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주의 뒤풀이
안 종 문
여느 때와 달리 가족 결혼식 참석은 기쁘기 그지없다. 반가운 친지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주의 뒤풀이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늦가을이었다. 둘째 딸을 시집보내게 된 형님은 멀리서 참석한 가족을 식장에서 바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며 뜻깊은 행사를 준비했다. 1박 2일 가족여행이었다. 서울에서도 한참이나 먼 조그만 섬인 제부도로의 여행을 구상한 것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혼주는 넷째 형님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시골에서 몇 해 농사를 짓고 있던 차 서울에 취직해서 발을 붙인 셋째 형님의 부름으로 어렵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출신 고교에서 실기 교사로 단란하게 가정을 꾸렸던 형님은 자녀가 셋이 되면서 자가용 없이 고향에 다니며 겪는 불편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길을 걸었다. 기술로 승부를 걸겠다는 용기로 회사를 차렸다. 숱한 고생 끝에 쇠를 절단하는 톱날을 만들어내는 중소기업을 여봐란듯이 일구었다. 서울 근교의 일터가 협소해지자 새로운 공장 부지를 물색하던 중 지난해에 넓은 곳으로 옮겼다. 그곳이 제부도와 가까운 화성이었다. 이전 식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회사를 둘러볼 수 있으면서도 서해의 색다른 모습을 체험시켜주고 싶었다.
제부도는 육지로부터 오 리가량 떨어져 있는 섬이다.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하루에 두 번씩 열리면서 왕래가 가능한 섬이다. 조선 중기에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는 의미의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는 말에서 따온 지명(濟扶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남북으로 오 리쯤 되고, 폭은 그 절반이 되는데 지도상으로의 섬 모양은 옆에서 본 새의 머리와 같다.
늦가을 토요일 오후의 결혼식이었다. 폐백을 마치고 서울을 빠져나오려는데 벌써 여섯 시가 넘었다. 시내를 벗어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밤 여덟 시가 되면 밀물이 차서 제부도와 연결된 도로가 물에 잠겨서 건너지 못한다는 당부가 불현듯 생각나자 곡예운전으로 내달렸다. 가까스로 통행차량을 막는 시간을 면할 수 있었다. 벌써 도로 양편에는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어서 차 속에서나마 이색적인 풍경에 경탄을 주고받았다.
H 펜션에서의 일박은 옛정을 고스란히 되살렸다. 방 세 칸에 스무 명에 가까운 형제 가족이 옛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다섯 형제가 한 방을 사용하였고, 여섯 며느리와 장성한 질녀들이 한 방에 그리고 한 방은 장조카네 몫이었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아내가 산책하러 가자는 문자를 보내주었다. 아침을 먹고 온 가족 함께 움직이자는 형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살짝 방을 빠져나왔다. 도착하였던 밤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제부도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비록 동해와 같은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없었어도 해변의 새벽 공기는 가슴속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아침을 먹고 온 가족이 해안 둘레 길을 따라 걸었다. 돌아올 땐 야트막한 탑재산에도 올라갔다. 저 멀리 대부도가 보였고 우편에는 본토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남는 것은 사진이라며 저마다 이런저런 배경으로 세월 흔적을 만드느라 호호 하하 모두의 입술이 귀에 걸렸다.
단체 산책을 마친 가족들은 짐을 꾸려 섬을 나왔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바닷물이 빠진 갯벌의 민얼굴은 놀라웠다. 다른 많은 가족이 신발을 벗고 조개 캐기 체험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낙조는 일출 이상의 구경거리라는 말을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십여 분 후에 도착한 회사는 생각했던 이상으로 큰 규모였다. 직원 사무실과 숙소로 꾸며진 2층을 먼저 둘러보았다. 여러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요양원에 누워 지내시는 어머니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릎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동행하지 못한 아버지 생각이 간절했다. 이 다음이라도 모시고 와서 성공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혼주는 1층의 공장 내부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주었다. 온갖 설비들이 빛을 내고 있었는데 곳곳에 형님의 피땀이 진하게 배여 있었다. 가슴이 뭉클하였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때 맏형수님의 말씀이 들렸다. “여러 자식 걱정하지 마라. 제 먹을 것 다 가지고 태어난다는 아범의 옛 말씀이 히얀 하게 맞네. 닭을 천 마리 키우면 그중에 봉황이 생긴다는 말도 절로 생각난다야!"
점심은 궁평(宮坪)항으로 가서 꽃게찜과 회와 새우 요리로 배를 놀라게 하였다. 누군가는 어제오늘 일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말로 잊지 못할 1박 2일 가족여행의 기쁨을 말해주었다. 일백만 원의 경비로 일천만 원의 행복을 나눈 가족들은 해바라기 얼굴로 헤어졌다.
혼주의 뒤풀이 행사가 준 또 다른 행복이다. 나 또한 그렇게 하리라 다짐한다. 만추의 풍경에 취하여 콧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몇 년 후의 우리 집 행사가 머릿속에 이리저리 그려진다. 엄마 손잡고 동네 이바지에 갔었던 어린 시절의 그때 마음처럼 내 아들과 딸의 결혼식을 기다리련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꿈같은 이야기로 전망되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