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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석 특강] 스스로 자기 병치료의 주체가 되어야
장두석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장두석 선생, 그분이 대학만 나왔다면 실로 대단한 사람이 됐을 거야."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장관쯤은 거뜬히 되고도 남을 위인이 아닌가?"
"아무튼 대단한 분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요새 젊은이들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분은 지독할정도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독학파에다, 끊임없이 전국을 뛰어다니는 그야말로 실천적 사회운동가예요, 민족생활의학의 '장두목'이에요."
이상은 얼마 전 광주지역 유명인사들의 모임에서 무슨 말 끝엔가 나온 이야기다. 이 날 모임에는 소위 대학교수, 기업체 사장, 시민단체 대표 들이 스무 명 남짓 모여서 오랫만에 정담을 나누는 중이었고, 그때 마침 장두석 선생은 먼저 자리를 비우고 떠난 뒤였다.
대학 문턱만 밟았어도 실로 대단한 사람이 됐을 거다? 나는 그 모임에서 나온 이런 얘기들이 결코 말장난이나 농담이 아니며, 무심코 뱉어버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였으니만큼 더욱 그러했다.
장두석 선생의 이력도 이력이거니와, 그가 지금까지 벌려온 각종 실천적 활동은 아라비안 나이트만큼이나 길다면 길다. 왜냐하면 그는 소년 시절부터 남다른 생활을 통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인생 편력을 거쳐 오늘날 '자연건강법의 권위자', '민족의학계의 이론적·실천적 지도자'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인간 장두석은
장두석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한복을 입는다. 양복은 아예 없이 사는 사람으로, 집에서는 물론 전국 어느 곳을 가도 한복을 입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도 한복만 입고 여행했다 한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절로 가슴이 뿌듯하다. 넉넉한 바지저고리에 의연한 선으로 흘러내린 두루마기를 입고, 구두가 아닌 흰 고무신만을 신고, 오늘도 무등산 아래 '큰 어른'으로서 광주를 지키고 있다.
그의 고향은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전남 화순군 이서면 적벽동이다. 중국의 절경으로 유명한 적벽(赤璧)에서 이름을 빌렸음직한 곳으로, 일찍이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마을이다.
증조부 시용(時容)의 호는 금사(金沙)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의학에 남다른 재질을 보여 가정상비약으로 죽염을 만들었고, 죽염 제조법을 문중 자제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장두석 선생이 효험으로 손꼽는 죽염은 몇 대째 내려오는 가전(家傳)비법에 의한 것이다. 증조부는 동학혁명에 가담해 보국안민의 정신에 입각하여 온몸을 바쳤다고 한다.
선백부(先佰父) 학남(學南) 기홍(基洪)은 대학자로서, 위정척사운동으로 유명한 최익현 선생, 임병찬 선생, 조영선 선생, 조우식 선생과 함께 전북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백부는 일제 때 황국신민서사,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하지 않기 위해서 피신했다가 단발(斷髮)조차 하지 않은 채―일제의 추상 같은 단발령을 생각해보라!―해방을 맞이한 인물이다.
장두석 선생은 선조들의 민중사랑과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도 평생을 민족과 민중사랑을 실천하였다. 때론 민중 편에 서서 고통을 받기도 했지만, 절대 그런 일들을 남에게 내세워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생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남은 여생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는 또 기인(奇人)에 가까을 정도의 열정으로 자신의 집을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인다. 광주시 지산동에 멋들어지게 지은 그의 한옥에 들어서면, 그의 분신과도 같은 각종 민족생활의학 기구들, 약제품, 민족의학서, 그가 즐겨 어루만지는 장구와 농악기와 하회탈 들이 푸근하게 반겨준다. 그가 평생을 베고 눕는 목침과 대자리가 온돌방의 분위기를 더욱 따뜻하게 해준다. 한 사람의 인품이나 성품을 알려면 그가 기거하는 방안을 들여다보면 곧 알 수 있다는 옛말을 나는 장두석 선생 집에서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
선생의 시력은 정상인보다 많이 나쁜데도, 그런 눈으로 돋보기를 걸치고 동양의학서를 정독하거나 일서(日書), 한서(漢書)를 번역하는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계층이나 신분의 구분 없이 환우들은 물론 대학생들이나 선량한 이들이 즐겨 찾는 장두석 선생의 집은 그래서 확실히 '살아가는 즐거움' 같은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의학 지식은 물론이고 상식 또한 웬만한 지식인들이 근접할 수 없을 만큼 폭넓고 해박하다. 어디서 그 많은 지식과 상식들을 쌓았는지, 장 선생이 웅변조로 펼치는 일련의 논리들은 범인(凡人)들로서는 벅찰 만큼 숨가쁘다.
어디 그것뿐이랴. 회의의 진행이 지리멸렬해질 때, 핵심을 잃고 설왕설래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에 의해 흘러가려 할 때, 장 선생의 논리 정연한 회의 진행 방식은 그 어느 정치가나 사회운동가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고 당당하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배운 기술이 아니라, 진실로 정도(正道)를 밟아오면서 터득한 당당함과 의기(義氣)에서 비롯된 지혜라고 생각된다.
오늘같이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장두석 선생은 민족의학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분야에서도 바로 '큰 어른'이나 다름없다.
신용협동조합운동·농민운동
장두석 선생은 6·25전쟁 때 난리를 피해 적벽산, 백아산, 지리산에 들어가 의인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민족사랑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953년 민족의학에 입문해,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각종 요법을 만들어가면서 동서의 의학을 수학했다. 그는 한때(1960년) 민족자주통일운동중앙협의회(민자통)에 참여했고, 1962년 농협운동에 뜻을 같이한 이래 지금까지 재야운동에 헌신해 왔으며, 또 한때 백아산 밑 송달리에서 야간 민족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선생의 민족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남다른 마음은 가히 원초적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못 배웠다고 그것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더 배우고 익혀서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뿐이니, 나 같은 속물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실천적인 행동은 눈부실 정도이다.
우선 그의 신용협동조합운동(이하 신협운동)은 어떠한가. 광주·전남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의 신협 회원들 중에는 장두석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신협 창립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확대·재생산되는 자본주의의 금융 구도 속에서 서민들의 금고(金庫)라 할 수 있는 신협 건립에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과연 그의 이러한 혜안(慧眼)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식자(識者)들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그런 시대에, '신협의 깃발'을 들어 서민들로 하여금 근검·절약 정신으로 똘똘 뭉쳐 더 나은 생활을 찾게 한 그의 의지는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라는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가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깨달았기에 신협운동의 초창자로 몸담았는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의아할 정도이다.
카톨릭 농민운동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다. 그는 농업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강조한다. 농업은 순수 경제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몸을 지키는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이야말로 한국인을 질병에서 구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긴다. 쉽게 말해, 오늘날 우리가 병으로 시달리는 것은, 즉 우리의 농산물을 멀리한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갈파한다. 우리가 태어난 우리 땅에서 자란 농산물을 먹지 않고 수입 농산물을 먹을 때, 당연히 우리의 몸은 병들어버린다는 것이 바로 민족의학의 출발점이다.
장두석 선생의 농민운동(유기농업운동)은 그래서 결국 생명운동으로 직결된다. 요컨대 신협운동과 농민운동의 연결고리는 바로 사람살리기의 '생명운동'으로 심화된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 속에서 신협운동과 농민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그와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실천적 사상 때문이리라.
양서조합운동·사회인권운동
장두석 선생의 행적 가운데 나는 그의 양서조합운동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불의를 당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병들고, 가난하고, 더 빨리 죽는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미 생이지지(生而知之)를 통해 인간사와 사물의 이치, 그 갈 길을 터득한 장두석 선생은 그 무지를 깨뜨릴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양서(良書)'라는 것을 알고 평소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장 선생은 1978년 광주시 대의동 옛 YWCA 건물에 양서조합을 만들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현 광주시의원 황일봉(黃一奉) 씨와 함께 양서조합을 조직하고 수많은 양서들을 비치, 원하는 이들에게 회원제로 대여해주고 있다. 알아야 당당하게 살 수 있고, 알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알아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 조그마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제는 광주의 많은 젊은이들이 양서조합을 즐겨 찾게 되었다.
그 무렵 장두석 선생은 앞서 얘기한 신협·농민운동은 물론 또 하나의 단체에 가입, 열심히 활동하였다.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긴급조치 위반자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줄을 서던 암울한 1970년대 후반에 그는 사회인권운동 차원에서 앰네스티에 가입, 이른바 '재야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이 활동은 5월 광주항쟁 때까지 이어져 장 선생은 다른 수많은 앰네스티 회원들과 함께 상무대 감옥으로 끌려간다. 물론 장 선생은 소위 불온서적 운운하는 책들을 만들고 대여해주었다는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광주항쟁
광주항쟁의 전모에 대해서는 이제 사람들이 웬만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상 규명은 아직도 요원하고, 역사적 해결은 지금도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는 사이 가해자들에 대한 실정법 공소시효가 언제까지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
그 몸서리쳐졌던 때 보안대 지하실에서 시인 문병란 선생(조선대 교수)과 장두석 선생이 함께 대질신문을 받던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광주항쟁 중에 끌려간 사람들은 일단 화정동 소재의 보안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후 곧바로 상무대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장 선생과 문 교수가 상무대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 지하실에서 나란히 대질신문을 받던 중의 이야기다.
"우리 선생님을 때리지 마시오. 내가 더 건강하고 몸도 좋으니, 앞으로는 차라리 나를 때리시오. 이 사람은 보다시피 선비 같은 사람이라 어디 때릴 곳도 없지 않소. 그러니 차라리 나를…."
수사관을 향하여 장 선생은 그렇게 빌고 빌었다. 그 덕분에 문병란 선생은 대질신문을 받을 때 계엄부대 수사관들의 몽둥이 세례를 면했다고 한다. 반면 장두석 선생은 실로 모진 고초를 받았다.
예로부터 이야기되듯이, 감옥에 같이 가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고 한다. 장두석 선생은 역시 평소 그 자태대로 품위를 잃지 않고, 오히려 항쟁동지들을 위로하고, 간수들(군인) 몰래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하루도 아닌 몇 달의 긴 세월을 감옥살이에서 시달리면, 사람들이 의지가 약해져서 줏대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되고,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으려고 서로 아등바등하게 마련인데, 장 선생은 그런 모습을 보면 준엄하게, 때론 따스한 마음으로 나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아온 장두석 선생, 그래서 그의 오늘이 더욱 소중하고 빛나는 것인지 모른다.
무료함이나 공포감을 달래기 위해 쓸데없는 농담이나 음담을 일삼지 않고, 비록 감옥 안일지라도 그의 수양(修養)하는 자세와 공부하는 자세는 머지않아 열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것이었기에 그 모습이 더욱 빛났던 것이다.
민족생활의학
현재 장두석 선생은 민족의학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닦아온 민족생활의학의 연구에 몰두함은 물론, 신협운동, 농민운동, 사회인권운동, 생명운동, 자연건강법알리기운동 등을 통해 '참다운 삶', '건강한 삶', '올바른 삶'을 개진해 나가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있다. 흰 고무신과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차림으로.
장 선생의 민족의학은 다름 아닌 민족사상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학은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민족 생활법을 근간으로 한다. 우리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순한 민족이다.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얼이 깃들인 민족 음식, 민족 의상, 민족 가옥은 자연순환계의 이치에 따라 한랭온열을 조절하는 순천적(順天的)인 삶의 형태이다. 우리 조상들은 병이 들면 우선 하늘을 바라보고 산과 강을 돌아보았다. 혹시 하늘의 뜻이나 자연을 거스른 적은 없었나 스스로를 살폈다. 그리하여 병을 잘못된 생활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다. 치료에 있어서도 '증상' 자체와 싸우기보다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고 몸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는 순한 방법을 썼다. 증상을 적으로 보지 않고, 건강 회복을 도와주는 동반자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병이란 약이나 의사가 고쳐주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 자연과 더불어 고쳐나가는 것'이 곧바로 민족의학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을 늘상 밝혀 오는 터이다."
단식 및 여러 보조요법을 통해 암을 비롯한 불치병, 난치병, 각종 문명병(성인병)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완치로 이끈 바 있는 우리 시대의 의인(醫人·義人) 장두석 선생.
해를 거듭할수록 놀라운 열정과 집념으로 민족의학 연구에 투신, 1993년 《사람을 살리는 단식》이라는 두툼한 역저(力著)를 발간, 전국의 환우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끊임없는 치료, 끊임없는 순회 강연, 끊임없는 독서와 연구, 끊임없는 글쓰기를 거듭하는 장두석 선생과 함께 오늘을 숨쉬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끝으로 나는 그에게 이 한편의 시를 바친다.
우리고향
어디쯤, 내가 울다가
그냥 버리고 왔을
그곳에, 아하 참쑥 냄새
진하게 한 줌
뭉쳐있을 것이려니
그 참쑥같은 사람은
아마도 장두석 선생이 아닐런지
《민족생활의학》 정신세계사 pp.389-398
식(食)은 명(命)이다. 무엇을 먹느냐가 건강을 결정하고 인성을 결정하며 마침내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개인뿐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한 민족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를 결정짓는 근본은 먹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식생활은 한 민족 문화생활의 근간을 이루며 그로부터 민족혼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식생활은 어떠한가. 우리 먹거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양에서 건너온 먹거리들이 밥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래서는 도대체 민족문화나 전통, 혼을 찾을 수 없다. 최근 들어 각종 난치병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육류 및 가공식 위주의 서구식 식생활, 영양과잉, 먹거리 오염 등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잡식성 채식을 해왔고, 그 결과 내장이 긴 인체구조를 갖게 됐다. 채소나 곡식은 분해, 소화, 흡수과정이 곧 발효과정이므로 배설되기까지 그다지 많은 독소를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류와 가공식은 이 과정에서 독소를 많이 배출한다. 그 결과 장이 긴 우리 몸에 숙변이 정체되고 혈액이 탁해져 만병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육류 및 가공식의 다량 섭취는 영양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은 넘쳐나고, 이들을 분해하는 데 필요한 산소 및 각종 영양소는 모자란다. 이것 또한 만병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다. 먹거리의 오염도 질병을 부른다. 공기와 물이 오염된 상태에서 어찌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이 건강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조상들의 밥상을 보면 한가운데 장그릇이 놓이고, 오곡밥에 채소가 푸짐했다. 거기에 실로 자연과 우주의 원리가 담겨 있었다.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쌀밥에 무, 고춧가루, 갓김치 따위의 매운 음식을 먹어 인체의 보온작용을 도왔다. 더운 여름이면 보리밥에 풋고추, 상추, 포도 같은 차가운 음식을 먹어 더위로부터 인체를 보호했다. 이런 조상들의 먹거리 지혜를 되살려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식생활원칙을 제시해 본다.
1. 물을 하루 2ℓ 이상 마신다.
반드시 생수를 먹어야 하고,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게 좋다.
논이나 밭에 나갈 때는 꼭 생수를 준비해 수시로 먹어 줘야 땀으로 빼앗긴 수분을 보충할 수 있다.
2. 죽염, 볶은 소금, 된장, 고추장 등을 통해 하루 노동량에 따라 8g 내지 15g 정도의 소금을 섭취한다.
음식을 싱겁게만 먹어 몸에 소금이 모자라면 질병이 생긴다.
3. 채소는 뿌리, 잎, 줄기 등을 5가지 이상 골고루 섞어 잘게 채썰어 간장, 된장 등으로 양념하여 꼭꼭 씹어 먹는다.
한꺼번에 많은 채소를 사서 냉장고에 보관하기보다는 조금씩 사다가 먹는 게 좋다.
냉장고를 과신해선 안된다.
4. 밥은 오곡밥을 지어 먹는다.
식사의 원칙은 주식 30%, 채소 30%, 어류 및 기타 반찬 30%, 과일 10%로 한다.
반찬의 종류도 가능하면 육지, 산, 강, 들에서 난 음식을 5가지 이상 섞어 먹는다.
5. 과일은 전체 식사량의 10% 이내로 하고
반드시 볶은 소금(볶은 소금 반, 깨소금 반 비율로 혼합한 소금)에 찍어 먹는다.
6. 1일 2식이 건강에 좋다.
오전 12시 이전에는 물, 감잎차, 소금만 먹는다.
아침을 먹지 않으면 십이지장에서 모찌린이라는 효소가 분비되어 배변이 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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