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브라 궁전의 추억 2)
우리는 그라나다왕궁 입구에서 들어서자 바로 이어진 헤네날리페라 하는 왕의 여름 별장으로 향했다. 19세기 까지
개인소유로 되어 있어서 손실이 많아 시설은 거의 볼 것이 없으나 물을 많이 이용한 정원이 꽤 아름답다. 그 날도 정원사들이 나무 손질에 여념이
없다. 아세키아 정원이라 하는 곳이다. 어제 세비야의 왕궁에서 보았듯 이슬람왕궁은 건축물의 특성 말고도 꽃과 정원수 그리고 물이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물과 정원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던 것 같다. 건물과 건물 사이엔 꼭 수로가 놓여있거나 정원이 있으며 거기에 분수대가 물을 뿜어낸다.
자연을 조형미 있게 융화시키고자 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어 따사롭고 부드럽다. 이곳 아침의 공기가 보다 산뜻한 것은 정원 바로 뒤가 산으로
이어져 있으며 가까이 냇가가 있어서 일게다. 왕궁에선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그라나다 시내를 보며 사진 찍기도 그만이다.
우린 왕궁을 향해 내려왔다. 오는 도중 이슬람 특유의 문양을 파는 세공품 집이 있어 기념품을 하나 사고 그라나다
책자도 사고 왕궁 입구로 향하였다. 이 왕궁은 바로 아래에 위치한 13세기 알카사르를 확장하면서 차츰 넓혀지고 자리를 잡은 것으로 14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 궁전에 대해 설명할 때는 으레 최상급 표현을 동원한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다. 알람브라 요새는 가장 놀라운 건축물의 하나이고 궁전은 현존하는 세계 아랍 궁전 중 최고다. 낙원(樂園)과 흐르는 물을 결합시킨
설계는 <코란>의 에덴동산을 구현한 것으로, 이런 곳은 이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 말은 최근에나 나온 말이고 이 궁전을
점령한 사람들과 나폴레옹 군대는 인류의 유산을 무시하고 탄약 창고, 감옥, 병원 따위로 썼었다.
그런 한심스런 행위가 훗날 일어나리라 염려하였던 것인지 이 성벽엔 이런 시(詩)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을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곳이다. 1492년 1월 2일 스페인을 공동 통치하던 부부(夫婦) 군주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그라나다에 입성함으로써 779년에
걸쳤던 이슬람 세력의 이 도시 점령기가 끝난다. 이로써 약 800년간 스페인에 머물렀던 무어인(아프리카의 아랍인)의 시대도 종막을 고하고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 세력이 완전히 탈환했다. 아프리카로 물러난 아랍 사람들이 스페인에 남기고 간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이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알람브라 궁전이다. 그라나다의 열쇠를 스페인 왕에게 넘겨 준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모로코로 떠나는 길에 언덕에 올라 마지막으로 이 궁전을
바라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 언덕은 훗날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 궁전은 이슬람 나사르 왕조가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에 걸쳐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 왕국을 세울 무렵은 이슬람교도의 통치의 쇠퇴기라 할 때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 가던 시기에 어떻게 이런
궁전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왕족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최후를 예감하면서 더욱 탐미(耽美)에 빠져들었던 것은 아닐까.
난 이베리아의 마지막 무어인 보아브딜 왕을 꼭 기억해두고 싶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내가 올 이유도 없지 싶다. 명예로운 항복이 군사적
패배보다 낫다고 판단한 이슬람 군주는 이슬람 교도들을 잘 보호해줄 것을 청하며 순순이 성을 열어 무혈입성하게 해 주었다. 그런 그들에 대한
역사는 미흡하여 잘 알지 못하겠지만 추정컨대 그들은 모든 종교와 여러 문화를 받아들일 정도로 포용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바로 그라나다 언덕위에는 신성한 언덕 이라는 뜻의 사크라 몬테가 있다. 이는 집시들이 거주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왕족도 있으며 신분이 미천하다 할 집시가 또한 그 언덕위에 같이 있다는 것을 난 아주 특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왕궁에는 두 자매의 방이라
불리는 방이 있는데 그들은 왕의 애인쯤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들은 모두 가톨릭신자였다고 한다. 이후 가톨릭은 개종을 엄격히 시행 한다.
이는 이슬람 시대에 허용되던 다양성에 대한 제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전 자유롭고 다양하였다는 것이 역으로 반추 가능하다. 그리하여 개종들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이는 추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일 뿐 지배하여 다스렸으나 군림하지는 못하였다. 그들 문화가 철저히
봉쇄당하고 가톨릭화 한 이후에도 여전히 서부유럽과는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겪었던 이슬람 시대로 인하여 습성이 알게 모르게 많이 달라져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슬람 세력은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지배하여 약 800년간 그들 전성기의 문명을
유럽에 고스란히 남겨 놓고 떠났다. 이 왕궁을 점령하려던 이사벨 여왕 역시 왕궁이 어떻다는 것은 잘 알았음인지 당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사벨 여왕. 콜럼버스 하면 떠오르는 그녀는 참 역사적으로 참 중요한 기점에 섰던 한 시대의 여걸임에 틀림이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나서고 이슬람 왕국이 스페인에서 완전히 멸하는 해이다. 그 기념적인 해의 주역이 바로 이사벨
여왕이다.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인 그녀는 시칠리아의 왕이며 아라곤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 2세와 바야돌리도에서 1469년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그들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18세였던 그녀는 이복오빠이며 당시 카스티야의 왕이었던 엔리케4세의 추격을
받았으며 페르난도 2세 또한 상인으로 변장하여 당시 아라곤 왕국의 수도 사라고사를 출발했다. 이 결혼이 그렇게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11세는 두 지배가문이 결합하면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으며 귀족들도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그들의 입지가 약해질 것으로 판단하여 필사적으로 반대를 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결혼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
세력을 규합하였으며 정실이 아닌 중앙집권적 군주제를 확립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결합이 곧 정치적인 통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같은 권리를
나누어갖고 동등하다하는 것에 기본을 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바로 이곳을 멸하고 반도의 종교적 통일을 이루어낸다. 역사는 묶어서 그런 그들을
가리켜 가톨릭 왕들이라 칭한다.
그런 이사벨 여왕은 종교적으로 무척 배타적이어서 1478년 이교도 처단을 종교재판소를 만들고 1492년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들을 국외로 추방을 시킨다. 그들은 한때 북아프리카로 까지 진격할 생각도 하게 되는데 이슬람세력들을 늘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이에
그라나다에선 모리스코들의 반발이 극에 달해 한때는 그라나다가 점령되기도 하고 1499년엔 알프하라스 반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반란은 자주
발생되어 1570년에 가서야 완전 진압되었다고 하니 종교 강압의 후유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한 종교에 대한 집착은 1547년 ‘조상의
순수성을 장차 모든 고위성직 임명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한다.’ 는 순혈 령을 톨레도 대주교가 발표하기에 이르고 이는 곧 스페인사회의 불안으로
연결되어 족보를 조작하고 공갈범과 밀고자를 양산하였으며 경직되고 닫힌 사회가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시민사회가 늦게 열려 근대화의 큰 짐이
되는 결과를 또 초래한다.
그렇게 강력하였던 기독교왕들이 죽고 왕위 계승은 그들의 둘째 딸인 후아나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 펠리페 대공과
결혼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아쉽게도 후아나는 정신이상을 일으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알다시피 이사벨
여왕의 외손자가 바로 카를로스 5세 (재위 1516~1556)이다. 그녀로 인하여 스페인은 가톨릭 나라로 영원히 정착을 했으며 신대륙 발견으로
엄청난 영토를 카를로스 5세나 펠리페 2세가 소유하게도 된다. 더불어 포르투갈도 합병도 하며 무적함대 스페인의 기틀도 사실 그녀가 갖추어 준
셈이다. 그런 그녀는 종교에 대한 집착으로 그간에 가꾸어 온 다양한 종교에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문화가 사장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1492년을 높이 평가하는데 나는 그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의 발견의 의미인지 아니면 레콩키스타(국토회복 운동)를 기려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들로선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없다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방인인 나로서는 다양한 문화가 더 뿌리내리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매우 애석하다. 문화와 정치 그리고 종교는 인류에 있어서 여전히 어려운 해법 없는 방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말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라고 성벽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이 어디 그라나다만 해당이
될까. 문화의 가치를 모르고 문화 속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혹한 것이고 가엾은 존재가 아닐까. 문화는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쨌거나 이런 건물이 스페인에 남아 있다는 것은 스페인 뿐 아니라 유럽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나는 이제
막 <코란>의 에덴동산, 보아브딜 왕의 눈물의 흔적이 남은 그 우수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