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가을 숲과 만나다
김 영미
차가운 가을바람이 속삭인다. 서늘한 냉기에 붉은색으로 물드는 산들이 반가워지는 계절이다. 다망했던 일상을 뒤로 하고 얼마 전에 한동안 가지 못했던 가을 숲을 남편과 함께 찾았다. 이맘 때 쯤에 그 자리에 있을 그 누군가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기대와 설렘을 안고 가을 숲으로 향한다.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낮게 내려앉은 회색구름들을 보며 걱정했더니 역시나 앞 유리창에 작은 빗방울들이 맺힌다. 한 바퀴 돌아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다. 하차하자마자 습한 숲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나는 내리는 듯 마는 듯 하는 얄궂은 비를 맞으며 남편에 앞서 가만가만 걸어 숲으로 들어선다. 진한 붉은 단풍이 먼저 인사를 한다. 나무와 잎들은 저마다 붉고 노랗게 혹은 주황빛으로 다가온다. 느린 걸음으로 걷는 곳곳에 제법 가을빛이 내려앉는다. 물감을 뿌려놓은 듯 울긋불긋 다르면서 조화롭고 아름답다.
평소에는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작은 햇살과 나무들이 내어주는 시원한 그늘에는 향이 있다. 봄에는 헐벗어 뼈만 보이던 나무들이 새로운 생명을 터뜨렸고, 여름의 숲은 시원하다. 생기 넘치는 초록으로 무거워진 가지들을 이고 당당하게 서 있다. 신선한 녹색으로 장식된 나무와 가지를 바람이 흔들고 간다. 그렇게 생생한 녹색들은 가을을 맞으면서 빨강, 주황, 노란색으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듯 나뭇가지들이 불타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희미하게 낙엽의 향기가 채워진다.
비 내리는 날은, 숲에 가야만 맡을 수 있는 더 시원하고 조금 더 무거운 냄새가 난다. 이 때 먼저 후각이 강하게 반응을 하고 뒤이어 온 몸이 시원해진다. 천천히 깊게 숨을 마셔본다. 잊고 있던 그 냄새에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심장이 먼저 두근거린다. 젖은 흙과 뿌리냄새 속에서 진하게 들어오는 소나무 냄새에 먼저 콧구멍이 열리고 뒤이어 마음도 확 열린다. 물기를 머금은 숲의 냄새는 특별하다. 추적거리는 비 덕분에 맡을 수 있는 숲의 향기다. 내리는 비는 싫지만 비 때문에 좋은 숲의 냄새다. 흙의 냄새, 나무의 냄새, 풀의 냄새가 어우러져 나를 충전한다.
그런데도 비 오는 날의 가을 숲이 웬 지 나를 조금쯤 나른하게 한다. 더 느리게 걷고, 숨을 천천히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으면서 마음을 더 차분히 가다듬는다. 이 시간만큼이라도 후각에 집중하면서 다른 감각과 걱정들은 잠시 쉬기로 한다. 머릿속이 차츰 맑아지면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한 후에 스스로 마음을 챙긴다. 비가 내린 숲에 들어와야만 맡아지는 그리움이 묻어나는 냄새에 나는 기분이 차츰 좋아진다. 원상회복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으니 내가 그곳에 숲속에 속한 무언가가 된 듯한 기분이다. 나무와 풀처럼 흙에 나를 묻어버린다. 그러면서 뭔가를 깨닫는 기분이다. 작은 바람들이 하나 둘 모여 어느새 욕심의 포도송이가 되어버린다. 이곳에서 시침과 분침 사이 빈틈없이 울리는 삶의 무게는 그 힘을 잃는다. 가을 숲은 약시 비어 있는 여유를 찾고 또 다른 ‘나’를 만나기에 적절한 장소인 듯하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이 스쳐간다. 숲길을 걸으며 마음에 차 있는 욕심을 스스로 내려놓는 일은 오히려 쉽다.
숲을 채우는 것에는 나무와 돌, 흙과 풀 그리고 꽃만이 있는 게 아니다. 우뚝 솟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바람에 밀려나는 구름과 햇살이 차 있는 공간도 숲과 함께 있다.
문득 걸어가는 길 양 옆으로 군데군데 작은 돌들을 겹쳐 쌓아둔 모습이 여러 개 보인다. 옆을 스쳐 지나며 그 작은 돌 위로 조심스레 쌓아올리는 어느 누군가의 손길과 기도하는 마음이 겹쳐진다. 스스로 경건해지는 마음과 자세로 변해버린다. 도시의 나무들과 돌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성스러움이 이 곳에서는 가능하다는 믿음이 들어온다.
새순이 돋아 잎이 무성해지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 다시 새순을 틔우면서 반복되는 삶처럼 보이지만 저마다 똑같지 않은 시간들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살아가는 날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이 가을 숲처럼 살고 싶다. 비 내린다고 뛰지 말고, 눈 내린다고 눈덩이 굴리지 말고, 바람에 이기려 고집부리지 말고, 비에 치이고 눈에 맞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함께 가을 숲이 되어 살고 싶어진다.
둥치가 굵은 나무 앞에 멈춰 서 나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 본다. 남편은 못 볼꼴을 본 듯이 황급히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살피고 툭 쳐서 나를 앞으로 가게 한다. 그 자리에는 미처 따라오지 못한 마음만이 남아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거 기억나?“
말없이 땅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걷고 있는 날 흘깃거리던 남편의 말소리다.
몇 년 전, 백양사 단풍을 보러갔던 날이다, 그 때 난 새로 산 가죽 자켓을 입고 갔었다. 점심 먹고 산에 오르자 조금 후에 빗줄기가 세게 내렸고 비를 옴팡지게 맞고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가을 단풍을 보는 날, 비가 내리면 으레 날아오는 남편의 한 마디가 다시 날아온다.
“그래,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