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도 단군왕검 계승..기록 찾았다
YTN 2014.10.03.
|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 - 천제암궁(天祭庵宮)의 터



출처 - http://media.daum.net/digital/others/newsview?newsid=20141003230105128
위 말은 영조임금의 발언으로 "단군은 우리의 천황(天皇)이시니 그 사당을 항상 잘 수리, 보수하라.
나도 예의를 다하여야 하니, 가까운 신하인 승지가 가서 직접 제사를 올려라." 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천황(天皇)이라는 말도 고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쓰던 말인데
나중에 일본이 베껴다 쓰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조임금이 직접 단군사당에서 천제를 올리면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험악해졌을 겁니다.
중국권력이 보기에 그것은 중국이 천자(황제)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조선임금이 직접 단군사당에서 제를 지내는 것은 어려웠을 겁니다.
중국의 보복을 우려해서 말이죠.
그리고 위에 나오는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천제(天祭)를 지낼 준비를 하던 건물이 있던 터인데
건물은 사라지고 기단 등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그에 대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궁(齋宮) 터. -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4호.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 시조에 제사를 올릴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과 제기, 그리고 제물을 준비하던 건물로
지금 이 곳에는 석축 3단을 올려 본 터를 닦았던 자취와 우물, 금표 등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문신 목은(牧隱)이색(李穡)의 시를 목판에 기록한 시판(詩板)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임금도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들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터는 고려시대부터 존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도 명종이 당시 홍문관에 봉직하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로 하여금 참성단 제사에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단군제례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되다가 1883년(고종 20)에 폐지되고 여기에 있던 불상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겨졌다.
(이상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설명)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6020

영조임금이 신하들에게 [고려사]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고 있죠.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에 보면 이 후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옵니다.
上曰 下番讀檀君篇 命勳讀之
"(영조)임금이 (고려사의) 단군편(檀君篇)을 읽으라 명하니
(신하) 이명훈이 그것을 읽었다."
(승정원일기 원문 보는 곳.)
http://sjw.history.go.kr/


위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는 자리에서 "단군은 우리나라의 태고적 임금"이라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데 지금 전해지는 [고려사]에는 [단군편(檀君篇)]이 없는데
어떻게 영조임금과 그 신하들이 보는 고려사에는 단군편이 있었을까요.
조선 개국후 처음 만들어진 고려사에는 단군편이 있었는데
세조 ~ 성종 때 고려사에서 단군편을 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전해지는 [고려사]는 세조 이후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단군편]을 빼버린 것이고
원래는 단군편이 고려사에 있었으며
영조와 그 신하들은 단군편이 있는 [원래의 고려사] 책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비위를 건들지 않기 위해서 단군편을 뺀 고려사를 내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단군왕검 건국시기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 천자(황제)국임을 내세우던 중국으로서는 "한국이 중국과 고대 건국시기가 같다."고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중국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대외적으로는 [단군편]을 뺀 고려사를 내세우고
조선 왕실과 조정 내부에서는 [단군편]이 있는 원래의 고려사를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랜 세월 중국권력이 그들의 '중화제일주의'에 큰 위협이 되는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없애려 압박을 해왔으며
후에 일제도 마찬가지로 단군조선에 비하면 그들의 고대사가 너무 짧고 초라하므로
'단군조선 지우기'에 극심한 공작을 했죠.
일제가 삼국유사는 없애지 않고 놔둔 것은
삼국유사에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식으로 오해받을 수 있게 기록되어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곰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곰을 상징동물로 하는 부족'이 선진문명인이 되어간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프로야구팀 중에 '곰을 상징동물로 하는' 팀, 베어스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 부분은 영조임금이 신하에게 "신라, 백제에서 단군왕검께 제사지낸 달을 알아오라." 했고
신라, 백제에서 1년에 2번, 2월과 8월에 제사지냈다는 것을 보고받은 내용인데요
고구려에서 단군왕검께 제사지낸 데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백제에서 제사지낸 달을 알아오라 했겠죠.
음력 2월이면 대개 양력 3월, 4월이니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고
음력 8월은 대개 양력 9월, 10월이니 추수하는 시기죠.
농사가 시작될 때 농사 잘되게 해주십사 제사지내고
추수할 때 감사의 마음으로 제사지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음력 8월은 [한가위(추석)]라 봐야겠죠.



첫댓글 원시반본해야쥬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세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뭔가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지고 이런 카페도 더 수가 늘어나야 될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사대주의자 여서 단군과 고조선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군과 고조선이 사대주의자들이 만든 허구의 국조와 국가이기 때문에 삼국유사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고려사는 이마저도 왜곡해서 환웅의 신시시대를 지우죠. 사대사학 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영조는 고려사에 나온대로 단군이 천황이라고 잘못 알고 있죠.
삼국사기에는 국조가 선인왕검으로 헌원으로 나오고 그 자손들인 소호금천 이 신라 김씨 시조 손자인 전욱고양이 고구려 고씨 시조로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사대사학 삼국유사부터 단군은 국조로 삼으니 단군 보다 수백년전 인물들인 소호와 고양이 부정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