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아일체(物我一體)의 예혼(藝魂)
―강용식 화백의 졸수전(卒壽展)을 미리보고
문학평론가 리 헌 석
(사)문학사랑협의회 이사장
1.
흐르던 물이 지각을 울리며 폭포를 이룹니다. 지던 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부서졌다가 다시 만나, 오로지 초지(初志)를 일관(一貫)합니다. 폭포를 옹위한 두 절벽은 온통 암석이지만, 자신의 품에 푸른 숲을 가꾸고 있습니다. 폭포가 숨을 고르며 만든 수변(水邊)에서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 사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이 자연을 완상합니다. 송암(松巖) 강용식 화백(畫伯)의 풍경화 「효도」를 일견(一見)하면서, 이 그림 한 점에서 유추되는 선생의 진솔한 내면을 되살려 봅니다.
최근에 선생은 휠체어를 통하여 세상과 소통합니다.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휠체어를 작동하면서 변함없이 연부역강(年富力强)하는 어르신의 자세가 오롯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화 작품 「효도」는 최근의 선생 자신을 조감하는 자화상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강용식 유화 「효도」
2.
아호(雅號)가 송암(松巖)인 강용식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푸른 기상을 지향한 것 같습니다. 대전광역시 동구 직동 찬샘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랄 때, 산과 계곡이 아름답고, 소나무가 울울창창하였을 터입니다. 또한 비취 빛 하늘이 산 능선을 길게 늘이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고향에 대한 관심과 소나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향의 시골같이 평화로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왔습니다.
선생은 「소나무」 「솔향」 「절 가는 길」 「설악산 노송」 등 아호를 연상할 수 있는 그림을 자주 그렸습니다. 세종특별자치시 탄생에 지극정성 노력하던 중에 강과 들녘에서 만나는 풍경을 자주 그렸습니다. 또한 「복숭아꽃」을 배경으로 한 금강, 금강 건너 원경으로 세종시를 지키는 ‘원수산’과 ’전월산‘ 등 세종시의 진산(鎭山)을 화폭에 자주 담았는데, 이제 그 산 아래 지역은 도시가 들어서서 대한민국 제2의 행정수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선생은 서울 인사동 ‘라메르’와 대전 MBC 방송국 ‘M갤러리’ 등에서 개인전 20여 회,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와 ‘대전시립미술관’ 등의 초대전 및 단체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출품한 바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로 하여, 대한민국 미술전람회(國展)의 초대작가로 등극하였고, 한국미술협회 고문으로 추대받습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미술대전 평론가상, 대전광역시 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을 정도로 작품의 격조가 남달랐습니다.
--강용식 유화 「솔향」
3.
송암 강용식 화백은 대한민국 제2행정도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에 있어 새벽을 깨우는 나팔수이자 견인차였습니다.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세미나와 강연에서 주제 발표를 도맡았던 선생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를 만나 신행정수도 건설의 당위성을 역설·건의한 바 있습니다. 서울 중심의 행정적 비효율을 극복하고, 나라의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필요성을 환기하며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되게 합니다.
당선한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신행정수도 상임추진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고건 총리가 위원장을 맡게 되자 ‘추진위원 겸 자문위원장’으로 선출됩니다. 불퇴전의 열정으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을 제정·공포하는데 큰 힘을 보탭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낸 분들이 있었고, 헌재의 판단은 이를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실망하지 않고 ‘행정복합도시’로 수정안을 발안하였고, 이는 합헌으로 결정되어 대한민국 제2 행정수도의 첫 삽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때 연기군과 충청권에서는 단식투쟁을 하거나 머리띠를 두르고 ‘합헌’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선생께서는 부산 광주 대구 전주 대전 춘천 육군본부 경찰청 등의 초청을 받아 신행정수도 건설의 당위성에 대하여 강연을 합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고, 제2호 명예시민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 지역의 자연풍광을 화폭에 담아 「금강 장남평야」 「금강 장남평야 원수산과 전월산」 「금강지류」 「개발 전 세종시」 등의 예술 작품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용식 유화 「금강 장남평야와 원수산과 전월산」
4.
송암 강용식 화백은 순정한 교육자이자 대학 발전의 행정가였습니다. ‘대전공업고등학교’가 ‘대전산업대학’을 거쳐 ‘한밭대학교’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데 1등 공헌자이자 살아 있는 증인입니다. 충남대학교 재학 중에는 총학생회장, 졸업 후에는 충남대학교 총동문회장으로 신망이 두터웠던 선생은 1964년에 국립 한밭대학교 교수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1996년까지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임합니다. 1988년에 간접 선거로 치른 총장 선거에서 13:1로 한밭대학교의 1대 총장이 됩니다. 2대 총장은 직접 선거로 치렀는데, 재적 과반수 득표로 8년간 총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난제(難題)를 해결한 바 있습니다.
1차 난제는 학교 이전 부지 확보였습니다. 선생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대학 이전 특별법’을 진정하였고, 그에 따라 대전 유성구 덕명동의 임업시험장과 충청남도 소유 토지, 개인 토지 등을 구입하여 한밭대학교 이전을 시작합니다. 단과대학을 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킵니다. 산업대학원을 개설합니다. 전국 산업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을 맡습니다.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부회장을 맡아 4년제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 등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고향에 대한 사랑이 출중하여 ‘찬샘마을’에 송덕비가 건립될 정도로 애향심을 발현합니다.
선생은 사재(私財) 5천만원을 출연하여 한밭대학교 내에 학술문화연구재단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합니다. 이 재단은 2018년 현재 100억원 이상의 기금을 적립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인이 솔선하여 1,000만원을 출연하고, 다른 분들로부터 모금하여 ‘대공장학회’를 설립, 이사장으로 운영한 바 있습니다. 총장 재임 당시 13개 과를 증설하였고, 4개부를 개설하여 종합대학교의 기틀을 잡습니다. 그리하여 중부권은 물론 대한민국의 대표적 국립대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니, 이는 온전히 9전 10기의 정신으로 총장직을 수행한 송암 강용식 선생의 덕분일 터입니다.
--강용식 유화 「고향의 꽃길」
5.
하늘은 필요에 따라 인물을 낸다고 했습니다. 송암 강용식 선생은 대전광역시 오지(奧地) 중의 오지 ‘찬샘마을’에서 출생합니다. 선생이 3세였을 때 부친께서 별세하시고, 고향에 송덕비가 건립될 정도로 현철하셨던 모친 김임순 여사의 사랑과 희생으로, 올곧은 성품과 특유의 진취적 기상을 발양(發揚)합니다. 6.25 후 대전으로 이사하여 서대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재들이 선호하던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운명적 인연이었을까, 이동훈 선생님으로부터 미술 개인지도를 받습니다. 이에 힘입어 훗날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으니, 이는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의 본보기일 터입니다.
“항상 가난하고 불쌍한 분들 편에 서서 봉사하라.” 어머니 말씀을 따라, 선생은 세계적 봉사단체인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를 역임하면서 솔선(率先)하였으니, 선생의 인생 역정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하나 더 보태었습니다. 선생은 봉사자로서 수범(垂範)하였고, 화백으로서 출중하였으며, 지역 발전에 공헌하였으니, 이만하면 대한민국 남아로서 으뜸가는 성취라 찬탄할 일이 아니던가? 어허라, 솔향일까? 아름다운 자취에 고운 향기가 감싸고 흐르노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