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 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내걸었던 보호무역 공약이 현실화하면서 세계 무역질서가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TPP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호주·페루 등 TPP 회원국들이 RCEP 합류를 타진하고 나서면서 미국이 주도해왔던 세계 무역질서가 트럼프 정권이 시작하기도 전에 중국 쪽으로 기우는 모습도 연출되고 있다.
RCEP는 중국이 미국 중심의 TPP에 맞서 추진한 자유무역협정으로 현재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등 16개국이 협상에 참여하고 있다. RCEP 회원국의 인구는 35억명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며, 역내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2조4000억달러로 TPP가 폐기될 경우 세계 최대 경제블록으로 부상하게 된다. TPP와는 달리 시장 개방 수준과 범위에 대한 이견으로 그동안 협상이 지지부진했었다. 이 때문에 호주 등 RCEP와 TPP에 중복 참여한 7개국은 이미 타결된 TPP에 더 집중했으나, 최근 이 같은 흐름이 바뀌고 있다.
17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TPP 회원국인 페루가 RCEP 가입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의장국이자 TPP 회원국인 페루는 RCEP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과 협의를 시작했고, 에두아르도 페레이로스 페루 무역장관도 최근 언론에 "페루가 TPP와 RCEP의 동시 회원국이 되길 희망한다"고 언급했다.
페루가 RCEP에 합류하게 되면 미주 지역의 유일한 RCEP 회원국이 된다. 올해 초 다른 11개국과 함께 TPP를 비준했던 페루는 지난 9월부터 중국에 RCEP 가입 뜻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TPP는 미국의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는 물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역시 폐기를 공약했던 터라 페루의 이 같은 움직임은 TPP 무산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호주도 RCEP에 적극 참여한다는 방침이다. 스티븐 치오보 호주 무역장관은 16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하면서 "무역장벽을 낮추고 경제성장·고용을 촉진할 수 있는 조치라면 어떤 것이든 좋다"며 "호주는 RCEP 타결을 위한 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폐기 수순을 밟고 있는 TPP 대신 RCEP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동남아 최대 경제대국 인도네시아는 TPP 후발 가입 여부를 저울질해왔으나 최근 TPP를 포기하고 RCEP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엥가르티아스토 루키타 인도네시아 통상부 장관은 지난 11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 이후 TPP 참여 여부를 재검토하고 있다"며 "현재 TPP가 처한 상황을 볼 때 RCEP가 장기적으로 더 유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스타파 모하멧 말레이시아 국제외교통상부 장관도 "현재 우리의 초점은 RCEP 협상에 맞춰져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가 17일 트럼프 당선자와의 회담을 통해 미국의 TPP 잔류를 최선을 다해 설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러모로 일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무역협정이기 때문이다. TPP는 미국이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으로, 실질적인 목표는 중국 견제였다.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중국 의존도를 줄여 미국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복안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 개별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을 꾸준히 체결해온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TPP 같은 거대 경제권 협정으로 단번에 그 효과를 누리겠다는 정책을 펼쳐왔기 때문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외신들은 이 같은 일본조차도 미국 설득에 실패할 경우 부득이하게 RCEP에 눈을 돌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TPP가 난관에 부딪히자 중국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미국 차기 정부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RCEP가 미국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훨씬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며 미국에 RCEP 가입을 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