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베드로 San Pietro 사도 "사탄아 물러가라." < 마태복음 16장(2020.10.18.일)> 2020. 10. 18일- 마태복음 16장(현대어성경) 16: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러 와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塵勞泂脫 事非常 (진로형탈 사비상) 생사 해탈 하는 것이 보통일 아니니 황벽(黃蘗)선사의 게송(偈頌)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나를 생각할 때 나의 죽음과 앞으로 나의 갈길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의 문제, 권력에 탄압받고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닌가? 그리하여 의병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고, 국민주권과 국민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잃거나 함께 싸우는 것 역시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사람에게 어려움이 없으면 인간의 존귀함을 드러낼 수 없다. 어려움이 있어 어려움을 알고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제 자리에 이른다. 니이체는 평안하게 사는 것은 점점 느릿느릿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위험하게 사는 것, 고난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끝내 바른 자리에 서는 것 그 것이야 말로 가슴 따뜻한 사람의 길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장부생세(丈夫生世) 용즉효사(用則效死)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쓰이게 되면 죽기로 일 할 것이요. 불용즉경(不用則耕) 어야족의(於野足矣) 쓰이지 못하면 들판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취미권귀(取美權貴) 오심치지(吾甚恥之) 권세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훔치는 것은 제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물이 차오르듯 고난이 자꾸 밀려오는 것이 습감이다. 분명 위와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과 각오도 볼 수 있지만 누구나 생의 한가운데서모든 꽃이 저마다의 모습과 색깔, 향기를 지니듯, 우리 역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 성격이나 외모, 병약한 체질, 불편한 관계, 갖가지 고통, 좌절과 실패 불우하고 절망적인 환경, 뗄 수 없는 관계가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수 있다.
나 자신 밖에 어느 누구도 져 줄 수 없는 '자기 십자가' 다. 피할수록 한량없이 커지는 고통이요 두려움이다. 십자가다.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기 초월이 시작되고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마침내 십자가에서 부활로 비로소 십자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이 습감習坎이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며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존엄이 들어나고 하나님의 영광, 상덕행 常德行이 되는 길이다. 16:15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예수님이 금용주의자 세례요한,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바알과 이세벨에 대적한 엘리야, 유다의 멸망기 여호아김 여호아킨 시드기야 왕 당시 유대왕조의 멸망과 파괴와 함께한 피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아 예수님을 등치시킨 다른 제자와 달리 베드로사도의 신앙고백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예수님마저 크게 긍정한 베드로 사도의 이 답변은 인간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베드로의 삶을 탈바꿈하게 된다. 세상에 수많은 신이 있으나 그리스도와 예수님, 또 "살아계신"이라는 신명은 한글날 한글의 위엄을 드높이고 예수님의 존엄을 높여준다. 16:21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극찬에 이어 23절에는 베드로를 가르켜 "사탄아 물러가라." 고 호통을 친다. 어쩌면 예수님에게 베드로와 같이 경박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제자 한 사람이라도 있어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았을까? 내심 예수님은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도 지근에서 당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한 사람 베드로가 있어 위로를 받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 사탄아 물러가라!" 는 말이 진정 베들로에게 하신 말일까?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신을 향한 외침인지도 모른다. 할 수 만 있으면 이 잔을 물리치게 해달라는 기도처럼 인간의 한 마음은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리스도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말은 달지만 그 길을 가시는 것은 험하다. 고통스럽다. 이 잔을 피하고 싶다. 베드로에게 하신 "사탄아 물러가라!" 는 이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인류에게 하신 말씀인지 모른다. 흔들릴 때, 상처받을 때, 위태로울 때, 고통스러울 때 사탄은 넌즈시 다가와 속삭인다. 그만 두라고, 편한 길 가라고, 쉬어 가라고, 그 때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서 속삭이는 자가 사탄임을 알아야 한다. 한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 이라 부르신 것처럼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나, 어머니는 요안나다.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고래 배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깃배를 젖다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배를 저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활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장엄하게 그분을 따르게 된다. 축일 6월29일. because he claimed he was not worthy to die in the same manner as Christ
(feast of the Chair of Peter, emblematic of the world unity of the Church)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울로 대성당 축성 봉헌 축일:11월18일.게시판1476번. (feast of the dedication of the Basilicas of Peter and Paul)
마태16,12-15ㄱ
첫번째 교황이며 십이 사도들의 지도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게파(Cepha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대신하여 답변하곤 하였다. (마르 14:33). (마르 l6:7)고 말하였다.
(사도 1:15-26)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사도 15:6-12).
해주고 있으며 그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신(요한 21:16-17)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하였다. 인간적인 결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말코스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린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요한 18:10).
느끼기도 하였다(루가 22:54-62).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베드로는 '돌, 반석'이란 뜻이다. 신약 성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선택되어 사도들의 지도자가 된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요한과 그를 파견하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6,17-19) 그런데 복음은 베드로에 관하여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닌 내용도 상세하게 덧붙임으로써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평범하게 죽어야 할 인간들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 애쓰고 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지만 일곱 번이란 제한을 내세웠다.
다음에는 온몸을 깨끗이 씻어 달라고 했다.
The Repentant Peter-GRECO, El 더 쉽게 고해 성사를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베드로는 일생을 가난하게 상고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그의 이름은 처음 시몬이라고 불렀다. 주님의 명명(命名)에 의한 것이었다. 베사이다에서 태어나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건전히 자랐고, 신앙이 깊은 일반 유다인처럼 그곳의 회당에서 성서를 배웠다. 나이가 들자 아내를 맞이해 가난한 중에서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강 근처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어업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와 후에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된 요한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주님의 뒤를 따랐다.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잠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예수와 같이 가나도 갔고, 예루살렘에도 올라갔다.
예수께서 오셨다.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다.
The Calling of St. Peter-Domenico Ghirlandaio.
그 뒤 예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시도하신 후 날이 밝자 많은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며 그 중 베드로를 으뜸 사도로 선택하셨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실 때도, 게세마니 동산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도 베드로만은 동행의 영광을 차지했다.
스승을 생각하는 열정에서 상대에게 달려든 자는 누구였던가?
그의 예수께 대한 사랑은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도 통탄할 실수는 있었다. 그것은 최후 만찬 석상에서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했으나 재찬소 마당에서 “당신은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 아닙니까?” 하는 질문에 세 번 모두 겁을 집어먹고 “나는 그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맹세까지 하며 배반한 사실이다.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슬피 울었다.
주님께서도 그의 진실한 통회를 보시고 그의 약함을 용서해 주셨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희소식이 들리자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을 향해 갔다.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세 번째로 사도들에게 발현하셨을 때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씩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마음이 슬퍼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모든 교회를 다스릴 대권을 그에게 위탁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 오순절이 되어 베드로는 성모 마리아와 다른 사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렸다. 그때까지 백성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용기를 얻었고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 서서, 일장의 설교를 해 한 번에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베드로는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해 주고, 그로 인해 법정에 끌려가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지만 베드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단호한 태도를 표시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는 성령의 힘으로 용감히 교회의 지도자로, 예수의 대리자로 최선을 다했다. 신앙을 위해 투옥 당한 일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천사의 특별한 힘으로 구출된 사실도 있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사마리아에 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다음 안티오키아를 방문하고 거기에 교회를 창설했으며 요빠에서 기적을 행하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회의를 사회(司會)해 중대한 결의를 선언했다. Martyrdom of St Peter (detail)-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그리고 나서 그는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겼는데 애석하게도 자세한 내막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당시 아시아의 두세 교회들에 보낸 서간이 성서 속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67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스승과 같이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스승과 같은 형태로 순교할 자격이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용감한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그 유해는 신자들이 정성되이 안장해 지금도 세계 최대의 베드로 대성전 안에 안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공경은 사방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결국 후회하게 될 말을 한 적은 없는가? 충동적이고 좌충우돌하기도 하지만 삶의 기쁨이 넘치는가? 성 베드로는 중도에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배에서 뛰어 내려서 물 위를 걸으려 했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끝없는 사랑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믿음을 잃고 낙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온 마음과 열정을 다 쏟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수없이 넘어졌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섰고 앞을 향해 전진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열정과 복음을 향한 열정, 그리고 생명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미지근한 홍차를 조금씩 홀짝거리는 데 비유한다면,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베드로의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 같은 문구가 있다. "인생은 연습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무대 위에 올라갈지 말지를 결정하도록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가 미적거린다면 쇼는 벌써 끝나고 막은 냈다는 것만을 알게 될 것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사도'의 어원은 '파견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apostell 이며 세상에 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면 '사도'라는 칭호는 예수가 그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선택한 열두 명의 제자들과 (마태 10:2, 사도 21:4) 이방인들의 탁월한 사도였던 바울로에 국한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12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던 시기에는 '제자'들로 불려졌으나 예수가 승천한 이후부터는 '사도'들로 기록되고 있다.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베푸는 자리에서 예수는 이들을 사제로 임명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은 성령강림절 이후에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바를 사람들에게 전했으며, 초대교회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사도’는 사도직을 계승한 주교 등 성직자뿐만 아니라 사도적 활동을 하는 평신도들에게도해당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는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의무는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이라는 것과 교회 건설에 평신도들도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교령 25)을 성직자들이 명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2020.10.18(일) 씨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