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나"친구 A는 저번 주 소개팅에서 훈남을 만났다고 하던데, A의 친구 B는 아이돌st 연하남과 소개팅으로 만나 달달한 열애중이라던데, B의 친구 C는 한 연애가 끝날 때마다 그 아픔을 소개팅으로 달랜다고 하던데, C의 친구 D는 사랑은 다른 소개팅으로 잊혀지는 거라고 명언을 남겼다고 하던데,
왜! 나만! 소개팅에 나가는 족족 시트콤 아닌 시트콤을 찍게 되는 걸까. 남신은 바라지도 않으니 훈남이라도, 아니, 주제 넘게 훈남은 바라지도 않으니 흔남이라도!"
나도 연애 좀 해보게 괜찮은 남자는 몽땅 다 어디에 숨어있는 거냐고,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비슷비슷한 답변 뿐,
소개팅을 해보라고? 그래, 하자. 나도 해보자, 소개팅! 저마다 꿈꾸는 이상형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따뜻한 분위기, 자상한 성격, 상냥한 태도, 세련된 유머감각, 넘치는 패션감각, 각 나오는 신체조건, 치명적인 매력, 바라보기만 해도 배부른 얼굴!
하지만 뭐, 딱 맞는 이상형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0.00000034%에 불과하다고 하니 폭탄만 아니길 빌어봐야겠죠. 외모가 떨어진다고 다 폭탄은 아니거든요. 매너와 개념은 곱게 접어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낸 이들도 있으니까. 외모는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이 폭탄이 되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그렇게 영 아니냐고요?
아무것도 몰라요, 니가 정해주세요~
무엇이든 다 정하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개팅에 앞서 뭘 해야 좋을지, 뭘 먹어야 좋을지 등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은 하고 나왔기를 기대하는 게 무리일까. 고민이 곧 '성의'라고 생각하는 게 오버일까. 처음엔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디서 만나야 좋을지 물어보는 문자에 소박한 배려심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소개남, 배려심이 아니라 소심이다. "뭐 먹을까요?" "뭐 좋아해요?" "어디 갈까요?" 끊이지 않는 갈팡질팡. 하지만 이 남자도 "글쎄요……."라는 대답밖에 돌려주지 못하는 나란 여자, 답답할 테니, 너무 타박하지는 않겠다. 어렵사리 메뉴를 고르고 들어가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입에 지퍼를 채우는 남자. 대화까지 내가 리드해 나가야 할 상황이다. 이럴 거 대체 왜 나왔어!
호감을 보이니 사랑으로 해석하는 놀라운 독해력
지저스! 괜찮은 남자를 오랜만에 만난 거 같아 신이 났다. 언제까지 여자는 수동적으로 마음을 끄적여야 하는가, 늘 불만이었던 난 적극적인 태도로 소개팅에 임했다. 솔직하게 호감을 내비쳤고, 애프터에 대한 은유도 충분히 남겼다. 이거 이거, 이러다가 진짜 연애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 썸남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와 문자가 오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점검한다. 너무 늦게 집에 들어가는 거 아니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다거나, 친구를 만난다고 이야기하면 혹시 남자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날려온다. 나는 호감을 보였을 뿐인데, 이미 자신의 소유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 부담스러움을 뛰어넘어 솔직히 무섭다.
자서전 대필작가 구하러 오셨어요?
소개팅에서 서너 시간쯤 마주앉아 있었을 뿐인데, 나는 이미 소개남의 지난 연애사와 가족관계,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역사를 꿰뚫는다. 그에게 관심이 넘쳐나기 때문이냐고? 아니, 묻지도 않은 자신의 'everything'을 줄줄 읊어주었기 때문. 다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줄 아는 남자? 물론 좋다. 하지만 마치 자신이 게스트로 초대된 토크쇼라는 듯이 행동하는 남자는 지루하다.
나는 그를 주인공으로 모신 MC가 돼주어야 하는 건가. 누구나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당연히 나에게도 그러한 욕망은 있다. 내가 소개남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내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 자연스럽게 나란 여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운을 떼지만, 또 다시 자기 이야기로 받아치는 센스. 감탄할 수밖에. 게다 은근슬쩍 묻어나는 돈 자랑, 학벌 자랑, 차 자랑, 집안 자랑, 자기 자랑! 저기, 여기는 상품 박람회가 아니잖아요.
알고 보니 이 남자, 여자친구 계신다
괜찮아, 성격도 잘 맞는 것 같고 센스 있게 상대를 잘 배려하는 사람이지. 이제 정말 깊고 깊은 절망의 끝에서 광명이 비추는가! 커플이 되는가! 하지만 진지하게 스텝을 밟아가려고 할수록 알 수 없는 벽이 느껴졌다.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데, 우연찮게 주선자에게서 고해성사를 듣게 되었다.
뭐? 임자 있는 남자라고? 그럼 왜 소개팅에 나왔어? 여자친구와 잠깐 싸우고 연락을 두절한 상태에서 홧김에 소개팅에 나왔다는 소개남, 괘씸하다. 주선자의 멱살을 쥐어 비틀어도 분은 풀리지가 않는다. 이번엔 정말 헤어질 거라며 다짐 또 다짐을 하길래 괜찮을 줄 알았다는 주선자에게 무엇을 욕하랴. 이게 다 내가 솔로이기 때문이다. 감히 여리디 여린 솔로녀의 마음에 불화살을 땡겨? 우리 제발, 애인하고 잠깐 싸웠다고 소개팅 나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