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글
「 영남대 이수건 교수는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 조작> (대구사학, 제86집, 2007) 라는 논문에서 “차원부 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 가해자들이 서얼계란 사실이 기재된 차류동보(車柳同譜)가 해주 신광사에서 소각되고 말았다는 내용도 한국족보사(韓國族譜史)에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최초의 편간족보(編刊族譜)가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 이므로 그보다 70년 전인 태조 7년에 차류족보가 판각될 리 없으며 또 차씨와 류씨가 동조동원이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차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문화류씨 문중에서 1423년 간행된 《영락보》로 현재 서문만이 전해져와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나, 이를 인정해야 한다. 1398년 이전에 《차류보》를 만들었다면, 《영락보》를 만들기 25년 전 일이다.
특히 서울대 이태진의 논문 <15세기 후반기의 거족과 명족 의식-,<<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분석을 통하여-> (한국사론 3집, 1976)에 의하면 “족보에 관한 사실들은 《설원록》 자체가 왕명을 받들어 당대의 석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신뢰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밝혀지듯이 해주 신광사 소장의 《차·류세계》의 존재는 오히려 문화류씨보의 빠른 출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라 하였고 이어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결국 문화류씨보 하나가 아니라 연안차씨보를 합친 족보가 되는 셈이다.”라 하였다.」
반박
1. 연안차씨 종친회는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논문을 일부를 인용하고 있는 바, 이태진 교수가 연안차씨 종친회 입장에서는 상당히 든든한 우군인 것처럼 보인다.
2. 서울대 이태진 교수님은 차원부 설원기가 “왕명에 의하여 당대의 석학들이 쓰여졌으므로 신뢰” 할 수 있는 문헌이라고 하였는데 차원부 설원기 내용을 고려시대 지석,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 당시 다양한 사료를과 비교 검토해 보면 차원부 설원기 내용은 정사(正史)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반대로 “이런 글이 과연 왕명에 의하여 당대의 석학들에 의하여 쓰여진 문헌”으로 볼수 없다는 증거들이 수도 없이 많아 1456년이 아닌 훨씬 후대에 쓰여진 야사(野史) 수준으로 글들로 가득 차 있고 기본적인 팩트도 틀린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1) 연안차씨 고려시대 혼인관계 문제
(2) 이성계의 세자 책봉 문제
(3) 제1차의 왕자의 난시 하륜,이숙번에 관한 문제
(4) 이성계의 속칭 “함흥차사”관련 문제
(6)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문제
(7) 이외 차중문,차지남에 대한 문제, 회안대군 문제, 윤이(윤사강), 등등 열거하면 셀 수도 없다.
3. 만약 차원부 설원기가 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서울대 이태진 교수님 생각처럼 “ 차원부 설원기가 1456년 당대 석학들에 쓰여져 신뢰성 있는 문헌” 이라고 가정한다면 정사(正史)에 반하는 기록들이 많아 차원부 설원기는 역사적 사료적 가치는 정말 대단한 것이고 역사 전공을 하는 학자들에 의해 논문등으로 발표되기도 하고 많은 인용도 했을 것인데 오히려 반대로 역사 전공을 하는 학자들에게는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4. 차원부 교지 문제와 마찬가지로 차원부설원기가 1456년 왕명에 쓰여진 것인지 여부도 차원부 설원기 기록,내용등을 가지고 역사 전공 학자들에게 공개 검증을 하면 그 진위 여부가 금방 들어 날 것이다.
첫댓글 이성계가 차원부를 3번 찾아 갔다는 내용은 이성계가 배극렴을 3번 찾아간 기록이 태조실록 2권 태조1년 11월 26일 계묘 1번기사가 증명하며, 이성계 세자 책봉문제는 조준이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세자로 해야한다고 이방원을 추천한 내용을 태종5년 (1406) 을유/명 영락3년 6월 27일(신오) 1번째 기사가 증명하는 말인데 차원부가 이방원을 추천하였다는 말로 조작한 것이 차원부설원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