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서 우리의 계획은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시내를 관광하고 부수적으로 쇼핑을 하는 정도였다. 오전에 돌아보았던 벨베데레 궁전(미술관이 있는 곳)과 나슈 마르크트 (거리 시장)는 비교적 만족스러웠기에 오후 또한 기대가 되었고, 계속해서 우리는 비엔나의 명동거리 격인 '케른트너 거리'로 향했다. 비엔나는 크기가 별로 크지 않은지 지도를 보면서 몇 걸음 걷다보면 한 블럭, 한 블럭이 수월하게 넘어가서 마치 우리가 지도 속에서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침내 케른트너 거리에 도착했는데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임에 틀림없었다. 잠시 거리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참아 왔던 고통으로 인해 더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여행 오면서 새로 샀던 운동화가 화근이었다. P사에서 만든 흰색의 날렵한 이 신은 사고서 조금 신을 때까지는 몰랐는데 반나절 정도를 걷자 본색을 드러내고는 내 발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는데 그 고통이 점점 더해왔다. 역시 서양인들 발의 볼이 좁은 것일까? 그리고는 여행 전 인터넷에서 읽었던 '여행 격언'의 한 줄이 번뜩 떠올랐다.
'헌 신발을 신어라.'
읽으면서 '도대체 새 신발을 신고가서 발 아프다고 괴로워하는 미련한 인간들은 누구야?'하며 코웃음을 치던 나였는데 내가 그 꼴이 되고 보니 발이 아프면서도 히죽 웃음이 나왔다. 아, 그들이 미련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겠구나.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여행은 늘 타인을 이해하게 하고 좀 더 관대하게 만든다.
마린에게 발의 통증을 호소하자 그녀는 고맙게도 어서 신발을 사러 가자고 나선다. 지도를 제대로 읽지 못해 우왕좌왕 하다가 찾아들어간 백화점을 샅샅이 뒤졌건만 신발 코너는 보이지 않았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신발 코너는 들어와 있지 않고 바깥의 'Foot Locker'를 이용하란다. 점점 통증은 심해오는데 신발 사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그 사이에도 마린은 여성 코너의 옷이 예쁘다며 막간의 아이 쇼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린을 데리고 다시 백화점을 나서서 풋 라커로 향했다.
...
수많은 신발들 가운데 세일 품목이면서 동시에 내 마음에 들기까지 하는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르고 고른 끝에 마침내 나는 69유로 짜리 검정 아디다스 운동화로 바꿔 신을 수 있었다. 나는 신발을 사준 마린에게 신발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공중으로 펄쩍 뛰어주었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지나는 행인들이 신경쓰였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촬영하려는 마린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나질 않아 수 차례 더 뛰어야 했고, 발에는 다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우리는 일단 H&M과 Zara 등의 옷가게에 들어가서 이번 겨울을 날 옷을 보기로 했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각자 쇼핑을 한 뒤에 밖에 나와서 만나기로 했다. 위에 말한 브랜드들은 나와 마린이 무척 좋아하는 브랜드들로 품질대비하여 무척 저렴한 가격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100수 면티가 대략 4만원 정도이고, 멋진 블루블랙 셔츠가 8~9만원 정도. 귀엽게 후드티를 받쳐 입을 수 있는 부드러운 베이지색 골덴 마이가 12만원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한 번 둘러보는 거지 하고 들어갔는데 고르다보니 완전 이번 겨울을 날 아이템을 몽땅 다 골라 들고 있었다, 발가락의 고통은 싹 잊은 채로. 그리고 내가 마린을 다시 만난 것은 그녀가 그녀의 쇼핑을 모두 끝낸 후 남성 Zara 매장으로 왔을 때였다(여자인 마린보다도 쇼핑을 오래 했다는 뜻). 나는 계산대 앞에 서 있었고 옷을 한아름 안고 있는 상태였다.
정신없었던 옷 쇼핑을 마치고 형식적으로 성당 구경을 하고 나니 다섯시 반, 커다란 쇼핑백들과 아까 산 신발 가방, 그리고 벨베데레 궁에서 산 클림트 사진첩을 바리바리 싸 든 채였다. 마린은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다며 나를 끌고 갔는데 바로 주방기구 WMF였다. 거기서 그녀는 백화점에서 백만원 정도하는 냄비 5종 세트가 99유로라며 거품을 물었다. 거기에 지인의 결혼 선물을 위한 나이프와 포크 세트도 구입했다. 결국 그들은 깨졌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짐을 든 채로 걷기 시작했다.
너무나 거대해서 계속해서 물러나야만 했던 성 슈테판 성당. 그래도 성당을 다 담기에는 화각이 부족해 보인다.
걷기 시작한 지 대략 20분 정도가 지났는데 우리의 힐튼 호텔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길가던 아주머니를 붙들고 방향을 물었는데 이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리가 없는데, 틀림없이 지도상으로 확인하고 왔는데. 하긴 아까 지나쳐온 저 건물들과 간판들은 벨베데레 궁을 보고 나올 때 봤던 것들인데, 벨베데레 궁은 힐튼과는 반대 방향에 있는 건물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여 다시 한번 경찰에게 사실을 전해듣고서야 우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엄청나게 걸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는 관광용 비엔나 지도의 바깥쪽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어렵게 택시를 잡아 타고서야 안도의 한 숨을 쉴 수 있었다.
정말 드러누워 한 숨 자고 싶었던 숙소의 침대.
치열한 쇼핑의 흔적을 보여주는 수많은 쇼핑백들. 맨 우측이 문제의 냄비 세트. 티비 시계가 19시 03분을 가리키는데 해는 아직 지려면 먼 느낌.
호텔 방에서 커피 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과 햇반으로 저녁을 해결한 뒤, 우리는 다시 음악회를 들으러 나서야 했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빈에서의 하룻밤을 그냥 잠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서 골라 예약까지 한 터라 계획을 수정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낮에 보았던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답게 수많은 연주회들이 식당, 교회, 음악당 등에서 열린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특히 머리에 모짜르트 시대의 구루퍼 가발을 쓰고 연주회를 홍보하는 삐끼는 50유로 짜리의 공연이라며 우리에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제발 학생이라고 말해달라며 학생이면 40유로에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차피 그들의 프로그램도 별로 맘에 안들고 해서 슈테판 성당에서 하는 연주회를 1인당 50유로 주고 예매했다.
성당 앞의 광장의 야경.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낮에 헤메었던 경험을 살려서 길을 가로질러 갔더니 아까 보았던 슈테판 성당이 10분만에 떡하고 나타났다. 한번 더 씁쓸해하면서 성당에 들어갔다. 4인조 쿼텟은 모짜르트라며 연주를 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재기발랄한 모짜르트가 아니었다. 생전 처음듣는 재미없는 곡만 골라서 하는 듯 했다. 나는 음악도 별로고 시차로 인한 급피로가 몰려와 더이상 눈꺼풀을 지탱하고 있을 수 없어서 그냥 앞 의자에 기대서 노골적으로 졸았다. 사람들은 음악이 좋았는지 어땠는지 한 시간의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를 보냈는데 무대 뒤로 퇴장했던 쿼텟이 다시 등장하여 다시 한번 경의를 표했다. 나는 속으로 저 재미없는 곡을 한 곡 더 듣겠군, 하고 있었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를 하던 그들은 뒤도 안돌아 보고 그대로 퇴장을 해버린다. 성당 문 닫는 시간은 철저히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사람들은 박수만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힘든 연주회 감상을 마치고 힘겹게 숙소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꼭 식사를 하고 싶었던 어느 레스토랑. 다른 식당은 썰렁해도 이곳은 손님이 제법 있었는데..
* 이번 여행기는 뚜렷한 에피소드가 없어서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심에 고심끝에 올려요. 그래도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일생에 단 한번 뿐인 비엔나 방문기일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
다음에는 아름다운 두브로브닉으로 가는 이야기, '공항 쌩쑈' 편을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ㅋㅋ부부가 서로 올리는것이오???이거 잼나는데??
그걸 노린거요...
에피소드 없어도 쇼핑 이야기로 즐거웠어요.. 쇼핑 품목을 쫙 펼쳐서 다 구경하고 싶어요 ^^ 그 치열한 쇼핑에 동참하고 싶은 맘이 가득 ~
역시 우리 세대는 쇼핑이오.. 기존 세대와 차별화되는 점이. zara를 쓸고 다니던 때가 그립소..
마린언니의 여행기를 이미 싸이에서 봐서 더 잼나네요... 여자 말하길 :... 남자 말하길:^&%^*&^$%^ 글구 zara 정말 좋아하는데 곧 한국에서두 런칭한다는데 비싸질듯해요.. zara 특히 신발 살게 많은데.. 잘못하면 발이 무지 아프다는
ㅋ, 다 읽으셨구나~ zara 신발 이뿌더군요. 눈여겨 보긴 했지만 신발 메이커 아니라서 패스했는디.. 담에는 신도 신어봐야겠군여.
마린이의 포토타임을 위해 뛰신 소년님의 표정이 넘 잼나네여... 유럽여행할땐 쇼핑 별루 안했었는데 이글을 읽고 지금 생각해보니 아쉬워지네여~~~
하지만, 실제로는 많이 고통스러웠다는거~
친숙한 내용들..ㅋㅋ..WMF..우리도 들렀다죠...fissler냄비를 사고는 얼마나 좋아했던지..소년님처럼 저도 신발땜에 무지 고생했어요..저작년에 다닐때는 너무 편하게 신고 다닌 샌들이었는데 이번엔 어찌나 불편하던지.. 샌들에게 배신당했잖아요..ㅜㅜ..
그러게, 우리는 wmf 동창이네여. ㅋ
소년님과 마린님.두분 다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보기 좋아요.쇼핑한 것만 봐두 제가 행복한데 저걸 어떻게 다 들고다니셨는지.....uguf처럼 두분도 색다른 이니셜이나 팀 이름하나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구요...하여간 두분의 글.재미나고 행복해지네요.
저희도 팀이름 만들었답니다. 마린 보이라고.. ㅋ
나두 빨리 2탄을 올려서 진상을 낱낱이 고해얄텐데... 난 우리의 심리묘사에 치중하여 자세히 쓸테야 ㅎㅎㅎ
말로만 하지 말고 어여 써주세요. 님아~~~~
쇼핑한것도 여행의 즐거운 추억이죠 ^^ 여행하다 발아픔 최고의 아픔입니다...ㅋ
흠..슈테판성당이 무슨 보수공사중인가 보네요...
신발 신고 펄쩍 뛰는 모습 너무 재밌어요! ^ㅡ^ 냄비세트 ㅋㅋ 쇼핑 넘넘 잼었겠어요!
ㅋ 마린 언니 싸이와 소년님 여행기를 번갈아 읽는 즐거움이란_ ㅋㅋ 저도 취미나 관심사가 같은 사람을 만나얄텐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