 파출소 계단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 거제 경찰서로 옮기던 중 일부 파손되어 현재까지 이곳 시청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글귀는 도고장군이 출진하면서 직접 쓴 시문(詩文)이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주 위대한 해군 전략가이기도 하지만 난중일기(亂中日記)등을 비롯한 많은 글과 시를 남긴 훌륭한 문장가이기도 해서 후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도고장군도 러일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지만 이런 시(詩)를 남긴 것을 보니 그 역시 훌륭한 문필가임이 틀림없다.
(거제시 YMCA에서 참조)
(기념비 밑의 우물 : 기진맥진한 러시아 병사들이 섬으로 올라오자 2명의 농부가 이 샘으로 인도하여 갈증을 해소하고 마을 민가에 병사들을 분산하여 치료하고 보살폈다고 함)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를 뒤로하고 )
가미쓰시마 마치(上對馬町) 도요포대
일본군이 제2차 대전때 만든 당시 세계 최대 포대였으나 실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하며 대마도에는 이런 포가 20문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포대 입구 : 100엔 동전을 넣으면 30분동안 내부의 전등이 자동으로 켜집니다.)
(포대 안내도 : 昭和4년(1929년) 5월에 기공하여 5년후에 완성)
(도요포대 위치도 : 지도를 보니 대한해협과 쓰시마해협의 적함을 공격하기위한것으로 보임.)
(도요포대 위치도 : 포대 위의 산이름이 高麗山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음)
(포대 지하통로)
(포신을 세웠던 자리)
(포대 지하 통로 : 영화에서 봤던 나바론 요새같음)
한국전망대
쓰시마 최북단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로 한국에 훨씬 더 가깝다.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가 보이는 그야말로「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전망대 주변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으며 해안 단구의 높은 지형에 위치해 있어 멀리 작은 무인도들이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바다는 조류가 빠르며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거칠어진다. 전망대 건축물은 한국의 건축양식으로 1997년에 세워진 것이다.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로 서울 파고다 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으며, 전망대로 진입하는 도로 입구에 세워진 문은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의 것을 모델로 하였다. 설계단계에서부터 한국 학자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며 한국산 재료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하였다. 특히 쯔즈자키 해상공원과 사오자키 공원, 그리고 에보시타케 전망대와 더불어 한국 휴대폰이 터지는 장소다.
(한국전망대 입구 : 기와를 비롯한 자재를 한국에서 가져와 공사를 하였음)
(한국전망대 : 1997년에 세웠으며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는 서울 파고다공원위 정자를 모델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