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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길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어느 문학인가?
하재열
11월을 넘기는 삿뽀르의 아침 하늘엔 냉기가 휘몰았다. 호텔을 나와 큰길의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가로엔 샛노란 끝물의 은행잎이 쓸린다. 간밤의 빗물이 만든 살얼음판에 주춤된다. 사람들의 종종걸음을 따라 하얀 입김이 흩어진다. 홋카이도 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혼자 오전 일정을 달리하기로 했다. 미리 이야기해두었건만 아내는 여기까지 와서도 문학기행이냐며 여자만 잠시 만나고 오라며 비쭉댔다. 소설 ‘빙점 氷点’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를 찾을 작정이었다. 반세기나 흘렀지만 홋카이도 출신으로 일본 작가 중에 한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어 알려진 인물이다.
문학관은 나카지마(中島) 호수 공원 가에 있었다. 삿뽀로의 도심에서 벗어난 북쪽 구릉지의 한적해 보이는 곳이다. 구름 틈새의 푸른 하늘과 햇살이 내려앉는 풍광이 새뜻했다. 회백색 이층 건물이 숲에 가려 다 드러나지 않았다. 도립문학관 치고는 별 볼품이 없어 보인다며 안으로 들어섰는데 지하층이 더 넓었다. 소담한 공관에 전시관과 수장고 등 주요시설이 들어섰다. 주변 수변 경관에 맞추어 지상층을 낮춘 모양이다.
전시관은 상설 전시관과 특별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설 전시관에는 홋카이도 개도(1869)이래 향토 출신 작가에 대한 소장 자료 약 25만 점 중에서 선별했다는 육필 원고, 초판본, 사진 등 관련 자료를 시대별(명치 시기 大正시기, 소화 전쟁 전기-중기-소화 전쟁 후기, 고도경제성장기, 현재)로 진열해 놓았다.
전시관 출입구 안쪽 첫 번 째 코너에 수문장처럼 들어선 조형물에 먼저 붙들렸다. 홋가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문학작품이라는 설명 아래 알파벳으로 적은 글씨가 동판에 새겨졌다. 구전되어 오는 시가(詩歌)의 소리를 채록한 것이라 했다. 아이누족의 땅이었던 그곳에 지금은 그들의 말도 문자도 거의 소멸해 형태를 온전히 알 수 없다고 한다.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북방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본토 이주민에 밀려 한 세기도 안 되어 동화된 민족이다. 아직 뜻을 해독하지 못 한다고 했다. 일본어 알파벳 표기보다 읽어내기가 읽어내가가 어렵다,. 자음 받침이 붙은 한글의 알파벳 표기처럼 소리가 억세다. 같은 우랄알타이족이겠지만 말의 태생이 안개가린 길목처럼 긍금했다.
미우라 이야코를 먼저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역시 혹카이도 대표작가답게 중앙 벽면 전시대에 크게 인물 사진이 걸렸다. 예의 불거진 볼에 우수어린 눈빛의 얼굴이 여기선 훤하게 달리 보였다. 아래 진열대에는 이력, 육필원고, 책자, 사진 등이 눈에 띄었다. 그의 고향 아사히가와(旭日川)의 ‘미우라 아이쿄 기념문학관’엔 더 많은 자료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의 대표작 빙점(氷点)은 1964년 아사히 신문 현상 공모 당선작으로 신문에 연재되었다. 단행본은 71만 부나 팔려 베스투셀러가 되며, 그를 일본 대표 여류작가로 자리잡게 했다. 그때의 공모전 상금이 1000만 엔이었다는 자료가 눈길을 끌었다. 단순 계산으로 1억 원이었다는 말이다. 그게 일본 문학이 힘을 내는 바탕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도 70년 대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를 더 끌리게 한 책은 그의 에세이집 북국일기(北國日記)다, 일본인의 세상사 정서를 더듬어보는 일이기도 해 지금도 서가에 두고 있다. 혹가이도의 풍정과 사람들, 결핵과 암투병 등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작가의 심상이 울림을 준다. 교우하던 한국 교포가 담가 준 김치를 맛있게 먹는다는 글줄부터 정감이 일기도 했다.
옆쪽의 다른 작가의 자료를 살피는대 李恢成(이회성)이란 이름이 눈길에 잡혔다. 분명 한국인 이름이다. 다시 살피며 긴가민가 했다. 이전에 해방공간과 전후의 문학을 다룬 한 자료에서 얼핏 읽은 이름이다, 어렴풋한데 그를 삿포로 향토 작가 53명의 한 사람으로 ‘사할린 출신 조선인 작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라 미우라 아야코와 나란히 이희성의 사진이 걸렸다. 거기에다 재일 외국인 으로서는 처음으로 앜타가 기아상을 수상(1972)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그가 홋카이도에 살았고,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궁금증이 구름처럼 몰리며 뭉클거렸다.
사할린에서 태어났다.(1935) 아버지는 황해도 재령, 어머니는 경상도 출신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는 1920년대 말 규슈의 탄광노동자로, 어머니도 돈을 벌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둘이 만나 결혼했고, 1930년 초 홋가이도를 거쳐 사할린으로 건너갔다. 이회성은 3남2녀의 셋째이다. 종전 후 1945년 일본인에 섞여 아버지따라 사할린에서 도망 나왔으나 미군정의 외국인 소환령에 따라 규슈 오무라 수용소에 일시 수감되었다. 어머니는 광복 10개월 전 36살의 나이에 이미 사할린에서 병사했다. 수용소에서 조국으로 귀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삿뽀로에 정착하였고, 아버지와 돼지를 치며 고교시절까지 보냈다. 1955년 도코로 옮겨 홀로 고학을 하며 1961년 와세다 대학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에는 한국어로 소설을 썼으나 이어가지 못했다. 조총련에 가입하여 제일교포 북송사업에 간여했다. 자신도 북으로 가려고 했으나 조직의 일을 맡으라고 해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사로 옮겨 근무하면서 조직의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탈퇴했다. 1967년부터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수십 편의 소설과 에세이집을 남겼고, 88세의 고령인 지금도 현역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 사할린에 친척을 두고 온 고뇌의 이야기를 쓴 처녀작으로 군상(群象)지의 신인문학상을 받은 ‘다시 돌아오는 길(1969), 사할린으로 이주해 온 외갓집 집안의 고단한 삶을 다룬 작품으로 1972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다듬이질 하는 여인(1971),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비극적 역사를 다룬 ‘유역(1992)’ 1947년 사할린에서 탈출한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노마(野間)을 받았고, 10인이 뽑은 94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된 ‘백 년 동안의 나그네(1994), 유신채제를 비판하며 김대중 납치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 정치문제와 한국사회주의자들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에게 많이 읽혔던 금단의 땅(1979)<이호철 소설가 번역>이 있다.
1939년에 10년 만에 어머니가 5살인 그를 데리고 고향을 찾았던 때가 첫 한국 방문이었다고 한다. 1970년에 혼자 몰래 한국을 찾은 일이 있고, 아쿠다가와 상 수상 해인 1972년에 한국일보사 초청으로 방문해 국내 문인들과 처음 만났다. 그 후 세 차례 방문을 시도했으나 군사정부애 대한 그의 비판 활동으로 입국을 거부당했다. 민주화 정부가 들어선 후 1995년 한림대 일본학 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움에 참석차 23년 만에 방한했고, demago 10월 서울에서 개최한 ’한민족문화인대회‘에 참석하여 국내 문인과 문학대담을 하기도 했다.
미우라 아야코를 만나러 왔다가 이외의 인물과 두근거리는 조우를 했다. 한국계 작가의 대표적 인물로 일본 문단의 평을 받는다. 그의 삶은 학창 시절은 물론 일생 내내 정체성의 문제로 고뇌했다. 모국을 모르는 재일 2세가 다 그랬듯 일본도, 한국도 북한 그 어디에도 온전히 귀속하지 못하고 어름에서 서성인 사람이었다. 스스로 뿌리뽑힌 사람, 유량인, 망명자라고 했다. 그 경계에서 독자의 문화적 의식을 형성하여 살아온 것이 2세대 한인들이다. 그의 문학엔 조국을 등지고 떠도는 재일 한인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모든 작품 속에서 면면히 흐른다. 조총련 조직을 떠난 사람이 거의 민단으로 옮기거나 귀화한 것과 달리 그는 한국도 북한도 아닌 소선이란 국적을 고집했다.
여행길에서 내가 만난 홋가이도 내륙 미에이(美瑛)지역 일대의 구릉지, 호수, 폭포와 같은 수려한 자연경관이 그의 몸에도 베었을 것이고, 자작나무 숲과 이오이이케의 푸른 물에 내리쏟아지던 솜 같은 함박눈에 아내와 나는 넋을 잃었듯이 그도 그걸 보며 살았을 것이 아나던가. 또한 남쪽 홋가이도, 11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카르텔 호수 시코쓰고, 도야고의 물바람과 아직도 화산 활동이 이어지는 쇼와신잔, 우스잔의 장쾌하고 두려운 광경을 그도 마주하며 숨을 쉬었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왜 발붙인 홋카이도의 풍광과 그쪽 사람의 사는 일보다 살아보지도 않은 모국 사람의 삶에 그토록 집착하면서 작품을 썼던 것인가.
일제의 압제, 해방 공간, 한국전쟁을 거치며 민족의 대규모 이동과 재편이 이루어졌다. 강점기 때 일본에 이백만, 만주에 일백만 그 외 하와이 등 타지로 이주해 간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연해주로 이주했던 17만 2천 명이 1937년 다시 소비에트에 의해 중앙앙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국내에서도 광복과 전쟁의 혼란기에 수백만의 북한 주민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작가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 갈림으로 월북작가, 월남작가, 해외 귀한 작가의 꼬리표를 불이고 많은 문인이 민족이동에 몸을 실었다. 터를 옮겨간 작가도 남한에 채재했던 작가도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달랐지만 민족의 고통을 작품에 담으려 한 지향점은 같았다. 좌우의 이념대립을 하면서도 민족의 문제를 고뇌한 많은 작품을 내놓으며 한국문학의 줄기를 엮어왔다. 이회성 그의 문학도 동시대 국내작가와 같은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고뇌했다. 바로 귀국할 수 있었더라면 현대 문학사에 이름을 올린 안수길, 황순원, 선우휘, 최인호, 장용학, 이호철 등의 월남문인과 같은 궤적을 걷는 작가가 걷는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12살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에서 규슈로, 다시 홋가이도로 간 길이 그의 문학의 길이 되었다. 태어났고, 유년기와 소년기를 살았던 사할린은 그의 작품의 원풍경이었다. 그 자신도 사할린이란 고독한 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회성 문학에 대한 우리 문학계의 관심과 논의는 빈약하다. 국내와 국외와 일본 문단이 이회성 작품론엔 안수길의 ’북간도‘유의 한국인 수난사를 그린 작품으로 4대에 걸친 한 가족사의 장대한 이야기이다. 현대 문학사에 하나의 초석이 될 만한 거작으로 일컫는다. 만주와 사할린이라는 작품 태동의 장소는 다르지만, 해외에 떠돌면 겪었던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의 유사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닐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다듬이질 하는 여인‘은 작가가 9살 때 36살 나이로 사할린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장술이의 실명을 붙여 쓴 자전적 소설이다. 압제와 차별에 쫓기며 끝내 사할린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 ’더는 떠돌지 말아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기만 하려는 남편에게 장술이가 남긴 유언은 유랑의 생활을 끝내고 싶은 절박한 한인들의 비원이었고, 항거였다. 일본 땅으로 표류해 갔던 한 가족의 비참한 삶과 여인의 고난에 찬 일생을 서정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한국적 가족애와 새활감정, 한국의 토속적인 것에 대한 절박한 애착과 그리움이 베어 있다. ’아이구‘ ’치마‘ ’저고리‘ ’댕기‘ ’당신‘ ’신세타령‘ 등 작품 곳곳에 한국어를 그대로 일본어 발음으로 적거나 한국식 한자를 썼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도 된장을 담그고, 김치를 담가 먹고, 다듬이질을 하며 살았다는 여인의 이야기, 다름 아닌 비로 그의 어머니 이야기였다. 작중 인물 중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 그게 어느 쪽 문학인가.?
한국 현대문학사 담론엔 이회성 같은 재일본 작가는 거명되지 않는다. 문제는 인식하면서도 문단의 관심은 엷어보인다. 1998년 국민의 정부 때 오랜 고뇌 끝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뿌리 뽑힌 유랑자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고난과 아픔의 정서가 오롯이 담겼어도 리카이세이(이회성), 그의 글은 일본어로 쓰였으니 정녕 한국문학은 아닌 것인가? 일본에는 재일 한국 작가들의 문학이 1980년대에 일본 문학사에 등장하며 일본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한다.
우리 문학관에서 일본인 작가를 향토 작가로 받드는 일이 있을 것인가. 한국어로 일본인의 삶과 정서를 다룬 작품을 쓴 일본인 작가에게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인가. 한국 문학이 진정 세계 문학사에 제대로 자리를 찾으려면 그런 날이 올 때가 아닐까 싶다. 좌우를 포함한 여러 이념적 분화를 포용하면 삶을 탐구해온 것이 문학이요 문학사의 흐름이다. 일제의 압제와 남북분단에서 파생된 분노와 아픔이 만든 정치의 언어에 문학의 언어도 잡힌 겄인가. 광복 70년을 넘기고도 선진국 소리 듣는 지금도 강점기의 상흔을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니 이라다. 이데올르기적 협소함에 갇힌 좁은 시야를 벗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미우라 아야코와 함께 내걸린 이회성의 얼굴을 쳐다보며 일본의 넓은 오지랖을 대하는 일이 씁쓸했다. 손에 든 물건을 뻬앗긴 기분이었다. 특별전시관에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전이 열리고 있었다. 서로 전쟁을 했고 지금도 북방 영토 문제로 다투고 있지만 사람들은 북적였다. 수시로 해외 유명 작가와 작품을 초치하여 독자에게 알리는 기획전을 연다고 했다. 문학관을 찾았던 그해(2017) 노벨문학상은 일본 태생의 영국인 이시쿠로 가즈오였다. 발표 한 달이 지났건만 홍보물과 관람객으 말에서 열기가 묻어나왔다. 영어로 쓰였지만 일본적 정서가 흐른다며 일본 문학의 위대함을 애써 알리려 그들은 요란을 떨지만, 동북공정에 나선 중국도 윤동주의 문학을 중국문학이라 우기려 든다는데, 우리도 일본은 물론 해외 한인의 문학을 받아 안을 문학사의 눈과 품을 넓혀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 문학관을 나온 길의 나카지마 호숫가에서 이회성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눈깨비 흩뿌리다가도 푸륵 개기도 하는 늦가을 풍광이 좋았다. 마침 옆의 노틀이 내개 휴대폰을 내밀며 사진을 부탁했다. 젊은 여자와 손을 맞잡고 포토존 난간에서 웃었다. 딸이라며 묻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아니란 걸 금새 알아채면서도 그도 나도 슬며시 눈짓을 바꾸었다.
내 나라의 여권을 가진 나는 든든했다. 문학관을 둘러보는 내가 진지해 보였던지 한국에서 왔다는 왔다는 말에 여직원이 깍듯하게 안내까지 해주었고, 포토존의 그 남자와 나는 동류의 사는 정감을 무언의 눈짓 말로도 스스럼없이 통했다 경계인 이회성, 그는 그 노틀의 땅에서 낮보는 무수한 사람의 벽을 두드리면서 통하려, 이겨내려 애쓰며 고뇌했던 것 아닌가, 호숫가를 덮는 조릿대 앞을 두드리는 싸락눈 소리가 그곳의 탄광과 댐 건설 현장에서 몸부림쳤을 한인들의 아우성처럼 들린다.
지금도 모국의 문학 품에 안길 자리가 없는 유랑자요 경계인이다. 이회성(일본 호칭 리타이세이), 그에 이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세 명의 작가도 그렇다. 우리는 한국계 작가란 이름만 중얼거리며 그들을, 그들의 작품이 모국에 던지는 물음을 지나치고 마는 것인가.
(대구 수필과 비평 2023-13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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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느끼는 것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