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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출혈을 각오하고서라도 '가짜와의 전쟁'을 이어갈 것입니다."
2009 한국고미술대전의 일환으로 '진짜와 가짜의 세계'전을 열고 있는 한국고미술협회의 김종춘(61) 회장이 한 '선전포고'다. 지난 15일 서울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막을 올린 이번 전시는 서화ㆍ도자기ㆍ목기ㆍ민속품 등 고미술품 '가짜' 200여점을 진품 800점과 함께 나란히 선보인 자리다. 국내에서 열린 가짜 문화재 전시로는 최대 규모다.
고미술 시장은 1995년을 전후로 반짝 호황을 누렸으나 IMF 외환위기 이후 내리막길로 치달아 현재는 가격이 당시의 10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다. 김 회장은 "'가짜 유통'으로 인한 신뢰 상실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목하며 "이번 전시를 통해 진짜와 가짜를 비교해보면서 감식안을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위작 유통으로 병든 국내 문화재 유통질서를 회복시키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가품 제작 기법도 천차만별이다. "도자기 분야에서는 수백년 된 순백자에 청화 문양을 새기거나 순청자에 상감을 넣어 수십 배 이상 가격을 부풀리는 기법이 자주 보입니다. 서화는 100년 이상 된 옛날 종이에 원화를 베껴 그리고 위조 낙관을 찍거나 작자 미상의 작품에 소치 허련 같은 유명 화가의 낙관을 찍는 '후낙' 기법이 성행합니다."
위조가 치밀해 전문가도 자칫 헷갈릴 수 있다. 김 회장은 감정위원들마저 팽팽하게 진위 의견이 엇갈린 도자기를 화학약품에 넣고 삶았던 일화도 소개했다. 진품 청자의 안쪽에 치과용 드릴로 교묘하게 붙인 문양이 툭툭 떨어져나와 '가짜'로 확인됐다. 김 회장은 "진품 도자기에 도안을 새기고 파는 위작 기법은 북한에서, 그림을 덧그리는 기법은 중국에서, 후낙으로 값을 높이려는 방법은 국내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지나치게 가볍거나 윤기가 많으면 가짜인 경우가 많지만 일반인은 구별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김 회장은 16주 과정의 고미술문화대학 감정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전시 연계행사로는 고미술품 무료 감정 행사가 오는 28~30일에 열린다. 또 도난ㆍ도굴ㆍ위조 사건과 관련된 불법 문화재 자료도 열람할 수 있다. 가품 외에도 시가 20억원에 달하는 '백자청화수조난초문호'와 오원 장승업의 '노안도', 겸재 정선의 '16폭 화첩' 등 귀한 진품도 전시된다. 전시회는 30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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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양대교당과 수운회관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의 운현궁 맞은편에는 수운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경운동 88번지에 자리한 수운회관은 낙원상가 쪽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 안국역 5번출구로 나와 직진하여 서울노인복지센터를 지나면 곧 나타난다. 지하철 역을 나와 도보로 약 2분~3분 정도가 소요된다.
경운궁을 둘려 살펴보고 난 다음 점심을 먹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수운회관을 발견하였다. 수없이 드나든 곳이지만 관심이 없어서인지 수운회관은 처음 보았다. 아, 물론 수원회관뒤로 대교당이 더욱 흥미를 준다.
수없이 종로를 드나들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수운회관이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단은 방문하였다. 멀리서 보면 현대식빌딩인 수운회관만 보일 뿐이어서 대교당이 있는지도 몰랐다. 고층빌딩인 천도교수운회관 옆에 중앙대교당이 보인다.
시도유형문화재 제36호(종로구)로 지정된 천도교중앙대교당(天道敎中央大敎堂)은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 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당시 3대건물이라고 칭해졌던 다른 두개는 명동성당과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1919년 7월 일본인 중촌여자평(中村與資平)에게 대교당의 건축설계를 맡기고,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에게 이를 시공시켰으며, 일본인 기사 고곡호시(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이 건물을 완성시켰다. 즉 대교당은 착공한 지 1년 반이 지난 1921년 2월 28일에 완공되었고, 그 공사비는 대략 22만여원에 이르렀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벽체는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다. 탑의 지붕은 바로크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을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 교회당과 비슷한 구조를 닮으면서도 이와는 전혀 다른 맛을 지니고 있다. 건물 구조는 벽돌로 지은 4층건물로서 1층의 건평은 212.8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평, 합계 280.68평으로 되어 있다.

1860년 경신년 4월 후천개벽을 꿈꾼 동학의 사상가 수운 최재우는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있으며 사람이 곧 한울(人乃天)이므로 사람섬기기를 한울같이(事人如天)합시다' 라고 설파하였다. 동학은 동학란, 후에는 동학혁명이라 불리며 많은 투쟁과 핍박속에 피어난 민족 종교이다.
33인 대표인 손병희는 지금에 와서 친일 행적이 문제시 되고 있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친일 행각을 한 사람으로 치부되는데, 당시의 지식인 중에는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사람도 많다. 아무튼 그는 어려움과 두려움을 참아내지 못하는 강골되지 못하는 기질 때문일지 지금에 와서는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한울 이라는 인권적 사상과 당시의 인적자원, 물적 자원이 뒷받침되어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곳에서 3.1독립운동의 불꽃을 피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거사 기본계획과, 이 운동의 거사 자금을 운영하고 선언서 배포, 해외독립운동의 군자금까지 이곳에서 계획되었다. 대교당은 3.1운동의 증거이다. 당시 민족 돇림에 쏟은 천도교의 열정은 큰 몫을 담당했고, 대교당은 그 중심에 있었다.

손병희의 사위 소파 방정환은 이 천도교 중앙교당에서 어린이 인권존중을 역설하고 어린이문화운동단체인'색동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항일사상을 고취한 월간지 '개벽사'가 있었던
신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곳 대교당의 설계는 당초 현재의 3배 이상의 규모였으나 일제는 건물내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건축허가를 반대하여 부득이 현재의 규모로 겨우 허가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허가를 받은 후에도 왜경은 건축공사의 철근, 벽돌, 자재 등의 구입을 방해하면서 시공자를 구금하기도 했다. 다사다난했던 우리 근대사에서 일제하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설립된 것은 곧 3.1운동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 대교당을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전체적인 평면형은 마치 에집시안 크로스(Egyptian Crose)처럼 되어 있으나 기독교 교회당들의 평면과는 다른 하나의 강당과 같은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았으며, 지붕은 맞배로 되어 있다. 건축양식상 바로크 양식의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일반 교회당들의 모양을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내 외부에는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 무궁화 등이 특이하게 조각되어 있다. 교당의 수용인원은 1,000명. 내부는 200평이 넘는 큰 큐모인데 기둥이 하나도 없다.

풍수적으로 눈을 잡는 것은 대교당 옆의 수운회관이다. 수운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재우의 호이다. 현대 건축으로 눈을 끄는 것은 지극히 풍수적인 요건을 충족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방형의 몸체와 튀어나온 창과 문, 단정한 건축 외경은 아마도 동학의 꽃꽃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