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신문조서(제3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피의자 김창영 右 반민법위반 피의사건에 관하여 4282년[1949] 4월 20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忠淸北道調査部 서기 김상철[金相喆]을 입회시키고 前回에 계속하여 피의자의 신문함이 如左함.
문 前回의 진술은 허위는 없는가.
답 네. 없습니다.
문김일성[金日成] 귀순공작을 단념한 후 소위 滿洲國 국책에 의한 항일군 귀순공작 及 토벌공작에 대하여 피의자의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계하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대로 진술하라.
답 其後에는 귀순공작(일반 공산군)은 各省에서 주관하여 시행하고, 토벌공작은 關東軍에서 직접 단행하였으므로 내용을 자세히는 모르나 아는 대로 진술하겠습니다.
문 그대는 귀순공작에 대하여 공로가 현저할 뿐 外라 지위에 있어서 各省 각 공작의 내용을 모를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자세히 모른다고 말하는가.
답 前述 여소재[呂紹財] 귀순공작에 성공한 후 各 省에서는 그 공로를 탐하여 관내 공작은 각자 省에 일임하여 달라고 요청이 있었으므로 治安部 당국에서는 각각 省 단위로 일임하였고, 토벌에 있어서는 관동군에서 직접 관계하였으므로 군사비밀상 참견치 못하였고, 사후 연락 혹은 보고 등으로 내용을 아는 대로 진술하려고 한 것입니다.
답 귀순공작에 있어서 吉林省 공작반 총지휘자는 日人 도변[渡邊](경비과장)이었고, 同省 내 樺旬縣 공작반장은 滿人 호국신[胡國臣](省警佐), 同省 내 敦化縣 及 鱎河縣 공작반장은 日人 강본[岡本](省警佐) 등이었으며, 通化省 공작반 총 지휘자는 日人 안곡융일랑[岸谷隆一郞](省 경무청장)이었고, 同省 내 輝南縣 及 濛江縣 공작반장은 조선인 안광훈[安光勳](독립군으로 귀순한 후 당시 省 경좌)이었으며, 間島省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劉鴻洵]( 간도성 차장)이었고, 同省 延吉縣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金松烈](정보 제공에 종사한 자), 同省 汪淸縣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桂蘭秀](前 간도성 사무관), 同省 安圖縣 공작반장은 日人 편전[片田](省경좌) 등이었으며, 各 省 移動 헌병 공작반장은 日人 장도[長島](헌병 曹長)이었습니다. 토벌공작에 있어서는 총사령부를 길림에 두고 총사령관에 日人 야부[野副] 소장, 참모 북부[北部] 중좌(日人) 밑에 각 지구 사령관을 두었는데, 통화지구에는 日人 길천[吉川] 중좌, 길림지구에는 日人 소림[小林] 대좌, 간도지구에는 日人 포본[布本] 중좌, 牧丹江지구에는 日人 小林 대좌 등이었고, 각 지구 사령관은 관하 일본군, 만주국군 及 경찰대를 통할 지휘하였었습니다.
문 그것은 내부기구에 불과하니 각 공작의 실적을 말하라.
답 귀순공작에 있어서는 김일성부대 참모장 임수산[林守山](조선인)은 부하 30여 인을 인솔하고 장도[長島] 헌병 공작반에 귀순하였고, 楊 군장의 사령부 총무부장 전광[全光](조선인으로 본명은 오성륜[吳成崙]으로 上海시 김구[金九], 한형권[韓亨權]의 命을 받아 전중[田中] 대장을 저격타가 실패 투옥 중 탈옥하여 불란서, 露西亞를 거쳐 入滿한 자)은 10여 명 부하를 인솔하고 안광훈 공작반에 귀순하였고, 同 사령부 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조선인)은 부하 6명과 같이 계난수 공작반에 체포 귀순하였고, 同旅의 소속 단장 김백산[金白山](조선인)은 단신으로 김송렬 공작반에 귀순하였고,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노재범[盧在範](조선인)은 부하 6명과 같이 김송렬 공작반에 체포 귀순하였고, 其 이외는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조선인, 滿人 합하여 약 200여 명이 귀순하였습니다.
답 아는 범위에서 주요한 것을 말하면 군장 양정우는 몽강현 내에서 通化경찰부대에게 사살당하였고, 제5師長 진한장[陳翰章](滿人)은 목단강성 鏡泊湖 부근에서 간도경찰대에게 사살당하였고, 양정우 정치주임 위극민[魏極民](滿人)은 돈화현 내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당하였고, 同 정치위원 한인화[韓仁和](滿人)는 연길현 哈爾巴岺 부근에서 역시 토벌대에게 사살당하였습니다.
문 당시 토벌대에 숙청을 당한 항일군 수가 수백 명인 줄 아는데 기억이 없는가.
답 미미한 공산군은 수백 명 숙청당하였으나 성명과 시기, 장소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문 당시 토벌대에서 비행 폭격한 사실이 있는가.
답 營口 해상경찰대 소속 비행기 2대를 토벌사령부에 이속되고, 대장은 日人 산전[山田] 警正이며, 주로 간도, 통화, 길림 3성 내 匪團의 정찰에 종사하였는데 폭격한 사실은 모릅니다.
문 숙청공작이 일단락된 후에 그대는 무엇을 주로 하였는가.
답 전술한 숙청공작에 대해서는 직접 지도권이 없었고, 직무에 의한 범위 내에서 만주국 국책을 완수키 위한 간접적 관련된 협조만을 하였으며, 김일성 공작 실패 후에는 주로 만주국 내 조선인 撫育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문 撫育사업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범위며, 어떻게 추진하였는가.
답 在滿 조선인의 산업, 경제, 문화 향상을 圖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과 懇談한 후 주요 문제는 開拓總局 제2과 及 대사관 朝鮮科와 연락하여 즉시 해결 又는 朝鮮總督府 及 만주정부에 건의하도록 긴밀한 연락을 하였고, 사소한 문제에 대하여서는 현지에서 직접 해결을 시켰습니다.
문 지방 순회는 어떻게 하였는가.
답 만주국 참의 이범익[李範益]과 同道하여 만주국 내 주요 도시는 전부 순회하였으며, 특히 協和會, 省 본부회의와 각 성 중요회의에는 참석하였습니다. 右 본인에게 讀聞시킨바 相違가 無하다 하고 서명 拇印함. 공술자 김창영 단기 4282년[1949] 4월 20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신정호[申政浩] 입회인 서기 김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