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동안 동해안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실어나르던 열차가 끊어졌다.
실로 삶의 애환이 서린 철도라고 하겠다.
2013년 12월 1일 힘없고 맥빠진 기적을 울리며 마지막 열차가 지나갔다.
이는 부산~울산 간 복선전철이 생겼기 때문.
이 녹슬어가는 철로를 연계하여 걸어보기로 하였다.
돌아올 때는 ☞ 갈맷길의 일부구간인 '문텐로드(moontan road)'를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송정에서 그만 퍼져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달맞이고개에서 해안경계를 서면서 군대생활을 하였다.
젊은 날 추억이 깃든 철로를 타박타박 걸으며 힘들었던 그 시절을 유추해보고 싶었다.
파아란 겨울 바다의 시린 낭만을 느낄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하나 더 덧붙인다면 일본을 바라보고'아베'넘 욕이라도 한바탕 시원히...
위의 개념도는 문텐로드.
폐선된 철도(검은 선)와 새로 난 복선 철도(빨간 선)
2호선 전철 중동역 7번출구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7번출구 입구엔 'e마트'가 있다.
미포로 이동을 한다.
도로에 세워진 이정표.
..
'미포오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차들이 줄지어 선 방향으로 내려간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만나는 이정표(빨간 동그라미).
폐선된 철로를 건너 해운대바다가 아래로 보인다.
막아논 철로엔 폐쇄 현수막과 출입금지 경고 안내문이 붙어있다.
..
미포로 내려가서 달맞이 방향으로 방향을 잡는다. 개구멍(?)을 찾기 위해서다.
찾았다.
이곳에도 경고판이 붙어있다.
그러나 어쩌랴!
80년 동안은 기차들의 길이였지만 이제 우리들이 걸어볼 차례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개구멍으로 들락거리고 있다.
선창횟집 조금 못미쳐에서 위로 난 수로...
녹슬어가는 철로길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등대인 듯한데,살짝 당겨본다.
동해남부선을 이용하여 동해안을 지나가보면 바다로 펼쳐지는 탁 트인 조망은 아름답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달맞이 고개의 터널을 지난다.
달맞이언덕은 와우산(臥牛山)으로 불렸단다. 소(牛)가 엎드려(臥)있었다면 미포(尾浦)는 소의 꼬리부분에 해당된다는 이야기.
..
돌아보니 해운대해수욕장과 빌딩숲 그리고 동백섬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출렁이는 푸른 바다의 은빛 물결.
철로의 침목에 보폭을 맞추어 보면 남자 성인의 그것보다 작지만 자갈밭을 걷노라면 사각사각 경쾌한 발자욱소리가 듣기 좋다. 사각 사각♪
끝없는 바다와...
해안선을 따라 뻗어있는 철로.
드디어 사십여 년 전 내가 근무했던 초소가 나온다.
느릿느릿 지나가던 열차를 바라보며 손 흔들었던 기억과 손 흔들어 주었던 승객들의 다정한 모습도 떠오른다.
보초 서던 곳은 철로 옆 나무숲이 있는 부근이였던 것 같은데...
철조망이 쳐진 이 곳인가?
다시 돌아보는 초소.
온갖 추억이 덕지덕지 엉켜 붙어있다.
<소대장이 자살하려고 머리에 총을 쐈던 일.수술 중 피가 모자라 급히 수혈을 하러 갔던 일.
훗날 살아온 소대장이"너 때문에 내 살았다."며 감사해했던 일.
그리고 추석날 LMG 기관총 실탄 한 통을 도난당하여 당시 근무자가 M1소총으로 자살했던 일.
소대장의 외출을 거짓보고하다 중대본부에 불려가 개같이 맞고 개집(?) 철창에 갇혔던 일.
시력이 나쁜 안경잽이들은 해안경계가 부적합하니 전출시켜야 된다면서 27개월 일등병의 몸(상병 제대)으로 내륙지인 조병창으로 전출되어 또 '존나이' 뚜들겨 맞은 기억.>
그 사십여 년 전의 기억이 마치 어제일인 양 생생하게 떠오른다.
기찻길은 이제 느릿느릿 휘어진다.
저 바다건너 못된 '아베'넘이 있제? "에라이~써글 넘아!"
지나간 역사를 인정하고 진정한 사과가 꼭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발전적 미래와 상호공영을 위하여 머리를 맞댈 수 있을 것이다.
..
삼포의 하나인 청사포다. 삼포는 미포와 청사포 그리고 구덕포를 이르는 말이다.
막아 놓은 옆으로 살짝 비켜나가서...
다시 철로를 이어탄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걷기엔...
날씨도 포근하다.
구석기유적지라더니 올라가보니 밭으로 둘러져 있을 뿐 흔적도 없다.
어린 아이와 젊은 엄마도 함께 걷는 길.
겨울바다는 여전히 시린 낭만을 노래한다.
제 살을 깎아내며 버티고 선 갯바위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와 함께...
너무 거리가 머남? '둘리 아빠' 내외.
철로 끝에 송정이 보인다.
휴일을 맞은 도보꾼들이 철로를 따라 걷고 있다.
좌측 송정해수욕장과 우측 바닷가 시랑산.그리고 그 뒤에 용궁사가 있다.(그 시랑산 우측 해안 너머에 시랑대가 있다고 했다.)
'아베'넘은 자기네 민족의 꼴짭한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겠제?
송정해수욕장이 가까워졌다.
폐선된 철도의 쓸쓸한 송정역 플랫폼.
인적없는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이정표.
이제 송정역은 80여 년의 애환을 삭인 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송정역은 문화재청으로 부터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이 시대 최고의 가치는 오직 '빨리빨리'인가?
그 빠름을 추구하다보니 이 아름다운 철로는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지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당국의 역활이겠지만 시민들이 옛 추억을 그리며 아름다운 동해안의 절경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
이제 철길은 여기에서 내려선다. 철로야 더 이어져 있지만 엊그제 병원에서 퇴원한 친구도 있고해서 여기쯤에서 접는다.
도로에 나와서 보는 이정표.
바닷가로 돌아 나온다. 우측엔 죽도공원(송정공원) 나무숲이 보인다.
친구들은 적당한 식당에서 자리잡고 있을 것이고,나는 그 새 용궁사(2km)를 다녀와야 한다. 이제 혼자 걷는다.
해안로를 따라 걷다보니...
정지작업을 하는 공사현장이 나온다.
황량한 공사장 우측으로 시랑산이 보이고 그 너머에 '해동용궁사'가 있다.
나는 바쁜 걸음을 해야하기 때문에 황량한 언덕배기의 고개를 넘었지만 지도상에는 솔숲이 우거진 시랑산 우측으로 길이 나 있었다.
☞ 해동용궁사 입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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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용궁사 셔틀버스 운행 안내.
'십이지' 석상들이 도열해 있는 입구엔 휴일을 맞아 탐방객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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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서두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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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일관음성지
용문석굴
천혜의 바닷가에 섰다.
사진의 우측 잘 쌓은 돌탑이 있는 곳에 '기장7경'인 시랑대(侍郞臺)가 있으나 용궁사에서 담으로 막아놔서 바로 갈 수는 없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고 황금부처가 모셔져 있는 저 바위가 해를 맞는 일출암(日出岩)이고 또한 물고기를 방생하는 제용단(祭龍壇)이다.
대웅보전 앞엔 승천하는 용이 있다.
달을 맞는다는'영월당'
절은 심산유곡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금으로 덧칠 되어진 느낌.
부처님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너무 호화롭고 사치스러워졌다.
만복문
정령 아름다운 이곳에 부처님의 환한 자비가 펼쳐지길 바랄 뿐.
강원도 휴휴암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시랑대를 만날 수 있다.
트럭이 바라보고 있는 철문은 항상 굳게 잠겨있고,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용궁사 담을 돌아 내려서면 만날 수 있다.
<펌>
시랑대의 본래 이름은 원앙대(鴛鴦臺)였다. 기장현읍지도 기장군군지도 원앙대라 적고 있다.
시랑대는 영조 9년 이조참의로 있던 권적이 기장현감으로 와서 이곳 경관을 즐기며 주위 선비들과 시부(詩賦)를 읊는 데서 비롯되었다.조선시대의 참의 벼슬은 고려시대의 시랑(侍郞)벼슬이라, 주위 선비들은 고려 때의 벼슬 시랑을 이끌어 들여 권적을 '권시랑'이라 하고 '미랑대'라고도 한 대(臺)를 시랑대라 했다.<자료>
또한 원앙이 까마귀떼처럼 무리지어 날았다고 비오포(飛烏浦)라고도 불렸다.
여기에는 또 이러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시랑대의 본래 이름은 원앙대(鴛鴦臺)였다.
마을 사람이 원앙대 아래 해룡단(海龍壇)에서 미랑스님과 함께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
기우제가 끝난 후 사람들은 제각각 돌아가고 미랑스님 혼자 원앙대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쌍쌍의 원앙새를 보고 있었다..
그때 동굴 아래에서 아름다운 동해 용왕의 공주인 용녀(龍女)가 나타났다.
용녀공주는 원앙대로 올라 달빛에 젖은 겹겹의 옷가지를 벗고 미랑스님과 반석 위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
미랑스님의 씨앗을 잉태한 용녀가 용왕의 눈을 피해 해산을 하려하자 이 사실을 안 용왕이 크게 노하여 산더미 같은 노도(怒濤)를 일으켰다.
파도에 휩쓸린 용녀를 하늘의 옥황상제가 가엾게 여겨 아기와 용녀를 천상으로 구해 올려 천상의 옥녀로 삼았다.
그래서 지금도 파도가 치는 날이면 미랑스님이 애절하게 용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학사암(學士암)은 기장군수였던 홍문관 교리 손경현(孫庚鉉)이 고종 32년(1895년) 여름에 이곳에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암)'이라 이름 붙여 새긴 것이다.
그 밖에도 이곳을 들른 당시의 시인 묵객들이 바위에 아름다운 싯귀를 새겨 놓았다.
그러나 어쩌랴~ 여행은 여기까지다.ㅠㅠ
친구들은 벌써부터 식당에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우리 '29어울림'정기총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
오랫동안 책임을 맡아왔지만 이제 무거운 직책을 내려놓아야 한다.
버스를 타기 위하여 용궁사를 빨리 벗어난다.
마침 휴일이라 몇 군데의 대형 주차장엔 차들로 넘쳐나고 있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버스가 다니는 도로 입구.(도로 입구엔 대형 용궁사 안내판이 서 있다.)
내가 걸은 길은 '대변 해안길(기장역~송정,19.7km,6시간)과 해운대 삼포길(동백섬~송정,8.4km,3시간)의 일부구간이다.
용궁사입구의 181번 시내버스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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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노선버스인 181번 안내표.
식당엔 벌써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즐거운 모습의 얼굴들은 화기가 넘치고 발그스럼하다.
우여곡절 끝에 새 산행대장을 선출했다.
새 산행대장 백충교친구는 그동안 열의를 가지고 친구들의 화합에 기여하였다.
앞으로도 그 열정으로 친구들의 산행모임을 잘 이끌어 가리라 확신한다.
정기총회도 끝나고,술도 한순배 돌고,뒷풀이가 시작된다.
'훌라'와 '고스톱'
나는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
^^
열공! 열공! 열공!
돌아본 '20년전통 할매집'
오늘의 모든 계산은 디스크수술 후 막 퇴원하였다는 차상율 친구가 모두 감당하였다.
가끔씩 거금 찬조도 마다하지 않았는데,고맙다. 그리고 빠른 쾌유를 빈다.
아직 어둠은 내리지 않았다.
얼추 취한 마음에 아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181번 용궁사 방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답사치 못한 시랑대가 머리에 맴돌기 때문.
그러나 버스는 쉬이 오지않고 나는 그만 아쉬움의 생각을 접는다.
귀가하면서 오랫만에 연산동 여동생집에 들렸다.
혼자힘으로 검사아들을 키워논 당찬 여동생이다.
눈물이 핑 돎을 숨길 수 없었다.
이런저런 책임있는 위치에서 벗어나 자꾸만 혼자이고 싶은 마음이 무슨 우울증의 전조인가 하였는데,
그런 오빠를 가리켜 "이제 오빠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여동생에게서 힐링(healing)의 키를 꽉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