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10일, 동작동에는 비가 내렸다. 흰 우의를 입은 시민들이 제단 앞을 메웠고, 검은 현수막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 봉환 국민제전'이라는 글자가 걸렸다.
그 자리에 흰 예복 차림의 노인이 섰다. 당시 대종교 종무원장 김선적.
그가 다섯 선열의 영전에 추도의 말을 바쳤다. 그 장면은 지금 남은 영상 기록 속에 선명하다. 젖은 태극기와 흰 두루마기, 그리고 비. 이 하루는 장례만이 아니었다.
그해 봄, 김영삼 대통령은 방한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에게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 봉환을 제의했다. 전해에 맺어진 한중수교가 없었다면 시작조차 못 했을 일이다.
중국이 수락하자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민제전위원회를 꾸렸고, 8월 4일 상하이 만국공묘에서 파묘와 화장을 마친 유해는 이튿날 천묘식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국무총리 노백린,
국무총리 대리를 지낸 신규식,
임시의정원 의장 김인전,
그리고 안태국.
순국한 지 70여 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다시 48년이었다. 파묘 현장에서 노백린의 유골 항아리는 깨진 채 발견됐다. 국가가 이들을 잊고 있던 세월의 길이가 그 항아리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은 이장(移葬)이 아니라 봉환(奉還)이었다. 옮기는 것이 아니라 돌려받는 것.
당시 정부 담화의 핵심도 거기에 있었다. 임정 요인의 유해를 모셔오는 일은 대한민국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음을 만천하에 밝히는 행위라는 것.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헌법의 언어다. 현행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다.
1993년의 국민제전은 그 조문을 의례로 집행한 사건이었다. 법통(法統)이라는 추상명사가 다섯 개의 유골함이라는 물질이 되어 국토에 안착한 날이라 해도 좋다.
바로 그 국가의례의 자리에 대종교 지도자가 섰다.
영상이 전하는 추도의 요지는 세 갈래다.
선열의 희생 위에 선 나라라는 자각, 분단인 채의 광복이 아니라 통일로 완성되는 광복이라는 염원, 그리고 홍익인간과 이화세계가 미래 세대에 물려야 할 정신이라는 호소.
셋 다 교리의 나열이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의 과제를 오늘에 되묻는 질문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국가장급 의례에는 여러 종단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관행인데, 대종교 지도자의 추도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잉 해석이 아니냐고. 답은 돌아온 유해 자체에 있다.
박은식은 1911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 환인현으로 가서 대종교에 입교했고, 교주 윤세복의 집에 1년을 머물며 '동명성왕실기'와 '대동고대사론' 같은 역사서를 써 내려갔다. 민족정신의 기준을 국조 단군에 세워야 한다는 각성이 그의 국혼 사학을 낳았다.
신규식의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이 대종교 입교와 그 인적 네트워크 위에서 전개됐다는 것도 학계 연구가 확인해온 사실이다.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 동제사를 세웠다. 이사장 신규식, 총재 박은식.
상해 최초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였고, 임시정부가 서기까지 상해 한인 사회의 중심 조직이었다. 돌아온 다섯 분 가운데 두 분이, 그것도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이와 임정의 산파가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 지도자가 그 영전에 추도의 말을 바친 것은 의전의 배려이기 이전에 역사의 인과였다.
다섯 선열의 신앙이 모두 대종교였던 것은 아니다. 목사였던 김인전처럼 다른 신앙의 궤적을 걸어온 분들이 있다. 논지는 '유일한 원류'가 아니라 '배제할 수 없는 원류'다. 그리고 그 원류는 이미 국가 규범 안에 세 겹으로 새겨져 있다.
(1)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이 하나, (2) 교육의 이념을 홍익인간으로 명시한 교육기본법 제2조가 둘, (3) 정부 수립 뒤 대종교가 대한민국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고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제도사가 셋이다.
1993년의 국가의례는 새로운 지위를 창설한 것이 아니라, 규범이 이미 새겨놓은 원류를 소리 내어 호명했을 뿐이다.
이 봉환이 문민정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정치 기획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정통성이 필요했던 국가가 그 뿌리를 어디서 찾았는가.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 그리고 그 임시정부를 떠받친 정신의 계보에서 찾았다. 기획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증언이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서문에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라고 썼다. 몸이 무너져도 혼이 살아 있으면 나라는 부활한다는 국혼론이다.
신규식은 '한국혼' 첫머리에서 마음이 죽는 것보다 큰 슬픔은 없으며 나라가 망한 것도 그 마음이 먼저 죽었기 때문이라고 통탄했다.
두 사람은 글로 남긴 명제를 자신의 유해로 다시 증명했다. '형'은 상하이의 공동묘지에서 스러져 갔다. '신'은 살아남아 끝내 돌아왔다. 만국공묘의 옛 자리에는 작은 표석 하나가 남았다.
그날의 비를 다시 떠올린다.
흰 우의의 시민들,
젖은 태극기,
흰 두루마기의 추도사.
독립운동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으로만 환원하면 이 장면은 설명되지 않는다. 총과 문서 이전에, 싸울 이유를 대던 정신이 있었다.
대종교인의 독립운동과 대종교의 독립운동을 갈라 세우려는 시선은 신앙과 행동이 한 몸이던 시대를 형식의 칸막이로 가두는 일이다.
1993년 8월의 동작동은 그 칸막이가 역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줬다. 유해는 돌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정신이 돌아올 자리다.
이 이야기는 1993년 동작동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해가 있다.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옛 이름은 화룡현 청파호다. 들 가운데 낮은 구릉에 무덤 셋이 나란히 있다.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 대종교의 삼종사다.
백두산 북쪽 기슭의 이 마을은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자리이고,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독립군이 야산에 파 두었던 무기 창고 두 개가 아직 남아 있다. 청산리로 이어진 길이 여기서 시작됐다.
세 분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한 독립유공자다.
국립묘지법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국립묘지 안장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은전을 베푸는 문제가 아니라 법이 이미 정해 놓은 자리를 비워 두고 있는 문제다.
그 무덤을 지금 관리하는 것은 화룡시 인민정부다. 1991년 문화유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반일지사 묘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국이 항일의 공적으로 기려 온 자리를, 정작 그 공적의 상속인인 대한민국은 오래 비워 두었다.
1993년의 국민제전이 무엇을 증명했는지 다시 생각한다. 헌법 전문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어 놓은 문장은 종이 위에 있을 때 문장일 뿐이고, 유해가 국토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될 때 비로소 효력이 된다.
법통은 선언이 아니라 이행이다. 김포공항에 내린 다섯 분의 유골함이 그 이행이었다.
그렇다면 화룡의 세 무덤도 같은 이행을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예우로 모셔 와야 한다.
국조를 세워 민족의 자기정체성을 지킨 이들, 그 신앙 위에서 무장독립군의 지휘부가 조직된 이들, 나라가 형체를 잃었을 때 혼을 붙들고 있던 이들이다.
이들을 모셔 오는 일은 한 교단의 숙원이 아니라 국가의 채무 이행이다. 헌법이 그렇게 적었고, 역사가 그렇게 흘렀다.
돌아올 자리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남은 것은 결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