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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3.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 / 마라톤과 살라미스의 전투
페르시아군은 600척의 함대에 지상부대를 싣고 사모스 섬을 거쳐 에게 해를 횡단하며 그리스 본토로 향했다. 유일하게 저항한 에우보이아섬의 카리스투스와 에레트리아를 제압하고 본토 동부에 있는 아티카 동쪽 해안,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에 상륙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그 병력에 관한 기록은 일체 남기지 않았다. 30만, 혹은 20만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600척의 배에 태울 수 있는 병력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만 명 이하일 것이다. 600척의 함대라는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상투적인 표현이었음을 감안하면 과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병력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앞서 기원전 493년, 케루소네소스의 참주였던 밀티아데스는 아테네의 장군이었다. 아테네 시민회에서는 페르시아군 침공을 목전에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밀티아데스의 제안으로 아테네가 자랑하는 중보병을 마라톤 전투에 출격시키기로 했다. 밀티아데스는 앞서 언급한 대로 트라키아 원정에 참전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군대와 전술을 숙지하고 있었다.
V. D. 한센의 <고대 그리스의 전투>에 따르면 아테네의 중보병은 모두 청동 투구와 함께 그와 같은 재질로 이루어진 흉갑, 아대 등의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또한 왼손에는 커다란 원형 방패, 오른손에는 2.5미터 길이의 창을 들고 있었다. 방패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졌지만 표면에 청동판을 덧댔기 때문에 무게는 10킬로그램 가까이 나갔다. 갑주의 무게 또한 20킬로그램 이상이었으며 투구는 시야가 좁은 데다 주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중보병은 먼 거리를 이동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고 기동력도 떨어졌다. 그러나 8열 종대의 밀집방진을 짠 후 앞쪽 3줄이 창으로 앞으로 겨누고 대형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돌진하는 전투대형은 실로 엄청난 공격력을 발휘햇다. 적군이 이 대형을 둟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보병의 장비는 가벼웠다. 펠트 재질로 만든 모자, 소매가 있는 셔츠와 철제 갑옷, 바지로 이루어진 차림이었으며 버들가지로 짠 방패와 짧은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페르시아군의 특징은 궁수와 기마병이었는데, 특히 기마병은 뛰어난 기동성에 긴 창을 잘 다뤘다.
전투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테네군 1만 명과 플라타에야군 1000명으로 구성된 그리스군은 산 아래 구릉지대에 진을 쳤고, 두 나라 병력은 며칠간 그곳에서 대치했다. 아테네군의 군사회의 에서는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과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히 팽팽히 맞섰다. 아테네군에는 총지휘관(칼리마코스)이 있었고 밀티아데스는 10명의 장군 중 하나였다. 군사회의가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밀티아데스는 총지휘관에게 다음과 같이 직언했다.
“우리 10명의 사령관 의견이 둘로 나뉘어 한쪽은 교전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나라에는 심각한 내부 분열이 일어나 아테나이(아테네) 국민의 사기가 꺾일 것이며 그 결과 페르시아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페르시아를 추종하려는 몇몇 충성스럽지 못한 아테나이인들이 불온한 생각을 하기 전에 전투를 시작하고, 신께서 진정 공정하다면 우리는 싸워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6권, 109쪽)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페르시아군은 1.5킬로미터에 걸쳐 포진했다. 이에 대항하는 아테네군도 똑같이 1.5킬로미터 길이로 포진했는데, 병사의 수가 적은 그리스군은 진지의 양쪽 끝에는 충분히 병사를 포진할 수 있었지만 중앙에는 불과 몇 줄의 병사만을 배치하게 됐다. 사실, 이는 그리스의 함정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페르시아군은 방어가 허술한 중앙을 돌파하면 진군해왔다. 그러자 진지의 양쪽 끝에 포진해 있던 그리스 군은 중앙에 몰려든 페르시아군의 배후로 돌아서 이들을 포위했다. 오랜 전투 끝에 결국 그리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군은 뿔뿔이 흩어져 함선으로 달아났다. 아테네군의 사망자는 192명, 페르시아군의 사망자는 6,400명이었다. 스파르타에서 원군이 도착한 것은 이미 하루가 지난 뒤였다. 이상이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마라톤 전투의 개요다.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는 제1차 그리스 원정의 패배를 설욕하기도 전에 죽었고, 그 뒤를 크세르크세스(재위 기원전 486-465)가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듬해 반란을 꾀한 이집트를 평정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전무후무한 규모의 육해군단을 편성, 제2차 그리스 원정을 실행했다. 그는 기원전 480년 봄 헬레스폰투스를 건너 트라키아의 도리스코스에 집결해 그해 7월 마케도니아의 테르메(지금의 테살로니키)에 병력을 모았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당시 페르시아군 병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보병부대 170만, 기병부대 8만, 여기에 아랍인 낙타부대와 리비아 전차부대 2만이 더해졌으며 해군과 육군을 모두 합한 총병력은 231만 7,600명이 된다. 또한 여기에 아시아인 부대 병력 30만을 추가해야 한다. 거기에 그들의 시종과 군량 보급에 종사하는 비전투부대원 수백만을 더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지휘하에 (결전이 있었던) 세피아스 곶과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한 총병력은 528만 3225명에 달했다고 하니 실로 가공할 숫자다.
다음으로 군선의 규모다. 3단 도선의 수는 1207척에 달했으며, 페니키아 300척, 이집트 200척, 키프로스 150척, 킬리키아 100척, 이오니아 100척, 아이올리스 60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선에 관해서는 아이스킬로스의 유명한 그리스 비극 <페르시아인>에도 “그 수가 1000척이며 그중 쾌속선은 200척에 7척이 더 있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책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자료 자체가 상당히 과장돼 보이며 육상 보병의 숫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보급 등의 병참 문제로도 페르시아는 도저히 이런 대군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전무후무한 대군단이 투입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는 이런 페르시아군에 어떻게 맞서려고 한 것일까. 당시 아테네의 최고 집정관(아르콘)인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8-462)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페르시아의 침입에 대한 위기감을 상실한 시민들에게 이제부터가 진정한 싸움이라고 경종을 울렸다. 그는 해군의 군비를 증강할 것을 주장했고, 새롭게 발견된 은 광산의 수익을 모두 투입해 200척의 군선 건조를 강행했다. 그러는 사이 크세르크세스가 수사를 떠나 사르디스에서 겨울을 난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제야 그리스 전역에 위기감이 고조됐다. 이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동맹이 체결됐다. 그리스 사상 처음으로 전 그리스를 아우른 정치, 군사 연합이 결성된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은 육로를 통해 북부에서 남부 그리스로 침입할 때 관문이 되는 아테네 북서쪽 135킬로미터 지점의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또 해상에서 에우보이아 섬 앞바다 아르테미시움에서 각각 페르시아군을 맞이하게 됐다. 그리스 연합군은 펠로폰네소스군을 중심으로 한 7000명의 병사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250척가량의 군선이 전부였다. 사흘간 계속된 해상전으로는 승부를 가를 수 없었고, 육상전에서는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스파르타가 분전했으나 산을 따라 나 있는 샛길이 발각돼 협공을 당하게 됐다. 결국 스파르타군은 레오니다스 왕과 함께 전멸했고 테르모필라이는 함락됐다. 해군은 이를 보고 코린트 지협의 가장 깊숙한 지역인 살라미스 섬으로 퇴각해 다음 해전을 준비했다.
같은 시각, 그리스 본토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잇었다. 그리스 중부 지역이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놓인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소개령에 따라 싸울수 있는 아테네 시만은 모두 배를 탔으며, 그 외의 시민들은 각지로 대피한 상태였다. 아테네의 인구는 200척의 3단 도선을 움직여 전투를 하는 데도 벅찬 규모였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모든 시민을 군선의 노를 젓는 데 소집하고, 아테네 시내를 비운 것이다. 이 덕에 페르시아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아테네에 진입해 도시를 불태웠다. 몇몇 시민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아크로폴리스의 모든 신전도 맥없이 페르시아군에 불태워졌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살라미스 해전으로 넘어갔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함대가 380척인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1400척이었다. 기원전 480년 9월의 일이다. 페르시아 함대가 살라미스 해협의 동쪽 앞바다에서 정찰 활동을 하는 동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연합군의 군사회의는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를 비롯한 대다수는 이곳에서 철수한 다음 펠로폰네소스 본국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한 가지 계책을 꾸몄다. 그는 크세르크세스에게 밀사를 보내 “그리스군은 서로 의견을 통일하지 못해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 페르시아군과 싸울 여유는 없으며, 조만간 페르시아군에 투항하자는 일파가 그것을 반대하는 일파가 서로 해전을 치르게 될 것”이며 “지금이야말로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했다.(헤로도토스, <역사> 8권 75쪽).
크세르크세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전면 공격을 펼치며 해협의 북쪽으로 자취를 감춘 그리스군을 추격하기 위해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리스군은 돌연히 방향을 바꾸어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좁은 해협 안에서는 함대가 많다고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도망치는 데 급급한 페르시아 함대는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전투를 벌였다.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인>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처음에 페르시아 함대는 전열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군선이 한꺼번에 좁은 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서로 힘을 모으기는커녕 청동으로 만들어진 충각으로 같은 편의 배를 들이받고 노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한편, 그리스 함대는 용의주도하게 멀리 떨어져서 공격을 계속했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아군(페르시아 측)의 배가 전복됐고, 배의 잔해와 병사의 시신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사자의 시체로 가득했다.”
육지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결전에 임하지 않고 육상에 있는 대군 중 일부를 거느리고 아시아로 돌아갔다. 그리스 중부에는 여전히 크세르크세스 휘하의 무장 마르도니우스가 겨울을 보내고 있엇으나, 이듬해 여름 아테네에서 북서ㅉ고으로 51킬로미터 떨어진 폴라타에아에서 스파르타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햇다. 또한 소아시아 연안의 사모스 섬에서 그리스 함대에게 공격을 받자 페르시아 군은 싸우지도 않고 철군했다. 이리하여 20여 년간 이어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이 끝났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압도적인 대군을 거느린 페르시아가 왜 패배했을까. 이 질문은 예로부터 자주 거론되는 흥미로운 주제다. 일단 짐작 가는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전의(戰意), 즉 사기의 차이다. 이는 종종 지적되는 부분이다. 즉 그리스 측에는 ‘그리스적 자유’를 수호한다는 조국 방위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던 데 반해 페르시아 측에는 그 같은 정당성이 없었다. 그리스는 본래 폴리스를 주체로 한 도시국가의 집합체다. 각 도시는 독자적인 삶의 방식이 있었고, 통일된 행동을 취한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듯 서로 헐뜯고 싸우며 종종 그 싸움이 격렬한 전투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 앞에서 그 같은 도시들이 ‘그리스 연합’을 형성한 것이다. 원래 아테네가 자랑하는 중보병은 독립 자영농민(요만)을 주체로 한 시민군단이다. 게다가 해군력의 증강으로 3층 단선을 움직일 일손이 부족해 하층 시민,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까지도 여기에 동원됐다. 그러나 이는 하층 시민을 포함한 모든 시민의 일체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의 공격 앞에 아테네 시 전체를 비우고 적의 약탈을 묵과하는 대담한 행동에 시민 모두가 협조한 것도 이러한 단결심과 위기감, 그리고 ‘그리스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페르시아 측은 정복 지역의 수많은 용병으로 이뤄진 혼성 군단이었다. 특히 해군이 그랬다. 시돈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 해군은 그리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나, 결국은 돈으로 고용된 군단에 불과했다.
두 번째는 육군과 해군 양 군단의 장비와 전술, 전략의 차이다. 그리스의 중보병과 페르시아 보병의 장비의 차이는 이미 앞서 설명했다. 해군을 살펴보자면 그리스 해군은 노를 젓는 사람이 170명으로 이루어진 3단 도선으로 모두 통일됐고, 뱃머리에 달린 충각으로 적의 배를 들이받는 전법을 쓰고 있었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인 페니키아 배는 그리스의 배보다 크고 이동 속도도 빨랐으나 견고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리스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지형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 장소를 그리스 측에 유리하게 이용했다. 그 최대 성과가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게다가 그리스 측에는 밀티아데스나 테미스토클레스 같은 영웅이 있었고, 그들의 과감한 결단이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공헌했다.
세 번째로 최대의 문제점은 이런 페르시아의 패전이 과연 역사적으로 진실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자료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헤로도토스는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전하기 위해 <역사>를 썼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록들은 공정성이 결여되고 페르시아 측의 전력을 과장해서 전하고 있으며, 그리스 측의 전과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또한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에서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왕(크세르크세스)이 스스로 위기에 처하자 도망쳤다.” 또는 “왕의 군대가 전멸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밤이 깊어 더이상 승부를 겨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충분한 여력을 남기고 철수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도 “해전이 끝난 후 그리스군은 해역에 표류하는 파손된 선체를 살라미스로 옮기고 다음 해전을 준비했다. 그들은 페르시아 왕이 남아 있는 함선으로 다시 공격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역사> 8권 96쪽)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크레르크세르의 총병력은 528만 명”이라 주장하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대해 “현재로 치자면 그 병력의 수는 5만 명 미만일 것”(피에르 브리앙,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찌 됐든 기록이 그리스에 편파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해전을 끝으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해 페르시아에 망명했다. 그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궁전에서 여생을 마쳤다. 페르시아 측의 관대함과 여유를 느끼게 하는 일화다. 그러나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이라는 최대의 비극이 페르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