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면] 서지오 오스메냐 [뒷면] 필리핀 의회 의사당 전경
서지오 오스메냐 (SERGIO S. OSMENA, 1878-1961)
서지오 오스메냐는 1878년 9월 9일 세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했던 그는 마누엘 로가르타가 소유한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가장 총명하고 영특한 학생으로 지목받은 서지오 오스메냐는 산카를로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마닐라의 레트란 대학에 입학, 필리핀 공화국 제 2대 대통령이 된 마누엘 퀘죤을 만났으며 미국과 필리핀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오스메냐는 학업을 계속 할 수가 없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고 전쟁이 끝난 후 산토 토마스 대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또다시 마누엘 퀘죤을 만난 오스메냐는 서로의 우정을 키워가기 시작했고 이들 둘은 1903년에 치러진 사법고시에 모두 합격했으며 특히 오스메냐는 차석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1900년 17일, 세부가 여전히 미국의 영향권 내에 있을 때 오스메냐는 미국 당국의 허가를 얻어 스페인어판 신문을 발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필리핀 국민들에게 민족주의를 일깨워 주기 위해 발간되었다. 그러나 신문은 3년밖에 발행할 수 없었다. 에스테파니아 치옹과 결혼한 오스메냐는 얼마되지 않아 부인과 사별하고 1920년 에스페란자 린합이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필리핀 국회가 구성되고 오스메냐는 하원의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통치하에서 운영되던 정부에 처음으로 필리핀인이 등용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깊은 것이었으며 1922년까지 하원의장직을 맡았다. 25세의 나이에 미국의 라이트 총독에 의해 임시 세부 주지사로 임명된 그는 1906년 2월 선거에서 세부 주지사 후보로 출마하여 그의 막강한 라이벌이었던 빈센테 소토와 마가리타 아빌라를 제치고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1906년 3월 6일 세부 주지사로 취임한 그는 국회에 합류하기 위해 주지사직을 사임하고 네쇼날리스타 당에 입당하고 동료의원들에 의해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부터 1922년까지 무려 15년간 하원의장직을 맡았던 그는 1935년 대통령 선거 당시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고 마누엘 퀘죤을 대통령후보로 지지했다.
오스메냐와 퀘죤은 그들의 시대가 도래하자마자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의 진정한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으며 활동적인 퀘죤과 매사에 신중한 오스메냐는 환상의 콤비로 활동했다. 그들은 미국에 머물면서도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했으며 1944년 8월 1일 마누엘 퀘죤이 결핵으로 미국에서 사망하자 부통령이던 오스메냐는 자동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 장군에 의해 레이테가 수복되자 오스메냐를 비롯한 정치가들이 필리핀 본국으로 돌아왔다.
오스메냐의 임기 중 국내에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건물, 도로, 다리등의 복구와 같은 문제 해결에 전념했던 오스메냐는 국민들로부터 구호금을 적절히 분배하여 국민들에게 나누지 않았다는 비난도 받았던 그는 뒤이은 대선에 출마할 의사가 없었으나 주변의 강요에 의해 출마했지만 숙적인 마누엘 로하스에게 패하게 된다. 선거에서 패한 후 휴식을 취하고자 고향인 세부로 향했으며 1961년 10월 19일 노환으로 숨졌다.
[출처 : www.koreapost.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