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원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복음을 묵상하면서 한 부분만 집중해서 묵상해 그게 전체적으로 묵상이 될 수 있는 포인트를 찾겠다는 방식으로 묵상하는 방법을 변경했습니다. 이런 관점을 이해하시면 좀 더 이해가 잘 되실 것 같습니다. 오늘 주일복음 서두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과 의복의 모습에 변화가 있다고 루카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기도하셨기 때문에 변화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제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보여주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하시는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모습은 기도 이전과 이후로 서로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느님의 속성 자체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변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변화가 없겠지만 하느님의 신적인 권능으로 일시적이나마 잠시 변화가 있도록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불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고승 이것도 기도쪽으로 고승을 말합니다. 이런 고승은 그 제자들이 기도 수행 정진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 뭘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선방에 틀어박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시간에 비례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승려인지 알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걸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고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승이라는 말은 없지만 언어유희를 하자면 하승입니다. 모름지기 고승이라면 그 행자나 수행자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고도 얼마나 기도 수행을 정진했는가 하는 걸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이면 고승이라고 말해도 가히 지나친 판단은 아닐 것입니다. 궁금하시죠? 이건 말로 참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긴 합니다.
단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처럼 내공이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게 나옵니다. 이걸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원리는 마치 유유상종과 같은 것입니다. 공학적인 설명으로는 주파수 이론과 같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을 예를 들어 쉽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수행자의 주파수가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주파수입니다. 고승은 그 주파수가 어디인지 라디오로 튜닝(주파수를 맞추는 것)을 합니다. 딱 맞아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게 돼 있습니다. 그 지점이 바로 수행자의 주파수입니다. 공학적인 설명으로는 이곳에서 공명이 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장 선명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파수라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에너지와 같은 것입니다. 원래 전자렌지를 발명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수강하는 전자기학이라든지 아니면 마이크로파 공학 수업을 듣게 되면 듣는 소리입니다. 저는 우연히 안테나 관련 자료를 언젠가 번역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위성 안테나를 파라볼라 안테나라고 합니다. 이 안테나는 마이크로파 주파수 영역의 주파수 대역을 사용합니다. 그 안테나 근처를 지나가다가 마치 인간구이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연히 전자렌지를 발명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나친 이야기이지만 내용은 사실입니다. 저는 주파수라는 게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걸 이해시켜드리는 의미에서 이 예를 든 것입니다. 이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겠습니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처럼 그럼 어떻게 해서 기도를 하면 그런 에너지 같은 게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우리와는 교리상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해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공통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깊은 지식이 없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만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스님들이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 그 기도는 다양한 것이지만 그래도 핵심은 부처를 보며 내 안에 다른 부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부처는 실제 우리가 절에 가면 있는 불상 그 부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라는 어떤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부처 속에 있는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 불성을 보며 그 불성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이 하나의 수행인 것입니다. 그게 다 담겨졌을 때 오로지 자신이 작은 또 하나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말씀처럼 그와 같은 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성이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같은 속성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게 이해가 된 상태에서 오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런 원리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정말 다양한 내용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기도하면 얼굴에 변화가 옵니다. 미추의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기도손을 하고 촛불을 켜고 한다든지 아니면 성당에서 한다든지 하는 그런 장소도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성당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있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 같은지 궁금하시죠. 우리가 생각하긴 하느님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의식적으로 생각을 해야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떠올리지 않아도 하느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단 그런 사람은 자세히 보면 얼굴에 악한 기운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설령 악한 기운이 흘렀던 얼굴이라고 해도 그렇게 살면 얼굴이 변화가 됩니다. 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걸 실제 눈으로 많이 확인을 했습니다. 종교를 불문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일단 눈이 다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긴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눈은 절대 못 속입니다.
설령 성형수술로 눈매를 수정한다고 해도 눈에서 나오는 영혼의 기는 절대 못 속입니다. 대표적인 게 눈이지만 눈뿐만 아니라 얼굴은 정말 관상이라고 해도 절대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상은 미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표현해서 생긴 것은 못생겼는데 부티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은 미인 미남 같은데 표독한 얼굴이 있습니다. 이건 자기의 삶이 얼굴에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환원하겠습니다. 성당에만 간다고 신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처음부터는 안 되겠지만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시나브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으면 어떻게 신앙인의 모습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표독한 얼굴로 변화가 된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당에는 아기처럼 얼굴이 순수하게 변화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변한 얼굴이 있습니다. 문제는 딱 하나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과 그냥 지멋대로 산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마지막에 하느님을 만났을 때 이런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도 쳐다보고 싶지 않은 흉물 같은 모습의 얼굴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 흉물은 달리 흉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대로만 산 사람에게만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서라도 항상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말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나중에 저희 영혼의 얼굴을 보게 되면 단번에 한눈에 파악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말입니다.
첫댓글 참고로 전자렌지의 원리는 고주파를 이용해 물체 속에 있는 물분자를 진동해 그때 진동으로 생긴 열이 음식물을 데우는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