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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진영과 두 종말
4-5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4장은 “또 내가 보니”(1상),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3장도 “내가 보니”(13:1) 하고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에는 “보았다”는 말이 54회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주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13장에서는 무엇을 보여주셨고, 14장에서는 또 무슨 광경을 보여주시는가? 13장에서는, “바다 짐승, 땅 짐승”에 의하여 박해를 당하고 있는 지상의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13장과는 대조적인 밝고 찬란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장과 14장은 대조적인 관점으로 보아야만 바로 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바다 짐승, 땅 짐승”과 대조되는 온유한 어린 양을 보여주시고, 짐승의 추종자들과 대조되는 어린 양을 따르는 순결한 144,000인을 보여주십니다. 둘째로 짐승의 표와 대조되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 이름이 이마에 있고, 13장에서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3:15) 하였으나, 14장에서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은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11), 즉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10하) 된다고 대조와 반전(反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13장은 지상(地上)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 장면이라면, 14장은 천상(天上)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장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의 몸은 13장에 있지만 영은 14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난 파도를 바라보다가 빠져 들어간 베드로와 같이 13장만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14장을 바라보면서 인내(忍耐)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라는 격려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4장에서도 “두 진영과 두 종말”을 볼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천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5) 어린 양과 함께 섰는 144,000인
둘째 단원(6-13) 짐승의 표를 받는 자의 종말
셋째 단원(14-20) 두 가지 추수
첫째 단원(1-5) 어린 양과 함께 섰는 144,000인
①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서 있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 합니다. “또 내가 보니”(1상) 합니다. 13장에서도 1절과, 11절에서 “내가 보니” 하고 시작이 되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도 주시해 보아야만 하지만,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서 있는”(1상) 광경을 더욱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하고,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라는 것인가?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한 “어린 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온 산”은 땅에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히 12:22)라 한 하늘의 시온산인 것입니다.
②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1중) 합니다. 어린 양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충만한 수(12×12×1000)를 상징하는 144,000이 서 있는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7장에서는,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6:17)에 응하여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144,000인과,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광경을 보여주셨는데, 14장에서 또 다시 144,000인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13장에 등장하는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인 무시무시한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어린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거짓선지자의 미혹 중에서도,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10, 14:12) 한,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고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3:15) 했는데,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4)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믿음의 순결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영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점이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 하신 말씀에 나타나는데, 이를 문맥적으로 보면 복된 죽음은 순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③ 그러므로 14장의 광경을 보여주시는 의도는, 13장의 상황에 처해있는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인데 요한만이 바라볼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고난 중에 늘 바라보아야 할 장면인 것입니다. 충성된 증인 스데반 집사도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행 7:55)을 바라봄으로 넉넉히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면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3)고 피곤해하는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눈으로는 14장의 장면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는 이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환난과 시련 중에서도 마음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하늘에서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14장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인 것입니다.
④ 그런데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하) 합니다. 이는 13장 마지막 부분에서 짐승이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3:16-17) 한 것과 대조적인 면에서 한 말씀입니다.
이마에 표를 했다는 것은 그가 어느 진영에 속해있으며 누구의 소유인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屬)한 자들”(4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다시 상기해야 할 점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 한 말씀인데 이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이 된 자들은 죽임을 당할지언정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도 짐승의 표를 받으면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그릇된 말을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복음서에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요한복음에 확고하게 서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경고하기를,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교묘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합니다. 이렇게 곡해할 것을 알았기에 13장에서도,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0) 말씀하고, 14장에서도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 말씀하면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13)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 2:11-12)라고 고백하면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즉 순교당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마의 표는 하늘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동안에 성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천상에 있는 144,000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도다” 한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는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9) 한 말씀과 결부되는 것으로 그들은, “바다 짐승, 땅 짐승”의 박해 중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킴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한 “이긴 자”임을 나타내는 마크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13-14장은 두 진영(陣營)과, 두 종말(終末)의 대조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소속이 없는 자가 없고, 소유주가 없는 자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영적 전쟁이란 이 두 진영 간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가리켜서, “땅에서 속량함을 얻은 144,000인”(3)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속량”을 받았다는 말을 4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어서 강조적인데, 속량이란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5:9)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에서 우리 주님을 계속적으로 “어린 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여주신 은총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부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⑤ 이점이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3) 한 말씀에서도 나타나는데, 새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기에 새 노래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의 진영에 속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의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첫째는,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4상) 합니다. 이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8절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신 말씀과 결부되는 것입니다.(참고, 19:2). 영적 음행이란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말인데, 죽을지언정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기를”(11) 거부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절(순결)이 있는 자라”(4중)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4하)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디로”란 순교의 현장을 암시하는 말인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 대로 겟세마네 동산에도, 갈보리 산 십자가까지도 순종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순교자, 또는 순교정신으로 무장한)을 “처음 익은 열매”(4하)라 하는 것입니다.
⑥ 셋째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5상) 합니다. 이 “거짓말”을 윤리적인 식언(食言) 쯤으로 여긴다면 계시록의 사상을 너무나 모르는 처사입니다. 이는 거짓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거짓선지자와 대조되는 관점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훼방하는 유대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3:9)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21장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고(27),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게(21:8) 된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하신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짐을 받을 자의 목록에 “거짓말하는 자들”(21:8)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란 참과 거짓의 싸움인 것입니다.
⑦ 다시 강조합니다만,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5) 한 뜻이 평생에 거짓말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다는 그런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증언한 말씀에는 거짓이라고는 “흠”만큼도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21:5, 22:6) 하신 신실하고 참된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거짓선지자”인 것입니다.
“거짓말”이 얼마나 큰 해독을 끼치는지 아십니까?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1-2)고 경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44,000인은, “자기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긴”(12:11 자들이요, 11장의 두 증인처럼 증언하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던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라는 말씀은, 증인된 우리의 “입”을 점검하게 합니다.
둘째 단원(6-13) 짐승의 표를 받는 자의 종말
①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6) 합니다. 14장에는 천사의 활동이 활발한데, 여섯 번(6, 8, 9, 15, 17, 18)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말씀을 증언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증인 된 우리가 증언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처음 등장하는 천사(6)는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합니다.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는데, 첫째는 어찌하여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그들이 전한다는 영원한 복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② 이에 대한 빛을 비춰주는 열쇠가 있는데 복음 전할 대상(對象)에 대한 언급이 그것입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6)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요한에게 펴 놓인 책을 갖다가 먹고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 한 명령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7장에서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이 어떤 방도로 이루어지는 가를 상고한 바 있습니다. 같은 원리로 온 천하 만민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을 날아가고 있는 천사를 통해서도,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순교정신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증인들을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이는 천사가 할 일이 아니라, 바로 자신(교회)에게 명하신 지상명령이요,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를 독려하고 계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③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요한에게,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10:7) 한 그 복음이요, 갖다 먹고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한 그 펴 놓인 두루마리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영원한 복음”이라 하는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겠다”(겔37:2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새 언약의 복음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점을 그가 전하고 있는 내용이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7) 합니다. 이는 결코 새로운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첫째 천사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증언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기쁜 소식만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전도자는 “복음과 심판”을 함께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④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기를,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8)고 외칩니다. 먼저 규명해야 할 점은 이 시점에서 어찌하여 바벨론을 거론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최초로 짓밟은 것이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적그리스도의 대명사요, 이때로부터,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한 “이방인의 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한 묘사를 요한 당시의 “이제 있는” 것으로 보면 로마요, “전에 있던” 것으로 보면 바벨론이 되고, 장차 있을 바벨론은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시 2:2) 하는 불신 세계를 총칭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둘째 천사를 통해서 우리가 증언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긴박성”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17-18장에 가서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는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졌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부르는데,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바벨론도 멸망했고, 로마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진영도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다”(겔 7:2-3)고 긴박함을 말했습니다.
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9-10)고 경고합니다. 이 경고는 11절에서도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재차 강조됩니다.
이 경고가 성도들에게는 차라리 순교를 당할지언정 비 진리와 타협하지 말라는 격려가 되고, 불신자들에게는 짐승의 표가 아닌 어린 양의 인침을 받으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됩니다. 셋째 천사를 통해서 우리가 증언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선지서를 보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참 선지자들은 모두가 죄를 책망하면서 심판을 경고한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렘 8:11) 라고 듣기에 좋은 말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을 좋아하고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⑥ 이 시점에서 잠시 멈추고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말씀이 주어지는데,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 합니다. 같은 말씀을 13장에서도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 중간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3:10하) 하시는 것만 보아도 이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계시록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난해한 것도, 기이한 것도 아닙니다.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라”는 한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말하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시는 또 한 말씀이 있는데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먼저 “기록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상) 하십니다. 이를 넓은 의미에서는 “주 안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만, 문맥적으로 보면 순교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13:15절에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 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한 말씀과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을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패배한 자 같으나 하늘의 관점으로 보면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하고 장엄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12절과 연관이 되는데, 성도들이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순교까지를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절(순결)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4)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셋째단원(14-20) 두 가지 추수
①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14) 합니다. 본 단원은 크게 두 부분(14-16, 17-20)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은 “인자”(人子)로 묘사된 주님께서 “손에 예리한 낫”을 가지시고 추수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추수냐, 구원의 추수냐”로 해석은 갈리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의 추수가 심판의 추수임이 분명하다면 첫 번 추수는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시는 구원의 추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고, 두 가지 추수가 함께 이루지게 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의 추수가 심판의 추수라면 17절에서 별도로 “또 다른 천사가, 역시 예리한 검을 가졌더라”고 구분하여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②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15).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6)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암 9:9)고 증언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곡식을 추수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도는 성도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여겨집니다.
③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17) 합니다. 이 천사의 추수가 무슨 추수인가는 19절이 설명해주고 있는데,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한 대로, 심판의 추수 꾼인 것입니다. 그런데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18)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심판을 촉구하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저들이 어찌하여 심판을 당하게 되는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대속 제물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곡식도 익었다고 말하고(15), 포도도 익었다”(18)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죄악이 가득했을 때”(창 6:5),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서 추방할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창 15:16) 아니했기 때문에 400년 후에야 주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익었다는 개념입니다. 최후의 종말도 죄악이 가득 차게 될 때 임할 것입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20)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사야서 63:1-6절을 반영인데, 심판의 엄중성을 나타냅니다.
④ 마지막으로 부언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록에는 몇 번의 사이클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6:12절에서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했을 때, 이는 분명 종말에 되어 질 현상입니다. 9:13절에서 여섯째 나팔을 불 매, 유브라데에 결박당했던 네 천사가 놓여나고 “이만만”의 마병대가 등장하여 인류의 ⅓이 죽임을 당할 때가 종말인줄 알았습니다. 또한 어린 양과 함께 144,000명이 시온 산에 섰고,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을 밟는 14장의 내용은 분명 종말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계시록이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하심으로부터 재림까지에 일어날 상황들을 주제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무시하기 때문에 무리한 해석과 혼란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며 순결을 지키십시다. 죄악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 언제 터질지 모를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죄악은 익어가고 있는데, 성도들은 확실히 익어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