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조각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1510년작 프레스코 〈뱀에게 유혹당하여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하와)〉이다.
미국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 1896~1940)의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제이 개츠비(Jay Gatsby)가, 잉글랜드 소설가·시인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ë, 1818~1848)의 장편소설 《폭풍언덕(Wuthering Heights)》(1847)에서 히스클리프(Heathcliff)가, 독일 정치인·작가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소설 《젊은 베르터(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87)에서 베르터가 비장하게 감행한 이른바 ‘느와르(누아르) 사랑(흑색사랑)’ 아니면 ‘질풍노도하는 사랑’ 아니면 ‘편집증형 사랑(죽음행 사랑)’이 문학작품들에서나 예술작품들에서 연출되거나 발발하지 않고 현실에서 발발한다면, 그런 사랑들은 일간지 사회면의 기삿감으로서 주목받든지 통속잡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리라.
그런 한편으로 현실의 ‘단란한’ 사랑(생활행 사랑)은 알콩달콩하거나 지루한 일상을 못견뎌 저 예술적이고 일회적인 ‘죽음행 사랑’을 꿈꾸거나 환상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죡변이 귀동냥눈동냥하기로) 작금 각종 TV연속극·방송극·드라마에서 창궐한다는, 이른바 “막장” 사랑타령들은 저 죽음행 사랑의 예술성마저 제거해서라도 흥행을 갈망하는 상업행 방송 드라마 작가들의 주사(酒邪)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여태껏 언제나 단란한 사랑을 추구한 현생인류의 영원한 예술적 소재로 애용된 죽음행 사랑도 어느덧 끝물로 치달아 갈수록 참담해지는 현실의 망로에 일조하는 듯이 보인다.
예술이 감당했던 사랑의 편집증, 병증, 어둠, 고통, 막장이 현실로 방면될 때...
현실에서는 사랑의 질투, 증오, 경쟁, 전쟁, 허무가 방창하려니...
흐흣, 야누스(Janus). 그러니까 에로스(Eros)도 타나토스(Thanatos)도 아닌, 에로타나토스(Erothanatos), 타나토에로스(Thanatoeros), 수나즈(Sunaj). 그것이 사랑의 진상이리라.
삶죽음, 죽삶, 음양.
그래서 죡변이 무성체-무성번식체 → 단성체-유성번식체(현생인류) ⇒ 양성체(자웅동체)-자가번식체로 변이하는 인간진화론마저 가설해보고플 때도 있다.
(2009.04.11.)
아랫그림은 이탈리아 화가·건축가 라파엘로(Raffaello; 라파엘Raphael, 1483~1520)의 1517년작 벽화 〈아모레(쿠피도Cupido; 큐피드Cupid; 에로스)와 프쉬케(프시케)의 결혼피로연(Banchetto nuziale di Amore e Psiche; Wedding Banquet of Cupid and Psych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