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만뢰산(萬賴山;611.7m)-태령산(胎靈山;451m) 산행기 만뢰산과 태령산 줄기의 주산인 만뢰산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과 백곡면의 경계에 있으며, 주능선은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가르는 경계선이고, 정상은 도 경계선에서 진천 쪽으로 약 400m 안쪽에 위치해 있다. 만뢰산에는 신라시대의 토성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자연 경관 또한 빼어나다. 만뢰산
옛날엔 보련산(寶蓮山), 금물노산(金勿奴山), 금노산(金奴山), 또는 이흘산(伊訖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신라 시대에는 진천 고을을 ‘만노군’이라 했으므로 ‘만노산(萬弩山)’이라 일컫기도 했으나 현지 주민들은 만리산으로 부르고 있다. 지금의 산 이름인 ‘만뢰’라는 뜻은 나라에 난리가 나면 병정이건 백성이건 만민이 다 같이 피신할 수 있는 장소를 만뢰산이 베풀어 주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해발 표고가 600m 대에 지나지 않아서 산악지역인 강원도의 산에 견주어본다면 야산에 불과하지만 사방에 높은 산이 없는 진천지방에서는 최고봉으로 대접받는 진천의 진산(鎭山)이다. 태령산
그리고 함께 산행할 태령산은 김유신장군의 태(胎)를 묻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며, 그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 장군이 만노군(진천의 옛이름) 태수로 있던 진평왕 17년(595년)에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 태령산 자락의 담안밭(장군터)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태령산 자락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 유적과 신라 때 우물인 연보정(蓮寶井), 장군이 소년시절 말 달리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치마대(馳馬臺) 등 장군과 관련된 명소들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유적과 태실을 포함한 상계리 일대의 129필지가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4호로 지정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덕성산 아래 화랑벌 안내판
그리고 진천 지방은 김유신 장군에 얽힌 이야기 외에 신라시대에 화랑들의 수련 장소이기도 해 화랑에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진천군 광혜원면의 덕성산(519m) 자락 일대는 ‘화랑벌’이라 하여 화랑들이 수련을 했던 곳이라서 당시의 여러 유적들이 무술, 병무관, 비들목 등의 지명으로 많이 남아 있다. 만뢰산과 태령산이 속한 산줄기는 금북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에 해당한다. 즉 한남금북정맥이 칠장산(492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져서 그 중 금북정맥이 남으로 서운산(547.4m)으로 이어지고, 서운산 아래 엽돈재에서 금북정맥으로부터 갈라진 가지가 만뢰지맥이다. 이 만뢰지맥이 충북과 충남의 도계를 형성하면서 만뢰산에 이른다. 그리하여 만뢰산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지 하나가 갈라지니, 이 가지가 태령산으로 이어진 후, 태령산을 지나 동쪽으로 나아가서 문안산(416m)-잣고개-봉화산(412m)을 거쳐 백곡천에 그 여맥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만뢰산에서 남으로 뻗어가는 만뢰지맥은 계속 충북과 충남의 경계를 이루면서 덕유산(412m)-환희산(402.6m) 등을 지나 미호천에 이르러 그 여맥을 모두 가라앉힌다. 그런데 충청북도의 서쪽과 충청남도의 동쪽 도계를 이루고 있는 이 만뢰지맥 능선이 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던 무렵에는 신라와 백제가 패권을 다투던 중요한 전선(戰線)이기도 했단다. 그래서 만뢰산에는 신라 때 쌓았다는 만뢰산성의 옛 흔적이 남아 있고, 이 성터는 백제와 고구려 침공을 방어하던 신라의 군사적 요충으로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천 고을엔 만뢰산성 외에도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都堂) 산성, 진천읍 신정리의 걸미산성, 진천읍 문봉리의 문안(文案)산성, 문백면 옥성리의 파령(巴嶺)산성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산성이 있어서 이 모두가 삼국시대에 진천고을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진천은 미호천변으로 옥토가 펼쳐져 있어 충북의 3대 평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한해나 수해가 없는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지방에는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전한다. 옛날 용인에 사는 한 여인이 남편이 죽자 진천으로 개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 장성하자, 진천에 사는 어머니를 모셔가기 위해 찾아갔으나 진천에서 낳아 키운 아들이 완강히 반대하는지라 난처하게 됐다.
그래서 고을 원님을 찾아가서 판결을 요청했던 바, 원님이 고심 끝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천의 아들이 모시고, 죽어서는 용인의 아들이 모셔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는 데에서 그런 말이 유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설화들이 전한다. 아무튼 진천은 옛날부터 땅이 넓고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이요, 용인은 산자수명하며 산세가 순후하여 사대부가의 유명한 산소가 많으므로 죽어서 묻힐만한 곳이라 하여 ‘사거용인’이라 한 것 같다. 이런 살기 좋은 진천 땅에 위치한 만뢰산이나 태령산은 산세가 낮고 위험지역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린이나 노인을 동반한 가족 산행 대상지로 손색이 없다. 또한 수도권에서 가깝고, 하루해가 짧은 초겨울에도 쉽게 다녀올 수 있다.
만뢰산과 태령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여럿이 있으나 김유신 장군의 태가 묻힌 상계리의 태령산과 만뢰산을 잇는 종주능선을 택하여, 김유신장군 탄생지ㅡ태령산ㅡ쥐눈이고개ㅡ갈미봉ㅡ만뢰산ㅡ보탑사ㅡ주차장 그런 코스로 산행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수도권에서 산행기점인 태령산 자락의 김유신 탄생지로 가려면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그리하여 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 내려 톨게이트를 나서면 바로 21번 국도를 만난다. 그러면 얼핏 생각하기에 우회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반대로 좌회전하여 계속 21번 도로를 따라 가야 한다. 그리하여 진천 톨게이트에서 3km 정도 진행하여 진천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 오른편에 길상사(吉祥祠) 표지판이 나타난다.
길상사를 처음엔 절인 줄 알았는데, 절이 아니라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진천은 김유신 장군이 출생한 곳이자 어릴 때 자란 곳이므로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 진천에 있다. 길가에 큰 표지판이 서 있어서 찾기 쉬우므로 기왕에 온 김에 들렸다가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돌아가신 후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아 왕의 반열에 올랐고, 이곳 길상사의 사당인 흥무전의 이름도 장군의 시호인 흥무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김유신의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이고,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며, 만명부인의 아버지이자 김유신의 외할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으로 편입돼 있기는 했지만, 신라왕족과 통혼을 할 만큼 명문 귀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숙흘종의 입김에 의해 신라 조정에서는 만명과 서현을 떼어놓으려고 김서현을 3국의 각축장인 변방 만노태수(지금의 진천)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날 밤 만명은 연못가에 신발을 벗어 놓고 마치 자살을 한 것처럼 꾸며 놓은 뒤, 진천을 찾아가서 김서현을 만나 지금의 태령산 자락 담안밭 장군터에 살면서 김유신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 당찬 행동을 해가면서 훗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김유신을 낳았으니 어머니 만명부인의 혜안이 뛰어났던 것 같다. 신라는 이처럼 남녀 관계가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선덕, 진덕 등의 걸출한 여왕을 배출했는가 하면, 김춘추(태종무열왕)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훗날 왕비가 된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문명왕후)의 이야기라든지, 원효대사를 꾀내어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의 이야기 등 개방적인 남녀 관계에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길상사는 정비가 잘 돼 있어서 아늑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사당이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흥무전에 이르게 되고, 흥무전에는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그 외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사당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봄철엔 흥무전 앞에 아주 커다란 벚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봄이면 화사한 벚꽃이 만개하고, 또 주변에 배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있어서 벚꽃과 함께 복사꽃과 배꽃을 볼 수 있다.
길상사에 들렸다가 되돌아 나와 다시 21번 국도에 들어서서 잣고개를 넘어 7km 정도 천안 방향으로 진행하면 초원휴게소 앞 ‘보탑삼거리’란 곳에 이른다. 거기서 21번 국도와 헤어져서 태령산 들머리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갈림길이 지도에 ‘3거리’로 표시돼 있지만 실제로 현지에 가면 3거리가 아니고 4거리여서 조금 아리송하다.
21번 국도와 헤어져 나가는 도로가 두 가닥이고, 오른편(북쪽)으로 뻗은 길은 문복리로 이어지는 길이며, 왼편(서북쪽) 길이 보탑사와 태령산 들머리인 상계리 계양마을의 김유신 장군 탄생지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리하여 1.5km 정도 들어가면 길가 오른편에 ‘태권도 성지’가 있고, 이어서 궁도장 주차장이 있으며, 그 다음이 김유신 장군 탄생지인 담안밭 장군터이다. 이 셋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의 생가 터엔 1983년 건립된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복원된 생가 건물이 한 동, 그 외에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
장군터라고도 하는 이곳에 예전에는 길을 가로막는 큰 돌담이 있었기 때문에 일명 ‘담안밭’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유허비 뒤쪽에는 산행안내도가 있고, 태령산 정상 까지 1,1km라 적혀 있으며, 그 뒤로 등산로가 있다. 그러나 차를 가져갔다면 바로 아래 궁도장 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주차장 한쪽에는 ‘화랑정 올라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화랑정이란 활터를 뜻하며, 그 활터를 거쳐 태령산으로 올라가므로 주차장에서 바로 화랑정 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올라가면 된다.
주차장에서 4~5분이면 활터에 이르고, 활터의 사대 건물 뒤로 돌아가면 등산로가 이어진다. 그리고 활터 바로 위, 등산로에서 50여m 오른편에 연보정(連寶井)이란 우물이 있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만노태수(萬弩太守)로 있을 때 치소(治所;지금의 관청)에서 사용한 우물이라 전해지고 있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둥글게 쌓아 놓은 우물은 지름이 약 1.8m, 깊이 2.6m로서 우물을 중심으로 상단과 하단에 부분적으로 자연석이 아닌 가공된 돌들도 보인다. 이 돌들은 자연석으로 쌓은 돌들이 무너져서 나중에(수백 년 전) 보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등산로로 되돌아와서 7~8분을 올라가면 밧줄이 쳐진 계단 길이 이어지며, 이 계단 길이 주능선까지 이어진다. 그리하여 주차장에서 40여분 올라가면 주능선에 닿으며, 거기 ‘생거진천’ 이정표에 ‘태령산 0.2km, 만뢰산 5.4km, 보탑사 7.9km, 김유신장군 탄생지 0.9km’라 적혀 있다. 여기서 동쪽 태령산 정상에 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한다.
거기서 우측(동쪽)으로 5~6분이면 김유신 장군 태실이 있는 태령산 정상에 이른다. 산행기점인 주차장에서 1.1km, 45분 정도 걸린다. 태령산은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실은 동봉(451m)에 있다. 태실(胎室)이란 왕가에서 아이를 출산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하며, 태령산 정상의 김유신 장군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지름 9m, 높이 1m 규모로 무덤처럼 납작하게 봉토를 올렸다. 그리고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태실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높이 1.2~1.8m, 길이 216m의 돌담이 산성처럼 축조되어 경사면을 에워싸고 있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돼 있어서 정확한 사실이고, 지금 남아 있는 태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 형식이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적이다(사적 제414호). 그래서 그런지 태령산 태실 옆에 서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태령산 정상엔 태 무덤 외에 안내판이 있으며, 태실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서쪽으로는 만뢰산이 뾰족하게 솟아있고, 동쪽으로는 진천읍, 남동쪽으로는 문안산과 봉화산 뒤로 멀리 두타산(598.3m)이 하늘금을 이룬다. 남으로는 덕유산(412m) 허리인 장고개를 넘는 병천 방면 21번 국도가 실낱처럼 내려다보이고, 장고개 너머 멀리는 서림산(316m)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쾌청한 날엔 남서쪽 멀리 천안 독립기념관 방면의 흑성산(519.5m)까지도 보인다.
태령산(태실)에서 되돌아 나와 앞서 주차장에서 올라왔던 주능선 삼거리를 지나,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전진하게 되는데, 이 능선이 갈미봉 남동릉이다. 그리하여 동봉에서 17~8분 가면 지형도 상에 또 하나의 태령산(454m)인 서봉에 닿는다. 이곳은 사방이 수림에 가려 시야가 막혀 있다. 헌데 이 서봉에서 길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다. 양쪽에 모두 표지기가 매달려 있어서 헷갈리고, 처음 가는 사람은 길을 아주 잘못 들기 쉽다. 왼편(서쪽) 길은 연곡리로 하산하는 길이고, 오른편(북쪽) 길이 갈미봉과 만뢰산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육안으로 보면 서쪽 길로 가야할 것 같이 보여서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혼란스럽다. 초행자는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오른편 길은 상당한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그런 길로 7~8분 내려가면 경사가 완만한 편안한 길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10여분 가면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두 번을 내려가면 거의 바닥에 닿는 듯 표고가 낮아지고, 안부에 내려서면 왼편에 나뭇가지 사이로 ‘만뢰산 생태공원’이 보여서 ‘쥐눈이’란 곳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리고 7~8분, 살짝 오르막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간 안부가 ‘쥐눈이’라는 곳이다. 4거리 안부에서 왼편으로 쥐눈이 농가의 파란 지붕이 보인다.
이후 긴 오르막이 이어지고, 20여분 올라가면 고압선 철탑이 서 있는 임도에 닿는다. 이곳을 쥐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임도 양쪽에 각기 하나씩 이정표가 서 있다. 철탑 쪽 이정표엔 ‘쥐눈이마을 1.2km, 태령산(태실) 3.0km, 김유신장군 탄생지 3.7km’라 적혀 있고, 건너편 이정표엔 ‘연곡저수지 2.0km, 백곡 34번국도 6.7km, 만뢰산 2.0km, 보탑사 4.5km’라 적혀 있다.
이후 해발 560m인 갈미봉 정상까지 가파른 오르막이 20여분 이어진다. 태령산(동봉)에서 3.6km, 1시간 30여분 걸린다. 갈미봉은 멀리서 보면 뾰족한데, 막상 정상에 올라서면 펑퍼짐하고, 거기 이정표엔 ‘보탑사 3.9km, 만뢰산 1.4km, 철탑진입로 0.6km, 연곡저수지 2.6km’라 적혀 있다. 갈미봉
그리고 갈미봉 정상에서 16~7분 전진하면 오른편으로 하수문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삼거리가 나타나고, 이어서 3~4분이면 왼편으로 보련골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닿는다. 갈미봉에서 20여분 거리이다. 거기에 ‘제1지점 119 표지판’이 서 있다.
거기서 7~8분이면 팔각정 정자가 있는 곳에 이른 후, 1분이면 만뢰산 정상에 닿는다. 산행기점인 주차장에서 6.7km, 2시간 40분 정도 걸리고, 태령산(동봉)에서 5.6km, 2시간 정도 걸린다.
만뢰산 정상은 널찍한 헬기장이고, 표지석과 일등 삼각점(진천 11, 1984재설)이 있으며, 한쪽에 등산안내판이 서 있다. 정상은 사방으로 확 트여 있어서 서남쪽으로는 흑성산과 봉황산(427.4m)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진천의 장군산(436.1m)과 무제산(574m) 등 주변 산들이 보인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방금 지나온 태령산 줄기가 보이며, 남쪽으로는 진행해야 할 만뢰산 능선이 이어진다.
하산 길은 서쪽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 2~3분 진행하면 신선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연거푸 두 번 나타나고, 정상에서 10여분 가면 도계 삼거리에 닿는다.
만뢰산을 기점으로 한다면 첫 번째 삼거리이다. 엽돈재에서부터 충북과 충남을 가르는 능선이 이어지는 곳으로 거기 이정표에 ‘엽돈재 7.5km, 만뢰산 0.4km, 보탑사 2.1km, 보련골 1.6km’라 적혀 있다. 이후 도계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면 길이 평탄하여 기분 좋게 내려갈 수 있다. 그리하여 7~8분 내려가면 두 번째 삼거리가 나타난다. 거기 이정표에 ‘보련골 1.1km, 만뢰산 0.9km’라 적혀 있고, 그 옆에 ‘제3지점 119 표지판’이 서 있다.
그리고 10여분 내려가면 세 번째 삼거리가 나타나면서 거기 이정표에 왼편을 가리키며 ‘보탑사 1km’라 적혀 있고, 오른편을 향해 ‘보탑사 1.2km’라 적혀 있으며, ‘만뢰산 1.3km’라 적혀 있다. 거기서 왼편 길을 택하면 아주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4분 정도 진행하면 다시 이정표가 나타나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키며, ‘보탑사 0.6km, 보련마을 주차장 2.5km’라 적혀 있다. 그리고 7~8분이면 보탑사에 닿는다.
그렇게 할 경우, 만뢰산에서 보탑사까지 하산하는데 2.3km, 40여분 걸리고, 산행기점인 태령산 주차장에서 9km, 순수산행시간 3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쉬는 시간 포함하면 4시간 정도 걸리는 수월한 산행이다.
<보탑사(寶塔寺)> 아름다운 보탑사가 들어서 있는 곳은 행정적으로는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이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으며, 고려시대의 큰 절터로 전해오던 곳이다.
이곳에 21세기를 앞두고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동시에 전통목조 건축문화를 재현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민족문화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보탑사란 이름은 보배로운 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어 자비심으로 가득 차게 해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한다.
1991년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하고, 대목수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 감독 아래 1992년 5월에 착공하여 1996년에 문을 열었으며, 2003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특히 3층 보탑은 쇠못하나 쓰지 않은 순수한 목탑으로 삼국시대 목탑형식을 빌어 고스란히 재현한 2000년대의 문화재라 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무려 42.71m, 척 단위로는 탑신이 108척이어서 백팔번뇌를 상징하고 있다.
80m가 넘었다는 황룡사 9층탑에는 못 미치지만 옛사람들의 건축술을 재현한 기념비적 건물이다. 이 보탑사 목탑의 특이한 점은 참배객이 직접 3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설계돼 있는 점이다. 그리하여 1층에는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신 금당이고, 2층은 경전을 모신 법보전(法寶殿)이며, 3층은 미륵 3존불을 모신 미륵전으로 구성돼 있다.
1층의 금당에는 심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석가여래,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고, 4방에 출입문이 나 있으며, 출입문 위의 현판은 각기 다르게 대웅보전(大雄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 적광보전(寂光寶殿), 약사보전(藥師寶殿)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보탑사는 비구니 절답게 경내가 깨끗하게 정돈돼 있으며, 구석구석이 잘 가꾸어져 있어서 비록 오래된 고찰은 아니지만 전체의 조화가 너무 아름답고 황홀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산을 사랑하다가 보니 자연을 사랑하게 되고, 따라서 인공이 가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만 인공이라 해서 모두 배척할 것이 아니구나, 인공으로 이룬 아름다움도 이렇게 환상적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백비(白碑)> 보탑사 요사채 옆 바깥마당의 비각에 있는 석비는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 알려져 더욱 유명하다(보물 제404호). 조형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북받침 위에 빗몸을 세웠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얼굴이 손상돼 말머리 같은 모습이다. 앞발톱도 일부 손상돼 있으나 여의주를 문 용 아홉 마리가 뒤엉킨 이수는 사실적인 조각이 돋보인다.
우리나라에 백비가 4기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문이 없어 무자비(無字碑)라고도 한다. 경기도 파주 감악산 정상에 있는 백비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라고 전하지만 확실치 않고, 전남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에도 백비가 있으며,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비는 주인이 분명한 유일한 백비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청백리인 아곡 박수량(莪谷朴守良)을 기리는 비석으로 명종 임금이 비석을 내리면서 비문이 오히려 청백리에 누가 된다면서 글자를 새기지 말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절 앞의 600년 된 느티나무
이상으로 김유신 장군의 유적도 보고, 비교적 편안한 산행도 마쳤으며, 아름다운 보탑사에서 멋진 시간을 보냈지마는 차를 두로 온 주차장까지 산길이 아닌 도로를 따라 4.4km, 1시간 정도 걸어가야 원점회귀 산행이 마감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런데 보탑사에서 2km, 30여분 걸어 나가면 연곡리에 시내버스 종점이 있다. 연곡리에서 보탑사까지는 길이 좁아서 승용차는 다닐까 시내버스는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연곡리까지 걸어 나가더라도 워낙 오지라서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으므로 시간 맞추기가 곤란한데, 오후 3시 차편이 있어서 이에 맞추면 이용이 가능하다. 산행을 시작할 때 아예 이 시간에 맞추어 하산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절에 왔다가 가는 신자들의 차편에 편승하는 방법도 있으나 그건 운이 좋아야 한다. 글쓴이 - 둘 산악회 아미산(이덕호)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
출처: amisan511 원문보기 글쓴이: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