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제 받은 병역을 내 마을 개발 위해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새마을지도자반 제44기 백 태 현
제가 태어난 곳은 전주에서 북쪽으로 8km 지점인 모란꽃 같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모란동이라 불리는 부락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밤낮없이 일하는 부모님의 덕택으로 우리 주변에서는 비교적 농사를 많이 경작하는 외아들로 태어나서 살다가 6.25 사변의 붉은 마수가 제 나이 7살 때에 우리 어머니를 29세의 젊은 미망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어머님은 실망과 허탈감을 무릅쓰고 오직 사랑만으로 저를 대학까지 졸업을 시켜주셨습니다.
저는 나이 어릴 때부터 농촌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덴마크의 농촌과 이스라엘의 농촌을 책에서 읽고 배웠습니다. 외국의 현대화 된 농촌과 내가 몸을 담은 농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나는 농촌의 아름다운 이상을 내 고장에 꼭 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농과대학을 지망했지요. 나는 집에서 실습도 해보고 방학 때 전국 유명한 농장에 나가 견학 실습을 하면서 열심히 나의 파란 설계를 그려 봤습니다. 우리 농촌의 전형적인 초가지붕과 토담의 구조에서 벗어나 정원수가 우거진 농장에 빨간 지붕을 가진 양옥을 짓고 얼룩진 송아지가 한가히 꼬리를 흔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젊음과 정렬로 열심히 일해서 저축하여 내 마누라 판타롱, 맘보바지 입혀 포도송이 입에 물고 오토바이 몰며 주말을 즐길 수 있는 농민이 되리라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착수한 사업이 원예였습니다.
논 벼 수확 후 보리갈이 대신 원예를 했지요.
약 5,000평 규모의 원예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봄 채소 종자는 일본에서 구입해다 쓰는 형편이었습니다. 제 논은 시내버스 1 구간 정도의 긴 논인데 끝이 안보일정도의 비닐 하우스는 주위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저의 밤낮 없는 정성의 결과인지 그 해 수확으로 저는 소망의 빨간 지붕을 가진 양옥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 후 계속 된 원예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비 바람에 비닐이 찢기고 폭우가 쏟아져 침수 되고 가격이 하락하여 생산비를 겨우 건지는 등- - -
그러나 나는 땅과 열심히 싸웠습니다.
마을 주민들도 제 뒤를 따라 원예를 시작해서 생활이 많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주변 마을은 새마을 사업의 횃불을 잡고 열심히 가꾸고 부락민이 협동하여 5천 년의 긴 침묵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단 몇 개월 동안 진정 새마을을 만드는 집념과 실천을 보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도시 근교 부락의 주민을 단합하여 새마을 사업을 한다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 우리 마을은 침체되어 있느냐?
생각할 때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큰 원인인 것 같았습니다. 나는 외아들이라는 명목으로 병역면제를 받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젊음을 바치고 있는데 ‘나도 무엇인가 국가에 보답해야겠다’하는 생각으로 내 부락을 위하여 몸을 바치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일을 하자 결심을 했지요.
저는 부락총회에서 제 의사를 말씀 드렸더니 주민 만장일치로 목효마을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해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착수한 사업이 74년 봄 하곡 수매였습니다. 보래 수매를 할 때 공동으로 해보자 하여 우리 부락민이 총동원 되어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부치고 작석하여 단 하루에 목표량 800가마니를 끝마쳤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군수님이 표창장과 시상금을 주시면서 우리 마을의 가꾸기 사업 추진계획을 보고 받고 시멘트 600포대와 철근 1톤을 지원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여기에 힘입어 농로 5km, 마을안길 2,800m, 하수구 설치 800m, 소교량 3개소, 회관 1동, 담장개량 2,200m, 지붕개량 65동 등 주민 남녀 노소 총동원으로 환경개선 사업을 완료했습니다.
그 동안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벌금을 받든가 규탄하는 일은 삼갔습니다. 다만 설득을 했지요.
우리는 새마을 사업을 하는데 추진위원이 주축이 되어 저녁은 꼭 위원들 집에서 돌아가면서 식사를 하며 내일 할 일을 상의하고 책임을 분담 실천하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도 모두가 해결 되었습니다. 저는 되도록 내 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주민들의 총의에 따라가는 형식으로 했습니다.
우리 마을은 골짝이 많아 비비정골, 느랏골, 봉서골 등 골짝 십여 곳에 경지면적 45.7ha가 있는데 수리안전 답이 겨우 20ha요 나머지는 천수답이었습니다. 그 동안 농사는 하늘과 땅만 쳐다보며 농사는 하늘이 지어 주느니 하고 체념하는 상태였습니다.
우리 마을의 소망은 천수답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매립 되어 있는 소류지를 보수하기로 결정하고 약 40년 동안 모래와 흙으로 매몰 되어 있는 약 2,000평을 마을 인력을 총동원하여 한 달간 준설 작업을 했습니다.
겨울 날씨에 진흙에 빠져 동상에 걸리는 등 주민들이 크나큰 고생을 했으나 그 흙으로 객토를 하여 저습답을 개량하는 효과를 봤습니다. 이 상황을 면장님과 군수님이 돌아 보시고 이 마을은 진정으로 새마을정신으로 뭉쳐있다 이 마을을 도와 주어야겠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면장님, 군수님에게 매달려 호소한 결과 취로사업 5백만 원, 자체자금 3백만 원으로 3,000평 규모의 신규 소류지를 하나 더 만들어 경지면적 10ha를 완전 수리답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순탄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 당시 부지가 천수답이니 200평당 백미12가마니 정도이면 살 수가 있었는데 소류지를 막는다니 당장 논 값이 올라 200평당 18가마니 내지 20가마니 정도를 요구했고 또한 그것도 땅 주인은 절대로 팔 수 없다고 논에서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락민과 거의 한 달 동안을 매일 밤 회의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래도 해결은 되지 않고 부락의 숙원사업인데 포기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논과 바꾸어 주기로 하고 공사를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인 소류지는 완성이 되었지만 그러나 공사비는 백미로 120가마 정도가 모자랐습니다. 가을이 되자 채권자들은 몰려와 졸라 대지요 공교롭게도 여동생의 결혼 날자는 닥쳐오지요 막막한 심정을 밤하늘에 하소연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부채는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지도자다. 새마을지도자다. 내일 더 잘 살기 위하여 전진하자.”부채는 내가 짊어져야 한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친구들은 월남에 파병 되어 민주우방을 돕고 국위선양을 위하여 생명을 잃거나 불구자가 된 친구들도 많은데 우리 부락을 위하여 내 재산이 약간 없어진들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또 새마을 지도자가 부락에 부채를 남겨두면 다음 새마을지도자의 의욕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저는 부락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부락민들은 너무 걱정 말아 주십시오. 내가 전부 해결을 하겠습니다.”하고 그 해 농사지은 벼를 전부 매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집애 동생도 사돈댁과 상의하여 간단히 혼례를 치렀습니다. 여기에 부락민도 호응하여 나머지 부채를 전부 해결했습니다.
가을에는 주민들이 지도자를 도와주자 하고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농사를 무상으로 지어주었습니다. 75년도에는 우리 마을이 통일벼계통 집단재배상을 탔습니다. 다수확 농가도 7농가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소류지를 만들어 천수답을 수리안전 답으로 만들고 객토와 퇴비를 많이 한 결과입니다.
저는 벼농사에 2년째 다수확 시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부락민에게 벼농사에 대한 영농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76년도 농수산부에서 통일벼 확대 재배 차 나온 직원이 이런 골짜기에 유신벼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논 한 마지기에 겨우 벼 4가마니 정도가 고작인 것이 금년 평균 7.5가마니 정도를 수확했지요. 또한 76년에는 잘 사는 새마을로 선정이 되어 농특자금 5백 만원을 지원 받아서 한우 75두, 돼지 200두를 입식 시켰습니다. 우리 마을은 지금 봄에는 촉성재배 원예를 거의 다합니다. 누에도 거의 호당 2~10장까지 합니다. 과수원도 거의가 2단보 정도 복숭아밭을 가지고 있습니다. 돼지도 거의 호당 5두 이상 사육하고 있습니다. 122.8ha의 산에는 산림이 우거져가고 있습니다. 8 년 후는 억대를 넘는 부락재산입니다. 76년 소득 추계는 120만원이 넘습니다. 77년에는 140만원 이상 자신이 있습니다.
하루는 노인들이 모여 닭을 잡고 술을 받아다 놓고 저를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저의 공적비를 세워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벅차 오르는 감격을 억제하며 제가 이 고장을 위해서 계속 일 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면 공적비 건립은 취소 해주도록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그 동안 축산물의 가격변동은 3~4년 주기적으로 하락과 상승의 교차입니다. 우리는 가격 하락 때 이것을 이겨 나가는 농민들의 지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는 양돈 협동회를 우선 조직하면서 계통출하 시 근당 30원 정도씩을 적립하여 금년부터 두당 150근*30원*400=1,800,000원 3년간이면 540만원 그 동안 자금을 놀리지 않고 서강 엔시레지를 만든다면 사료값 kg당 약 80원 정도를 40원으로 절감하여 부락에 공급하고 돼지 가격이 하락할 때는 보상도 해주는 생산보험제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도 부락 혼자의 힘보다는 더욱 우리 농민을 위하는 단위조합과 협의하여 적극 추진할 것이며 이 양돈 협동회 사업이 성공 될 때는 전국 양돈 마을에다 적극 권장할 것입니다.
끝으로 농촌 부흥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계시는 대통령 각하와 사회 각계 지도자들에게 뼈저린 고마움을 느끼면서 계속 우리 농촌지도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 할 수 있고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북돋아 주실 것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